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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문화재답사

경남 사천의 다솔사를 찾아서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14. 10. 13.

경남 사천의 다솔사를 찾아서

 

다솔사는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봉명산 자락에 있는 고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인

범어사의 말사로 다솔사는 15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찰로 503년 연기조사가

개창하고 영악사라 했으나 자장이 다솔사로

의상이 다시 영봉사로 고친 것을 신라 말기에

도선이 증축하면서 다솔사라 불렀다고 하는데

고려 공민왕때 나옹이 중건하고 조선에 들어와

사세를 유지하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가

숙종 때 중건불사를 하였다고 하며 다솔사는

경남 유형문화재 제 83호로 지정된 대양루와

후불탱화 속에서 108개의 부처님 진신사리가

발견된 적멸보궁 응진전 명부전이 있으며

안심료는 만해 한용운 선생이 독립선언

서의 초안을 작성했고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이 저술된 뜻 깊은 곳이기도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다솔사를 찾아갔습니다.

 

 

봉명산 다솔사(多率寺)는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봉명산 자락에 있는

고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인 범어사의 말사입니다

 

 

다솔사는 1500여년이란 역사를 간직한 고찰로 503(신라 지증왕 4)

연기조사가 개창하면서 영악사라 했다고 합니다.

 

 

다솔사는 636(선덕여왕 5) 자장이 사우 2동을 짓고 다솔사(陀率寺),

다시 의상이 676(문무왕 16)에 영봉사로 고친 것을 신라 말기

도선이 불당 4동을 증축하면서 다솔사라 불렀다고 합니다.

 

 

다솔사는 고려 공민왕 때 나옹이 중건하고, 조선에 들어와 사세를 유지하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가 숙종 때에 큰 중건불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다솔사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된 대양루(1748)를 비롯해 적멸보궁·응진전·명부전·선실·요사채가 있습니다.

 

 

영악사 중건비문에 의하면 신라 지증왕 4(503)에 범승 연기조사가 창건해

최초의 사명을 영악사라 했고 선덕왕 5(636)에 자장율사가 중창해

사명을 다솔사라 했다는 비문이 있습니다.

 

 

다솔은 소나무가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절의 주산이 마치 대장군이

앉아 있는 것 처럼 군사를 많이 거느린다는 뜻에서 붙여졌다고 합니다

 

 

다솔사에는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조선 영조 때의 대양루를 비롯해

극락전, 응진전이 있으며 인근에는 보안암과 서봉암 등이 있습니다.

 

 

다솔사가 불자들의 순례지와 기도도량으로 신성시되는 이유는 대웅전인

적멸보궁에서 후불탱화속에서 108개의 부처님 진신사리가 발견돼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솔사 안심료는 만해 한용운 선생이 독립선언서의 초안을 작성했으며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이 저술된 뜻 깊은 곳이기도 합니다.

 

 

적멸보궁은 원래는 대웅전이었으나 1979년 삼존불상을 개금할 때 후불탱화

에서 108과의 사리가 발견되어 대웅전을 적멸보궁으로 개축하고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게 된 사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적멸보궁은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전각으로 적멸보궁에는

보통 불상들이 없는데 다솔사에는 와불이 모셔져 있습니다.

 

 

 적멸보궁은 법당 안에는 단만 있고 법당 밖 뒤편에 사리탑을 봉안하여 놓은

곳으로 뒤쪽 투명 유리를 통해 사리탑이 보이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적멸보궁(寂滅寶宮)은 사리탑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보배로운 곳

이란 뜻으로 다솔사의 중심 불전이 적멸보궁입니다

 

 

 와불 뒤로 사리를 모셔둔 사리탑을 참배를 할 때는 연화대에 손을 씻고

올라가라는 안내판이 있어서 불자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참배 방법은 연화대 차() 물에 손을 3번 담가 몸을 청정하게 한 후

탑전에 오르는데 호신불을 수지 합장하고 사리탑전에 참례한 후

사리탑을 오른쪽 시계 방향으로 3번 돌면서 소원을 기원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신라의 승려 자장이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가져온 부처님의

사리와 정골을 나누어 봉안한 5대 적멸보궁이 있습니다.

 

 

 5대 적멸보궁은 양산 통도사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태백산 정암사 사자산 법흥사의 적멸보궁입니다

 

 

 적멸보궁은 불교도들의 순례지이자 기도처로서 가장 신성한 장소로 5

멸보궁 외에도 비슬산 용연사에 있고 도솔사 적멸보궁이 있습니다

 

 

적멸보궁 사리탑 주변을 두루고 있는 수 많은 소원부(願符)에는

이곳 다솔사를 다녀간 많은 사람들의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사리탑 뒤쪽으로는 차밭이 있는데 이 차밭이 있습니다

  

 

웅진전은 경남 문화재자료 제149호이며 정면 3, 측면 2칸 크기에

맞배지붕 건물로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마감되어 있습니다.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한 원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숙종6)에 죽마 대사가 다시 중건하였으나 그 건물도 노후되어

1930년 만해 한용운 선생이 다시 중수한 것이라고 합니다

 

 

웅진은 아라한과 같은 의미의 불교 용어로 웅진전은 달리 나한전이라고도 하는데

나한 혹은 아라한은 부처님을 따르던 수행자들로 최고 경지에 이른 스승들이며,

이곳 웅진전에서는 16나한을 모시고 있습니다.

 

 

다솔사 극락전은 경남 문화재자료 제148호로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모시고 있는 전각으로 아미타불은 무량불 이라고도 합니다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처음 건립한 극락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중창과 소실을 거쳐 1910년대

중건한것이 지금에 전하고 있습니다.

 

극락전은 정면 3, 측면 2칸 크기의 익공계 맞배지붕 건물이며.

정면 좌우 측의 창호와 머름, 벽체의 설치가 특이합니다

 

 

극락전은 정토종 계통의 절에서 아미타불을 봉안해 둔 법당으로 이곳에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려는 부처인 아미타불좌상을 안치하고 있습니다.

 

양쪽에는 극락정토의 아미타불 협시부로 부처의 교화를

돕는다는 관세음보살상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다솔사는 1326(충숙왕 13) 나옹이 중수한 뒤에도 여러 차례 수리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1914년의 화재로 타버린 것을 이듬해 다시 세운 것입니다.

 

  

다솔사 대양루는 영조 24(1748)에 큰 불로 말미암아 불행히도 재앙을 겪고

영조 34(1758)에 명부전과 대양루 사왕문을 중건했지만

 

 

 

191412월에 또 한 번의 대화재로 모든 전각이 불타는 불운을 겪었으나

불행중 다행으로 대양루만은 화를 면하여 오늘에 이른다고 합니다.

 

 

   

대양루는 정면 5칸 측면 4칸에 맞배지붕의 중층 누각으로 전체 건물 길이가

13m에 이른다고 하며 대양루는 다솔사 차 전시관으로도 쓰고 있습니다.

 

 

   

 다솔사 차 전시관은 5월에 차 축제가 열리며 다솔사 차에 관련된 전시물과

관련 서적 등 차에 관련한 역사와 지식을 자세히 접할 수 있습니다.

 

 

   

대양루는 대적광전과 마주보고 있는 2층 누각으로, 신도들에게 설법을 하고

절의 행사 때 사용하는 도구나 그릇을 보관하기도 합니다.

 

 

 일반적인 절의 누각은 윗 층은 마루·아랫 층은 문으로 이용하는데,

대양루는 왼쪽으로 돌아서 들어가도록 되어있습니다

 

 

 

대양루는 앞면 5·옆면 4칸의 규모이며 사람 인()자 모양의 단순한

맞배지붕으로 방풍판을 달았으며 대적광전 쪽은 개방되어 있습니다

 

 

 

대양루는 좌우와 뒷쪽에 벽으로 막았고, 뒷쪽은 문을 달아 밖의 경치를

볼 수 있도록 하였으며 앞마당과 누각 마루는 떨어져 있으나 오른쪽

퇴칸 앞으로 돌다리를 걸쳐 출입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안심료(安心寮)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처소라는 뜻으로 1930년대에

지은 단층의 평범한 요사이지만 만해 한용운이 거처하면서

한국 불교의 법맥을 이은 유서 깊은 곳입니다.

 

 

 안심료에서 김동리(1913~1995)선생이 1960~1961년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등신불을 집필하여 발표 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다솔사 입구에는 일주문이나 천왕문은 없고 어금혈이란

글씨가 세겨진 어금형 봉표 바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 봉표는 명당터에 세도가들이 묘를 쓰는 폐단을 막고자 어명으로 세운

금표로 120년 전인 18859월인 고종재위 22년에 세워진 봉표입니다

 

 

 

이 바위에는 조선시대 고종(高宗) 22년에 쓴 비명(碑銘)이 새겨져 있는데

어금혈봉표 (御禁穴封表)라는 커다란 글씨와 광서십일년을유구월일

(光緖十一年乙酉九月日) 이라는 작은 글씨가 보입니다 

 

 

어금혈봉표란, 어명으로 다솔사 경내에 무덤을 쓰는 것을 금지한다는 의미의

표지석이고 광서십일년을유구월일(光緖十一年乙酉九月日)에서 광서란

청나라 연호로 고종 229월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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