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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문화재답사

[스크랩] 굴불사지(掘佛寺址) 사면석불(四面石佛)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14.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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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불사지(掘佛寺址) 사면석불(四面石佛)

 

 

 

 

 

 

 

 

 

 

 

 

 

 

 

경주시내 북동쪽에 소금강산(해발 176.8m)이 있다. 이 산 중턱에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이차돈이 순교를 할 때 머리가 날아가 떨어졌다는 백율사가 있다. 삼국유사에는 자추사라고 하는데  소금강산의 서쪽 기슭에 있는 백율사가 바로 자추사일 것이라고 추정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백율사 못미쳐 아랫쪽 산기슭에 굴불사지(掘佛寺址) 사면석불(四面石佛)이 있다

 

'삼국유사' 3 탑상(塔像) 사불산굴불산만불산조(四佛山掘佛山萬佛山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경덕왕(재위 742765)이 백률사(柏栗寺)에 행차하여 산 밑에 이르렀을 때, 땅속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들리므로 그곳을 파게 하였더니 큰 돌이 나왔다. 그 돌 사면에는 사방불이 조각되어 있어서 그곳에 절을 세우고 굴불사(掘佛寺)라 이름을 지었는데, 지금은 잘못 전하여 굴석사라 한다(又景德王 遊幸栢栗寺至山下聞地中有唱佛聲命掘之得大石 四面刻四方佛因創寺以掘佛爲 今訛云掘石)”라고 되어 있다.”

 

신라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의 문헌에는 굴불사에 대한 기록이 없으며 1910년대에 일본인들에 의하여 조사․보고되었고 1935년 5월에 보물로 지정되었다가 1963년 1월 21일에 다시 보물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굴불사지에서 출토된 금동불

 

 

1981년  국립경주박물관에 의하여 발굴조사가 있었는데 창건 당시에 사면석불을 모시는 건물이 있었음이 확인되었고 이러한 건물은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의 어느 시기까지 존재하였음도 확인되었다.

발굴자들의 의견에 의하면, 건물은 정면을 남쪽으로 하고 앞면 3칸 이상에 옆면 3칸의 건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후 1985년, 절터를 정비할 목적으로 2차 발굴이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 의해  실시되었는데, 통일신라시대 금동불상을 비롯한 고려시대 청동반자, 소형 청동종, 청동향완 등이 발굴됨으로써 중요한 자료를 얻게 되었다. 특히 고려시대 초기에는 이곳을 '동사(東寺)'라고 불렀다는 사실도 확인되었으며, 또한 삼국유사가 쓰여질 당시에는 '굴불사(掘佛寺)'가 아닌 '굴석사(屈石寺)'라 불렀다고 하는 기록이 정확했음도 입증되었다고 한다.

절터는 계곡부의 경사면을 잡석으로 메워서 대지를 만든 후 큰돌을 옮겨와 불상을 새기고 건물을 세운 것으로 보여지는데, 불상이 새겨진 돌이 동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모습은 지반의 약화와 관계가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면석불이 새겨진 바위는 긴 폭 약 4m, 짧은 폭 약 3m, 높이 약 3.5m 크기이다.  

바위의 아래에 큰 암반이 있음이 남쪽면과 동쪽면의 아래에서 확인되는데, 그 위에 큼직한 바위가 동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상태로 올려져 있고 여기의 네 면에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동쪽면의 약사여래좌상과 남쪽면의 두 상은 돋을새김으로 조각되어 있고, 서쪽면의 삼존 중에서 본존은 돋을새김으로 조각되어 있고 양 협시보살은 입체로 조각되었으며, 북쪽면은 오른쪽에 선각보살상 1구와 왼쪽의 돋을새김 1구가 조각되어 있는 사면석불이다. 그러나 굴불사지 사면석불은 정확한 직사각형 형태는 아니다

 

 

일제강점기시의 사면불

 

 

발굴 당시의 모습

 

 

 

각 면의 불상들

 

서쪽면

 

 

 

 

서쪽면의 아미타삼존불

 

서쪽면에는 바위면에 선각에 가까운 얕은 돋을새김으로 조성하고 머리만 따로 만들어 바위 위에 올려 놓은 본존불이 있고  좌우의 협시보살은 환조로 조각하여 따로 세워놓았다. 

 

 

 

 

 

 

본존 아미타불

 

아미타여래로 보여지는 본존불은 머리를 따로 만들어 바위 위에 올렸는데 큼직하게 솟아오른 육계에 민머리를 가지고 있다. 눈과 입은 마모가 심하여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큼직한 귀는 목 부위까지 내려와 있으며  바위와 연결되는 부위에 세 줄의 삼도가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양쪽 어깨에서 나란하게 흘러내리다가 바지의 매듭 아래에서 U자 모양으로 평행한 무늬를 겹쳐 내려 무릎 아래에까지 이른다.

왼손은 선정인과 같은 모습으로 놓였는데 둘째손가락을 굽히고 있으며 오른팔은 떨어져 나가서 정확한 모습은 알 수 없으나 시무외인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본존불의 발과 대좌

 

두 발은 나란히 하여 정면을 향하고 있으며 바지자락은 발목까지만 내려와서 발등을 덮지는 않았다.

대좌는 앙련의 연꽃대좌로서 아래에는 홑잎 연꽃 7송이가 위를 향하고 있다.

 

 

 

우협시불과 좌협시불

 

 

  좌협시 관세음보살

 

좌협시보살상은  앞과 좌우에 세 개의 면을 세운 삼면관을 썼는데 정면에는 아미타여래가 서 있는 모습의 화불(化佛)을 장식하고 있는 것을 보아 관세음보살로 생각된다.

눈은 동그스름하며 코는 큼직하나 입은 자그마하게 표현되어 있고 턱밑에는 주름이 있다. 큼직한 귀는 목 부위까지 내려오 있고 목에는 세 줄의 삼도가 있다. 삼도의 아랫쪽에는 고리가 달린 목걸이를 장식하고 있다.

하늘거리는 천의를 걸치고 있으며 오른쪽 팔에 걸쳐서 위로하여 왼쪽어깨로 넘어와 몸과 팔 사이로 드리워지는데 왼손에 한 자락을 살며시 고리 지워 잡고 있다. 허리에는 목걸이에서 보이는 같은 모양의 장식꾸밈이 있는 허리띠를 하고 있다.

오른손은 들어올려 엄지와 셋째손가락을 잡은 모습으로 손목에 팔찌를 하였다. 왼손은 몸에 붙여서 표현하였는데 역시 팔찌를 하고 있다.

발은 원래 몸과 함께 같은 돌로 되어 있었으나 깨어졌다.

대좌는 별개의 돌에 조각하였는데 겹꽃 8송이의 복련을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우협시불이 들고 있는 정병

 

우협시보살상은 파손이 심하고 떨어져나간 부분이 많으며, 남아있는 부분도 얼굴과 가슴 그리고 배 부분이 떨어져나가 상세한 모습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목에는 세 줄의 삼도를 표현하고 좌협시보살과 같은 모양의 목걸이로 장식하였으며 목걸이 부분에서 리본같이 처리된 옷 한 자락이 흘러내리고 있다. 무릎아래에서 양다리에 각기 주름을 표현하여 발등을 거의 다 덮었고 양다리 사이에는 옷자락이 지그재그식으로 흘러내린 것을 표현하였다.

왼손은 들어올렸는데 떨어져 자세히 알 수가 없고 오른손은 내려서 정병을 둘째와 셋째 손가락사이에 끼워 잡고 있다.  왼손과 오른손의 자세가 좌협시보살과 우협시보살이 대칭을 이루고 있다.

이 보살은 본존과는 달리 손톱․발톱을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대좌는 좌협시보살과 거의 동일한 모습으로 생각이 되나 흙에 묻혀 있어 볼 수가 없다.

좌협시보살이 관세음보살로 보면 당연히 우협시보살은 대세지보살로 생각된다

 

 

동쪽면

 

 

 

 

동쪽면의 약사여래불

 

동쪽면에는 왼손에 동그란 보주 모양의 약그릇을 든 약사여래좌상 1구가 조각되어 있다

불상이 새겨진 바위면은 아래쪽이 거의 평면에 가깝고 위쪽은 양 가장자리에서 가운데로 갈수록 오묵하게 다듬어 자연스럽게 광배모양을 하고 있다. 불상의 아래는 자연암반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두었으며 광배형태의 옆부분도 손질을 하지않고 자연상태로 두었다.

약사불은  민머리에 큼직하게 솟아오른 육계를 가지고 있다. 큼직한 귀는 목 부위까지 내려와서 어깨에 닿을 듯하다,

 

 

 

 

눈썹은 코의 바깥 선과 연결되어 둥글고 뚜렷하며 눈은 눈 꼬리를 올려 아래로 내리뜬 모습이다. 코는 큼직하나 현재 시멘트로 복원을 해 놓았다.  입은 두툼하고 턱 아래에는 한 단의 주름이 있다.

목에는 삼도를 표현하였던 것 같으나 파손이 있어 확인할 수 없다. 왼손은 선정인 모습으로 손바닥을 편 상태에서 그 위에 약그릇을 올렸다. 오른손은 들어 올렸는데 바위가 목 부위에서 양어깨와 배 부분까지는 거의 완전히 떨어져 나간 상태이므로 확인할 수가 없으나 아마 시무외인(施無畏印)이나 설법인(說法印)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법의는 양어깨에 걸친 통견(通肩)으로 추측되며 다리는 결가부좌로 길상좌(吉祥坐)를 하였고, 발은 양쪽 모두 완전히 노출되어 발가락까지 표현되었다.

 

 

 

 

 

머리둘레의 두광은 이중선을 사용하여 원형으로 나타내었는데 이중선의 안쪽은 그냥 쪼아서 비워 두었고  바깥부분은 불꽃무늬로 위가 뾰족한 구슬모양을 하고 있다. 몸 둘레의 신광은 삼중선으로 표현하여 안쪽은 그냥 쪼아서 비워 두었고 그 바깥부분은 불꽃무늬를 나타내어 두광과 같게 하였다. 그 윤곽선을 한 선으로 처리하고 두광과 연결되어 전체 광배를 형성하고 있다.

 

오른쪽 무릎 아래로 선각 연꽃대좌의 일부가 보이고 있어 흙을 파낸다면 전체는 아니더라도 부분적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남쪽면

 

 

 

 

 

남쪽면에는 원래 삼존불이 있었으나 오른쪽의 협시불은  일본인이 떼어갔다는 이야기가 많이 회자되고 있다.  불상을 떼어 갔다고 일컬어지는 부분은 현재 수평․수직으로 쪼은 선이 얼켜 있고 전체적으로 두 불상보다는 작지만 조금 앞으로 튀어나와 있다.

 

왼쪽 불상은 보살상으로 보관은 따로 만들어 씌웠었는지 알 수 없지만 머리카락을 묶은 보계가 큼직하고 삐죽하게 나와있어 마치 육계처럼 표현되어 있다.

얼굴은 마모가 심하지만 대체로 원만하여 부드러운 느낌을 주고 있으며 양 귀는 길다랗게 표현되어 어깨에 닿아 있다.

 삼도는 표현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목걸이를 하였는데 가슴부분에서 마름모형태 세 개를 드리우고 있는데 가운데 것은 끝에 원형을 매어 단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목걸이 아래로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비스듬히 천옷을 걸친 듯하다. 허리띠는 불확실하지만 허리에 묶은 끈 한 자락을 무릎정도까지 내려뜨린 듯 하다. 바지는 양다리의 윗 부분에서 각기 U자 모양으로 옷 주름을 나타내었다. 무릎부분에서는 생략되었다가 그 아래에서 다시 듬성듬성 나타내고 발목에서 끝맺음을 하였다.

왼손은 내려뜨려서 손바닥을 앞으로 향하여 둘째, 셋째, 넷째 손가락을 꼬부려 천의자락을 잡고 있는데 왼팔에는 어깨 쪽의 팔찌인 비천과 손목의 팔찌인 완천이 모두 조각되어 있다.

오른손은 들어올려 밖으로 향하였던 것 같으나 떨어져 나가서 어떤 손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팔띠를 찌고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오른쪽 불상은 목부분이 왼쪽 보살과 비슷하게 표현되었으나 현재 머리부분이 떨어져 나가 확인이 불가능하므로 여래상인지 보살상인지 구분을 할 수 없다. 이 면에 삼존불을 새겼다면 석가여래상일 것이고 처음부터 삼존이 아니고 이존불만 새겼다면 보살상일 가능성이 많다.

 

왼손은 들어올렸는데 역시 떨어져 어떤 모습을 하였는지 확실하지 않다. 오른손은 내려뜨려서 천의 자락을 잡은 듯 손등을 밖으로 하여 안쪽으로 약간 오므렸고 다섯째 손가락만 편 상태이다.

겉옷은 양어깨에 걸친 통견으로 허리 위에서는 U자 모양으로 단을 이루고 끝단은 무릎아래에서 V자 모양으로 마감하였다. 다리가 표현되어야 하는 부분에서는 왼쪽 보살상과는 달리 가운데 별도의 천 자락 표현 없이 Y자 모양을 이루어 좌우 대칭으로 흘러내려서 무릎 부분에서 돌고 있다. 발은 떨어지고 없다.

연꽃대좌는 왼쪽 보살의 것과 거의 같으나 아래쪽의 복련이 겹꽃의 가운데를 나누는 선을 넣은 점에서 차이가 난다.

 

 

남면 불상의 대좌

 

 

 

남쪽면의 우협시는 일제가 완전히 떼어 가서 흔적만 남아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나 일제시의 발굴사진에도 불상은 없으며, 사실 화강암벽에 있는 부조상을 그대로 떼어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곳에 보살상을 조각했다가 마음에 들지않아 지웠는지, 아니면 돌출된 바위부분을 평면으로 고르기 위해 수직․수평방향으로 정으로 툭툭쳐서 깎아낸 흔적인지는 알 수 없다.

 

 

북쪽면

 

 

 

 

 

 

 

11면 6비 관음보살 선각                                                 미륵보살상 

 

북쪽면은 전체를 2부분으로 나물 수 있는데  바위면 전체로 봐서 동쪽이 뒤로 들어가고 서쪽이 앞으로 나온 것과 같은 형태이다.

동쪽 들어간 부분에는 11면6비 관세음보살상이 선각으로 새겨져 있고,  서쪽 나온 부분에는 보살상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관음보살의 종류는 매우 많은데 11면 6비 관음보살은 얼굴이 11개, 팔이 6개이므로  11면 6비 관음보살이라고 부른다. 이 관음보살은 인간의 11가지 걱정거리를 없애고 11가지의 기쁨을 준다는 보살이다. 팔이 여섯개나 되는 것은 인간을 구제하는데 그만큼 많은 일을 해야 힘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또한 6개의 팔이면 무엇이던지 할 수 있다는 전지전능하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북면의  11면6비 관세음보살상은 얕은 선각과 암석의 풍화작용으로 인하여 식별이 어려우며 다만 부분부분 선각을 볼 수 있어 확인이 된다. 

 

 

11면 6비 관음보살의 탁본 

 

머리 둘레에 표현된 두광은 삼중선으로 그렸고 얼굴은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머리에 관을 쓰는 보관자리에는 명확하지는 않으나 화불이 있고, 이를 중심으로 좌우에 세 개씩의 얼굴을 조각하였다. 그 위에 다시 세 개의 얼굴을, 제일 꼭대기에 한 얼굴을 조각하여 본 얼굴과 합쳐서 11개의 얼굴 즉 십일면이 되게 하였다.

양쪽 귀와 삼도 및 웃옷은 확실하지 않으며, 속옷인 승기지로 보이는 옷을 표현한 것 같기도 하다. 왼쪽은 높고 오른쪽은 낮게 처리한 선이 몇 개 보이고 허리에도 늘어뜨린 짤막한 자락이 나타나 있다.

팔은 좌우 각각 셋으로 표현되었는데 제일 위에 있는 굽혀서 들어올린 팔은 손을 양쪽 다 밖으로 향하고 있다. 가운데 팔은 안쪽으로 굽혀 가슴 근처에서 무슨 물건을 잡은 것 같은데 확인되지 않는다. 아래로 늘어뜨린 팔은 왼손에 정병으로 보이는 물건을 든 것으로 보이며 오른손은 확인 되지 않고 있다.

천의자락은 전체적으로 확실하지 않으나 왼쪽 아랫단에서 옆으로 활짝 펼쳐진 듯하다.


 

 

 

 

서쪽 나온 부분에 있는 보살상은 미륵보살상으로 생각된다. 돋을 새김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몸의 아랫부분은 짧고 윗부분은 길다. 왼손은 늘어뜨려서 천의자락을 잡은 것 같고 오른손은 들어올려 손바닥을 앞으로 하여 주먹을 쥔 듯 오무리고 있다.

얼굴의 모습은 원만한 편으로 머리에 쓴 보관은 삼면관처럼 보이고 가운데에 화불인지 정병인지 구분할 수 없는 형체가 새겨져 있다. 귀는 목 부위까지 내려왔으나 짧은 느낌이며,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고 그 아래에  목걸이가 표현되어 있다.

겉옷인 가사는 왼쪽 어깨에 걸쳐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듯 비스듬하게 표현하였으며 몸통부분에는 선 몇 개로 처리하였다.  양손에서 가사와 천의자락이 거의 수직으로 흘러내려 아랫단은 직사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발등이 드러나 있다. 발은 정면을 향하여 양쪽이 나란하게 발가락까지 표현되어 있다.

발 아래로는 다듬지 않은 자연 암벽이 그대로 있는데 선각으로 된  복련의 연꽃이 일부 남아 있는듯이 보인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 사면석불은 발견 당시부터 조각이 이미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조각 양식 면에서 보면 경덕왕대, 742765년 사이나 그보다 약간 올라가는 시기에 조각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면의 불상은 조금씩 시차를 두고 조각된 것으로 보여지는데 그중에서 서쪽 면의 아미타삼존상이 가장 먼저 제작된 불상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이 사면불에는 환조, 부조, 선각이 섞여있는 독특한 형식의 사면불이어서 더욱 흥미를 느끼게 한다.

 

이 사면 불상은 기록이 전하는 사면불상으로 사면불의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그뿐만 아니라 각 면의 상들은 8세기 통일신라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또한 사면석불의 북쪽 면에 십일면육비의 관음보살상이 표현되어 있는 것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에 모시던 불상 중에 밀교적 성격을 띠는 불상이 있었음을 보여 주는 매우 귀중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굴불사지 주면에 놓여있는 석재들

 

 

               우물주변의 기도처     

 

출처 : 토함산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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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함사솔이파리 님 좋은 글 옮겨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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