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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문화재답사

[스크랩] 능비(陵碑)가 새워진 신라왕릉은 어디어디일까?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14.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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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비(陵碑)가 새워진 신라왕릉은 어디어디일까?

 

 

 

 

 

경주지역에 신라왕릉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은 모두 36기이고, 경주를 벗어난 지역에 있는 것은 경남 양산시에 있는 진성여왕릉과 경기도 연천군에 있는 경순왕릉이 있다. 따라서 신라왕릉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은 모두 38기이다.

 

경주에 왕릉으로 전해지고 있는 36기 가운데 많은 능(陵)이 기록상의 위치나 시대적인 능의 형식과 차이가 있어 의문시되고 있으나, 능비가 남아 있는 무열왕릉(武烈王陵)과 비편이 출토된 흥덕왕릉(興德王陵)은 확실시되고 있으며, 기록상의 위치 추정과 시대적인 형식에 맞아 학계에서 공통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은  문무왕릉(文武王陵), 선덕여왕릉(善德女王陵) 정도이다

 

 

 

 

 

이렇게 산재해 있는 왕릉 가운데서 능비(陵碑)가 세워진 곳은  무열왕릉, 문무왕릉, 성덕왕릉, 흥덕왕릉 등 불과 네 곳뿐이다.

무열왕릉과 성덕왕릉, 흥덕왕릉은 비석를 세웠던 귀부가 남아있어 왕릉비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해중릉(海中陵)인 문무대왕은  682년에 사천왕사에 왕릉비가 세워졌는데 정조 20년(1796년)에 비석의 하단부와 우측 상단부 조각이 발견되므로 왕릉비가 세워졌음이 확인되고 있다

 

능비는 모두 왕릉 곁에 세워졌다. 그러나 문무왕릉비는 해중릉인 대왕암이나 릉이 바라다 보이는 가까운 육지에서  발견된 것이 아니고  대왕암과는 전혀 관계없는 선덕왕릉 아래 사천왕사이다. 따라서 이 비가 서 있었던 사천왕사는 문무왕에 의해 창건되었기 때문에 이곳에 세워졌을 가능성이 있다. 유언에 따라 문무왕을 화장한 장소라고 알려진 능지탑도 사천왕사지 가까이에 있다 .

 

학자들에 의하면 능비를 세우는 것은 일반적인 예가 아니고. 특별한 경우에 세웠을 것이라고 한다. 무열왕이나 문무왕의 경우는 통일을 열고 완성한 왕들이고 성덕왕의 경우 중대 왕실 통치기간이 30여년으로 길었을뿐더러 외교적 업적도 컸으므로 세워졌을 것으로 보여진다.

 

 

▣  무열왕릉비

 

 

 

무열왕릉

 

 

무열왕릉 비각

 

 

무열왕릉비

 

서악동 있는 무열왕릉 있는 비석으로 신라 중기(7세기)에 건립된 신라 제 27대 태종무열왕의 능비이다. 원래의 명칭은 태종무열왕비이나 줄여서 무열왕릉비라고 한다.

화강암으로 만든 비석으로 귀부의 머리가 서남쪽 향하여 세웠으며, 현재 비신() 없어지고 귀부 이수 남아 있다.

귀부(龜趺)의 길이 약 3.33미터, 폭 2.54미터, 이수(螭首)의 높이 약 1.1미터이다.  귀부는 장방형의 기석(基石) 위에 얹혀 있다. 귀부의 머리는 거북모양으로 목은 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고 있어 전체는 앞으로 전진하고 있다. 과감한 기상을 보여주면서도 표정은 과격하지 않고 오히려 명랑하다. 비좌(碑座)는 연꽃으로 이루어져 있고 귀갑은 4중의 육각형 귀갑문이 조각적인 수법으로 새겨져 있다.

 

 

 

 

 

태종무열왕릉 비편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의하면 이 비는 무열왕이 승하한 661년에 건립되었으며, 비문(碑文)은 김인문(金仁問)이 썼다고 하나 비신이 소실되고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 이수 중앙에 김인문(金仁問)의 글씨로 전하는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이 전서(篆書)로 양각되어 있다.

 

이수는 좌우 3마리씩 놓여 있는 용이 서로 상대방의 앞발을 꼬리로 꼬아 전체는 좌우대칭형을 이루고 있는데, 다리의 표현, 용의 비늘 하나 하나가 생동감 있게 조각되어 있는데  당시 석조 예술의 뛰어난 솜씨를 잘 보여준다

 

 

 

비의 이수(머릿돌)

 

 

이수에 있는 김인문(金仁問)의 글씨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

 

 

 

 

비의 아래에는 귀부를 놓고 위에는 이수를 얹은 형식은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이 비의 조각수법은 신라만의 독창적인 것으로   귀부와 이수를 구성하고 있는 각 부분은 각자 생기가 있으면서도 전체와 조화되어 있으며 완전한 짜임새를 보여준다.

귀부의 머리나 귀갑의 외형, 이수 등 그들의 윤곽은 완만한 곡선으로 단순화된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탄력성 있는 양감(量感)을 지니고 있어서 당시의 불상에서 볼 수 있는 충만한 조각성과 공통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통일신라 초기의 조각들이 보여주는 이상화된 사실주의 양식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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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무왕릉비

 

 

 

 

문무대왕 해중 릉

 

 

 

 

문무왕릉비는 682년 사천왕사에 세워졌다고 한다. 그러나 오랜 세월에 파손이 되고 그 흔적이 묘연하였는데, 조선시대 경주 부윤을 지낸 홍양호의 문집 '이계집(耳溪集)에 정조 20년(1796) 어느 농부가 밭을 갈던 중 비석 하단부와 오른쪽 상단부 조각을 발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계 홍양호는 경주부윤으로 있다가 한양으로 올라간 뒤 비석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내려와 그 2개의 비편을 조사해 보고 문무대왕비편임을 확인한 뒤 탁본을 했다고 한다.

 

 

 

문무대왕비 탁본(서울대박물관)

 

 

문무대왕비의 내용이 실려있는 해동금석원

 

 

그 후 1817년과 1824년 두차례에 걸쳐 경주를 방문한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 1786~1856)에 의해 다시 탁본이 되었다.
이계 선생의 탁본인지, 추사 선생의 탁본인지 알 수는 없지만  당시 우리나라의 탁본이 명, 청나라로 가는 사신에 의해 중국 관리들에게 선물로 주는 관행대로 문무왕비문(文武王碑文)의 탁본도 청으로 전해 졌고 이 탁본이 청나라 금석학자 유희해(劉喜海 : 1793~1853)의 손에 들어가 그의 저서 '해덩금석원(海東金石苑)'에 내용이 실려있다

 

 

 

 

 

문무대왕 비편

 

 

2009년 구박물관 담장 뒷집에서 발견된 문무왕 비편

가정집에서 빨래판으로 쓰이다가 수도 검침원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이 후 비편의 소재가 묘연했으나 1961년 비석의 하단 부분이 경주 동부동에서 발견되었고 또 다른 상단부 1점은 2009년 동부동 옛날박물관 뒷집에서 발견이 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중이다

발견 당시 이미 많이 훼손되었지만  적갈색의 화성암에 바둑판처럼 가로선과 세로선을 긋고 그 안에 해서체로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새겨져 있었으며 글씨의 크기는 가로 3.2cm, 세로 3.3cm이다.

 

 

 

 

 

문무대왕비가 있었다고 추정되는 서 귀부

 

 

사천왕사지 입구의 당간 지주로부터 30m 동편에  석조 귀부가 놓여 있다. 이 귀부의 동쪽 약 26m 지점에도 1기가 있으며 동서로 대립해 있다. 모두 비신과 이수 등이 사라지고 귀부의 머리 부분이 없어진 것도 동일하다. . 귀부는 남향하였으며 대체로 그 크기는 현재의 전체 길이 약 210cm, 폭 약 160cm로 귀부의 등에는 비좌 주변의 연화문과 귀갑문, 당초문을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동쪽 귀부의 현상은 머리뿐만 결실 되었을 뿐 완형이다. 방향 역시 서쪽 귀부와 마찬가지로 남향 하였고 그 크기는 현재의 전체 길이 약 210cm, 폭 175cm 로서 서쪽 귀부에 비하여 폭이 조금 넓은 편이다.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로는 동측 귀부에는 사천왕사적비가 있었고 서측 귀부에는 문무대왕릉비명이 있었다고 한다

 

사천왕사지 서쪽 귀부가 문무왕릉비 일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귀부의 머리

문무대왕의 비가 얹혔을것으로 추정되는 서 귀부의 머리.

 

 

 

발견된 비편의 위치

<한국문화관광방송 자료></한국문화관광방송>

 

이 외에 소편(小片) 1개가  일제강점기에 오사카 긴따로(大坂 金太郞)씨에 의해 발견되어 경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비편에는 2글자 뿐으로 "口基"로 판독된다. 홍사준 관장에 따르면 동비(同碑) 제 2,3행 제일 끝자로 추정된다고 한다.

사천왕사지 남향 오른쪽 귀부의 비대공(碑臺孔 주, 귀부의 등에 비를 꼿도록 파 둔 홈)이 동부동에서 발견한 비 하단부 촉과 일치함으로서 이 비가 사천왕사에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흥덕왕릉비

 

 

 

 

흥덕대왕릉

 

 

신라 제 42대 흥덕왕릉(826∼836)은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울창한 송림 가운데에 있으며 사적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흥덕왕릉은 왕릉 중에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유일하게 기록으로 남아있는 합장묘 왕릉이다. 

흥덕왕은 왕비인 장화부인이 죽고도 왕비를 너무 사랑해서 새 왕비를 들이지 않았다. 왕이 장화부인의 무덤에 합장하기를 유언했으며 왕이 먼저 왕비릉을 조성하고 왕의 사후 합장을 했던 것이다. 실지로 이 무덤은 횡혈식 석실고분이므로 이 무덤은 기본적으로 합장을 위해 만들어진 무덤이라고 한다.

 

난간석이 없는 왕릉

 

 

흥덕왕릉은 한국전쟁 당시 포격을 맞아 석물들의 훼손이 심했다. 그래도 돌기둥은 성한 것이 남아 그대로 복원을 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난간석은 파편조차 남아있지 않아서 그 모양을 알 수 없어 현재까지 난간석을 끼우지 못하고 있다. 다른 왕릉의 난간석과 유사하게 할 수도 있지만 원형의 복원을 위해 파편이라도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흥덕왕릉 귀부

 

 

흥덕대왕릉비편(국립경주박물관)

 

 

흥덕대왕릉비편(동국대학교 박물관)

 

 

 

 

흥덕왕릉은 능 전방의 왼쪽에 능비가 있다. 흥덕왕릉 비편이 발견 돼 왕릉의 주인이 흥덕왕릉임을 중명하고 있다. 능비를 세웠던 귀부가 있으나 많이 손상되었다.

비신(碑身)과 이수는(螭首)는 사라지고 없으며, 귀두 역시 잘려나갔고 귀갑과 발 부분도 파손이 심하여 형태를 알아볼 수 없다.

이 귀부는 경주지역에 남아있는 것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나 조각의 섬세함은 떨어지는 편이다

 

<관련자료: 흥덕왕릉 http://blog.daum.net/kinhj4801/15961633></관련자료:>

 

 

성덕왕릉비

 

 

 

 

 

경주성덕왕( 제33대 왕, 재위 702∼737)릉은 조양동에 소재하며 사적 제28호다. 이 왕릉은 신라 최초의 완비된 형식을 갖춘 능묘로, 둘레돌의 형식이 크게 발전하였고 능의 네 귀퉁이에는 돌사자를, 그 전방에는 석인을 배치하였으며, 둘레돌 앞에는 입체적인 원각(圓刻)의 십이지신상을 세웠다.
11개의 십이지신상의 머리 부분은 망실되었고 하나의 십이지신상만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성덕왕릉에도 문무인상이 있었다.
그러나 무인상은 어깨 윗부분만 남아있는데 마모가 심해 원래의 형태를 짐작할 수 없어 명확하게 얼굴을 알 수 없었다. 원성왕릉이나 흥덕왕릉의 문무인상처럼 완전하진 않았으나 문인상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성덕왕릉비의 귀부는 성덕왕릉의 남

쪽 약 100m 떨어진 논의 가운데에 있다.
성덕왕의 아들인 경덕왕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성덕왕의 능을 개수하였는데, 이때 성덕왕릉비도 함께 세웠다. 경덕왕 13년(754년) 5월의 일이다

귀부는  1개의 돌로 되어 있으며 사각형의 지대석과 거북모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크기는 가로 290㎝, 세로 268㎝이며 비석과 이수(螭首)는 없어지고 거북 모양의 받침돌만 남아 있다.

네모나게 다듬은 돌 위에 조각된 이 귀부는 현재 거북머리 모양의 귀두는 파손되어 없어졌으나. 몸체의 앞발에는 5개의 발톱이, 뒷발에는 4개의 발톱이 새겨져 있고, 등에는  6각의 거북등무늬가 전체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비석을 세웠던 비좌

 

 

등의 중앙부에는 비석이 세워졌던 자리인 장방형의 홈이 패어 있다.

전체적으로 조각이 섬세하면서도 힘차서 성덕왕대 전후의 조각술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비록 비석과 이수가 없어졌으나 여기에 새겨진 거북등무늬나 기타 당초문을 통해서 8세기 전반의 신라 왕릉에 사용한 귀부제작 양식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능비 주위에서 모두 3차례에 걸쳐 비편이 수습되었는데  1935년 11월 최남주선생이 귀부 주변에서 작은 비편 2개를 발견했으나 모두 판독이 불가능하였으며 그후 1966년 1월 경주박물관의 박일훈씨에 의해 귀부 주변 정리 중 6개의 비편이 발견되었지만 두 편만이 각 1자씩 판독되었다. 1976년에 또다시 귀부 주변에서 비편이 수습되었는데 1자만 판독되었다.

 

※ 반면, 원성왕릉(괘릉)의 경우는 신라하대왕의 시조라 할 수 있으며 왕릉의 석조물을 모두 갖춘 화려한 능인데도 능비가 없다는 것이 의아스럽다

 

 

 

출처 : 토함산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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