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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문화재답사

[스크랩] 성덕왕릉의 12지상은 왜 위치를 벗어나 있을까?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17.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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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왕릉의 12지상은 왜 위치를 벗어나 있을까?

 

 

 

 

 

 

 

신라의 제33대 성덕왕(聖德王;재위 702-737)은 신문왕(31대)의 둘째 아들이며 효소왕의 동복(同腹) 동생이다. 본명은 융기(隆基)였으나, 당나라 현종의 이름과 같아서 흥광(興光)으로 고쳤다.

효소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추대를 받아 즉위했다

 

왕위에 오른 성덕왕은 안으로는 정치를 안정시키고, 밖으로는 당나라와 외교를 활발히 하여 국력을 튼튼히 함으로써, 삼국을 통일한 이후 가장 평화롭고 살기 좋은 시절을 이루었을뿐 아니라, 문화면에서도 눈부신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다. 정치적 안정과 함께 성덕왕대는 사회적으로도 통일신라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성덕왕은 35년이나 왕위에 있다가 돌아가시니 뭇 백성들이 슬퍼하고 후히 장사지냈다

국립경주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도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위해 만든 것이다

   

성덕왕릉은 경주역에서 울산으로 통하는 7번국도를 따라가다 10km 되는 지점, 경주대학교 한국광고 영상박물관 동쪽, 철로 건너 울창한 소나무 숲 속에 자리잡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이거사(移車寺) 남쪽이라 했고, 『삼국유사』왕력 편에는 동촌(東村) 남쪽(양장곡-楊長谷-이라고도 한다)에 능이 있다고 했다.    

 

성덕왕릉의 규모

 

 

 

 

 둘레석 및 명칭과 크기

 

 

능의 밑둘레는 52m인데, 봉분더미가 무너지지 않도록 아래쪽에 돌로 호석을 두르고, 12지상(十二支像)을 배치하였으며 그 바깥은 돌기둥을 세워 난간(欄干)을 만들었다.

무덤의 남서쪽 방향에는 잘 다듬은 돌로 안상이 새겨진 상석(床石)을 설치하고, 더 남쪽 좌우에는 석인상이 배치되어 있다.

또 네 마리의 돌사자가 왕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을 향하여 지키도록 배치되어 있으며, 왕릉에서 약 70m 남쪽에는 비석을 세웠던 귀부가 있어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 조성된 획기적인 왕릉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성덕왕릉의 봉분 둘렛돌은 판석으로 세우고 그 위에 갑석을 덮었는데, 판석이 넘어지지 않도록 턱이 지게 도드라진 기둥돌(탱주)을 30개 세웠다. 탱주는 무덤 안쪽으로 들어간 부분을 길게하여, '돌못'이라 부를만한 생김새로 되어 있다. 그리고 돌못을 더욱 튼튼하게 하도록, 옆에서 보면 삼각형으로 된 두꺼운 돌(보호석) 30개를 밖에서 기대어 받쳐 놓았다.  

 

이 둘레돌 앞 보호석 사이에는 환조(丸彫)의 십이지상을 세웠고 그 바깥에 33개의 석주를 세웠으며, 석주 사이에는 상하 2개의 관석(貫石)을 끼워 출입을 못하게 했다.

 

 

 

성덕왕릉의 난간 석주

난간의 석주는 모두 33개이다12지상을 세우면서 같이 세운 난간석주인데 왜 12의 배수인 36개를 세우지 않고 33개를 세웠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전륜성왕을 지칭하였기 때문에  33 도리천을 의미하여 33개를 세운 것일까? 

 

 

받침돌 사이사이에 배치된 12지상은, 신라의 능묘 중에서 단 하나 뿐인‘둥글새김(환조) 12지상’이다. 수수인신(獸首人身-몸은 사람, 머리는 짐승)형의 12지상은 모두 무사(武士)들이 입는 갑옷을 입었으며 손에는 무기를 들고, 당당한 모습으로 앞쪽 위를 응시하며 서 있다. 목에는 경당을 두르고 가슴에는 흉갑을 두른 무사복에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요갑을 둘렀으며 양팔에는 소매자락을 길게 내려뜨린 모습으로 조각이 매우 섬세하다. 

 

그런데 이 12지상들이 서 있는 위치를 자세히 살펴 보면, 호석 받침돌 가운데만 서 있는 것이 아니고,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 왼쪽에 치우쳐 있는 것 등, 들쑥 날쑥이다.

가운데 일정하게 서 있으면 보기에도 좋을텐데 이렇게 치우쳐 있는 까댥은 무엇일까? 

 

 

가운데 있는 돼지상

 

 

 

왼쪽으로 치우쳐져 있는 호랑이상

 

오른쪽으로 치우쳐져 있는 양상

 

 

 

 

이렇게 가운데 있지 않고 다른 위치에 서 있는 까닭은, 봉분과 12지상이 각각 다른 시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봉분은 성덕왕의 다음 대인 효성왕 때 만들어졌으나 무덤 둘레의 12지상은 35대 경덕왕 때에 만들어 호석 사이 사이에 세웠기 때문이다.

 

처음 만들어진 성덕왕릉 무덤의 구조는 신문왕릉(최근에는 효소왕릉으로 추칭)처럼 둘레석에 삼각형의 호석만을 세운 형태이었을 것이다

 

 

초기의 성덕왕릉 추정                                                   경덕왕때 정비후의 모습

 

 

삼국사기에 보면 '경덕왕 13년(754)에 성덕왕릉에 비(碑)를 세웠다'고 했으니, 둘레에 삼각형의 호석만 있던 성덕왕릉에 바닥 돌, 돌난간, 12지상, 문인석, 상석, 돌사자 등도 이 때 다듬어 설치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타당하다.

 

성덕왕릉 둘레의 호석(받침돌)은 원(圓)둘레의 30등분한 위치에 세웠져 있었다, 이것은 12지상의 배치는 전혀 고려되지 않은 축조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처음부터 12지상을 배치하려고 계획하고 하였다면 받침돌 개수가 12, 또는 24, 36으로 12의 배수가 되어야 하지만 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30등분으로 하여 호석을 설치한 것이다

 

여기에서 왜 30등분을 했느냐에 대한 사실은 아직 조사 발표된 바가 없다  

 

여하튼 30등분 된 능의 둘레에 12지상을 조성하여 놓으려니 당연히 정확한 12방향에 놓을 수가 없다. 호석이 없으면 가능하지만 호석이 놓여 있기 때문에 12지신상 조각은 일정한 공간 배분을 얻지 못하고 호석을 피해 12방향에 근접한 자리에 놓으려다보니 호석의 왼쪽이나 오른쪽에 치우치게 놓을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성덕왕릉 12지상의 배치도 (빨간 네모는 원숭이상으로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12지상의 배치와  12방향갈색은 현재 12지상이 놓여있는 곳이고 파란 점은 정확한12방향을 표시한 것이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원숭이상

 

머리

분이 남아있는 닭상

 

 

원성왕릉이나 흥덕왕릉 등은 축조 전에 이미 계획을 세워 판석에 12지상을 부조로 조각을 한 뒤 세웠으나, 성덕왕릉은 이미 세워진 왕릉의 판석에 부조로 새기기란 무척 어려운 작업이기 때문에 환조로 조성하여 세운 것이 아닐까....   

 

현재 남아있는 12개의 상 중에서 원숭이상과 닭상의 2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목이 목이 떨어져 나가고 없고 말상은 완전히 부셔진채 두 토막만 남아 한 도막은 말상의 위치에 또 한 도막은 원숭이상 자리에 놓여 있다. 닭(유酉)상은 얼굴부분이 조금 파손이 되었지만 제 자리를 지키고 있고 비교적 완전한 원숭이(신申)상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 전시되어 있다

 

 

      

말상                                                                      원숭이상          

(원숭이상에 놓여있는 것은 말상의 디리부분으로 상하가 뒤집혀진 채 놓여 있다)

 

 

 

신문왕릉의 상석                                                       성덕왕릉의 상석

 

잘 다듬어진 높은 상석이 남쪽에 놓이기 시작하는 것은 이 성덕왕릉부터이다.

신문왕릉(효소왕릉)까지는 여러 개의 돌을 쌓아 낮게 만들었으며 위치도 능의 동쪽에 놓여졌는데 경덕왕때에 이르러 화려하고 크게 만들어 남쪽에 설치하였던 것이다.  

 

 

성덕왕릉의 석물 배치도(화살표는 바라보고 있는 방향을 가리킨 것이다)

 

 

석인

 

능 앞에는 안상문(眼象紋)이 새겨진 석상(石床)이 놓여 있고, 그 앞으로는 문인석(文人石) 2구, 무인석(武人石) 2구를 마주 대하게 배치하였으나 지금은 파손이 심하여 무신석 1구와 상반신만 남은 석인 1구밖에 남지 않았다. 석인상은 방형기단(方形基壇) 위에 올려져 있으며, 의장용 갑옷인 양당계를 착용하고 양손으로 칼을 짚고 있는 모습으로 갑옷의 표현이 사실적이다.

 

(※ 현재는 문인석, 무인석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으며 통틀어 석인상이라고 한다. 신라때는 문무인의 구별이 없었으며 앞쪽 옷은 문인복 같은 복장이나 칼을 들고 있으며, 뒷쪽은 갑옷이기 때문에 문인, 무인으로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자상

 

능 뒤쪽 좌우에 1구씩, 그리고 능 전면 석인들 앞 좌우에 1구씩 모두 4구의 석사자(石獅子)가 배치되었는데 자세, 안면, 체모(體毛) 등이 매우 착실하게 표현되어 있다.

 

 

 

 

성덕왕릉 귀부

 

능 전면 좌측에 능비(陵碑)가 있었으나 지금은 비신(碑身)과 이수가 없어지고, 목이 부러진 귀부(龜趺)만 남아 있다. 귀부는 비교적 웅대한 편이나 몸체가 납작하고 귀갑문(龜甲文)의 조각도 힘차지 못하다. 머리는 없어졌으나 절단된 상태로 보아 직립된 용형(龍形)이 아니었던가 추측된다

 

능비(陵碑) 주위의 조사에서 약간의 비석 조각이 발견되었으나 판독된 명문은 '무(武)'와 '적(跡)' 두 자뿐이다

 

 성덕왕릉의 여러 가지 구조는 십이지를 비롯하여 석인·석수를 갖춘 우리나라 최초의 예로서 매우 주목되며 이후 신라 왕릉의 규범이 되었을 뿐더러 고려, 조선 시대 왕릉 양식의 시원(始原)이 되었다.

 

 

 

신문왕릉(효소왕릉)의 벽돌식 둘레석                                             성덕왕릉의 판석식 둘레석                (삼각형보호석-44개)                                                           

 (삼각형보호석-30개) 

신문왕릉과 성덕왕릉의 호석

 

 

※ 신라왕릉에 호석을 두르기 시작한 것은 신문왕릉(효조왕릉)부터인데, 신문왕릉에서는 네모난 잡석을 대강 다듬어 축대를 쌓듯 축조하고 나서 다듬은 삼각형 받침돌을 일정한 간격으로 빙둘러가며 받쳐 놓아 그 붕괴를 막으려한 기법을 보인다.

그러던 것이 그 아우 성덕왕(聖德王, 690년∼737년)의 왕릉에 가서는 소형 잡석 대신 잘 다듬은 판석(板石)을 둘러가며 탱주(받침기둥돌)을 사이사이에 박아서 짜 맞추어 나가는 방식으로 발전시키면서, 외부에서 호석을 받치던 3각형 받침돌은 효조왕릉 형식을 그대로 계승하여 받침기둥돌을 외부에서 받치게 하였다.

 

이 글에서 신문왕릉(효소왕릉)이라고 표기함은 현재 신문왕릉이라고 칭하는 왕릉을 효소왕릉이라고 보는 설이 많은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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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에 얽힌 이야기>

 

대세지보살은 아미타불의 오른편에 있는 지혜의 문을 관장하는 보살이다.

 

하루는 석가가 대세지보살을 불러 극락으로 통하는 열두 개 문의 수문장을 지상의 동물 중에서 선정하여 일년씩 돌아가면서 당직을 세우도록 했다.

 

이에 대세지보살은 열두 동물을 선정하고 그들의 서열을 정하기 위해서 모두 불러모았다.

열두 동물 중 고양이는 모든 동물의 무술 스승이므로 제일 앞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순서대로 소, 범,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돼지, 개를 앉혔다.

 

대세지보살은 열두 동물의 서열을 정한 후 석가여래에게 훈계를 청하려고 맞이하러 갔다. 그 사이 석가를 기다리던 고양이는 갑자기 뒤가 마려워 참다참다 견딜 수 없어 잠시 으슥한데 가서 뒤를 보려고 자리를 비웠다. 공교롭게도 이 때 석가가 왕림하셨다. 석가가 소집된 동물들을 살펴보니 한 동물이 부족했다.

 

어찌된 영문인지를 몰라 물어보니 마침 고양이를 따라 구경온 생쥐가 쪼르르 달려나와 석가에게 말했다. 자신은 고양이 친구인데 고양이는 수문장의 일이 힘들고 번거로워서 수문장이 싫다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에 석가는 쥐에게 어쩔 수 없으니 네가 고양이 대신 수문장을 맡으라고 했다. 뒤늦게 소변을 마친 고양이가 달려왔으나 한 번 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으므로 쥐를 포함한 열두 동물이 천국의 수문장이 되었다.  

 

이 때부터 고양이는 간교한 쥐에게 원한을 품고 영원토록 쥐를 잡으러 다니며, 이때부터 고양이와 쥐는 천적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출처 : 토함산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메모 : 경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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