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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문화재답사

[스크랩] 지리산 내원사(內院寺)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14. 6. 5.

지리산 내원사(內院寺)

 

 

 

내원사

 

대원사에서 지리산기슭을 따라 약  10km 남쪽으로 내려오면 장당골(長堂谷)과 내원골(內院谷)의 맑고 좁은 두 물줄기가 합치는 자리에 내원사가 있다. 내원사 주변은 지리산의 마지막 비경이라 소개되기도 하는 곳이기도 하다

 

일주문은 없고 반야교를 건너 사찰 옆 마당에 주차장이 있다.

 

신라시대 무염선사(無染禪師)에 의해 창건된 내원사의 옛 이름은 덕산사(德山寺)이다. 한 때 1000명이 넘는 사부대중이 머물렀고 크게 번창하였던 절이었으나 500여 년 전 화재로 소실된 뒤 방치 되다시피 한 것을 1959년 원경(圓鏡)스님이 폐사지에 사찰을 건립하고 내원사라 이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산사를 창건한 무염스님은 태종무열왕의 8대 손으로 '해동신동'으로 불리웠으며 신라 헌덕왕 때 당나라로 건너가 화엄을 배우고 돌아와 '동방대보살(東方大菩薩)'로 일컬어졌다 

또한 선종 9산문(九山門)의 하나인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조(開祖)가 되어 성주대사(聖住大師)로 추앙 받았다. 지금도 충청도 보령 성주사지에는 무염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이 남아 있으니 그것이 바로 성주사지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 제8)이다.

 

현재 덕산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과 석조여래좌상으로 덕산사의 잃어버린 역사와 함께 현재 내원사와의 관계를 설명해 주고 있는 유일한 흔적이라 할 수 있다 

 

 

대웅전

 

 

 

 

 

청 내원사의 주전각인 대웅전은 1960년대 지워졌으며 규모는 정면 3, 측면 2칸의 규모로 익공계 팔작지붕이다. 전각의 규모에 비해 유독 지붕이 커보이고 처마는 겹처마에 단청이 되어 있으며 벽에는 심우도가 그려져 있다. 창호는 빗살창으로 어칸은 3분합이며 협칸은 2분합에 좌우 측면은 1분합문을 달았다.

기단은 자연석을 쌓았고 주초석 또한 자연석으로 놓고 원주 기둥을 세웠다 

 

대웅전 안에는 가운데 불단을 조성하고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상이 협시하고 있다삼존불은 법의 주름이 두껍고 전체적으로 강한 느낌을 준다

봉안된 탱화는 법당을 중건한 시기와 같으며 삼존불 뒤로 후불탱이 그 오른쪽에 지장탱, 좌측벽면에 신장탱이 봉안되어 있다.

 

 

내원사 삼층석탑-보물 1113호

 

 

내원사 삼층석탑과 대웅전

 

 

1850년 무렵 도굴된 것을 1961년 복원하였는데 지붕돌들의 파손이 심하고 상륜부는 소실되고 없다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놓고 정상부에 상륜을 장식한 신라시대 일반형 석탑으로 높이는 4.8m이다. 탑의 위쪽 옥개석(屋蓋石)이 많이 부서지고 상륜부는 상실하였다.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서 기둥 모양을 본떠 새긴 우주가 뚜렷하게 보이지만, 불에 타서 심하게 손상된 상태이다

지대석과 하층기단 면석은 같은 돌 4매로 구성하였으며, 하층 기단 각 면에는 두 개의 우주(隅柱)와 두 개의 탱주(撑柱)가 모각되어 있다.

 

 

 

 삼층탑의 기단부

 

 

 삼층탑의 일층몸돌

 

탑의 상륜부

 

얇고 평평한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을 4단씩 두었으며, 수평을 이루던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크게 치켜 올려져 있다

 

옥개석 상면에 2단의 받침으로 그 위층의 탑신석을 받고 있는 점과 기단부의 구성, 지붕돌 및 각부의 양식 수법으로 보아 신라시대 하대의 석탑의 원형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비로전

 

 

 

 

 

 

보물로 1021호로 지정되어 있는 석조비로자나불을 봉안한 법당으로 산청 내원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전각이다 

규모는 정면 3, 측면 2칸에 이공계 맞배지붕이며, 처마는 겹처마에 단청이 되어 있다.

창호는 띠살무늬를 하고 있으며, 정면 어칸과 협칸은 3분합문에 좌우측면은 1분합문이 달렸다. 기단은 자연석 기단에, 주초석도 자연석을 놓고 원주 기둥을 세워놓았다

 

 

 

석조비로자나불-보물 제1021

 

 

 

 

비로전에는 석조비로자나불이 봉안되어 있다.

현존하는 비로자나불 중 조성 연대를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이 불상의 중대석 대좌에서 나온 납석제 사리호(영태2년명 납석제호-국보 제 233)에는 '영태(永泰) 2년'이라는 연호가 적혀 있어서 신라 혜공왕 2(AD 766)에 조성 된 것임을 확인 할 수가 있다.

사리호에는 연호 외에 136자의 이두문이 음각되어 있어 조성 배경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로 현재 부산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

 

화랑이었던 두온애랑(豆溫愛郞)이 젊은 나이에 죽자 그의 부모가 죽은 자식을 위해 법승(法勝), 법연(法緣) 두 스님으로 하여금 명복을 빌게 하며 석남사(石南寺) 관음암(觀音巖)에 조성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여기서 말하는 석남사는 지금의 내원사 위, 써레봉에서 국사봉에 이르는 내원골 상단에 있던 절이라고 하는데, 이 불상은 1945년 이 마을의 이성호 형제가 나무하러 갔다가 발견하고 지게에 지고 와 집안에 두었던 것을 1965년 이곳 내원사로 옮겨 모셨다고 한다. 이들 형제가 마을로 불상을 모셔오면서 무게를 줄이기 위하여 무릎 밑과 등 부분을 깎아내어 원형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안타까움을 간직한 불상이다.

 

또다른 이야기로는 지리산 중턱에 있던 석남암수(石南巖藪)에서 천왕봉을 바라보며 놓여있던 것을 1970년 경에 약초꾼들이 가지고 내려온 것을 내원사가 창건되면서 옮겨 봉안하였다고도 한다

 

 

 

 

 

 

얼굴부분의 파손이 심하여 정확한 표정을 알기 어렵고 복식도 알 수가 없다. 다만 수인(手印)이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어 연화장세계에 살면서 세상 골고루 밝은 빛을 나눠주는 비로자나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석조비로자나불은 내원사에 안치되기전까지 야외에 방치되어 있었던 탓에 비바람에 의한 마멸이 심하나 풍부한 입체감과 우아한 자비의 얼굴 모습을 간직한 세련된 조각 솜씨를 지니고 있다 

 

 

 

 

 두 손은 가슴에 모아 지권인(智拳印)을 결한 8세기의 비로자나불상의 예로서 이상적인 생동감과 사실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상체는 건장한 모습으로 자연스러운 가슴, 허리의 굴곡, 어깨나 팔의 부피감 등에서 사실미를 잘 표현하고 있으며 전신을 감싸고 있는 법의 주름은 촘촘하고 부드럽게 표현되어 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는 연꽃무늬와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대좌는 8각의 하대에 연꽃무늬를 새기고, 중대는 8각의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겼으며, 상대에는 2겹의 연꽃무늬를 새겼다.

 

석조비로자나불 앞에 불단이 조성되어 있다

 

 

 

비로자나불 옆에는 광배의 파편조각이 고이 모셔져 있다

 

 

불상의 중대석에서 나온 '영태2년명 납석제호'-국보 제 233

 

 

산신각

 

 

산신각, 칠성각, 천왕전

 

대웅전 오른쪽에는 산신각이 있고 앞쪽에는 근간에 조성한 삼층석탑이 있다

 

전각의 규모는 정면 3, 측면 2칸에 익공계 팔작지붕이다. 처마는 겹처마에 단청이 되어 있다.

일반 사찰의 산신각 보다 큰 이 전각은 산신각이라는 편액뿐만 아니라 칠성각, 천왕전(天王殿)이라는 편액이 함께 걸려 있다.

 

전각 안에는 정면에 독성탱과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는데, 산신탱의 호랑이는 털의 색이 희고 얼굴도 여느 호랑이와는 다른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칠성각 편액이 걸린 칸에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칠성여래를 협시하고 있는 칠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천왕전 칸에는 보살상 3구가 봉안되어 있는데, 하나는 동르오 만든 입불상이며 나머지 2구는 석불좌상이다.

 

천왕전은 옛날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왕비로 가게 된 한 여인이 지리산으로 도망을 와서 수행을 하면서 신통력을 얻게 되었는데 그 이야기에서 한 어느 노보살이 그 이야기를 듣고 천왕보살상을 만들어 자기 집에서 모시다가 내원사에 기증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보살상은 옛날 왕비들이 한 머리모양을 하고 있다고 한다.

 

산신각 앞 바위 위에는 근간에 만든 작은 3층 석탑이 세워져 있는데, 사각 기단 위 네 모서리에 기둥을 세우고 공간을 둔 채 갑석을 놓고 가구식 모양의 우주를 올려놓았으며 그 위에 다시 옥석받침이 있는 옥개석을 3층으로 올렸다.

 

 

석등의 하대석과 부러진 간주석

 

석등의 지붕돌

 

 석등의 하대석

 

삼층석탑 뒤편에는 주변애서 수습한 석부재들이 놓여있다

 

 

 

 요사체

 

 

 반야교 아래 장당골에서 내려오는 계곡

 

  명옹대(明翁臺)

 

절에서 나와 반야교 입구 아래로 내려서면 평평한 바위가 있는데 바위 중간에 명옹대(明翁臺)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산청사람인 남명 조식선생과 뜻을 같이한 학자 정홍(鄭弘)의 글씨라고 하는데 노인의 귀와 눈을 밝게 하는 곳이라는 뜻일까?

명옹대라는 글씨가 쓰인 이 바위를 장수바위라고 부르는데 설화에 의하면 내원사의 옛 이름인 덕산사의 수맥이 더 이상 흐트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 한 장수가 이 바위를 들어다 물길을 막아 놓았다고 한다.

 

 

 

 

출처 : 토함산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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