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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문화재답사

[스크랩] 부산 복천박물관을 찾아서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14.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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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복천박물관을 찾아서

 

 

 

부산 복천박물관

 

복천박물관은 사적 제 273호인 복천동고분군에서 발굴된 각종 유물들을 전시하여, 아직 미지의 왕국으로 남아 있는 가야의 신비를 풀어줄 정보뿐만 아니라, 이웃한 일본 고대문화 원류를 규명할 수 있는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으며. 관람객에게 전통문화의 우수성과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 고대 부산지역의 가야 문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1996년 10월 5일 개관하였다.

 

 

 

가야국의 위치

 

 

네모모양의 장소가 고분 유적 발굴 장소이다

복천동고분군(박물관에서 본 모습)

 

 

 

 

 

복천동고분군의 야외전시관(발굴 당시 무덤 내부과 출토유물을 재현해 놓았다)

 

 

복천동고분군은 6세기 이전 부산 유일의 지배층 무덤으로, 가야 문화의 번성과 신라로의 편입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유적이다.

 

무덤의 입지·규모·부장유물의 면에서 부산의 대표적인 고분군으로, 삼국시대인 4세기에서 5세기에 주로 만들어진 가야 지배층의 무덤이다. 지금까지 8차례의 조사를 통해 10,000여 점의 유물이 나왔는데, 경주의 고분에서 금으로 된 유물이 많이 나온데 비해 복천동 고분군에서는 철로 된 유물이 많이 나왔다. 특히 무기와 갑옷 종류가 많이 나온 유적으로 유명하다.

 

복천동고분군은 삼국시대에 우리 부산지역에서 꽃피웠던 독특한 가야문화와 당시 역동적인 정치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유적으로 평가할 수 있으며,

동래 중심지 북쪽의 마안산에서 남서로 길고 완만하게 뻗어내린 구릉에 위치한다. 현재 고분 공원으로 조성된 범위는 대략 남북 300m, 폭 100~120m 가량이지만, 원래는 현 법륜사까지 약 700m 가량 완만히 이어진 구릉이었을 것이다


그 동안 여러 차례에 걸친 발굴 조사에서 덧널무덤(목곽묘),구덩식돌덧널무덤(수혈식석곽묘), 앞트기식돌방무덤(황구식석실묘), 독널무덤(옹관묘)등 총 200여기의 무덤이 확인되고,여기서 다양한 형태의 가야토기,철제무기류,갑옷,투구,가지방울,금동관,목걸이 등 12,000여 점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복천박물관에서는 이들 유물을 정리ㆍ복원하여 두 개의 대형전시실에 진열하고, 고분군내에는 발굴 당시 무덤의 내부 모습을 보여주는 야외전시관을 마련하여 가야문화를 알기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복천동고분군의 무덤형식

 

복천동고분근에서는 지금까지 널무덤(목관묘) 12기, 덧널무덤(목곽묘) 112기, 구덩식돌덧널무덤(수혈식석곽묘) 61기, 독널무덤(옹관묘) 4기, 앞트기식돌방무덤(횡구식석실) 1기가 조사되었다.

무덤의 형태는 널무덤→덧널무덤→딸린덧널무덤→딸린돌덧널무덤→구덩식돌덧널무덤→앞트기식돌방무덤의 순으로 변화한다.

 

 

 

 

널무덤(목관묘)

 

널무덤(목관묘)

 

널무덤은 길이 4~5m, 폭 2~3m, 깊이 1m 내외의 묘광을 파고 목관을 안치한 후 주위를 충진토로 채우는 구조로 복천동에서는 고분 구릉의 남서쪽말단부에서 확인되었다.

 

 

 

 

 

덧널무덤(목곽묘)

 

 

덧널무덤(목곽묘)

주검을 담는 널을 보호하기 위한 외피시설인 덧널을 갖춘 형식이다. 2세기대목곽묘는 무덤의 형태가 방형 또는 장방형으로 깊이가 얕고, 길이방향이 등고선 방향과 나란하게 설치된다. 4세기 이후가 되면 규모가 크고 깊어지며, 많은 항아리를 발치 쪽에 부장한다. 복천동 80, 81, 84호 무덤이 대표적이며, 특히 84호 봉토에서는 불에 탄 나무판재가 출토하여 매장의례를 알 수 있다.

 

 

 

딸린덧널무덤(주부곽식목곽묘)                               딸린돌덧널무덤(주부곽식석곽묘)

 

 

딸린덧널무덤(주부곽식목곽묘)

 

매장주체부 외에 유물 부장용 공간을 따로 만들어 2개의 덧널로 구성된 형태로 목곽묘에서 한층 발달된 구조이다. 으뜸덧널(주곽)에는 주인공과 그가 착용한 장신구, 패용한 무기류 등 주로 귀중품을 매납 하였으며, 딸린 덧널(부곽)에는 다량의 토기류를 매납하였다. 주부곽식목곽묘는 대체로 고분 구릉의 능선 정선부에 등고선 방향으로 위치한다. 깊이 2m 이상의 구덩이를 파서 내부에는 두께 10cm 가량의 나무판으로 덧널(목곽)을 짜고 그 안쪽에는 기둥을 세워 목곽을 보강하였다. 바닥에는 깬돌을 깔고 화살촉, 덩이쇠 등을 깔기도 하였으며, 38호, 54호, 56호 등이 대표적이다.

 

딸린돌덧널무덤(주부곽식석곽묘)

 

5세기 전반에는 주곽의 재료가 나무에서 돌로 전환된다. 복천동고분에서는  93호분에 처음으로 적용되는데, 나무뚜껑을 사용하고, 충진 공간이 좁고, 깬돌 채움이 없는 등 기존 목곽묘의 전통과 결합하여 나타난다.
5세기 전반이 되면 나무뚜껑 대신 돌뚜껑으로 덮고, 벽체도 크기가 비교적 균등한 깬돌을 사용하는 구조로 발전한다. 대표적인 무덤으로는 복천동21-22, 8-9, 14-24, 10-11, 39, 53호 등이 있으며, 그 중 21-22호분은 복천동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단독구덩식돌덧널무덤(수혈식석곽묘)                       앞트기식돌방무덤(횡구식석실묘) 

 

 

단독구덩식돌덧널무덤(수혈식석곽묘)

 

5세기 후반이 되면 주곽과 부곽이 합쳐지면서 무덤 길이가 8m이상으로 길어진 폭이 좁은 구덩식돌덧널무덤으로 변화한다. 무덤 내부는 돌로 벽을 쌓아 주·부곽을 구분하기도 하며, 주곽 바닥에는 돌을 깔고 부곽에는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는다. 5세기 말이 되면, 석곽 내부의 격벽마저 없어지고 부곽은 완전 사라지게 된다.

 

 

앞트기식돌방무덤(횡구식석실묘)

 

6세기 후반이 되면 복천동고분군에서는 묘역이 부족하여 더 이상 무덤을 축조하지 않지만, 65호가 유일하게 앞트기식돌방무덤으로 축조된다. 출입구를 남쪽으로 내고 이를 통해 1차례 이상의 추가장을 행하였고, 내부 벽면은 회를 발라 마감하였다. 특히 머리맡에서는 중국에서 수입된 청자잔이 출토되어 당시의 활발한 국제교류 상황을 알 수 있다.

 

 

복천동고분의 순장 인물

 

 

 복천동 22호분 발굴 당시의 모습

 

복천동 21, 22호분

 

복천동 고분 구릉의 북쪽 정상부에 위치하는 21·22호분은 딸린덧널이 있는 돌덧널무덤으로, 복천동 고분군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을 뿐아니라 규모나 부장품의 양이 다른 분묘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주곽은 길이 680cm, 너비 640cm, 깊이 290cm의 네모난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475×160×160cm가량의 석곽을 쌓아 4매의 뚜껑돌로 덮고 밀폐한 구조이다. 무덤구덩이와 석곽 사이를 흙과 할석으로 채워 보강해 나가면서 네 벽을 동시에 쌓아 올렸고, 바닥에 조그마한 깬돌을 깔고 가운데 부분에 나무로 만든 덧널을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주인공이 있었던 자리에서는 20매의 대형 덩이쇠와 함께 3점의 고리자루큰칼, 목걸이, 귀걸이, 청동제 칠두령과 토기, 철모, 곡도자 등이 출토되었다.무덤의 남쪽에서는 굽다리접시, 항아리받침대, 복숭아모양 토기 등 각종 토기류, 호록금구, 철촉군, 마구류, 경갑, 전복, 명주개량조개 등이, 북쪽에서는 각종 토기류와 함께 철촉군, 도끼, 낫 보습 등의 농공구류 등이 출토되었다. 또 주인공 발치 아래에서 순장된 3명의 인골이 확인되었다. 부곽은 주곽에서 약 50cm가량 북쪽에 만들어졌으며, 길이 630㎝, 폭 420㎝, 깊이 270㎝ 가량의 큰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나무로 만든 곽을 설치한 구조이다. 북쪽에서는 대형의 발형 그릇받침과 밑이 둥근 항아리, 굽다리접시 등 토기류가 남쪽에서는 낫, 창, 손칼 등 철기류, 동쪽에서는 철제 투구와 목가리개, 허리갑옷 등이 출토되었다.

 

복천동 21·22호분은 다량으로 출토된 부장품과 그 성격으로 볼 때, 5세기 전반 무렵 동래를 중심으로 한 지역의 최고 지배자 무덤으로 추정되며 무덤의 입지·구조·부장내용 등 복천동고분군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무덤이다.

 

 

 

 

 

 

박물관 전시실 내부

 

제1전시실은 신석기시대에서 삼국시대까지 한국 무덤의 역사와 변천과정을 종합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각 시대별 무덤의 양식과 부장품이 전시되어 있다. 부산 지역 고분의 특징과 고대 가야문화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으며, 1969년 이후 8차에 걸쳐 실시된 복천동고분군 발굴의 성과와 의의를 파악할 수 있게 구성되어 있으며

제 2전시실은 복천동고분군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을 장르별로 전시하고, 또 인접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을 비교 전시하여 복천동고분군의 성격을 볼 수 있다.

 

 

금동관 (金銅冠) 부산 복천동 11호  높이 22.5cm

 

 

 

복천동 출토 금동관

 

          금귀걸이/ 부산 복천동 1호/ 길이 5.2cm                                         곡옥

 

 

 

굽은옥(곡옥 曲玉)/ 부산 복천동 54호/ 길이 5.5cm

 

 유리제품

 

 

 

 

 

 

 

구슬목걸이/ 부산 복천동 15호/ 길이 90.2cm

 

 

복천동고분군에서 가장 많이 나온 장신구는 유리옥으로 만든 목걸이다.
유리옥은 중국의 영향으로 삼한시대부터 만들어져 삼한시대인들이 장신구의 재료로 널리 이용하다가, 삼국시대에 들어와서 그 제작기법이 더욱 발달하여 다양한 모양의 구슬이 만들어졌다. 유리를 제작할 때에 철·동·납·망간 등을 적절히 배합하면 여러 가지 색깔을 낼 수 있는데, 가장 널리 사용된 색채는 청색 또는 남색이다.
그 외에 무색투명한 수정도 다면옥, 곡옥 등의 형태로 많이 출토되었다.
적갈색·황색을 띠는 호박은 주로 대롱옥의 형태로 제작되었고, 붉은색의 마노는 대롱옥이나 12각형의 형태로 가공하여 목걸이, 팔찌, 귀걸이로 이용되었다.

 

 

가야 철기

 

 

복천동 고분군은 대량의 철기유물이 발견된 유적으로 갑옷, 투구, 말갑옷, 말투구 등의 무구와 화살촉, 칼 등 무기류가 확인되었으며, 특히 영남지방에서만 확인되는 판갑옷이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또 철기의 재료가 되는 덩이쇠, 제련과 관련된 각종 단야도구 등을 부장한 것으로 보아 당시로서는 첨단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복천동 고분군은 동시대 신라에서 금제 장식품이 많이 부장되는 것과 비교되며, 출토유물의 성격으로 보아 복천동고분군을 조성한 사람들은 철 생산력을 바탕으로 한 전사집단이라고 생각된다

 

 

 

 

팔뚝가리개                                                                 철 투구

 

 철갑옷

 

 

갑옷은 가슴과 등을 보호하는 대표적인 방어용 무기로, 중대형 철판을 연결하여 만든 판갑과 소형 철판들을 이어 만든 비늘갑옷(찰갑)으로 나누어지는데, 대체로 판갑은 보병용, 찰갑은 기병용으로 추정되고 있다.

복천동 고분군에서는 대형분을 중심으로 4세기의 이른 시기부터 철제갑옷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정치지배층의 강한 군사적 성향을 반영한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4세기에서 5세기 전반에 걸쳐 출토되는 종장 판갑에는 철판을 새 모양으로 장식하거나 동물털로 어깨부위를 장식하여, 실제 착장 당시의 모습은 보다 위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마구(馬具)

 

환두대도

 

 

 

 

 

말 모양 칼 손잡이장식(馬裝飾劍把頭飾)/부산시지정문화재 제20호/傳 김해 양동/높이 4.7cm

 

 

가지방울

 

 

청동새밥솥/울산 하대 23호/높이 49cm

 

 

복천동 고분군의 대형분에서는 미늘쇠와 굽은 손칼, 가지방울, 통형동기 등 형태와 기능면에서 일반유물과는 성격이 다른 의기성유물(儀器性遺物)들이 출토되고 있다. 대체로 실용성보다는 주술적, 상징적 성격과 기능을 가짐으로써 신분을 상징하거나 매장의례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루가 달린 원형고리 바깥으로 은행알모양 방울이 7개 달린 형태의 가지방울과, 금속제 봉(棒)이나
벽옥제 관옥이 들어있는 대나무 마디 모양의 통형동기는 모두 흔들면 소리를 내었던 방울종류이다.

 

 

가야토기

 

 

복천동 고분군에서는 항아리와 그릇받침, 굽다리접시, 잔 등 많은 양의 토기가 출토되었다.
제작방법과 소성상태에 따라 크게 회백색 와질토기와 회청색 도질토기, 적갈색 연질토기의 세 가지 종류로 나누어지는데, 회청색 도질토기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복천동 고분군 남쪽 경사면에 있는 독립된 구릉 주변에서 조사된 2~3세기대 목관·목곽묘에서는 주머니항아리, 소뿔모양 손잡이 항아리, 두 귀 항아리 등의 와질토기가 출토된다. 4세기대 이후의 무덤에서는 대부분 도질토기가 출토되는데, 도질토기는 1,000℃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산소와의 접촉이 차단되는 환원염으로 구워진 것으로, 흡수성이 거의 없는 단단하고 실용적인 토기이다.

복천동 고분군 출토 토기는 외절구연굽다리접시, 화로모양그릇받침, 격자타날문항아리, 넓은 입 작은 항아리 등 5세기 전반까지 기종과 형태 면에서 김해지역과 거의 동일한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5세기 중엽 이후 신라가 점차 강성해져 영역이 확대됨에 따라 복천동고분군에서도 다리달린항아리, 상하엇갈린 투창굽다리접시 등 신라토기형식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5세기 후엽부터는 대부분 신라토기 형식으로 교체된다.

 

 

  

 

 

 

 

 

 

새, 오리모양토기

 

특이한 모양 토기는 죽은 사람을 이승에서 저승으로 보내는 장송의례나 신앙행위와 관련된 유물로, 주로 삼국시대의 신라·가야지역에서 많이 만들어진 특수한 토기이다.
사물의 형상을 표현한 상형토기와 일반용기를 변형시킨 기형용기(器型用器)의 2가지 종류로 나누어지는데, 상형토기의 경우 오리, 말, 거북 등의 동물을 본뜬 것과 수레, 집, 배, 신발등의 기물을 본뜬 것이 있다.

특히, 동물형토기는 동물 숭배신앙과 결부되어 제작되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새가 죽은 자의 영혼을 이승에서 저승으로 날라다 준다고 생각하여 오리 모양토기를 많이 만들었다.

복천동고분군에서는 신발, 신선로, 등잔, 주전자, 복숭아, 말머리등을 본떠 만든 특이한 모양 토기가 출토된다

 

가지무늬토기

 

구멍무늬항아리(孔列文壺)/ 부산 망미동 동래고읍성지/ 높이 34.7㎝

 

붉은간토기

 

붉은간토기는 아주 고운 점토를 사용하고, 표면에는 산화철의 액체를 바르고 매끄러운 도구로 문질러서 구운 토기로서,‘홍도(紅陶)’,‘단도마연토기(丹塗磨硏土器)’,‘적색마연토기(赤色磨硏土器)’라고도 부른다.

무문토기는 바닥이 편평한데 비해 적색마연토기는 둥근 것이 많고, 또 굽다리(臺脚)를 붙인 것도 있다. 이처럼 모양이 특이하면서 표면은 붉은 빛깔과 광택을 내고 있어 세심한 제작방법과 함께 특수한 용도를 생각하게 한다.
주거지에서도 출토되지만 주로 무덤의 부장품으로 출토되고 있으며, 관 밖에 따로 부장공간을 마련하여 놓거나, 피장자를 안치하고 관(棺)을 덮은 뚜껑 위에 놓기도 한다. 무덤 주위나 퇴적토 속에서 출토되는 토기편들은 장송의례에 사용한 토기를 깨뜨려서 뿌리거나 흙과 함께 묻은 것이다

 

 

 

 

 

 

 

                                                                                                     

항아리

 

항아리는 아래 위가 좁고 배가 부른 그릇을 통틀어 일컫는 명칭이다. 토기가 처음 만들어진 신석기시대 이후 지속적으로 사용되어오고 있는 가장 보편적인 그릇 종류 가운데 하나이며, 대표적인 저장용기로서 곡식과 물 등 다양한 식품을 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복천동
고분군에서는 뚜껑이 있거나 손잡이, 굽다리가 달리는 등 여러 가지 형태의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많이 출토되었는데, 그릇의 형태를 만들 때 점토 내의 공기를 빼내고 기벽을 단단하게 하기 위해 두드리는 나무판의 무늬에 따라 표면에 격자문, 평행문, 승석문 등이 생긴 것도 있다.

 

 

특이한 모양 항아리받침

 

짚신모양 토기

 

                         말머리모양 뿔잔

 

 

 

그릇받침

 

그릇받침은 바닥이 둥근 항아리를 받치기 위한 그릇의 한 종류이다.

신라·가야에서는 항아리의 바닥이 둥근 형태를 띠고 있어 굽다리를 달거나 그릇받침이 있어야만 고정되므로 그릇받침 종류가 많이 만들어졌다. 생긴 모양에 따라 화로형·원통형·발형 등으로 종류가 나누어지며, 작은 항아리를 받치기 위한 소형 그릇받침도 있다.
복천동 고분군에서도 다양한 그릇받침들이 많이 출토되었는데, 대체로 화로형 그릇받침은 4세기 전반, 원통형 그릇받침은 4세기 중엽, 발형 그릇받침은 5세기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원통형 그릇받침은 조형미가 뛰어날 뿐 아니라 수장급 묘로 추정되는 분묘에 하나씩만 부장되며, 피장자의 머리 쪽에 놓여 봉토제사에 사용되는 등 장례의례상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릇받침

 

 

사슴선각문토기(부산 동삼동패총)

 

 

사슴선각문토기는 부산박물관에서 실시한 1999년 동삼동패총 정화지역 발굴조사에서 출토되었다. 현재 아가리와 몸체 일부만 남아 있어 전체 모습은 불확실하나 잔존 형태로 보아 바닥이 둥근 발형토기로 추정된다. 잔존 크기는 길이 8.7㎝, 너비 12.9㎝이다.
사슴 그림은 뼈나 대칼 같은 날카로운 도구를 이용하여 폭 2~3㎜의 선각으로, 사슴의 형상적인 특징만을 잡아 별다른 수식없이 간략하게 묘사한 형태이다.

사슴은 아가리 바로 아래에 두 마리가 그려져 있는데, 앞의 사슴 그림은 몸체의 엉덩이 일부와 꼬리, 그리고 뒷다리 일부만 남아 있으며, 나머지 부분은 토기가 파손되어 알 수 없는 상태이다.

현재 토기 편에는 두 마리의 사슴만 보여 토기 전면에 그려져 있었는지 혹은 일부면에 한정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사슴의 배치 상태로 미루어 발형토기의 아가리 주위를 돌아가면서 선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슴선각문토기는 사슴이 갖는 각별한 의미와 함께 일상용기와 구분되는 단도마연토기에 그려져 있다는 점에서, 사슴 사냥의 기원과 이와 관련된 의례를 행할 때 사용했던 용기로 추정된다. 특히 울산 반구대 사슴그림과 양식적으로 같은 특징을 보여, 반구대 제작시기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독널

 

 

큰 독을 널로 사용한 무덤으로, 지역과 시기에 따라 매우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다.
청동기시대 독널은 바르게 세워 묻는 직립식인데 비해 초기철기시대부터 등장하는 독널은 독을 옆으로 눕혀 아가리를 맞대거나 약간 삽입시킨 전형적인 이음식과 주검을 넣는 으뜸독에 뚜껑 또는 덮개로서의 막음용토기를 결합한 뚜껑식이 많다.

그러나 하나의 토기를 옆으로 뉘어 주검을 넣고 돌로 아가리를 막은 것도 있으며, 광주 신창동이나 평남 남경 유적에서는 3개의 토기를 이어 붙인 독널이 조사되기도 하였다. 일상생활용 토기를 가져다 썼으므로 그 형태가 여러 가지이다. 특히 뚜껑식의 경우 으뜸독으로는 독이나 항아리가 쓰이고 막음용으로는 항아리, 시루, 바리,화로모양토기 등 아주 다양하다

 

 

 

 

 

 

돌칼이 새겨진 고인돌 (여수 오림동)

 

암각화

 

 

영보단비(永報檀碑)-1915년

 

영보단비(永報檀碑)는 고분군에서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1909년 일제가 호적대장을 거두어들이려하자 주민들은 조상들의 성명이 적힌 호적대장이 아무렇게나 버려질 것을 우려하여 동래지역 13개면의 호적대장을 모아 마안산 기슭에서 불태웠다

그리고 이 위에 단을 쌓고 영모단(永慕檀)이라 하였다

이후 매년 음력 4월 23일 이 단에 모여 제사를 지냈으며 1915년 일제 침탈로부터 우리의 것을 지켜내려는 의지를 다짐하며 영보단(永報檀)이라는 비석을 세웠다 

 

 

 

 

 

출처 : 토함산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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