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팔도문화재답사

마이산 탑사를 찾아서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14. 7. 13.

 

마이산 탑사를 찾아서

 

진안 마이산은

그 모양이 말의 귀와

같다고 하여 마이산 이라고

 하는데 동봉을 숫마이봉 서봉을

암마이봉이라고 하며 동봉과 서봉은

약20m 간격을 두고 서로 떨어져 있으며

암석은 수성암으로 남쪽면과 북쪽 면에는

섬진강과 금강의 지류가 발원하는 곳으로,

탑사에는 이갑룡 처사가 돌을 포개 얹어서

80여개의 외줄돌탑을 쌓아 만든 외줄석탑

들이 폭풍우에도 무너지지 않고 백여년의

풍상을 묵묵히 지켜오고 있는 것이 불가

 사의한 일인데 겨울에 정한수를 떠놓고

  기도를 드리면 정한수 그릇에서 맑은 

   고드름이 하늘로 뻗쳐 피어오른다고  

    하는 역고드름의 신비한 현상이    

   또 하나의 불가사의 합니다    

   마이산은 여러번 가 봐도    

     보면 볼 수록 신비스럽      

      기만 한 곳입니다        

 

 

마이산은 산의 모양이 말의 귀와 같다고 하여 마이산 이라고 하는데

동봉을 숫마이봉 서봉을 암마이봉이라고 합니다

 

마이산의 동봉과 서봉은 약 20m 간격을 두고 서로 떨어져 있으며

암석은 수성암으로 곧 떨어져 내릴 것 같습니다

 

숫마이봉 중턱에 있는 화암굴 속의 약수를 마시고 산신에게 빌면 아들을

얻는다고 하나 지금은 낙석이 심하여 출입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마이산의 남쪽과 북쪽 면에는 섬진강과 금강의 지류가

발원하는 곳으로 신성시 되는 곳입니다 

 

탑사에는 이갑룡 처사가 혼자서 직접 돌을 하나하나 포개 얹어서

쌓아 만든 80 여개의 외줄 돌탑들이 불가사이 합니다

 

이갑용 옹은 이 곳에서 평생 동안 108기의 탑을 쌓았다고 하는데

현재는 80여기의 탑 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높이 15m, 둘레 20 여m의 거대한 돌탑이 폭풍우에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합니다

 

외줄석탑들은 접착제를 쓰거나 시멘트를 사용한 것도 아니며

돌에 홈을 파서 서로 끼워 맞춘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1백여 년의 풍상 속에 태풍과 회오리바람에도 끄덕 없이

견고하게 버티고 서 있는 까닭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외줄 석탑들이 무너지지 않고 백여 년의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면서도

무너지지 않고 탑사를 지켜오고 있는 것이 불가사의한데 

 

탑사에는 겨울에 정한수를 떠 놓고 기도를 드리면 그릇에서 고드름이

뻗쳐 오른다고 하는 역고드름의 신비가 또 하나의 불가사의 입니다

 

석탑은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에서 보기 드문 불가사의한 것으로

이 신비로운 이야기는 1백여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형성된 석탑들이 1백여 년의 풍상을 하나같이 지켜오고 있는 것은

정녕 부처님만이 아실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불가사의에 더하여 마이산탑사에는 또하나의 신비가 있는데

이갑룡 처사의 존영 옆에 있는 역고드름 이라고 합니다

  

이 역고드름은 겨울에 정한수를 떠놓고 기도를 드리면 그릇에서

고드름이 뻗쳐 오른다고 하는데 정성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릇 속에는 이처사가 쓴 신서가 박힌다고 합니다 

 

이 신서는 이처사가 신의 계시를 받을 때마다 그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부적과 같은 형태도 있으며 30여권의 책에 전해 내려온다고 합니다

 

이갑룡 처사의 사적비에는 언젠가 이 글을 해독하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이곳에 주석하고 있는 혜명스님은 바로 이갑룡 처사님의 3대손으로

2대손인 도생 처사님이 이곳에서 수도하였고 지금은 혜명스님과

4대손인 진성스님이 함께 마이산 탑사를 지키고 있습니다.

 

 

혜명스님은 진성스님과 함께 3억원을 투입, 미륵당 앞에 나한전을 짓고

종각, 요사채, 화장실 설치는 물론 주위 조경과 사찰

환경정화 사업을 사업을 완공 하였습니다.

 

이 탑을 쌓은 이갑룡 처사(본명 경의, 호 석정)는 1860년 3월 25일

임실군 둔남면 둔덕리에서 태어난 효령대군 16대 손입니다

 

이갑룡 처사는 수행을 위해 25세 때 마이산에 들어와 솔잎으로

생식을 하며 수도 하던 중 신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이갑룡 처사는 억조창생 구제와 만민의 죄를 속죄 하는 석탑을

쌓으라는 신의 계시였다고 합니다

 

이 처사는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전봉준이 처형되는 등 시대적으로

어두운 세속을 한탄하며 백성을 구하겠다는 구국일념으로

기도로써 밤을 보내고 낮에는 탑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이 처사는 탑을 쌓기 위해 30여년을 인근 30 리 안팎에서 돌을 날라

기단부분을 쌓았고 상단부에 쓰인 돌은 각처의 명산에서

축지법을 사용하여 날라 왔다고 전해옵니다.

 

 

이갑룡 처사는 이렇게 모아온 돌로 팔진도법과 음양 이치법에 따라

축조를 하고 상단부분은 기공법을 이용하여 쌓았다고 합니다

 

위치와 모양이 제각기 음양오행의 이치에 따라 소우주를 형성하고

우주의 순행원리를 담고 있으며  

 

외줄탑 가운데 있는 중앙탑은 바람이 심하게 불면 흔들렸다가 다시

제자리에 멎는 신비한 탑으로 돌에도 암수가 있어 암수의 조화를

이뤄 쌓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행을 뜻하는 오방탑의 호위를 받고 있는 돌탑의 우두머리 천지탑은

제일 높은 곳에 있으며 규모가 가장 큰 한 쌍의 탑입니다

 

이갑룡 처사는 자가 갑룡 이고 호는 석정이고 본명은 이경의 이고

어릴 적에 제삿날에 제삿상에 홀로 술을 올리고 절을 하면서

침묵과 함께 기도를 한참 동안 하셨다 합니다.

  

이갑룡 처사는 구한말 시기적으로 어려운 때에 지혜는 총명했지만

가난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서당에 다니지 못 하고 문틈으로

세어 나오는 글소리로 학문을 익혔다고 합니다

 

 이갑룡 처사는 16세 때 부모님을 여의시고 부모님 묘소 옆에서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시다 삶과 죽음의 허무와 무상을 탄식하시다가

19세 때 시묘살이를 마치고 속세를 떠나셨다고 합니다. 

 

疊疊山中 萬康漁萬來 라 오직 홀로의 산과의 대화요,

강을 건너도 또한 물고기와의 대화로다.

 

외로움을 달래며 이산 저산 이절 저절 다녀봐도 자리 잡지 못하시고

고향에서 농사나 지으며 인생을 살아야지 하며 전국을 누비시다가

거창에서 장수로 임실 둔덕으로 넘어갈 무렵 어느 두 봉우리가

이갑룡 처사를 부르기 시작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때가 1885년경, 나이 25세 되던 해로 그는 젊음을 이곳에 묻으리라

결심하고 유 불 선에 바탕을 두고 龍華世界의 실현이 이상적이라

믿고 구도의 행각 끝에 수도에 들어갔습니다

 

마이산에서 남자산이라는 지리산과 여자산이라는 계룡산의 중앙에 있는

마이령 봉은 남녀 두 봉우리가 역역하고 그 절묘함이 어느 곳에

비할 수 없어 그 정기로 사바세계를 개척하리라 마음먹고

중생 구제를 위해 고행을 하며 탑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세속과는 완전히 등진 채 낮에는 돌을 날랐고 밤에는 기도하다 자시에

돌탑을 하루에 한 층씩 30여 년 동안 쌓아 올렸습니다. 

 

이갑룡 처사는 인간의 괴로움을 달래기 위해 108기의 탑을 쌓으면서

108 번뇌를 해탈하고자 108개의 석탑을 구상했다고 합니다.  

 

자연석을 탑촌으로 하나둘 올려놓으면서 뭇 중생이 지은 죄를 대신해

비는 기도로 일관하였으며 나라를 잃은 아품을 하늘에 알리고 독립을

기원하면서 탑이 완성될 동안에 보통 사람이면 고독을 느껴서라도

하산의 길을 떠나 세속에 묻혔을지 모른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힘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큰 돌로 기초를 쌓고, 그 위에

돌탑을 완성했으니 이미 석정은 그때부터 령의 힘으로 그 같은 일을

했을 것이라고 탑을 보는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합니다.

 

기둥도 없이 가파른 탑신을 축지법으로 오르내리며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

돌탑들은 전국의 명산 각지를 순례할 때 산하에 기도하고 돌아올 때

한 개의 돌이라도 지고 와서 탑신에 섞어 쌓았다고 합니다

 

마이산은 2개의 암봉으로 신라시대에는 서다산, 고려시대에는 용출산이라고

했으며 조선시대부터는 산의 모양이 말의 귀와 같다고 하여 마이산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동봉을 숫마이봉(667m) 서봉을 암마이봉(673m)이라고

하며 동봉과 서봉은 약 20m 간격을 두고 있습니다  

 

 

두 산봉은 동서 방향으로 뻗어 있어 습한 북쪽 사면은 식생이 풍부하나

건조한 남쪽 사면은 식생이 빈약한 반면, 풍화작용으로 암석의 측면에

동굴 형태의 구멍이 생기는 타포니가 나타납니다. 

 

암마이봉 남쪽 기슭에 위치하는 탑사(塔舍:전라북도 기념물 제35호)는

자연석으로 쌓아올린 원추형기둥과도 같은 80여 개의 돌탑이며,

마이산 신 등을 모시는 탑이 있는 암자입니다. 

 

기반암은 수성암이며 산 전체가 거대한 암석산이나 정상에는 식물이 자라고

있으며 사방이 급경사로 이루어졌으며, 남쪽과 북쪽 사면에서는

섬진강과 금강의 지류가 각각 발원하는 곳입니다 

 

 

옛말로는 암마이산과 수마이산의 중턱에 강목천을 묻고 산을 왔다 갔다

하면서 솟금령 영신합이라 글을 쓰고 천을 타곤 했다는데 낮에는 돌을 구분

하면서 날랐고 밤 자시마다 하루에 한 층식 올렸다 합니다.

 

이 용궁은 이 갑 룡 처사가 파서 사용하기 시작했는 우물로

많은 사람들의 식수로 사용되고 있는 우물입니다

 

천지탑과 같은 타원형 탑은 둥근 원형 나선형 방향으로 쌓아 올라가다

계단식으로 조금씩 튀어 나오게 하여 원형계단을 이용해서 오르고

내려왔고 상단부위에 잔돌을 70cm 높이로 차곡차곡 올려서

그 위에 널판 돌을 올렸다고 합니다.

 

세계 조탑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자연석으로 탑을 축조하였는데 주탑인

천지탑은 원형의 기단부에서 70도로 타원형인 포물선을 그리며 상륜부에

해당하는 윗 부분은 잔석으로 괴여 힘이 눌리고 흔들릴 때 쿠션 역할을

하고 자연 판석을 그대로 올리고 높이 15m로 쌓아 올렸다고 합니다 

 

원추형으로 쌓은 두 천지탑은 알맞게 조화를 이룬 수법으로 역학적인 면보다

자연석으로 조탑을 했다는 기발하고 독창적인 착상이 신비스럽습니다

 

이 탑의 신비와 가치는 축조 기술보다 하나의 조형미와 전체적인 조화미에서

오는 감동인데 펑퍼진 기단부로부터 유연히 뻗어 오른 선의 미와 육중한

탑신의 중량감에서 탑봉의 예각이 주는 섬세하면서도

신비한 아름다움을 주는 법열이라고 합니다.

 

천지탑, 일광탑, 월광탑, 약사탑, 중앙탑, 월궁탑, 용궁탑, 신장탑, 등

배열은 팔진도법을 이용하였으며 각각 다른 탑형은 음 양의 이치를

살렸으며 높고 낮은 구조는 환생과 오행의 이치 조형미의 극치를

이루고 신비의 전경을 이루게 했다고 합니다

 

높고, 낮고, 크고, 작은 탑의 배치는 단순한 가운데 다양한 변화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모든 탑군은 저마다 입부리를 하늘을 향해

애절한 염원을 소원하는 듯 합니다.

 

우리나라는 백제 때부터 석탑이 발달하여 신라에 이르러 더욱 많이 축조되어

탑탑응행이라 하여 탑이 기러기처럼 줄서있다고까지 말했으며 고려를 거쳐

조선 초까지 1300기의 탑이 쌓여져 석탑의 나라라고 하였습니다

 

  마이산 석탑군이 축조될 때 서양에서도 철재로 파리에 에펠탑이 세워졌는데

에펠탑은 프랑스 대혁명 백년제를 기념하기 위하여 거액을 들여 완성

하였으나 마이산 석탑은 예산도 없이 만불탑을 이룩한 것입니다  

 

탑들이 위치한 곳은 암마이봉과 수마이봉 사이의 계곡인데 이곳에는

세찬바람이 사시사철 불어 오고 지형적으로 앞쪽이 넓고 뒤쪽이

좁은 계곡이어서 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쳐 오는 곳입니다.

  

특히 여름철 태풍이 불어오면 옆 언덕의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웬만한 나무는

뿌리째 뽑혀 나가만, 이곳의 돌탑들은 조금씩 흔들리기만 할뿐 쓰러지지

않는 돌탑의 축조비법과 풍상을 견뎌낸 신비는 놀랍습니다

 

탑을 쌓은 것은 2가지 방식으로 피라밋 형식과 일자형 탑인데 피라밋 형식의

탑은 팔진도법에 의해 타원형으로 돌아 올라가며 밖으로 돌을 쌓고 안으로

자갈을 채우고 가운데 비문을 넣고 올라가며 쌓은 것입니다. 

 

쌓아올린 지 100여 년이 지났으나, 강한 비바람에도 쓰러지지 않아 더욱

신비감을 주며 중생들을 구제하고 만인들의 죄를 속죄한다는

뜻으로 만불탑이라고도 합니다.

 

이갑룡 처사는 유, 불, 선 선인으로써 통합 종교로써 일관했고 삶의

생활은 유교를 바탕으로 수련은 도교를 바탕으로 기도는 불문을

바탕으로 경전에도 가까이 하셨다 합니다

 

이갑룡 처사는 40세 중반에 고금당 굴사에 갔다가 여인과 음양 합일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탑군에서 정화수를 뜨고 혼례식을 올렸습니다

  

상단 부위는 잔돌 사이에 사각모양으로 나무를 대고 그 위에서 축지법으로

몸에 기공을 넣어서 몸을 가볍게 만들고 돌을 올렸다 합니다. 

 

맨 꼭대기 부처님 머릿돌을 올리기 위하여 백일 동안 기도하고 천신에게

기공으로 매달려 마지막 돌을 올렸다고 합니다

 

천지탑은 만 3년이 걸렸다고 하는데 탑이 완성되면 내려오면서 사각 우물

정자모양의 나뭇대를 철거하고 돌망치로 툭 튀어 나온 계단형 돌을 쳐서

들어가게 하면서 내려왔다고 합니다.

 

천지탑은 음 양으로 보는 쪽에서 좌측이 음이고 우측이 양이며 돌덩이는

밑에부터 음으로 시작해서 위 칸은 양이고 음양 순으로 서로의 흡입력

때문에 비바람이 몰아쳐도 넘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천지탑 앞에 오방탑을 세우고 오행을 상징하듯 우뚝 서 있는데 천지탑을 위해

지지하는 오방탑은 천지의 지, 수, 화, 풍, 사대와 자신의 몸체를 말합니다. 

 

천지탑 주변 일렬 신장탑들은 천지탑을 보호하는 33기의 장수탑으로

천지탑을 보호하고 마귀의 칩입을 막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대웅전 아래 용궁과 중앙탑이 있는데 일자 신장으로 탑사의 정중앙에서

기준을 삼고 있어 폭풍우에도 흔들거리지만 넘어지지 않고

흔들린다고 해서 별명이 흔들탑 이라고도 합니다.

 

 

 

일렬 중앙탑에도 작은 신장탑들이 보호하고 있고 꼭 하늘을 치솟아

오를듯한 경계를 하고 있으며 우측에는 내공단 외공단이 있고

작은 용궁단이 바로 밑에서 자리하고 있습니다.  

 

갑룡 좌상 옆과 앞에 일광탑이 있고 좌상 앞은 약사탑이 있으며, 암바위

옆으로 월광탑이 있는데 일월은 이 사바세계의 세월을 나타내듯

인간의 세월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탑군은 우주의 축소판이며 인간의 삶의 현장이라 하는데 약사탑은 인간의

육체적인 병, 정서의 병 등 병고를 쾌유케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갑룡 처사는 항상 백두루마기를 걸치고 백의민족의 얼을 배움의 터전으로

삶을 살았다고 하는데 95세 때 아무 말도 없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후손들은 관을 짜고 초상을 치르는데 하루 반 만에 다시 일어나시며 죽음을

잘못 정했다고 하여 다시 살아 나셨다가 97세에 단식에 들어가 일 년 동안

용궁의 물만 마시며 몸속의 세상 사물의 이치를 씻어내었다고 합니다 

 

이갑룡 처사는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인간의 모든

때를 씻고 깨끗한 마음과 몸으로 이 세상과 하직 하고 싶고 내 몸이

정화가 되어야 수도한 내가 조상을 찾아 갈 수 있느니라’라고 하시고

용두봉 산위에 자리를 정하시고 98세로 눈을 감으셨습니다.

 

묘자리가 완전히 바위로 된 산을 어떻게 파고 묻을까 걱정하면서 후손들은

정상에 올라가서 그곳을 파보니 진찰흙이 깊이도 나왔다고 합니다. 

 

이갑룡 처사는 30여 년의 축조탑과 신서만을 남기고 1957년 1월 9일에 몸을

보내고 탑사 모든 곳에 갑룡의 혼이 숨을 쉬면서 찾아오는 이들을

격려와 축원으로 인도하면서 계시는 듯 합니다.

 

마이산 탑사 아래는 탑영제 벚꽃길인데 이곳엔 봄마다 저수지를 따라

벗꽃길이 펼쳐지는데 이태조가 백일기도를 드린 후

영험을 받았다고 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마이산의 전설

 

아득한 먼 옛날 큰 죄를 지어 하늘나라에서 쫏겨난 한 산신 부부 내외가

이 세상에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인간 세상에서 두 아이를 낳고 기르며

살면서 수 억겁 동안 속죄의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오랜 속죄의 날들을 보내고 드디어 하늘 천상계로 승천의 기회가 열렸는데

이때 남편 산신이 아내 산신에게 이제 하늘나라로 다시 올라갈 때가 되었소

그러나 우리가 승천하는 모습이 사람들 눈에 띄면 부정을 탈것이니

사람들이 깊이 잠든 한밤중을 택해 승천하는 것이 좋을 듯하오

라고 하였으나 아내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한밤중은 너무 무섭고 또 밤중에 일을 치르자면 너무 피곤하니 푹 자고나서

이른 새벽에 올라가십시다. 누가 꼭두 새벽에 잠 안자고 우리들이

승천하는 것을 훔쳐보고 있겠습니까? 

 

 

남편 산신은 일을 그르칠까 걱정되었지만 아내 산신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오랜 속죄의 날들이 무위로 돌아갈지도 몰라 불안 했지만 이튿날 새벽에

승천하기로 마음 먹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이튿날 새벽, 산신 부부는 마침내 승천을 하기 위해 하늘을 향해 산이 쑥쑥

솟아가고 있을 때 아랫마을의 어느 부지런한 아낙네가 치성을 드리기 위해

정화수를 뜨려고 우물을 찾았다가 그 현장을 목격하고 말았습니다.

 

 

  아낙네는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놀라 비명을 질렀는데 비명소리에 부정을

탄 산신부부는 결국 꿈에도 그리던 승천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져서 지금의 암수 마이봉이 되었다고 합니다.

 

 

  화가 난 남편 산신은 아내 산신을 걷어차고는 두 아이를 빼앗아 버렸는데

지금의 수마이봉은 두 아이를 거느리고 있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고

암마이봉은 수마이봉을 등지고 앉아 한없이 고개를 떨군 채

후회하는 듯한 형상을 취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런 내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종 때의 성리학자인

김종직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기이한 봉우리가 하늘 밖에서 떨어지니

쌍으로 쭈빗한 모양이 말의 귀와 같구나.

 

 

높이는 몇천길이 되는 데 연기와 안개속에 우뚝하도다.

우연히 임금의 행차하심을 입어 아름다운 이름이 만년에 전하네.

 

 

 

중원에도 또한 이름이 있으니 이름과 실제가 서로 비슷하도다.

천지 조화의 교묘함은 실로 끝이 없으니

천지가 혼돈했던 처음일을 생각하도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