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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문화재답사

포항의 원각조사비를 찾아서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14. 8. 15.

 

포항의 원각조사비를 찾아서

 

 

원각조사는

이름이 마흘이며

어머니가 해와 달을

가슴에 안는 꿈을 꾸고

탄생하였는데 81세 때 임진

왜란이 일어나고 명나라 군대가

들어온다는 것을 예언하여 불교계

에서는 그를 기려 원각조사라고 추모

했을 정도의 도량이 있었던 인물 이었

음에도 사당에 자신을 모시라는 유언을

남겨서 지금도 서낭당 안에 모셔져 있으

며 귀부는 얼굴과 정면 일부가 파손되어

있으나 귀부의 등에는 王 자가 새겨진

육각형의 귀갑무늬가 여러 개 있

으며 비는 조사리 마을 입구의

북편에 전각을 세워 보호

하고 있습니다.

 

 

원각조사비는 포항시 송라면 조사리 마을 입구의 북편 소나무

숲 속에 전각을 세워 비석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비신은 귀부의 중앙에 시멘트로 보강하였으며 비신에는 원각조사의

일대기가 적혀있는데 상태가 좋지는 않으나 판독이 가능합니다

 

원각조사는 이름이 마흘이며 성씨는 김해 김씨로 어머니가 해와

달을 가슴에 안는 꿈을 꾸고 난 뒤에 탄생하였다고 합니다  

 

 원각조사는 81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명나라 군대가 들어온다는 것을

예언하여 불교계에서는 그를 기려 원각조사라고 추모했다고 합니다 

 

 원각조사는 81세로 임종을 하면서도 사당에 자신을 모시라는 유언을

남겨서 지금도 서낭당 안에 모셔져 있다고 합니다  

 

 원각조사의 속성은 김씨이며 아버지는 김백광 어머니는 정덕으로

고려 우왕5년 청하현 조사리에서 태어났다고 전합니다. 

 

 원각조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여섯 살에 사서를 통달하였고

아홉 살에 시경 열 살에 서경, 열한 살에 주역을 읽어

시문은 물론 자연의 이치를 터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원각조사는 집에서 가까운 보경사와 성도암에 가서 고승과 불법을

문답하고 불경을 보고 참다운 생의 진리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원각조사는 일기와 농사일에 대한 풍흉을 계측하기도 하고 약 130년 후에

왜군이 침범한다는 일을 예언하여 이인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원각조사는 사후에 불교 의식에 의해 화장하고 사리

수십과를 거두어 상태사에 부도를 세웠다 합니다. 

 

 현재의 비는 원래 성도암에 세워져 있었던 것이지만 폐사 후

매몰 되었다가 일제 강점기에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원각조사비는 8·15해방이 되자 송라면 조사리 동민들이 원각조사가

출생한 조사리 교회가 있는 뜰 안에 옮겨 세웠으나  

 

 불교신도들이 불교의 원각조사비를 기독교의 교회 내에 세워두는 것이

옳지 않다고 다시 조사리 북쪽 신당 솔숲에 옮겨 세웠다고 합니다. 

 

 마흘이 탄생하기 전에는 오랫동안 날이 가물었는데 마흘이 탄생하던 날에

연 7일 간이나 비가 내리어 가뭄을 해갈하였다고 합니다.  

 

 원각조사는 나면서부터 기골이 청수하고 눈정기가 초롱 하였으며

울지 않아 키우는데 번거롭지 않았다고 합니다.

  

                       원각조사비의 귀부는 얼굴과 정면 일부가 파손되어 있으나 귀부의

등에는 王 자가 새겨진 육각형의 귀갑무늬가 여러 개 있습니다  

 

                  

                     원각조사가 어려서부터 워낙 총명하여 3살에 천자문을 다 외웠으며

다섯에 소학을 배웠고 6살에 맹자, 논어, 중용, 대학을 통달하였고 

 

 

9살에는 시경, 10살 때에는 서경, 11살 때에는 주역을 이렇게

해서 사서삼경을 다 통달하였다고 합니다.  

 

 

원각조사는 12살 때에 아버지가 급작스러운 열병으로 돌아가시자

아버님의 죽음을 보고 인생 무상함을 깨달아 그 이후  

 

 

마흘은 벙어리가 된 듯 다시는 입을 열지 않고 구릉솔숲에 들어가

인생이 무엇인지 명상에 잠기었다고 합니다 

 

 

원각조사는 3년 전 부친께서 세상을 하직하고 난 다음부터 벙어리가

된 듯이 말을 하지 않고 명상에 잠겨왔으나 동쪽에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순간 우주인생의 원리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원각조사는 이때부터 입을 열기 시작하여 천지만물과 나는 둘이 아니다.

저 태양의 광명이 나의 마음의 광명이다. 보고 듣고 생각하여 곧

아는 것은 참된 앎이 아니다.  

 

 

원각조사는 참된 앎이 보는 것, 듣는 것, 생각하는 것을 초월한 것이다

라고 하며 보통사람은 생각할 수 없는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원각조사는 3년후 어머님께서 돌아가시자 그때에는 큰 충격을 받지 않고

인생은 한 번 나면 죽는 것이다라면서 명복을 빌었다고 합니다.  

 

                        원각조사비는 귀부와 비신으로 되었으며 비신의 끝은 모죽임하였으며

비신의 크기는 전면폭 60㎝, 높이 150㎝, 두께 18㎝입니다.

                                          

 

원각조사 비각은 옛 지명으로 청하군 송라면 하송리 오역촌이라는 곳에서

약 5리쯤 떨어진 산기슭 성도암이라는 작은 암자에 있었다고 합니다.  

 

 

성도암은 청하 보경사와 함께 이 지역의 중요 사찰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왜군의 방화로 전소되어 폐사가 되고 후에 저수지의 축조 등으로

지금은 그 흔적이 사라진 절입니다  

 

 

왜군의 방화로 폐사가 될 당시 원각조사비도 행방불명되었다가 일제시대에

큰 홍수로 성도암지 앞 하상이 파이면서 비석 받침돌이 들어나 파보니

거북 받침돌이 있어 마을사람들은 이것이 원각조사의 비석 받침돌임을

직감하고 그 부근을 뒤져 비석을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보경사에서는 그 비를 인수하여 경내에 옮겨 세우고자 하였으나 비문 중에

왜군의 침략을 예언한 내용이 있어 화를 입을까봐 땅 속에 파묻었다 하며

비석을 보경사 대웅전 마루 밑에 숨겨두었다고도 합니다

   

 광복이 된 후에 송라면 조사리 마을 사람들이 그 비석을 파내서 원각조사

김마흘이 출생한 조사리 마을의 생가 터에 비석을 세웠다고 합니다. 

 

 

생가 터에 교회가 들어서면서 교회 뜰에 원각조사 비가 있는 모양이 되어

불교신도들이 원각조사비를 교회 내에 세워두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마을 뒷편 김마흘을 모신 서낭당 옆으로 옮겨 세웠다고 합니다.

 

포항시 송라면 조사리에 있는  원각조사비 안내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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