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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문화재답사

[스크랩] 고려말, 조선초의 명정승 하륜(河崙) 묘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14. 5. 9.

<!-by_daum->고려말, 조선초의 명정승 하륜(河崙)의 묘

 

 

하륜의 묘

 

 

조선 건국의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에게는 조선왕조의 밑그림을 그린 정도전(鄭道傳 1342~1398)과 왕권 강화의 디딤돌을 놓은 하륜(河崙 1347~1416)이라는 걸출한 두 신하가 있었다.

 

이 둘은 고려말 목은 이색(李穡)에게 성리학을 공부한 선후배이자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이었지만 이방원(李芳遠) 중추로 하여 서로 상반된 최후를 맞이하게된다

 

정도전(鄭道傳)은 고려 말기의 사회모순을 해결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며, 각종 제도의 개혁과 정비를 통해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져놓았으나,  왕자와 공신들이 나누어 맡고 있던 군사지휘권을 박탈하게 하고, 이방원을 전라도로 보내려고 하다가, 이방원의 기습에 의하여 살해되고 나라에 반역한 역적으로 몰리게 된다.

반면에 하륜(河崙)은 의정부를 폐지하고 육조 직계제를 신설하는 등 왕권 강화에 힘쓴 까닭에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경륜이 있는 정치가로 불리게 되었으며, 하륜의 죽음에 태종은 심히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고 3일 동안 조회(朝會)를 멈추고 고기와 생선이 든 반찬을 7일 동안 먹지 않았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오방재 앞에 서있는 이정표

 

 

 

경남 진주에서 합천으로 가는 4차선 일반국도에서 빠져나와 미천면 오방리로 가는 시골길을 가다보면 진양오방산 조선조팔각형고분군(晋陽梧坊山朝鮮朝八角形古墳群)’이라는 팻말이 길 옆에 서 있다.

팻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달리다 보면 길이 끝나는 지점 산기숡에, 웅장한 돌축대가 눈 앞을 막아서고 그 축대 위에 날렵한 솟을대문이 보인다.

 

조선왕조 건국에 혁혁한 공을 세운 하륜과 그의 아버지 하윤린, 조부 하시원을 모신 사당, 오방재이다

굳게 닫힌 오방재의 대문 에서 왼쪽 담장을 끼고 돌면서 오솔길을 약 200m 따라오르면 '오방리조선조팔각형고분군'이라는 안내판이 있고 산등성이를 따라 4기의 묘가 있는데 사각의 돌담으로 둘러싼 특이한 모습이다  

 

오방재와 조선조고분군의 위치

 

 

 

오방리조선조팔각형고분군(梧坊山朝鮮朝八角形古墳群)

  

오방리조선조팔각형고분군 안내판

 

 

 

 

하륜의 조상묘 4기와 하륜의 부부묘, 이렇게 6기를 합하여 '오방리조선조팔각형고분군'이라 부르며 진양(晋陽) 하씨(河氏)의 문중(門中) 묘이다. 
이곳은 삼대(三代)의 묘가 한 곳에 자리하고 있어 고려(高麗) 말에서 조선(朝鮮) 초기의 무덤 양식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이곳에는 맨 위쪽부터 하륜의 조부인 문정공(文貞公) 하시원(河侍源), 조모인 진양(晋陽) 정씨(鄭氏), 부친인 하윤린(河允麟), 모친인 진양강씨(晋陽姜氏)의 묘가 차례로 모셔져 있다

 

봉분은 장방형이며 주위를 둘러싼 호석은 길이가 11.4m, 너비가 8.0m, 높이가 1.2m로 판석으로 꾸며져 있다. 봉분은 길이 5.4m, 너비 3.9m, 높이 0.6m이며 둘레를 쌓은 장대석 위에 흙으로 1m 정도의 높이를 이루고 있다 직사각형의 무덤 주위에는 돌담을 쌓아두었다

 

 

조부인 문정공(文貞公) 하시원(河侍源) 묘 

 

 

조모인 진양(晋陽) 정씨(鄭氏) 묘

 

 

부친인 하윤린(河允麟) 묘

 

 

모친인 진양강씨(晋陽姜氏) 묘 

 

 

망두석(望頭石)

 

 

상석

 

 

망두석 대석

 

 

하륜 (河崙) 묘

  

 

 

 

 

 

 

 

 

 

여기에서 다시 옆으로 50m 산길을 더 가면 2기의 묘가 있는데 위의 팔각 묘는 시호가 문충(文忠)인 하륜(河崙)(1347∼1416)의 묘이며 그 아래는 하륜의 부인묘이다.(부인의 묘가 아니며 누구의 묘인지 알 수 없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하륜은 1416(태종 16) 116일 함경남도 정평에서 왕릉을 둘러보다 병으로 죽어 여기 묻혀 있다.

 

 

하륜의 묘는 특이하게 팔각이다. 면마다 한 개의 판재를 세루고 사이에 기둥돌을 세운 형태이다.

무덤 앞에는 장명등이 1개 서 있고 좌우에 문인석상 한쌍이 초라하게 서 있다. 봉분 주위는 돌로 쌓은 담이 둘러싸고 있다.

 

 

8각의 봉분

 

 

무덤 뒷쪽의 석축

 

 

묘비석과 상석

 

 

 

장명등

 

 

무덤 주변의돌담

 

 

문인석상

 

 

하륜 부인의 묘. 뒤쪽이 하륜의 묘

 

 

부인묘의 상석

 

하륜은 풍수와 주역의 대가라고 하는데 자신과 그의 조상들의 묘터를 보면 조금은 의아스럽다.

봉분을 덮은 흙은 차지지 않고 마사흙처럼 으스러져 내려 군데군데 움푹 파인 곳이 많다. 주변의 흙이 좋지않다는 뜻이며 봉분 주위를 에워싼 돌담의 돌은 주변에서 주워다 쓴 것이라면 이 산은 돌산일 것이다.

석질도 화강암이 아닌 푸석돌인데 옛부터 돌산에는 묘를 쓰지 않는다고 하는데 어떤 마음으로 여기에 자리를 잡았는지 모르겠다.

하륜은 후손이 없다는데 이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오방재(梧坊齋)

 

 

 

 

  

 

 

하륜묘로 오르다 뒤쪽에서 본 오방재

 

오방재 고분군 앞에는 오방재라는 재실이 있다. 하륜과 아버지 하윤린, 조부 하시원을 모신 곳이다. 재실 왼쪽에는 5년 전부터 하륜에 관한 전시실을 별도로 마련해 놓고 '진산부원군 하륜의 졸기'를 비롯해 하륜이 쓴 경회루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고 하나 대문이 굳게 닫혀져 있고 일반인의 접견을 허락하지 않는 곳이라 볼 수가 없었다.

 

 

 

 

오방재 경내에 있는

진양부원군 신도비각

 

 

진양부원군 신도비(문화재청 사진)

 

 

재실 내 뒷편에는 '진양부원군 신도비'가 있다. 하륜의 아버지 하윤린의 신도비다.

조선 시대 신도비 건립은 고위 관료들 사이에 유행이었다고 한다. 신도비란 죽은 사람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살았을 때의 일을 기록하여 무덤 앞이나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우는 것인데 후손들이 조상의 업적을 과장하여 세우는 등 부작용이 많았다.

이 신도비 역시 조선 건국 후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출세한 아들 하륜의 영향력으로 세워진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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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륜(河崙)은 누구인가?

 

 

하륜(河崙)은 1347년(충목왕 3)에 태어나서  1416(태종 16)년에 사망한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진주이며. 자는 대림(大臨), 호는 호정(浩亭)이다.

 

 

1360년(공민왕 9) 국자감시에 합격하고, 1365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382년(우왕 8)부터 우부대언·우대언·밀직제학 등 밀직사 소속의 관직을 역임했다.

1388년 최영(崔瑩)의 요동정벌계획을 극력 반대하다가 양주(楊州)에 유배당했으나, 그해 여름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회군으로 최영이 제거되자 관직을 회복하여  1391년에는 전라도도순찰사가 되었다. 

 

하륜은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권근(權近) 등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함으로써 초기에는 조선 왕조 건국에 반대하였으나 후에 정치적 변신을 하여 1393년(태조 2) 경기좌도도관찰출척사가 되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정도전(鄭道傳)과의 불화로 그다지 비중 있는 직책을 맡지 못했다.  

1396년 예문춘추관학사로 임명되었는데 이때 명나라와의 표전시비(表箋是非)로 정도전과 정면으로 대립했다. 이 사건의 발단은 조선에서 명에 보낸 외교문서에 명나라를 모욕하는 언사가 있다고 하여 문서 작성자인 정도전을 압송하라는 명나라측의 강경한 요구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때 그는 정도전을 보낼 것을 주장했으며  정도전이 가지 않으므로 계품사(計稟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그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왔다.

이에 정도전의 미움을 사게 되어 1397년 계림부윤으로 좌천되고 계림부윤 재직시에도 박자안(朴子安) 사건에 연루됨으로써 수원에 안치(安置)되는 등 정치적 수난을 겪었다.  

 

하륜른 당시 정도전 등에 의해 세자책봉에서 밀려나고 자신의 병력마저도 빼앗길 위기에 처한 이방원(李芳遠)과 급속히 가까워져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적극 지지했으며, 이방원의 세자책봉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하여 태종의 즉위 직전에는 정승 반열에 올라 서서히 정국을 주도해가기 시작했다.

 

그해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이어 영삼사사(領三司事)로서 관제를 개혁했으며,  저화(楮貨-종이 지폐)를 유통시키게 했다. 1402년(태종 2) 좌정승이 되었으며, 명나라에 가 조선 왕조를 승인하는 고명인장(誥命印章)을 받아왔다. 

 

이후 1405년 좌정승 세자사(世子師)가 되고, 그뒤 영의정부사·좌정승·좌의정을 등을 역임하였으며 1416년 70세로 치사(致仕)하여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치사 후 왕명으로 함길도 선왕의 능침(陵寢)을 순심(巡審)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죽었다.  

 

시문에 능하고 음양·의술·성경(星經)·지리 등에 조예가 깊었으며, 문한(文翰)을 주관하여  '동국사략'·'태조실록'의 편수에도 참여했다.

조선왕조 초기의 한양천도, 문물제도의 정비에 크게 기여했으며 외교정책에 능해 조선 초기 명나라와의 여러 문제를 해결했다.  문집으로 '호정집'이 있다.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어 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진주에는 하륜(河崙)이 아닌 하윤(河潤)이라는 분의 무덤도 있으니 착오없기 바란다

 

진주시 금곡면 검암리 115-1에 하윤(河潤)의 묘가 위치하고 있으며  묘비(墓碑)및 석인상(石人像)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27호로 지정되어 있다

 

하윤(河潤 1452~1500)은 본관이 '진양(晋陽)'이고 자는 '수부(睡夫)'이며, 호는 '운수당(雲水堂)'으로 진양하씨운수당공파의 중시조이다. 성종8(1477)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483년 식년시 병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호조좌랑, 형조좌랑을 거쳤으며 1498년 폐비윤씨의 입묘추숭(立廟追崇)이 잘못임을 주장하다가 순천군수로 좌천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의 화를 면했으나 그곳에서 별세하였고 진주 정강서원(鼎岡書院)에 제향 되어 있다.

 

묘소 아래에 있는 운수당(雲水堂)은 하윤(河潤)을 모신 재실이며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01호로 지정되어 있다

 

 

운수당 하윤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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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를 찾던 중 오마이뉴스 김종성기자가 쓴 '하륜'에 대한 좋은 글이 있어 여기에 올린다

 

<김종성의 참모열전 : 하륜 1부></김종성의>

고려충신 하륜은 왜 이방원의 참모가 되었나?

 

 

고려 공민왕 때 보수파에 맞서서 떠오른 개혁파 사대부 그룹. 이들은 신진사대부로 불린다. 이 중에서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급진파는 새 왕조 창업을 추진했고, 정몽주로 대표되는 온건파는 고려왕조의 간판을 유지하고자 했다.

양쪽의 운명은 1392년 조선 건국과 함께 갈렸다. 정확히 표현하면 '조선 건국과 함께 갈리는 것처럼 보였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건국 이후 6년간은 급진파가 권력을 잡았지만, 태조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이 정도전 정권을 무너뜨린 제1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온건파가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온건파는 동북면 무인 세력(이성계 가문의 군사적 기반) 및 고려시대 보수파와 손잡고 이방원 정권의 핵심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바로 이 온건파 신진사대부의 일원으로서 이방원의 참모가 된 인물이 하륜이다. 하륜은 정도전처럼 팔방미인 스타일 즉 르네상스형(型) 참모였다. 정통 선비들이 볼 때, 이들은 '쓸데없는 학문'까지 하는 사람들이었다. 정도전은 문학·역사·철학 외에 도시공학·군사학·법률 등에까지 관심을 기울였고, 하륜은 문·사·철 외에 관상학·풍수학 등에까지 관심을 기울였다. 좋게 말하면 박학다식하고, 나쁘게 말하면 '잡학다식'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하륜의 경우에는, 관상학과 풍수학이 그를 정치적 위기에서 구하는 은인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그의 잡학다식이 어떻게 그를 살렸는지는 이 시리즈에서 다시 설명될 것이다.

외교적 분쟁을 교묘하게 처리한 하륜

기사 관련 사진
 고려 말기 관료의 모습.
ⓒ 김종성  
하륜은 정해년인 고려 충목왕 3년 12월 22일(음력) 즉 1348년 1월 22일(양력)에 태어났다. 대부분의 백과사전에서는 하륜이 1347년에 태어났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이것은 정해년이 1347년과 1348년 양쪽에 모두 걸린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은 탓이다. 정해년은 1347년 2월 11일부터 1348년 1월 30일까지이므로, 같은 정해년에 태어난 사람일지라도 어떤 사람은 1347년 생이 되고 어떤 사람은 1348년 생이 된다. 

하륜이 태어난 1348년은 고려왕조가 무너지기 44년 전이었다. 그의 '라이벌'인 정도전은 이 해에 일곱 살이었다. 물론 정도전은 하륜을 라이벌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도전은 하륜의 주군인 이방원도 라이벌로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다. 

하륜이 태어난 곳은 지금의 경남 진주다. 정씨·강씨·소씨와 더불어 진주 토착세력을 형성한 하씨 집안은 지역에서는 기반을 잡았지만, 중앙 정계에서는 오래도록 기반을 잡지 못했다. 이 집안은 하륜 시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중앙 권세가의 반열에 올라선다.

하륜은 초년 운세가 좋은 편이었다. 열세 살 때인 1360년에는 국립대학 입학시험인 국자감시에 합격했다. 이것은 조선시대로 치면 진사 선발시험(문장력 테스트)이나 생원 선발시험(경전 이해력 테스트)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성균관에 입학한 것과 같았다. 한마디로 전도유망한 코스였다.

진주 토착세력인 가문의 지원, 어릴 때부터 잘 풀린 운세에 더해 그의 출세에 큰 영향을 준 요인이 있다. 그것은 그의 문제해결 능력이었다. 이 점은 훗날 관료가 된 이후에 그가 보여준 행적에서도 잘 드러난다. <고려사> '신우(우왕) 열전' 및 '임견미 열전'에 따르면, 하륜은 37세 때인 1384년에 외교적 분쟁을 아주 교묘한 방식으로 해결했다. </고려사>

공민왕이 반몽골(반원) 노선을 천명한 뒤에도 고려는 명나라와 북원(北元, 몽골 잔존세력)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다. 공민왕의 아들인 우왕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명나라 측은 북원 사신의 고려 왕래를 막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다. 그러자 고려 조정은 북청만호인 김득경에게 명나라 군대를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김득경의 작전이 성공하자 명나라에서는 항의를 제기했다. 그러자 고려 조정은 김득경에게 "너 혼자 알아서 한 일이라고 말하라"고 요구했다. 고려 조정과는 무관하게 단독으로 벌인 일이라고 해명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김득경이 이 요구를 거절하자 고려 조정은 난처해질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때, 하륜의 아이디어가 상황을 '깔끔'하게 종료시켰다. 고려 조정은 하륜이 낸 아이디어에 따라, 왜구를 가장한 자객을 보내서 김득경을 암살했다. 고려 조정이 김득경에게 책임을 떠넘긴 상태에서 일본 해적들이 김득경을 죽인 것처럼 사건이 처리되자, 고려와 명나라는 더 이상 얼굴 붉힐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것은 하륜이 책사 혹은 책략가의 기질을 과시한 사례였다. 

기사 관련 사진
 이방원의 무덤인 헌릉.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의 국가정보원 옆에 있다.
ⓒ 김종성  

가문과 운세와 두뇌에 더해, 하륜의 양 날개에 '윤활유'를 발라준 것이 있었다. 열여덟 살 때인 1365년에 하륜의 두 날개에 각각 윤활유가 지급된다. 이 해에 하륜은 과거시험 문과에 급제했다. 이때의 시험관이 이색과 이인복이었다는 점은 하륜에게는 일대 행운이었다.

시험관이란 존재는 오늘날의 수험생에게는 커닝이나 잡아내는 호랑이일지도 모르지만, 당시의 수험생에게는 합격 후에 평생토록 사제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어떤 시험관을 만나느냐'도 과거급제 이후의 행로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시험관인 이색은 정도전·정몽주 같은 신진사대부들의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였다. 이색과의 인연은 하륜이 개혁파의 일원으로 성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 <태종실록>에 수록된 '하륜 졸기'에 따르면, 또 다른 시험관인 이인복은 하륜에게 첫눈에 반해 동생인 이인미의 딸과 결혼시켰다. 이인복의 또 다른 동생인 이인임은 9년 뒤에 출현한 우왕 정권의 최고 실세였다. 이인복과의 인연은 하륜을 보수파 실력자 이인임의 조카사위로 만들었다. 이로써 하륜은 보수파와도 깊은 인연을 갖게 되었다. </태종실록>

이런 요인들은 하륜의 인생이 탄탄대로를 달리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그가 신진사대부 내에서 온건파가 되도록 만든 요인 중 하나였다. 그의 입장에서는 고려를 개혁하는 것은 좋지만 고려를 없애는 것은 불리했기 때문이다.

사실, 하륜은 고난을 감내하면서까지 왕조에 충성할 사람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고려에 충성을 바칠 것처럼 행동했지만 막상 조선이 세워지자 이방원을 열렬히 지지했다는 점, 이방원이 왕이 된 뒤에 부정축재로 이름을 날릴 정도로 물질에 대한 욕심이 컸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하륜은 결코 고상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래서 하륜의 충성심은 매우 유동적인 것이었다. 고려왕조 하에서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다는 점, 보수파 이인임이 인척이라는 점 등 때문에 고려에 대한 충절을 표방했던 것이다. 하륜은 고려왕조와 이인임 정권이 영원하리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하륜이 볼 때, 이인임 정권에 대항했다가 유배 및 야인 생활로 전락한 정도전의 행보는 주된 관심거리였을지도 모른다. 정도전의 능력은 이인임 정권에서도 인정하고 있었다. 어쩌면 하륜은 '왜 저만한 능력을 갖고 저렇게 살까?'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하륜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진다. 그것은 마흔한 살 때인 1388년에 최영과 이성계가 손잡고 이인임 정권을 무너뜨린 것이다. 그 이성계의 배후에는, 이미 1383년부터 이성계 캠프에 가담한 정도전이 버티고 있었다. 이런 뜻밖의 상황 전개와 함께, 하륜은 구(舊)정권 인사로 몰려 곤장을 맞고 유배를 당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같은 해에 벌어진 위화도 회군(이성계 쿠데타)은 하륜에게 극전인 반전의 기회를 줄 듯했다. 요동(만주) 정벌을 반대하는 하륜의 입장이 이성계의 쿠데타 명분과 일치했기 때문에,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이성계 공동정권이 무너지고 조민수-이성계 공동정권이 성립한 뒤에 하륜은 다시 정계로 돌아갔다.

하지만, 복귀한 뒤로도 하륜의 삶은 계속 가시밭길이었다. 인척인 이인임이 무너지는 순간부터 그는 이미 권력의 주변부로 내몰린 신세였다. 조-이 정권 하에서 정계에 복귀한 뒤에도 그는 또다시 유배를 당했다. 40줄에 들어선 하륜은 생전 처음으로 고난이란 것을 겪게 된 셈이다.

하륜의 썩은 동아줄 정몽주,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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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몽주 동상. 서울시 양화대교 북단(합정동 쪽)에 있다.
ⓒ 김종성  

마흔 살 때부터 인생이 꼬이기만 하던 하륜에게 고려 멸망 전년도인 1391년(44세)에 기적처럼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왔다. 하륜은 그것을 잡았다. 그는 그것이 튼튼하리라 믿었다. 그 동아줄은 바로 정몽주였다. 정몽주는 이성계·정도전에 맞서 신왕조 창립을 저지하고자 하륜을 자기편에 끌어들였다.

하륜의 머리 위에서 하늘이 다시 환해지는 것 같았지만, 얼마 안 있어 먹구름이 그의 머리 위를 덮었다. 고려가 망한 연도인 1392년에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당한 틈을 타서 정몽주가 정도전을 비롯한 이성계 계파를 숙청하는 듯했지만, 이방원이 선죽교에서 철퇴로 정몽주를 죽이는 바람에 하륜의 동아줄은 끊어지고 만다. 그가 잡은 줄은 썩은 동아줄이었던 셈이다.

하륜이 믿었던 정몽주가 암살을 당한 뒤에 곧바로 조선이 세워졌으니, 하륜은 조선왕조를 원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고 이방원 역시 원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하지만, 하륜에게는 빠져나갈 틈새가 있었다. 그것은 하륜의 동아줄을 끊어버린 이방원과의 인연이었다.

하륜과 이방원의 인연이 생긴 데는 하륜의 '잡학다식'이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관상 보는 기술이 이방원과의 인연을 유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2부에서 계속된다.

 

<김종성의 참모열전 : 하륜 2부></김종성의>

하륜이 주목받게 된 것은 관상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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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관상> 포스터. </관상>
ⓒ 주피터 필름  


영화 <관상>에서 주인공 내경(송강호 분)은 왕으로부터 수양대군(이정재 분) 등 신하 중에서 역모를 꾸미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라는 명을 받는다. </관상>

하지만 내경은 중대한 실수를 범했다. 수양대군의 실물을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내경은 수양대군이 보낸 가짜 수양대군의 관상을 보고 '역모를 꾸밀 재목이 못 된다'고 판단했다. 결국 내경은 이로 인해 참혹한 수난을 겪게 된다.

영화 <관상>은 허구를 소재로 한 픽션이지만, 관상과 얽힌 사건이 실제로 있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이 사건의 주인공은 바로 하륜이다. 그는 유학만을 공부하는 일반 선비들과 달리 관상학과 풍수학까지 두루 공부했다. 덕분에 그는 훗날 조선 태종이 될 이방원과 인연을 맺었고, 이것이 계기가 돼 조선 왕조에서 절정의 권력을 구가했다. </관상>

'고려가 계속될 것인가(1번) 새 왕조가 나올 것인가(2번)'의 갈림길에서 하륜은 1번에 '베팅'을 했다. 2번에 베팅한 사람들이 권력과 재산을 거머쥐게 되면서, 그는 정치무대 저편으로 밀려났다. 그랬던 그가 금방 컴백한 데는 관상학이 톡톡히 한몫을 했다.

하륜이 이방원에게 주목한 이유  

<태종실록>의 서언에 따르면, 고려 멸망 직전에 하륜은 이방원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방원의 관상이 특이하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방원이 아버지 이성계처럼 융준용안(隆準龍顔)의 형상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참고로, 준(準)이 얼굴 부위와 관련해서 사용될 때는 '절'로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융준용안은 융절용안으로도 읽을 수 있다. </태종실록>

융준용안은 중국 한나라 역사서인 <한서>의 '고조 본기'에 나온다. 여기서는 한나라 고조인 유방을 두고 "콧마루가 높고 미우(眉宇, 눈썹 부근의 이마)가 용 같으며, 수염이 아름답고 왼쪽 넓적다리에 72개의 흑점이 있었다"고 했다. '콧마루가 높고 미우가 용 같다'는 부분이 융준용안에 해당한다. 안(顔)은 흔히 얼굴을 가리키지만, 관상학에서는 이마를 가리키기도 한다. </한서>

하륜은 이방원도 융준용안의 관상을 갖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방원의 코와 이마가 정확히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관상학의 고전 중 하나인 <마의상법>을 통해 대략적이나마 유추해볼 수는 있다. </마의상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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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굴 부위를 가리키는 관상학 용어.
ⓒ 김종성  

<마의상법>에서는 "코가 높아서 우러러볼 만하면 관직 생활이 영화롭게 되고, 코 위에서 광택이 나면 집안에 부귀가 가득찰 것"이라고 했다. <마의상법>의 내용을 정리하면, 콧대가 솟은 상태에서 콧구멍이 보이지 않으며 준두(코끝)가 둥글고 홍색을 띠어야 하며, 산근(코뿌리, 양 눈 사이)이 너무 푹 패지 않으면서 이마까지 잘 이어져야 좋다고 했다. </마의상법></마의상법>

이방원의 코가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대체로 이와 유사한 느낌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또 미우가 용 같다고 한 걸 볼 때, 이방원의 이마는 적당히 넓고 뼈대가 솟은 듯한 느낌을 주면서 눈썹 바로 윗부분이 용이 꿈틀대는 듯한 느낌을 주었을 수도 있다.

만약 이방원이 보통 사람이었다면 하륜은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고려 멸망 4년 전인 1388년부터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의 아들이 그런 관상을 갖고 있다니, 하륜으로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듯하다. 이걸 명분으로 이성계 쪽과도 인연을 맺어두고 싶었는지, 하륜은 이방원의 장인인 민제에게 부탁해서 이방원과의 만남을 성사시킨다.

<태종실록>의 서언에 따르면, 하륜은 민제에게 "제가 관상을 많이 봤지만, 사위 분과 같은 관상은 못 봤거든요"라면서 "제가 꼭 한번 보고 싶어 한다고 전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하륜과 이방원의 만남이 성사됐다. </태종실록>

이때가 대체로 1390년 이전으로 추정되므로, 만남 당시의 하륜은 마흔세 살 이전, 이방원은 스물네 살 이전이었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 하륜은 당연히 이방원의 관상에 대해 이야기했을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은 부모자식 같은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긴밀한 친분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하륜은 이성계의 정치노선을 반대하면서도 관상학을 무기로 이성계의 아들과 친분을 쌓아두었다. 영화 <관상>의 내경이 이 모습을 봤다면, "저렇게 살아야 화를 면할 수 있거늘, 내 신세는 왜 이 모양인가!"라며 한탄하지 않았을까.</관상>

이방원과의 인연이 어느 정도 효력을 발휘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선이 세워지고 정치무대에서 밀려난 지 1년 만인 1393년에 하륜은 정계에 복귀한다. 이성계 진영은 새 왕조를 세우긴 했지만, 아직 안심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서 '1번'에 베팅한 사람들에게도 '배당금'을 주고 회유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하륜은 경기좌도관찰출척사라는 배당금을 받고 복귀했다. 관찰출척사는 관찰사와 같은 표현이다.

이렇게 하륜은 고위직 지방관이 되어 조선왕조에 투신했다. 그가 조선왕조에 들어간 것은 반대파를 회유하고자 하는 왕조의 전략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방원과의 개인적 인연도 적지 않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왕조의 사람이 된 하륜은 이번에는 풍수학을 통해 정치적 입지를 굳힌다. 건국 직후에 조선은 처음에는 계룡산 부근으로 도읍을 옮기기 위해 신도시 공사에 착수했다. 계룡산 부근에서 '중장비' 소리가 한창 요란스런 상황에서, 계룡산 천도의 적합성에 대해 반론을 제시한 인물이 바로 하륜이었다.

정치무대에 복귀한 해인 1393년에 하륜은 "도읍은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하거늘, 계룡산은 남쪽에 치우쳐 있고 동북면과도 막혀 있으며 풍수지리상으로도 좋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 주장이 채택되어 계룡산 천도는 무산되었다. 혹시, 이 때문에 재산증식의 기회를 놓친 계룡산 부근의 지주들은 "하륜이 무슨 염치로 조선의 도읍을 운운하는가?"라며 분개하지 않았을까.

참고로, 계룡산이 한반도의 수도로 적합한가와 관련해서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정감록>의 일부인 <삼한산림비기>에는 "계룡산 밑에 도읍을 세울 땅이 있으니, 정씨가 나라를 세울 것이다. 하지만, 그 복덕(福德)이 이씨에게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계룡산이 이씨 왕조한테는 적합하지 않다고 이 책에서는 말하고 있다. </삼한산림비기></정감록>

제1부에서 설명한 바 있듯이 고려 말에 고려·명나라·북원(북몽골)이 뒤얽힌 외교문제를 해결한 적이 있는 하륜은, 이번에는 위와 같이 풍수학을 무기로 계룡산 천도를 무산시키는 방법으로 조선왕조에서 입지를 굳혔다. 그 뒤 한강 이북이 새 도읍의 후보지로 떠오르자, 하륜은 무학대사와 같은 입장에 서서 무악산(지금의 서대문 안산) 천도를 주장했다.

결국 정도전의 주장대로 북악산(청와대 뒷산) 쪽이 도읍으로 결정되었지만, 하륜은 천도 문제에 관한 논의 과정에서 '조선 건국 반대파'의 꼬리표를 떼고 어엿한 조선 관료의 위상을 굳힐 수 있게 되었다.

정도전에게 일격을 준비한 하륜, 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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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악산 봉수대의 모습.
ⓒ 김종성  


이렇게 기반을 굳힌 하륜은 이번에는 실권자 정도전에게 정면으로 맞선다. 정도전을 경계하던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 "정도전을 우리한테 보내라"고 요구하자, 하륜은 "정도전을 명나라에 보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주상인 이성계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명나라의 요구를 일축한 상황에서 하륜은 대담하게도 명나라의 편을 들었다. 

하륜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이 사건은 그가 정도전의 정적인 이방원의 대변자임을 명확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정도전에게 미움을 산 그는 계림부윤(경주시장)으로 좌천되었다가 박자안 사건에 연루되어 귀양까지 당했다. 박자안 사건은 1397년에 지방관 박자안이 왜구를 놓친 사건이다. <태종실록>에서는 구체적 이유를 밝히지 않은 상태에서 하륜도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말했다. </태종실록>

조선 건국 뒤에 극적으로 재기에 성공한 하륜은 정도전의 권력이 절정에 다다르고 있던 1397년에 유배형을 당하고 다시 추락할 듯이 보였지만, 얼마 안 있어 사면을 받고 충청도 관찰사로 복귀했다. 박자안이 이방원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 사실을 보면, 하륜 역시 이방원의 도움으로 재기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부활한 하륜은 정도전에 대한 최후의 일격을 준비한다. 그는 이방원에게 선제공격을 건의했다. 결국 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1398년)을 벌여 정도전 정권을 붕괴시켰다. 하륜은 선제공격을 제의했을 뿐 아니라 자기 휘하의 군대까지 동원해서 쿠데타에 공훈을 세웠다. 이렇게 이방원 정권이 성립하자, 책사 하륜이 국정운영의 한 축을 이루게 된다.

이방원 정권이 성립한 뒤에 그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마지막 제3부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김종성의 참모열전 : 하륜 3부></김종성의>

 

하륜이 이방원의 신임을 얻은 두가지 비결

 

고려 말, 개혁파 선비그룹인 신진사대부의 일원으로 역사무대에 등장한 하륜. 그는 보수파 수장인 이인임의 조카사위가 되면서 개혁·보수 양대 세력과 동시에 어울리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는 고려왕조 하에서도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성계의 왕조 창업을 반대했다.

1392년에 조선이 세워지자 하륜은 정치무대의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려 멸망 직전에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과 맺어둔 인연 등이 유리하게 작용한 덕분에, 그는 조선 건국 이듬해에 정치무대에 복귀하여 이방원의 참모로 활약하게 된다.

관상학에 조예가 깊은 그는 고려 멸망 직전에 열아홉 살 연하의 이방원에게 '코와 이마에서 제왕의 기운이 흐른다'는 점을 확신시켜준 적이 있다. 이것이 이방원과의 인연을 만드는 발판이 되었다.

하륜이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

정계에 복귀한 하륜은 1398년에 이방원과 함께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이성계-정도전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한다. 그때부터 태종 이방원이 하야하기 2년 전인 1416년에 사망할 때까지 하륜이 태종 정권 하에서 부귀영화의 첨단을 걸었다는 점은 그가 영의정을 네 번이나 역임한 사실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또 하륜이 태종 시대의 거의 모든 정책을 결정했다는 점은, 그가 툭하면 '국정을 독단적으로 운영한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은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또 숱한 부정부패 스캔들에 휘말리면서도 끝끝내 신변과 명예를 지킨 사실로부터 그가 태종과 얼마나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하륜이 참모로서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 중에서 두 가지를 소개한다.

첫째, 하륜은 사전에 주군의 의중을 확인한 뒤에 그에 맞는 국가정책을 수립하는 데 주력했다. 이에 관한 증거로 들 수 있는 것은 왕권과 관련된 정책들이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건국 직후까지 도평의사사란 기구가 있었다. 신하들이 모여 국가의 최고정책을 결정하는 이 기구는 왕권을 제약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제1차 왕자의 난 직후에 이방원이 만든 정종 정권 하에서 하륜은 정부조직 개편을 지휘했다. 이때 그는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바꾸면서, 도평의사사가 갖고 있던 군사권을 의정부에 부여하지 않았다. 왕권을 견제하는 최고정책결정 기구의 힘을 약화시킨 이 같은 조치는, 곧이어 등장할 태종 정권이 신하들의 간섭을 덜 받으며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하륜은 태종 집권기인 1414년에는 의정부를 폐지하고 육조 직계제를 신설했다. 6개 행정부서의 수장인 판사들이 국정 현안을 주상에게 직접 보고하도록 한 이 제도는 왕권을 한층 더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 태종시대에 단행된 네 차례의 정부조직 개편 중에서 세 차례를 하륜이 주도한 사실에서도, 그가 태종의 왕권 강화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가 드러난다.

이렇게 하륜은 이성계의 참모인 정도전과 정반대로 왕권을 극대화하는 데에 치중했다. 정도전이 재상의 정치적 주도권을 관철시키려 한 것과 달리, 하륜은 이방원의 뜻대로 주상의 정치적 주도권을 관찰시키는 데 주력했다.

하륜이 참모로서 장수한 둘째 비결은 어찌 보면 첫째와 일맥상통한다. 그것은 그가 주군의 의중을 사전에 확인할 뿐만 아니라 주군과의 상호 교감 속에서 자신의 책략을 수정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의견이 주군의 의견과 충돌할 경우에는 주군의 생각을 바꾸기보다는 자기의 생각을 바꾸는 스타일이었다. 일반적인 최고급 참모들이 스승의 입장에서 책략을 내놓은 것과 달리, 그는 최고급 참모이면서도 보조자의 입장에서 책략을 내놓았다.  

연필로 책략을 썼던 하륜

그런 상황을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하륜은 자신의 책략이나 제안이 이방원의 비위에 맞을 때까지 계속해서 의견을 내놓았다. 정도전이 자신의 책략을 '잉크'로 썼다면, 하륜은 전영록의 노래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처럼 항상 '연필'로 책략을 썼다. 왜냐하면, 주군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깨끗이 지워야 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민무구·민무질 사건에서 잘 드러난다. </사랑은>

이방원은 왕비 민씨의 남동생들이자 세자 이제(훗날의 양녕대군)의 외삼촌들인 민무구·민무질을 경계했다. 자신이 죽은 뒤에 이들이 외척의 지위를 악용해서 차기 정권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방원은 핑계를 만들어 이들을 사형으로 몰아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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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경복궁이 이성계·정도전이 만든 궁궐이라면 창덕궁은 이방원·하륜이 만든 궁궐이다.
ⓒ 김종성  


이방원이 만든 핑계 중 하나가 태종 7년 7월 10일자(음력) 즉 1407년 8월 12일자(양력) <태종실록>에 소개되어 있다. 이미 여러 아들을 낳은 이방원이 하루는 처남 민무구에게 "임금한테는 아들이 하나만 있으면 좋을까?"라고 질문했다. </태종실록>

왕자가 많으면 왕위계승분쟁이 심할 테니 왕자가 하나뿐이면 좋겠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이에 대해 민무구는 "제가 이전에도 그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지 않습니까?"라며 동의를 표시했다. 왕자는 세자 하나로 족하다는 뜻이었다.

민무구의 발언은 그가 세자 이외의 왕자들에 대해 적대감을 품고 있다는 증거로 해석됐다. 민무구가 실제로 그런 마음을 품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그가 왕실 자손들을 해치려는 마음을 갖고 있다고 확대 해석된 것이다.

이 발언이 조정에 알려지고 정치쟁점으로 부각되자, 이방원은 최측근인 이숙번을 보내어 하륜에게 의견을 구했다. 이방원이 일부러 사람을 보내 하륜의 의견을 구한 것은, 이방원이 사적 감정이 아닌 합리적 조언에 따라 민무구·민무질을 처벌했다는 이미지를 남기기 위해서였다. 이방원은 진짜로 하륜의 의견이 궁금했던 게 아니라 하륜이 자기 마음에 드는 답변을 해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륜은 이방원이 원치 않는 답변을 해버렸다. 태종 7년 7월 12일자 <태종실록>에 따르면, 하륜은 이숙번에게 "가볍게 다루셔야죠"라고 답변했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이방원은 이숙번에게 "다시 가서 '경의 말은 안창후인 장우의 말과 같다'고 전해줘"라고 지시했다. </태종실록>

장우는 한나라 때 정승으로서, 눈치를 보느라 직언을 제대로 하지 못한 신하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방원의 말은 '당신 지금 민씨 가문의 눈치를 보느냐?'라는 뜻이었다.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경고의 메시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일급 참모가 '가볍게 처벌하시라'고 조언한 마당에 그것을 무시하고 중한 처벌을 내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방원은 민무구·민무질에게 유배형을 내렸다. 하지만 이방원이 하륜에게 "경의 말은 안창후인 장우의 말과 같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 알려졌으므로, 관료들은 유배형이 이방원의 본심이 아닐 것이라고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관료들은 이방원에게 좀더 강력한 처벌을 주문했다. 그러자 태종은 이런 분위기를 명분으로 민씨 형제들의 공신 자격을 박탈하고 관직을 빼앗는 방법으로 압박의 강도를 높여 나갔다. 그런 상황에서 하륜의 의견을 한번 더 확인했다. 이번에는 지신사(비서실장) 황희를 하륜에게 보냈다.

이번에도 하륜은 실수를 범하고 만다. 태종 7년 11월 11일자 즉 1407년 12월 10일자 <태종실록>에 따르면, 태종이 황희를 통해 의견을 묻자 하륜은 "이 무리들이 세자를 제거하려 했다면 죄가 말할 수 없이 크겠지만, 왕자들을 제거하려고 했으니 죄가 그렇게 중하지는 않습니다"라고 답변했다. 이번에도 가벼운 처벌을 제안한 것이다. </태종실록>

이 말을 전해들은 이방원은 황희에게 "다시 가서 '두 번 다시 그렇게 가볍게 말하지 말라'고 전해줘"라고 지시했다. 다시 황희의 방문을 받은 하륜은 땅에 엎드려 두 손을 모으고 "살 길을 가르쳐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하륜은 그때서야 이방원이 민씨 형제에게 유배형 이상의 처벌을 내릴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땅에 엎드려 두 손을 모은 상태에서 '주상께서 원하는 대로 하시라'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그는 자기의 제안이 주군의 의중에 맞도록 수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연필'로 책략을 써야 했던 것이다. 

나이 어린 이방원을 하늘 같이 떠받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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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군주와 신하의 모습. 경기도 남양주시의 다산 유적지(정약용 유적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하륜과 이방원의 관계는, 만약 이방원이 열아홉 살 많았다면 자연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하륜이 열아홉 살 많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하륜이 이방원을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모셨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왕이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해도 일반적으로 참모들이 왕의 스승 같은 존재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하륜의 태도는 얼른 이해하기 힘들다.

하륜이 굴신을 무릅쓰면서까지 이방원을 모신 데는 그의 참모 철학도 한몫을 했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에서 밝힌 바와 같이 '세습적인 왕들 중에는 무능한 사람들도 있으므로, 훌륭한 재상이 왕을 보좌해서 국정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을 좀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재상이 이끌어가는 대로 왕이 따라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선경국전>

서거정이 왕명으로 편찬한 문집인 <동문선>에 실린 하륜의 글에 따르면, 하륜은 군주가 위에 있고 재상이 아래에 있는 상태에서 서로가 잘 협조하는 것을 이상적인 군신관계로 인식했다. 하륜은 군신 간의 협조를 강조하면서도 군주 쪽에 방점을 찍었다. 그는 '참모는 군주의 의중을 잘 헤아리고 군주의 의지를 실천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동문선>

하륜이 나이 어린 이방원의 참모 역할을 하면서도 쩔쩔맬 수밖에 없었던 데는 이방원의 능력에 대한 고려도 작용했을 것이다. 고려 말에 문과 과거시험에 급제하고 제1차 왕자의 난이란 쿠데타도 지휘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이방원은 선비와 무장의 자질을 골고루 갖춘 인물이었다.

또 이방원은 상당히 잔혹하고 과격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정몽주를 적시에 암살하는 작전을 구사함으로써 이성계 세력을 보호하고 조선 건국을 가능케 했다. 이런 사실에서 드러나듯이 그는 기획력과 추진력도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참모가 없어도 상당히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하륜이 이방원의 눈치를 살핀 데는 그런 점에 대한 고려도 깔려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하륜은 자기보다 어리지만 자기 못지않게 유능한 주군을 모시려면 허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방원이 하륜을 끝까지 비호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이방원은 하륜이 고려를 지키려 했다가 조선으로 얼른 돌아선 의리 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또 그가 온갖 부정부패로 세상의 지탄을 받고 있다는 것도 잘 알았다. 하지만, 이방원 자신이 건재한 동안에는 하륜이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하륜을 끝까지 살려주면서 최대한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하륜은 이성계-정도전이 구축한 조선왕조의 기틀을 허물고 이방원과 함께 새롭게 기틀을 세운 인물이다. 새롭게 세운 기틀의 상당부분은 정도전의 구상을 모방한 것이지만, 하륜이 왕조의 기틀을 세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점만큼은 무시할 수 없다.

이처럼 적지 않은 역할을 했는데도 하륜이 후세의 주목을 많이 받지 못한 것은 그가 시대적인 소명을 고민하기보다는 일신의 안전을 최우선시하는 보신형(型) 참모였기 때문이다. 그의 뛰어난 능력은 그의 인생철학 때문에 상당부분 빛을 잃고 말았다.

 

 

 

 

출처 : 토함산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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