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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문화재답사

[스크랩] 잘못 알려진 신문왕릉과 효소왕릉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17.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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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알려진 신문왕릉과 효소왕릉

 

현 신문왕릉은 효조왕릉(효소왕릉)  

 

 

 

 

신문왕릉(효소왕릉)

 

 

사천왕사지에서 불국사쪽으로 약 300m쯤 가면 도로변 왼쪽에 큼지막한 왕릉이 1기가 있다.

신라 제 31대 임금 신문왕릉으로 사적 제18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무덤의 지름은 29.3m, 높이는 7.6m이다.

무덤의 외부모습은 둥근 봉토분으로서 밑둘레에는 벽돌모양의 잘 다듬은 돌을 사용하여 담장을 쌓아 올리듯 5단으로 쌓고 그 위에 갑석을 올려 무덤을 보호하였고 가로, 세로 90cm, 두께 50cm되는 다듬은 돌을 대각선으로 곱게 잘라내어 만든 삼각형 받침돌 44개를 호석에 등간격으로 받쳐 무덤외부를 튼튼하게 하였다.

 

 

신라 왕릉 형태의 변천

 

 

이러한 왕릉의 호석(護石)은 무열왕릉 형식에서 한단계 발전하여 무열왕릉 형식에서 성덕왕릉(聖德王陵) 형식으로 발전하여 가는 중간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정남쪽에 해당하는 삼각형 받침돌에는 “門”字가 새겨져 있어 이곳이 현실 안으로 들어가는 연도의 입구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당시에는 한 봉분 내에 추가장을 할 수 있도록 왕릉을 조영한 것 같다. 능 앞에는 장대석을 쌓아 만들어 놓은 상석이 있다.
왕릉의 호석은 일부가 땅 속에 묻혀 있었으나 1970년대에 원형을 복원하고 철책을 둘러서 보호하고 있다.

 

 

신문왕릉 남쪽 호석에 새겨져 있는 문(門)자 글씨

 

신문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정명, 또는 명지로 문무왕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자의왕후, 부인은 신목왕후이다.

681년에 왕이 되어 692년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으면서 국학을 창설, 학문을 장려하여 설총, 강수 등 대학자가 배출되었다. 또한 재위기간 동안 삼국통일 이후의 혼란스러운 국내정세를 정비하는데 주력하였으며, 685년에 9주(九州)를 완전히 정비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692년 7월에 왕이 죽자 시호(諡號)를 신문(神文)이라 하고, 낭산(狼山) 동쪽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현 왕릉의 배치

 

그런데 삼국사기에 낭산의 동쪽에 묘를 썼다고 적혀 있으나  현재 신문왕릉의 위치는 낭산의 동쪽이 아니라 남쪽이다. 그래서 지역 사학자들간에는 신문왕릉이 아니며, 오히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망덕사 동쪽에 있다고 한 효소왕릉(孝昭王陵)과 그 위치가 부합되므로 효소왕릉일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삼국사기’ 권8 효소왕  본기 11년(702)년 가을 7월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기 때문이었다.“왕이 돌아가서 시호를 효소(孝昭)라 하고 망덕사(望德寺) 동편에 장사지내었다.”

 

망덕사는 이곳에서 서쪽으로 약 8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현 효소왕릉이라고 불려지는 무덤

 

현재 효소왕릉이라고 알려진 곳은 망덕사지에서 동남쪽으로 약 5km 떨어져 있는 성덕왕릉 바로 서쪽 곁에

있으며 성덕왕릉에 비해 왕릉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초라한 무덤이다.

그래서 고 이근직교수는 이 무덤을 왕릉이 아닌 귀족의 무덤으로 단정한 바 있다

 

 <참고:(孝昭王,照를昭 라고 한 것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지으면서 오자(誤字)를 낸 것이 그대로 굳어진 것이므로 원래 시호대로 효조왕(孝照王)이라 불러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면 신문왕릉은 어디에 있을까?

 

 

황복사지 사리기 명문

 

 

1943년 낭산 동쪽의 황복사지삼층석탑(구황리삼층석탑)을 보수하기 위해 해체하였을 때 이 탑의 사리기에서 장문의 명문이 조각된 금동사리함과 함께 금제 불상 2구를 비롯하여 많은 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출토된 금동사리함의 외함 사방 표면에는 99기의 소탑이 점각(點刻)되어 있고, 뚜껑 안쪽 면에는 350여 자나 되는 장문의 명문(銘文)이 철필(鐵筆, 쇠붓)로 씌어 있었는데 이 명문에 탑의 조성내력이 적혀 있었다.

 

여기에 적힌 내용에 의하여 황복사지는 신문왕의 추복을 위해 3층석탑을 세우면서 신문왕 추복사찰이 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692년(효소왕 1)부터 706년(성덕왕 5) 사이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문왕릉을 이 황복사 바로 동쪽 곁에 썼다라고 적혀있다.

 

 

황복사지삼층석탑(구황리삼층석탑). 탑 뒤쪽에 보이는 밭이 절터이며 더 뒷쪽 논 가운데에 폐릉지가 있다

 

 

 

강우방교수는 “낭산 동쪽에 장사 지냈다”(‘삼국사기’ 권8 신문왕 12년 추 7월 조)는 기록에 따라 신문왕릉의 소재를 황복사지 3층석탑에서 불과 250m 떨어진 동쪽 지점에 있는 폐릉지가 신문왕릉이라고 단언하면서황복사지 금당의 기단석으로 사용한 12지신상 호석이 폐릉이 된 <신문왕릉>에서 옮겨 쓴 것이라는 주장한 바 있다. 

 

강우방교수의 주장을 간추려 보면 대강 다음과 같다.

 

"왕릉에 호석을 두르기 시작한 것은 효조(효소)왕릉부터인데, 효조왕릉에서는 네모난 잡석을 대강 다듬어 축대를 쌓듯 축조하고 나서 다듬은 삼각형받침돌을 일정한 간격으로 빙둘러가며 받쳐 놓아 그 붕괴를 막으려한, 서툰 기법을 보인다. 그러던 것이 그 아우 성덕왕(聖德王, 690년 경∼737년)의 왕릉에 가서는 소형 잡석 대신 일정한 크기로 다듬어 낸 판석(板石)을 둘러가며 받침기둥돌(撑柱石)을 사이사이에 박아서 짜 맞추어 나가는 방식으로 발전시키면서, 외부에서 호석(保護石)을 받치던 3각형 받침돌은 효조왕릉 형식을 그대로 계승하여 받침기둥돌을 외부에서 맞바치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 경덕왕(723년경∼765년) 13년경(754년) 성덕왕릉에 비석을 세우면서 왕릉호석의 받침기둥 사이 공간에 12지신상을 입체상으로 조각하여 장식하고 또 왕릉 둘레에 돌난간을 세워 이를 장엄하였다는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성덕왕릉의 12지신상 조각은 일정한 공간 배분을 얻지 못하고 있으며 난간과 받침돌이 서로 장애를 일으킨다.

 

 

성덕왕릉

 

경덕왕은 부왕인 성덕왕의 왕릉 장엄에서 이와 같은 시행착오를 경험하고 나서 호석이 없던 조부 신문왕의 왕릉에 본격적인 호석 추가 사업을 벌이게 되었으리라 추정하였다. 그 결과 신문왕릉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12지신상 호석양식을 최초로 갖추게 되었을 것이다.

 

외면에서 받침기둥돌을 받치던 삼각형 받침돌과 내면에서 호석의 판석을 고정하던 받침기둥돌을 하나로 합쳐 받침 기둥돌 뿌리를 삼각형으로길게 뽑아 봉토 안으로 깊이 박아 고정하면서 그 표면을 넓혀 장방형 공간을 만들고 그곳에 12지신상을 하나씩 돋을 새김해 나갔다.

 

당연히 호석 전체를 12등분하여 일정하게 공간을 배분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발굴과 실측 조사 및 복원도 작성 등으로 확인하여 논고로 세상에 발표하였으므로 황복사지 3층석탑에서 동쪽으로 250m 떨어진 지점에 신문왕릉이 존재했다는 것은 이제 기정사실이 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황복사지 동편 논바닥에 있는 폐릉지

 

그렇다면 이 신문왕릉에 신문왕과 그 왕비인 신목태후가 합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과부가 된 신목태후가 바로 부군인 신문왕을 위해서 맏아들인 효조왕과 함께 <황복사지 3층석탑>을 건립하였다고 사리함의 명문이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신목태후의 둘째 아들인 성덕왕이 등극하고 나서 왕 5년(706)에 모후인 신목태후와 형 왕인 효조왕의 추복을 함께 빌기 위해 부처님 사리 4알과 순금제 아미타불 상 1구 및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권 등을 추가 봉안하며, 사리외함을 다시 만들고 그 뚜껑 안쪽에 그런 사실을 글로 지어 새겨 놓고 있기 때문이다 

 

 

등에 왕(王)자가 적혀 있는 귀부신문왕릉의 호석으로 추정되는 12지상

(황복사지로 추정되는 밭둑에 묻혀 있다)

 

 

 

현재 국보  37호로 지정되어 있는 구황리삼층석탑(일명 황복사지삼층석탑)의 동쪽 밭둑에는 12지상이 묻혀 있으며 그 앞쪽 논바닥에는 왕릉에 사용되었던 석재들이 흩어져 있어 폐왕릉지임을 말해주고 있다.그리고 삼층석탑 남쪽에는 등에 왕(王)자가 세겨진 귀부 2기가 있어 신빙성을 더해준다.

 

따라서 현재 신문왕릉이라고 일컬어지는 릉은 효소왕릉이며, 신문왕릉은 낭산북쪽  동편 황복사지 앞 논바닥에 있는 폐왕릉지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출처 : 토함산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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