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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문화재답사

[스크랩] 영천 거조암과 오백나한상-부처가 된 5백 도둑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14.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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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거조암과 오백나한상

부처가 된 5백여 도둑, 인간사 희로애락 대합창

 

 

 

 

 

 

거조암의 배치도

 

 

거조암은 영천시 청통면 신원리 팔공산 동쪽 기슭에 있는 사찰로 '아미타불이 항상 거한다'는 뜻으로 거조암이라 한다.

가까이에 있는 영천 은해사보다 먼저 창건되었으며 창건당시는 거조사(居祖寺)라 했으나 근래에 와서 은해사를 본사(本寺)로 하고 거조사는 그 말사(末寺)로 편입되어 거조암이라 불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창건은 신라 효성왕(孝成王) 2년(738), 또는 경덕왕(景德王·742∼764) 때 라고도 하는데 창건주는 원참조사(元祖師)다.

 

영산전의 500여 나한을 중심으로 한 나한기도 도량으로 유명한 것은 물론, 우리나라 조계종의 종조인 보조국사 지눌이 3년 동안 수도하면서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을 작성한 곳으로 유명한 절이기도 하다.

 

 

거조암 영산전에 모셔져 있는 526분의 석조나한상

소를 훔치려 했던 500여명의 도둑이 죄를 뉘우치고 성불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知訥·1158~1210)은 정혜결사를 하기 이전에 각 종파의 큰 스님들을 맞아 거조암에서 몇 해 동안 수행을 했다고 한다. 이후 1182년(명종 12) 지눌은 개성 보제사의 담선법회에 참여해 선정을 익히고 수행에 힘쓰는 동료들과 함께 맹문(盟文·정혜결사문)을 지어 후일을 기약한다. 마침내 1188년(명종 18) 봄 거조암 주지 득재(得財)가 지난 날을 기약했던 수행자를 다시 모으고, 당시 예천의 하가산 보문사에 머물러 있던 지눌을 청해 거조암에서 처음으로 정혜결사를 열었다

 

정혜결사는 정(定)과 혜(慧)를 함께 수행해야 한다는 정혜쌍수론(定慧雙修論)을 바탕으로, 세속화되고 정치와 연관되어 타락한 불교를 지양하고 선(禪) 수행에 전념하자는 운동이다.

 

이후 1298년(충렬왕 24) 정월 원함이 낙서라는 도인을 만나 아미타불 본심미묘진언(本心徵妙眞言)과 극락왕생의 참법을 전수 받아 기도도량으로 크게 이름을 알렸다.

고려 우왕 원년(1375)에는 영산전(靈山殿·국보 제14호)을 건립해 법등이 이어졌으나 1799년(정조 23)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는 이미 폐사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후의 연혁은 전해지지 않는다.

 

 

 

 

 

 

 

영산루는 2층의 구조로 되어 있으며

아래의 계단을 통해 영산전이 있는 도량으로 올라설 수 있고,

이층은 불전사물(범종.밥고.목어,운판)을 모셔놓았다

 


거조암 내 현존하는 건물로는 영산전(국보 제14호)을 비롯해 삼층석탑(경북도 문화재자료 제104호), 영산루, 산신전, 설선당, 요사채 등이 있으며, 영산전에는 석가여래삼존불과 오백나한상, 상언(尙彦)이 그린 후불탱화도 봉안돼 있다. 영산전 앞에는 고려시대의 유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경북도 문화재자료 제104호) 1기가 있다.

 

 

 

영산전-국보 제14호

 

 

 

 

영산전의 전면

 

 

 

 

 

영산전의 측면

 

 

거조암의 본존인 영산전은 국보 제1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 건물의  해체 수리시에 고려 우왕 원년(1375)에 지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더불어 국내에 6곳밖에 없는 고려시대 목조건물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잡석으로 축조된 기단 위에 가로로 길쭉하게 만들어진 영산전은 소박하고 간결한 주심포계 형식의 정면 7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에 단청 없이 나무로만 조각을 내어 ‘옛것’의 기품이 더해진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부드럽고 풍부한 빛이 넓은 영산전 내부를 고르게 채워준다. 채광에 있어 측면 외벽 위 아래로 나란한 2층구조의 창이 제몫을 단단히 해준다.

마구의 수법이 간결하고 기둥에 뚜렷한 배흘림이 있으며 건축학적으로 군더더기가 없는 간결미의 극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이 이 건물의 특색이기도 한데, 주심포 양식의 초기적 형태를 잘 나타내는 중요한 건물이다.

남아 있는 고려시대 건축물 가운데서도 규모가 가장 크다

 

 

영산전의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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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면의 환기창과 환기통                                                 하나뿐인 출입문(어간문)

 

 

거조암 영산전의 특징

 

1. 규모에 비해 출입문이 작으며 출입할 수 있는 문은 어간문 하나 밖에 없다

2. 기둥이나 외벽 등에 단층이 없고 칠을 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3. 아래 위가 좁고 중간이 볼록한 배흘림기둥을 하고 있다

4. 앞뒤의 벽면에 각각 4개씩 여덟개의 창살, 좌우 측면의 벽면에 각각 2개씩 4개의 창살, 모두 12개의

    살창이 있으며 측면 및 뒷면에는 환기구멍이 있다.

5. 수미단 위 천정에 장엄한 닫집이 없다.

6. 내부에 있는 기둥 밑 주초석이 바닥 표면 위로 드러나 있고 바닥은 황토로 마감을 했다.

7. 마구의 수법이 간결하고 큰 장식이 없이 단순하다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 예산 수덕사 대웅전    - 1308년(국보 49호)

안동 봉정사 극락전    - 1363년(국보 15호)

영천 거조암 영산전    - 1375년(국보 14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 1376년(국보 18호)

영주 부석사 조사당    - 1377년(국보 19호)

 

 

 

영산전의 나한상

 

 

 

 

거조암 영산전에는 석가여래와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가운데 모시고 주변에 526분의 아주 다양한 표정의 석조 나한상들을 모시고 있다.

나한이란 아라한의 준말이다. 경전에 보면 이들은 저잣거리의 무뢰배인데,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아라한은 ‘응공(應供)’ 또는 ‘응진(應眞)’으로 번역된다.  '진리에 계합한 이'라 하여 응진(應眞)이라고 하고, 그리하여 '공양을 받을 만한 존재'이므로 응공(應供)이라 한다

 

오백나한은 500명의 아라한과를 득한 존자, 즉 성인의 무리로서 석가모니 멸도 후 1차 결집 시에 모인 가섭존자를 비롯한 500여명의 여러 스님을 가리킨다고도 하는데 이외에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사찰에서는 부처의 10대 제자나 16나한, 18나한, 500나한 등을 모셔 신앙의 대상으로 한다.
.‘깨달으면 곧 부처’라는 선불교가 꽃을 피우면서 우리나라에서도 나한이 신앙의 대상으로 자리잡았을 것이다
영산전 내의 나한상은 극락도에 의해 卍(만)자 형태로 배치되어 읶는데 앉아있는 자세가 제각각이다.

표정도 하나 같이 천진하고 익살맞고 해학적이다. 하지만 영험이 뛰어나다는 속설 때문에 해마다 이맘때면 소원을 빌기 위한 불자들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이 곳 영산전의 나한상은 이 절의 창건주인 법화 스님이 발원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는 전설도 있다.

아미타불에 지극하게 기도를 드려 성불한 그는 그 신통력으로 앞산의 바위를 조각하여 오백나한상을 모시게 됐다고도 한다. 그 배열에 있어서도 신통력을 발휘하여 각 불상이 스스로 제자리를 잡고 앉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설화들은 연대적으로 맞지 않으며 훨씬 후대인 조선 순조 5년(1804) 영파 성규 스님이 조성한 것이라는 게 가장 믿을 만하다.

화강암을 깎아 만든 뒤 호분을 입히고 머리에 칠을 한 나한상들의 자세와 표정은 사실적이면서 해학적이고,  세속의 갖가지 표정을 망라해서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 사람도 같은 얼굴이 없다. 유머러스하면서도 희로애락의 표정이 잘 나타나 ‘인간 희로애락의 대합창’이라고  강우방 교수는 말한 바 있다

 

영산전의 공양시간이 되면 밥그릇에 쌀을 담아 나한상 한분 한분께 각각 올리는데 불자 4사람이 꼬박 1시간이 소요된다고...

30분 후, 공양시간이 끝나면 올렸던 쌀은 다시 쌀독에 부어 본사인 은해사로 보내 신도들의 점심공양에 쓰도록 한다고 한다

 

 

영산탱

  

 

 

 

 

 

 

영산전에는 상인화상이 그렸다고 하는 영산회상도가 있으며그 색조나 화풍이 특이하다.

청, 학, 적, 백, 흑의 다섯 가지 원색을 주조로 그려진 조선시대 불화들과 달리 붉은 바탕에 호문으로 선묘만 하였을 뿐 청록색, 흑백색 등은 극히 적은 부분에만 사용하였다. 바탕색의 변화로 모든 색을 대신함으로써 붉은색이 자극적이지도 들뜨지도 튀지도 않는 이 후불탱화를 미술사학자인 고유섭은 “명랑하고 침착하고 품위 있는 색조”라고 표현하였다.

이 후불탱화는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네 명의 보살과 네 명의 불제자 그리고 두 명의 사천왕만으로 영산회상의 여덟 장면을 간략하게 압축해 구성한 것이다

 

 

 

은해사 거조암 삼층석탑

 

 

 

 

경북 문화재자료 제 104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탑은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앞에 있으며, 높이 3.15미터로 고려시대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탑의 몸돌과 지붕돌 모두 별석으로 되어 있고, 기단부의 면석 일부와 지대석은 후대에 보수된 것이다.

 

 

기단부

 

 

텁신부

 

 

상륜부

 

 

우리나라 보편적인 탑 구조와 마찬가지로 상층기단 면석과 각층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이 새겨져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이 남아 있으며, 기단에 안기둥 1개를 새긴 점, 덮개돌 상면이 경사진 점, 노반 낙수면이 짧은 점, 추녀가 두껍게 되어 있는 점 등에서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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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전에 얽힌 전설

 

 

 

 

 

지금부터 1천 수백 년 전 이야기다.
영산전에 도인 스님이 살고 있었다. 이 스님이 하루는 산을 내려가다가 동네가 내려다보이는 산비탈의 조밭 가에 앉아 잠시 쉬는 참이었다. 가을 기운이 삽상한 가운데 하늘이 맑아 누렇게 변해가는 들과 산색이 고왔다. 흥얼흥얼 염불이 절로 나왔다. 탐스럽게 익어 고개를 숙인 조를 만지면서 스님은 풍성한 계절감을 만끽했다.
그런데 아뿔싸, 큰일이 벌어졌다. 아마도 흥에 겨워서 그랬는지 조 이삭 세 개를 부러뜨린 것이다. 일어서서 갈 길을 가려다 스님은 그걸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아이고, 이를 어쩌나? 농부가 애써 가꾼 농사를 망가뜨리다니, 큰 죄를 지었구나. 이를 어쩌나?”
스님은 망연자실하여 그 자리에 못이 박힌 채 “이를 어쩌나?”를 반복해서 말하기만 했다.

그까짓 조 이삭 세 개를 부러뜨린 게 무슨 큰일이냐고 하겠지만, 스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자신의 하는 일이 지극한 도의 길을 가는 일이니,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마음에 걸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때로 무심코 한 일이 큰 죄의 빌미가 되는 것임을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알아야 하는 게 수행자의 마음이다. 평생 수행을 성실하게 해온 그에게 남이 한 해 동안 고스란히 땀 흘려 가꾸어온 조 이삭 세 개를 부러뜨린 건 큰 실수라고 여겨진 것이다.
“도의 길이 원만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런 작은 실수라도 빠뜨림 없이 참회해야 한다. 그 실수의 마음을 털끝만큼이라도 남아 있지 않게 참회로 지워야 비로소 완전한 도인의 길을 열 수 있을 게 아니겠는가.”

 

스님은 한참을 안절부절못하다가 갑자기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산 아래 동네로 발길을 돌렸다. 조밭 주인은 동네에서 성실하게 농사일을 해온 사람임을 알아냈다. 집도 찾아냈다. 저만치 농부의 집이 보이는 마을 어귀에서 스님은 문득 황소로 자신을 변모시켰다. 누런 황소가 “움머” 하고 소리를 쳤다.
“마음을 잘못 다잡아 남의 조 이삭 3개를 부러뜨렸으니, 3년 동안 조밭 주인댁에서 일을 해주어서 죄를 갚으리라”고 황소로 변한 스님은 다짐했다.
황소가 집 마당으로 쑥 들어오자 놀란 건 농부였다. 쫓아내도 도무지 나가려 하지 않았다. 농부는 외양간에 소를 넣어두고는 마을을 돌며 소 주인을 찾아보았으나 아무도 소를 잃지 않았다고 했다. 인근 마을에도 알아보았으나 소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 참, 이상한 일이네. 나중에라도 소 주인이 나타나겠지.”
농부는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소를 집에서 돌보기로 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소는 주인을 지극히 따랐다. 언제나 먼저 주인을 앞서서 밭일이나 논일을 했다. 사람보다 낫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고삐도 매지 않고, 일을 시키지도 않았지만, 알아서 집안일을 챙겼다.
“그 참 신통하네.”
동네 사람들도 한결같이 소를 칭찬하며, 농부에게 큰 복을 만났다고 격려해 주곤 했다. 이 소문은 멀리 퍼졌다.

문득 누가 찾아왔다. 인상이 고약했다.
“이 소는 내 소니 몰고 가겠소”라고 그는 말했다.
“그렇습니까? 소를 잃어버려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습니까? 당연히 데리고 가셔야지요.”

농부는 반색하며 소를 내놓았다. 그러나 소는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 완강하게 버티면서 그를 들이받을 듯이 위협했다. 그는 결국 머쓱해서 돌아가 버렸다. 계속해서 사람들이 찾아왔으나 소는 한결같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찾아온 이가 500명이나 됐으나 다 허탕을 쳤다. 그러는 가운데 3년이 훌쩍 흘러갔다.

다시 들판이 가을빛으로 물들었다. 농부는 수확한 벼와 콩을 거두느라 열심히 일했다. 아침에 들에 나가려던 그는 소가 전과 달리 의젓한 모습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게 신기해서 가까이 다가가 목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소가 말을 하는 것이었다.
“주인님, 이제 때가 됐습니다.”
농부는 깜짝 놀라 사방을 돌아보았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상해서 소를 바라보자 소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제 저는 가야 합니다.”
“아이고, 이를 어쩌나?”
농부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너무 놀라운 사태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이고, 저를 용서하십시오. 제가 이렇게 신령스러운 이를 몰라보고 마구 부렸으니 죄가 너무 큽니다.”
겁이 난 농부는 무조건 소에게 잘못했다고 빌었다. 그러나 소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문지르며 낮은 소리고 말했다.
“아닙니다. 주인님은 큰 복을 받은 겁니다. 그동안 일을 했으니 품삯을 주는 셈 치고 내일 잔치나 한 번 거나하게 베풀어주십시오. 인근 동네까지 소문을 내어 많은 사람이 오게 하십시오.”
잔치가 벌어졌다. 소 덕분에 부자가 된 농부는 인근 사람을 다 불러서 큰 잔치판을 마련했다. 소를 데리고 와서 춤을 추기도 했다. 사람들이 한참 흥이 높아졌을 때였다. 소가 짙은 안개를 내뿜었다. 그러고는 안개 속에서 어느 틈에 스님으로 변신해 합장을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놀라 스님에게 합장했다. 스님은 말했다.
“내가 소로 있을 때 자기 소라며 찾으러 온 이들은 썩 나오거라.”
추상같은 소리에 500명이 앞으로 나왔다. 인근의 산적들이었다.
“나는 3년 전에 실수로 조 이삭 3개를 꺾고 그 죗값으로 소가 되어 이 집에서 3년을 일해 주었다. 그런데 너희들은 남의 소를 갈취하려는 도적의 마음을 먹었으니 무엇으로 죗값을 치르겠느냐? 소가 되어 치르겠느냐? 참회하여 성불을 하겠느냐?”
모두 무릎을 꿇고는 스님을 따르겠다고 했다. 스님은 그들을 거조암으로 데리고 갔다. 그들은 열심히 도를 닦아 성불하여 나한이 됐다. 지금 거조암에 안치된 500나한은 그렇게 자리하게 된 것이다

 

이 설화는 비록 세속에서 살더라도 불도를 닦아 도를 깨치면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는 교훈이 담긴 이야기이다.

 

 

옛 거조암

 

 

 

영산전의 측면

 

영산전의 정면

 

 

 

 

 

출처 : 토함산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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