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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문화재답사

밀양무봉사를 찾아서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13. 12. 19.

 

밀양무봉사를 찾아서

 

 

밀양 무봉사는

시인묵객들의 발걸음이

그치지않았으며 봉황이 춤추는

형국이라하여 무봉사라 하였으며

신라 혜공왕때 법조가 영남사의 부속

암자로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무봉사의

대웅전에 모셔진 석조여래좌상은 통일신라

시대에 화강암으로 조성한 걸작품으로 보물

제493호로 지정된 귀중한 문화유산이며 원래

무봉사의 모찰인 영남사에 있었던 것이나 조

선시대 초기에 영남사가 폐사되면서 영남사

의 암자인 무봉사로 옮겨와 봉안했던 것으

로 추정하고 있으며 무봉사는 밀양 영남루

입구에는 한국가요계의 거장 박시춘씨의

생가가 있으며 아랑각, 천진궁, 석화,

등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아리랑

길을 걷노라면 밀양의 전설이

귓가에 맴도는 듯합니다.

 

 

 

무봉사는 예부터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발걸음이 그치지 않았으며

봉황이 춤추는 형국이라 하여 무봉사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무봉사는 신라 혜공왕 때 법조가 영남사의 부속암자로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무봉사의 대웅전에 모셔진 석조여래좌상은 통일신라시대에

화강암으로 조성한 걸작품이라고 합니다

 

 

무봉사 대웅전의 석조여래좌상은 보물 제493호로 지정된 귀중한

문화유산이며 원래 무봉사의 모찰인 영남사에 있었던 것이나  

 

 

조선시대 초기에 영남사가 폐사되면서 영남사의 암자인 무봉사로

옮겨와 봉안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영남루 후문에서 50m 남짓한 곳에 무봉사의 불이문격인 일주문과

금강역사가 있는 금강문이 무봉사를 지키고 서 있습니다.

 

 

무봉사는 밀양 영남루입구에는 한국가요계의 거장 박시춘씨의 생가가

있으며 아랑각, 천진궁, 석화, 등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아리랑

길을 걷노라면 밀양의 전설이 귓가에 맴도는 듯합니다.

 

 

 

이 금강문을 지나면 세속을 벗어나 부처님 도량인 피안의 세계로

접어들게 되면서 무봉사 경내에 들어서게 됩니다

  

  

무봉사 일주문은 민흘림 기둥 네 개가 나란히 서 있는 정통 건축양식으로

각 기둥에 7언절구의 주련 네 개가 걸려 있고 다포계 공포가 있습니다.   

 

 

 

  

어간 상부에는 無鳳寺 라고 적힌 편액이 있으며 좌측 입구에

무봉사 일주문 준공비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대웅전은 정면 7칸 측면 2칸의 익공계 팔작지붕으로 무봉사의 주전각이며

굽이치는 밀양강을 좌향하여 우뚝 서 있습니다.

 

 

무봉사 경내지가 길고 협소한 탓에 정면은 7칸이나 되는 대규모 전각이나

측면은 2칸으로 大雄殿, 說法殿의 두 가지 편액을 걸고 있으며

전면 기둥에는 주련만 15개가 걸려 있습니다.

 

 

법당 내부에는 보물 493호인 무봉사 석조여래좌상을 주존 불로 양옆에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좌우에 협시하고 있고 각 불사의 뒤쪽으로

후불탱, 관음탱, 지장탱이 걸려 있습니다.

 

 

이 중 후불탱은 1927년 조성되었다고 하며 지장단 왼쪽으로 신중탱과

영단이 있는데 영단의 시왕탱은 2001년 조성되었다고 합니다

 

 

관음단 오른쪽으로는 칠성탱과 석고로 된 7원성군좌상, 독성탱과 독성상,

산신탱, 석가모니불 소불입상이 있는데 이처럼 한 전각 안에 많은

존상과 불화가 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경내지가 협소한 탓에 스님들이 기거할 승방이 없어 원래 삼성각으로 있던

전각을 승방으로 사용하고 삼성각 내부에 봉안되었던 성보들을

모두 대웅전으로 옮겨 놓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대웅전에 모셔진 높이 0.97m의 무봉사석조여래좌상은 보물 제493호로

지정된 귀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원래 무봉사의 모찰인 영남사에 있었던 것이나 조선시대 초기에 영남사가

폐사되면서 무봉사로 옮겨와 봉안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신라 혜공왕 9년(733)에 법조가 영남사의 부속암자로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무봉사의 대웅전에 모셔진 높이 0.97m의 불상입니다.

 

 

네모진 얼굴에 가는 눈과 입, 넓적한 코, 짧은 목 등이 다소 평판적으로

표현되기는 했으나 단정한 인상을 풍기고 있습니다.

 

 

어깨는 넓고 둥근 편으로 가슴이 다소 움츠러들어 보이며.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두꺼워서 옷 주름과 신체의 굴곡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2줄의 볼록한 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구분하고 그 안에 덩쿨무늬와 연꽃무늬를 새겨 넣었습니다.

   

 

광배의 바깥부분에는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광배의 앞면에 5구의 작은 부처를 새겼으며 뒷면에는 연꽃무늬 대좌

위에 앉아 있는 약사여래를 조각하였습니다.

 

 

광배 뒷면에 불상이 새겨진 표현은 경주 남산 미륵곡 석불좌상과

같은 것으로 드문 예라고 합니다.

 

 

단정하고 양감 있는 신체표현, 간략해진 옷주름, 화려하고 복잡해진 광배의

표현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기에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화강석으로 된 이 석조여래좌상은 보존상태가 원만한 석가여래좌상으로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으며 몸 전체가 육중하며 위풍당당하게 보이지만

각 부분의 입체감이 부족하고, 형식적인 표현들이 보입니다. 

 

 

이 석조여래좌상은 원래 영남사지에 있었던 것으로 광배와 대좌를

잃었으나, 근처에서 발굴된 광배를 붙여 놓았다고 합니다

 

 

 

대웅전은 1991년 지어진 전각으로 전면 3칸 측면 1칸의 익공계 맞배

지붕을 채택하여 만들어졌으나 초석위에 기둥만 세우고

벽체는 없는 독특한 형식의 전각입니다.

 

 

비바람만 피할 수 있도록 만든 보호각 형태로 안에는 7위의 지장보살

입상이 갖가지 형상으로 나란히 서 있습니다.

 

 

무봉사는 신라시대 때 법조선사가 당시 신라의 5대 명사 중에 하나였던

영남사에 주석하다 대낮에 큰 봉황새가 춤을 추며 이곳으로 날아와

앉아 상서로운 성지라 하며 법계로 삼았다는 이야기와

 

 

신라 혜공왕이 법조스님으로부터 받은 불은을 갚기 위해 영남루 자리에

가람을 짓고 무봉암으로 했다는 사적이 전해내려 온다고도 합니다  

 

 

강 언덕에 우뚝 솟은 영남루와 밀양강과의 조화로 그림같은 풍경을 지닌 사찰

무봉사는 경내에 보물 제493호 통일신라시대 석조여래좌상을 주불로 봉안

하고 있어 그 역사에 걸 맞는 사격과 운치를 함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으며 몸 전체가 육중하며 위풍당당하게는 보이지만

각 부분의 입체감이 부족하고, 단순하고 형식적인 표현들이 보입니다.

 

 

광배에 새겨진 연화좌위에 앉아 있는 약사여래상의 조각은 정성들인 흔적이

역력하며 이 광배가 원래 석조여래좌상에 딸린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특이한 수범의 조각 솜씨를 보이는 희귀한 광배입니다.

   

 

무봉사 석조여래좌상의 광배와 같이 전후면을 조각한 형식과 수법은

경주의 미륵곡불상(보물제 138호)과 경북대학교의 독립광배 등에서만

볼 수 있는 극히 희소한 유형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무봉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이며 지금의

영남루 자리는 예전에 영남사(嶺南寺)라는 절이 있던 곳이고,

 

 

밀양 무봉사는 773년(신라 혜공왕 9) 법조(法照) 스님께서 이

영남사의 부속 암자로 세운 사찰입니다.

 

 

무봉사는 1359년(고려 공민왕 8) 영남사가 불에 타 없어지자,

무봉암을 무봉사로 승격시켰다고 합니다.

 

 

무봉사는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것을 1605년(선조 38)

혜징(慧澄)이 중창하면서 법당과 칠성각·수월루를 새로 지었습니다.

 

 

무봉사는 1628년(인조 6) 경의(敬儀)가 중창하였으며, 1899년(광무 3)

경봉(慶蓬)이 중건하고, 1942년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고 합니다  

 

 

무봉사의 전설을 찾아서

 

의창군에서 발행한 내 고장의 전설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1,200여년 전 신라 혜공왕 때 법조(法照)라는 한 도승이

밀양의 무봉사(舞鳳寺)를 세울 당시의 일이다.

 

하루는 선사가 급한 용무로 뒷간을 갔더니

호랑이가 뒷간 앞에 있는지라 다른 곳에서 용무를 마쳤다.

 

그런데 이틑 날 밤,

또 뒷간을 갔더니 이번에도 호랑이가 있는 것이 아닌가.

 

화가치민 선사가 들고 있던 지팡이로 호랑이의 이마를 쳐버렸다.

 

그랬더니 호랑이의 이마에서 흰나비 한마리가 날라 나오고

호랑이의 몸은 사라져 버렸다.

 

선사는 하도 이상하여 흰나비를 따라 나섰다.

 

나비는 하늘하늘 앞장서가더니

새벽녁에 어떤 산봉우리에 앉았다.

 

흰나비의 동정을 지켜보니

이번에는 날아서 산 아래 어떤 집으로 들어갔다.

 

그 집을 찾아들어가니

슬하에 자식이 없는 쉰살 가량의 부부가 살고 있었다.

 

이들 부부도 간밤에 매우 이상한 꿈을 꾸었다.

 

부부가 꾼 꿈이 똑같은 내용인지라 기이하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법조선사가 흰나비를 따라 이 집안으로 들어섰던 것이다.

 

선사가 두 사람의 꿈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 꿈의 내용은

간밤에 선사가 격은 흰나비와도 관련이 있는 꿈이었다.

 

이윽고 선사가

"오늘부터 열달 후에 소승이 다시 찾아

주인장에게 청을 하나 드리겠으니

 

절대로 청을 거절하지 마시길 미리 약조해 주십시오."

하고 다짐하여 주인 남자에게 허락을 얻고 떠났다.

열 달 후 이집의 부인이 해산하여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날 아침 약속대로 선사가 찾아와서 말하길

"이 아이는 액이 있어 이집에 있으면 머지않아 죽게 될 것이니

소승이 데려가 길러야 하겠으니 맡겨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주인 부부는 열 달 전 약속도 있고

아이가 죽는다는 말에 선사에게 아이를 주고 말았다.

 

선사를 따라간 아이는 절에서 공부와 무예를 닦았다.

 

이 아이는 비범하여 보통의 아이들과는 달랐으며

사람이 보는 앞에서는 항상 왼쪽 주먹을 꼭 쥐고 있는 버릇이 있었다.

이 버릇은 놀 적에도 그러하고 잠잘 때에도 왼쪽 주먹은 펴지 않았다.

 

 

어느 날 밤 선사는 아이가 잠든 틈을 타서

왼쪽 주먹을 펴보고 그만 깜짝 놀라 물러앉았다.

 

아이의 손금에 三자와 1자가 뚜렷한

王자의 손금이 선명 한게 아닌가?

 

그런데 선사가 미쳐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아이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절간이 떠나갈듯 일갈을 하였다.

 

"에잇! 요사스러운 중놈아!"

그와 동시에 아이의 손이 선사의 따귀를 한대 쳐버렸다.

 

이어서 아이는

"내 여태 감추고 있던 비밀을 어느새 네놈이 눈치를 챘구나,

 

그렇다면 내가 이곳을 떠날 수밖에 없다."

 

 

그 말을 남기고 절간을 나간 아이의 행방은 묘연 했으며,

뒷날 이아이가 중국으로 건너가 천자가 되었다하고

그런 연유로 천자봉(天子峰)이 생겼다고 전한다.

 

 

밀양 아동산 기슭에 자리한 무봉사와 천자봉의 전설은

법조선사라는 구체적인 인물이 등장하는 특이한 이야기입니다.

 

 

무봉사에는 국성접(國成蝶)이라 부르는 태극나비 이야기가

있어 더욱 신빙성을 갖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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