경주문화재답사 171 [스크랩] 잘못 알려진 신문왕릉과 효소왕릉 잘못 알려진 신문왕릉과 효소왕릉 현 신문왕릉은 효조왕릉(효소왕릉) 신문왕릉(효소왕릉) 사천왕사지에서 불국사쪽으로 약 300m쯤 가면 도로변 왼쪽에 큼지막한 왕릉이 1기가 있다. 신라 제 31대 임금 신문왕릉으로 사적 제18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무덤의 지름은 29.3m, 높이는 7.6m이다. 무덤의 외부모습은 둥근 봉토분으로서 밑둘레에는 벽돌모양의 잘 다듬은 돌을 사용하여 담장을 쌓아 올리듯 5단으로 쌓고 그 위에 갑석을 올려 무덤을 보호하였고 가로, 세로 90cm, 두께 50cm되는 다듬은 돌을 대각선으로 곱게 잘라내어 만든 삼각형 받침돌 44개를 호석에 등간격으로 받쳐 무덤외부를 튼튼하게 하였다. 신라 왕릉 형태의 변천 이러한 왕릉의 호석(護石)은 무열왕릉 형식에서 한단계 발전하여 무열왕릉 형식에서.. 2017. 4. 22. [스크랩] 성덕왕릉에 십이지신상이 세워진 까닭 성덕왕릉에 십이지신상이 세워진 까닭 성덕왕릉의 12지상 1. 전륜성왕 자처한 진흥왕 직계들 신라는 삼국 중 불교를 가장 늦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법흥왕 15년(528)에 이차돈(異次頓)의 순교(殉敎) 같은 극적인 사건을 계기로 일단 불교를 공식 수용하게 되자, 마치 백지에 물들듯이 불교가 모든 신라 사람에게 삽시간에 전파돼 나갔다. 이는 신라가 이때까지 어떤 외래문화도 받아들인 적이 없는 고립된 지역으로 문화적 순수성을 유지하고 있다가 최초로 불교로부터 외래문화의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한(漢) 사군(四郡) 설치(서기전 108년) 이후 이미 유교문화의 충격을 받았던 고구려나 백제 지역이 불교가 들어와도 한동안 냉담한 반응을 보였던 것과 달리 신라에서 열띤 호응이 나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신라.. 2017. 4. 22. [스크랩] 성덕왕릉의 12지상은 왜 위치를 벗어나 있을까? 성덕왕릉의 12지상은 왜 위치를 벗어나 있을까? 신라의 제33대 성덕왕(聖德王;재위 702-737)은 신문왕(31대)의 둘째 아들이며 효소왕의 동복(同腹) 동생이다. 본명은 융기(隆基)였으나, 당나라 현종의 이름과 같아서 흥광(興光)으로 고쳤다. 효소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추대를 받아 즉위했다 왕위에 오른 성덕왕은 안으로는 정치를 안정시키고, 밖으로는 당나라와 외교를 활발히 하여 국력을 튼튼히 함으로써, 삼국을 통일한 이후 가장 평화롭고 살기 좋은 시절을 이루었을뿐 아니라, 문화면에서도 눈부신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다. 정치적 안정과 함께 성덕왕대는 사회적으로도 통일신라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성덕왕은 35년이나 왕위에 있다가 돌아가시니 뭇 백성들이 슬퍼하고 후히 장사지냈다 국립경주박물관에 .. 2017. 4. 22. 신라의 황금문화와 불교미술 특별전 신라의 황금문화와 불교미술 특별전 경주박물관은 올해 개관 70주년을 기념하여 신라의 황금문 화와 불교미술 특별전을 개최 합니다. 이 전시회는 경주박물관 개관70주년 기념전이자 실크로드 경주 2015의 선도적 테마 행사입니다 신라의 문화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는 국내 특별전 으로 처음인 이 전시회는 지금까지 이루어진 조사연구의 성과를 바탕으로 황금문화 능묘 대 외 교류 왕경 불국토 등 5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부별 전시품으로서 금관총 금관 등 국가지정 문화재 22건 30점을 포함한 600여 점의 신라 문 화재가 선보이며 특히 국보 제83호 금동 반가사 유상이 최초로 경주에 전시되었는데 지금까지 신라에 대한 지식과 관념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 나아가 신라의 현재적 의의는 무엇인 가를 함께 생각해 보는 자리였.. 2015. 8. 4. 신라왕궁의 복원을 위한 월성 석재 귀환식 신라왕궁의 복원을 위한 월성 석재 귀환식 2015. 8. 2. 무장사지를 찾아서 무장사지를 찾아서 무장사지는 경주 보문단지 물레방아 촌에서 암곡동 마을로 아스팔트 길을 따라 가다 차를 세워두고 걸어서 약 30분 정도 거리에 있습니다 이 곳에 미타전을 조성한 사연을 적은 비문인 보물 제125호의 무장사아미타불조상사적비의 이수와 귀부 그리고 숲사이에 방치되.. 2015. 4. 4. 이스탄불 in 경주 2014를 다녀와서(13) 이스탄불 in 경주 2014를 다녀와서(13) 이스탄불in경주2014는 양국이 함께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는 의미에서 새로운 여정의 시작을 주제로 하였으며 천년의 시간을 거슬러 시작된 두 민족의 인연은 한국전쟁 때 보여준 형제애와 월드컵에서의 우정과 경제적인 교류로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이스탄불in경주2014는 이스탄불과 경주가 앞으로 더 발전적인 관계를 맺고자하는 뜻을 담고 있으며 2014년 9월 12일(금)부터 9월 22일(월)까지 경주 황성공원에서 개최되며 이스탄불 시는 120 억원의 예산으로 300여명의 터키 예술인들을 파견하는 등 프로그램 구성과 준비를 주도적으로 추진하였는데 행사는 한국-터키 작가들이 참여하는 한터문학 심포지움과 영화제, 바자르,이스탄불 사진전, 이용주 자수전, 이스탄불 .. 2014. 9. 18. [스크랩] 굴불사지(掘佛寺址) 사면석불(四面石佛) 굴불사지(掘佛寺址) 사면석불(四面石佛) 경주시내 북동쪽에 소금강산(해발 176.8m)이 있다. 이 산 중턱에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이차돈이 순교를 할 때 머리가 날아가 떨어졌다는 백율사가 있다. 삼국유사에는 자추사라고 하는데 소금강산의 서쪽 기슭에 있는 백율사가 바로 자추사일 것이라고 추정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백율사 못미쳐 아랫쪽 산기슭에 굴불사지(掘佛寺址) 사면석불(四面石佛)이 있다 '삼국유사' 권3 탑상(塔像) 사불산굴불산만불산조(四佛山掘佛山萬佛山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경덕왕(재위 742∼765년)이 백률사(柏栗寺)에 행차하여 산 밑에 이르렀을 때, 땅속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들리므로 그곳을 파게 하였더니 큰 돌이 나왔다. 그 돌 사면에는 사방불이 조각되어 있.. 2014. 6. 20. [스크랩] 범종 꼭대기에 용을 올린 까닭은? 범종 꼭대기에 용을 올린 까닭은? 성덕대왕신종 사찰에 걸려있는 큰 종을 범종(梵鐘)이라 부른다. 불교에서 ‘범(梵)’이란 우주만물을 뜻하며, 진리라는 의미로 쓰여지는데, 그러한 소리를 내는 것을 범종(梵鐘)이라 한다. 범종의 신앙적 의미는 모든 중생이 종소리를 듣는 순간 번뇌가 없어지고 지혜가 생겨 악도(惡道)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절에서는 아침과 저녁으로 종을 타종함으로써 지옥중생을 구제한다는 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범종은 아침 저녁으로 타종 하는데 아침은 28번을 치고, 저녁은 36번을 치게 된다. 아침종은 화엄사상에 근거하여 28대인상의 구족함을 나타내고, 저녁종은 정토사상에 근거하여 극락정토에 왕생하게됨을 상징한다고 한다 국립경주박물관 종각에 걸려있는 성덕대왕 신종은 우리나라에 남.. 2014. 6. 20. [스크랩] 능비(陵碑)가 새워진 신라왕릉은 어디어디일까? 능비(陵碑)가 새워진 신라왕릉은 어디어디일까? 경주지역에 신라의 왕릉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은 모두 36기이고, 경주를 벗어난 지역에 있는 것은 경남 양산시에 있는 진성여왕릉과 경기도 연천군에 있는 경순왕릉이 있다. 따라서 신라의 왕릉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은 모두 38기이다. 경주에 왕릉으로 전해지고 있는 36기 가운데 많은 능(陵)이 기록상의 위치나 시대적인 능의 형식과 차이가 있어 의문시되고 있으나, 능비가 남아 있는 무열왕릉(武烈王陵)과 비편이 출토된 흥덕왕릉(興德王陵)은 확실시되고 있으며, 기록상의 위치 추정과 시대적인 형식에 맞아 학계에서 공통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은 문무왕릉(文武王陵), 선덕여왕릉(善德女王陵) 정도이다 이렇게 산재해 있는 왕릉 가운데서 능비(陵碑)가 세워진 곳은 무열왕릉, 문무.. 2014. 6. 20. [스크랩] ??경주읍성의 위치와 규모 경주읍성의 위치와 규모 경주읍성 모형도(경주문화원) 읍성 내의 건물 서문(망미문) 밖 군영 내의 건물 경주읍성의 추정도 읍성주위의 북문로,황성로,동대로.옹기전길은 당시 성밖의 해자였으나 복개를 하여 지금은 도로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남쪽 화랑로는 일제시대 성을 허물고 그 위에 도로를 만들었다.옹기전길은 옹기를 구워파는 옹기상들이 모여 있는 길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나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두 곳의 가게만 남아 있다 일제시대 지적도에 의한 읍성의 위치와 크기 회색부분이 민가가 있던 곳이며 흰 부분은 논과 밭이다 여장복원도 출처 : 토함산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메모 : 토함산솔이파리님 자료 옮겨 갑니다 2014. 6. 20. [스크랩] ?사천왕상의 명칭 사천왕상의 명칭 사천왕사지의 신장상 출토 모습 사천왕을 사대천왕(四大天王)·사왕(四王)·호세사왕(護世四王)이라고도 한다. 사천왕은 동방의 지국천왕(持國天王), 서방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남방의 증장천왕(增長天王), 북방의에 다문천왕(多聞天王)을 일컫는다. 처음 인도에서 도상화된 사천왕상은 간다라 출토의 부조(浮彫)와 불전도(佛傳圖) 등에 나타나는 것처럼 고대 인도의 귀인(貴人) 모습을 하고 있으나 중앙 아시아를 거쳐 중국화되는 과정에서 무인형(武人形)으로 변했는데 이는 중국·한국·일본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사천왕은 나라와 경전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으며 지물(持物)도 일정하지 않으나 대체로 칼·창·탑 등의 무기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7세기경에 사천왕상이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 2014. 6. 20. 이전 1 2 3 4 ··· 1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