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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문화재답사

[스크랩] 겉은 가야, 속은 신라 - 양산 부부총과 금조총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13. 12. 1.

겉은 가야, 속은 신라 - 양산 부부총과 금조총

 

부부총과 금조총의 유물이 전시되고 있는 양산유물전시관

 

전시관 내부

 

양산시의 어제와 오늘을 한 곳에서 조명할 수 있는 양산유물전시관은 2013년 4월에 개관이 되었으며 경남지역에서 유일하게 1종 종합박물관으로 등록된 전시관이다

이 곳에는 금동반가사유상과 금제태환이식, 조선 태종의 어보가 찍힌 왕지 등 460여 점의 유물이 전시되고 있으며 전문 학예연구사들이 상주하여 전시물에 대한 해설이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양산유물전시관이 '백년만의 귀환-양산 부부총(夫婦塚) 특별기획전'으로 전시되고 있는 특별전시는 일제 강점기에 양산 부부총에서 발굴되어 일본으로 반출된 유물 68점이 대여형식으로 빌려와 한시적으로 선보이고 있으며 부산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금조총 유물,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청동반가사유상 등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이 특별기획전은 11월 15일부터 시작되어 내년(2014년) 1월 12일까지 열린다고 한다.

 

 

신라와 가야를 품은 고분, 부부총

 

아래에서 두번째 봉분 아래 호석을 쌓아놓은 무덤이 부부총이다

 

부부총은 양산시 동북쪽에 있는 해발 320m의 성황산에서 서쪽으로 낙동강의 지류인 양산천 유역에 형성된 넓은 평야지대를 향해 뻗어내린 구릉의 등줄기를 따라 대형봉토분(大形封土墳)이 나란히 우뚝 솟아 있는 사적 제93호 '양산 북정리 고분군' 가운데 제10호분이다.

 

창녕, 고령, 함안 등 가야의 수장묘는 대개 구릉의 정상부나 높은 곳에서 중심지를 조망하는 입지를 가지고 있다. 고분이 단순히 왕이나 귀족의 무덤이 아니라 백성들을 보호 감시하는 암묵적 통치의 기능도 내재하고 있으며, 또한 거대란 규모의 고분을 능선의 정상부에 쌓음으로써 무덤은 실제보다 더 크고 웅장한 느낌을 가지게 하는 시각적 효과도 지니게 된다.

양산지역의 신라고분들은 지리적으로 가야권에 인접해 있어 가야문화적 요소들을 닮았다. 그러나 발굴 조사된 유구와 유물은 신라문화에 더 가까운 특징을 지니고 있다.

 


 

1920년 일제 강점기에 일본 고고학자 오가와 게이기치[小川敬吉] 등이 조선총독부의 명령에 의해 북정동의 주 능선상에 분포하는 대형 고분 18기 가운데 하나를 발굴하였다.

일제는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본이 고대 한반도 남부의 일부를 지배했다는 임나본부설에 뒷받침이 될 만한 증거를 찾고자 가야지역 고분 발굴에 주력했으며 대부분의 고분조사는 발굴이라는 명목 하에 파헤쳐졌다. 하지만 무작위로 파헤쳐진 고분에서는 임나일본부설을 확증할만한 유물이 발굴되지 않았고, 유물에 대한 약탈만이 있었을 뿐 그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대부분 우리나라를 떠나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양산지역의 고분 중 왜 북정동 고분군을 선택했는지 정확한 정황은 알 수 없으나 발굴자인 오가와 케이기치는 당시 18개의 고분 중에서 부부총이 중간쯤에 위치해 있어 축조연대가 그 중간쯤일 것으로 생각해 발굴했다고 전한다.

발굴은 1920년 11월 13일 발굴이 시작돼 11월 25일까지 13일간 발굴이 이루어졌으며, 1927년 ‘고적조사특별보고’가 간행돼 발굴기록을 비교적 자세하게 알 수 있다.

부부총에서 발굴된 유물은 금동관, 팔찌, 귀걸이, 말안장 등 498점이나 되었는데 이 유물들은 모두 1938년 3월 조선총독부에 의해 도쿄제실박물관(현재 도쿄국립박물관)으로 모두 기증되었다.

 

1958년 제4차 한일국교정상화회담에서 문화재 반환문제가 거론돼 이들을 되돌려 받을 기회가 있었으나, 일본국립박물관에 진열하겠다는 일본 측의 요구에 반환이 보류되어 아직도 도쿄국립작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부부총의 내부


 

부부총은 횡구식석실묘(앞트기식돌방무덤)봉토(흙을 쌓아올린 부분)의 크기가 지름 23m, 높이 3m인 원형의 봉토분이다. 봉토 둘레에는 비나 바람으로부터 무덤을 보호하는 호석(護石)과 주구(周構)를 만들었다. 부부총의 중심이 되는 석실은 동서방향을 긴 축으로 해 가로 5.4m, 세로 2.2m, 봉분지름 27m, 높이 3m 정도의  긴 직사각형의 형태이다.

무덤의 출입구는 서쪽 방향으로 뚫었고, 나머지 동·남·북벽은 깬돌을 정교하게 쌓아올렸다. 서쪽의 입구에는 양옆에 돌을 쌓고 중앙 부분을 입구로 사용했는데, 발굴 당시에 입구는 돌로 막혀 있었다고 한다.

시신이 놓이는 부분에는 높이 80㎝ 정도의 주검받침(시상대 屍床臺)을 만들었는데, 처음에는 주인의 시신이 놓일 부분은 80㎝로 쌓고 반대편은 30㎝정도 낮게 조성했으나 후에 부인을 추가로 매장하는 과정에서 낮게 조성한 받침 부분을 주인이 놓인 부분과 동일한 높이까지 높여 나란하게 안치할 수 있게 조정한 것으로 파악된다.

 

 

  무덤의 주인 부부

 

 함께 묻힌 순장자들

 

 

 

부부총은 무덤 구조상 6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입지적인 면에서 가야적인 특성을 보이는 반면 무덤의 형태나 형식은 신라적인 특성을 따르고 있다.

 

출토 유물은 금동관·금제 이식·목걸이·팔찌·반지·과대·요패·금동 신발·대도·철솥·토기 등이 출토되었는데

경주지역의 출토 유물과 많은 유사성을 지니고 있어 부부총은 신라의 귀족이거나 신라왕조에 흡수된 양산지방의 호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해에 있던 금관가야의 지배집단이 신라에 흡수되는 과정에서 양산지방으로 이주해 고분을 축조했다는 의견도 있다.

 

또한 무덤의 주인에 대해서는 당시 삽량 도독인 김서현 장군 부부의 묘라 하기도 하고, 김서현의 사위가 산성의 성주로서 백제군과 대치 중 전사해 이곳에 묻혔다는 설도 있지만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 무덤 속 주인은 정말 부부일까

 

 

 


북정동 고분군 10호분을 ‘부부총’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덤의 주인이 남녀이기 때문이다.

1500년 전의 무덤주인은 아무 말을 해주지 않지만 무덤에서 확인되는 유물을 통해 이들이 부부일 것이라 추정하는 것이다.

 

부부총에는 자루 끝에 둥근 세 개의 환을 붙여 만든 삼환고리자루큰칼이 출토됐다. 기록에 따르면 고리자루큰칼은 2세기쯤 널리 퍼져 무기로 쓰였으며, 유물이 출토된 위치나 성격으로 볼 때 남성의 전유물로 인식된다.

귀걸이 또한 가는 것과 굵은 것이 있다. 신라의 무덤에서는 대체로 가는 것은 남성이, 굵은 것은 여성이 착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부장유물의 성격으로 볼 때 남녀임은 확실하고, 부부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또한 부장유물을 통해 무덤 주인의 신분은 어느 정도 가늠할 수도 있다.

허리띠꾸미개는 금제, 은제, 금동제로 나뉘어, 착용한 사람의 지위를 반영한다. 부부총에서는 은제 허리띠꾸미개 2점이 출토됐는데, 같은 시기 경주의 신라귀족 혹은 왕 무덤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낮은 신분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주인은 신라 때 양산을 통솔한 수장이거나 거대한 정치세력을 가진 지방 군주일 것이다.

일제시대 발굴보고서에 실린 도면

 

 

부부총 출토유물은 금동관을 비롯해 귀걸이, 목걸이 등 489점으로 보고돼 있다.

 

남성은 금동관을 쓰고 은제허리띠, 금제귀걸이, 금제목걸이, 은제반지, 금동제신발 등을 몸에 치장했고, 자루 끝에 둥근 세 개의 환을 붙여 만든 삼환둥근고리자루큰칼이 좌우에 놓여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여성은 자작나무 화관모를 쓰고 은제허리띠와 금제귀걸이, 마소노옥 팔찌, 은제팔찌 등의 장신구로 치장했고 주변에 작은 칼과 가위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또한 부부의 방에는 다량의 토기와 마구(馬具) 등 다양한 물건들을 만들어 부장함으로서 내세에서도 사용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부장칸에서는 뚜껑굽다리접시, 긴목항아리, 그릇받침 등의 다양한 토기류와 철제말발걸이, 청동제말방울 등 마구류가 나왔다.

 

부부총은 이후 동아대박물관에 의해 1990413일부터 920일까지 약 5개월간 내부구조 확인을 위한 추가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부부총 출토 금동관

 

 

 

부부총 출토 금동관(복제품)

진품은 도쿄박물관이 훼손이 될것을 우려하여 대여를 해주지 않아 복제품으로 대신하였다

(※ 전시물 중 안내판에 R자 표시가 되어 있는 것은 복제품이라는 표시이다 )

 

주인이 착장하고 있던 금동관으로 금동의 얇은 판으로 제작돼 대륜부(臺輪部)와 입식부(立飾部), 수식부(垂飾部)를 따로 제작ㆍ조립했다. 입식부(立飾部)에는 정면과 측면에 출(出)자형 입식(立飾) 3개를 세웠고, 뒷면에는 S자 형태의 사슴뿔 모양 입식(立飾)을 세웠다. 입식(立飾)에는 수많은 잎 모양 금동환을 달아 화려함을 더했다.

또한 대륜부(臺輪部) 아래 길게 내려진 수하식(垂下式)은 굵은고리귀걸이와 많이 닮아 있다. 수식(垂飾)을 포함한 길이는 무려 62.6㎝나 된다.

 

 

 

 

양산부부총 출토 금동관                                                  금관총 출토 금관

 

한편, 부부총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재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으나 경주 금관총에서 발굴된 금관과 형태상으로 매우 유사하다. 이는 양산지역이 신라의 중앙인 경주와 많은 교류가 있었다는 역사적 상황을 암시한다. 

 

 

남자용 목걸이

 

남편의 목걸이는 가운데 커다란 비취 곡옥을 달았다. 남편 목걸이가 단순하고 육중한 느낌이라면, 부인 목걸이는 섬세하고 화려한 느낌을 준다.

 

부인용 목걸이

 

부인용 곡옥목걸이는 부인의 가슴 부근에서 발견된 것이다. 아래쪽 중앙에 붉은 마노로 만든 곡옥을 달고, 좌우에 수정, 치옥, 순금, 청색유리 등을 11개찍 매달아 치장하였다. 특히 이 보석들을 은으로 만든 끈으로 꿰어 발굴 당시에도 흐트러지지 않고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 목걸이는 천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완전한 형태로 여전히 아름다운 빛깔을 내고 있다.

 

 

 

 

금동제 말안장 꾸미개

 

금동제 말안장 꾸미개는 말을 타는 사람이 말에 올랐을 때 몸의 균형을 유지해주는 말갖춤의 하나이다.

이금동제 말안장 꾸미개는 나무재질의 전륜(前輪)과 후륜(後輪)을 먼저 만들어 후륜부의 바깥에 금동판을 씌우고 안쪽에는 가죽이나 삼베 등을 씌운 목심금동제(木心金銅製)이다.

표면은 금동판에 물고기 비늘처럼 보이는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앞쪽의 꾸미개는 약간 부푼 반원형이고 양끝에는 못구멍이 뚫려져 있다

이와 같은 말안장꾸미개의 부장은 무덤 주인의 권력을 상징하는 최상의 물품이라고 할 수 있다

 

 

 금동제말띠꾸미개

 

발걸이

 

금제굵은고리귀걸이

 

순금으로 제작된 굵은 고리모양의 귀걸이이다. 아래로 가는 고리를 연결하였으며 수하식(垂下飾)을 붙였다. 수하식은 가는 고리를 연결하고 중심축에 상하 각각 연결고리를 만들어 10매와 7매의 작은 하트모양의 장식을 2단으로 달아놓았다

이 부부총 귀걸이는 금조총에서 출토된 금제굵은고리귀걸이와 유사하며 신라의 금속공예 기술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금제팔찌

 

은제팔찌

 

 

 

금제허리띠

 

 

토기

 

 

금조총(金鳥塚)

경상남도 양산시 북정동 산702

  

 

 발굴 당시의 모습

 

북정동 금조총은 사적 제93호인 양산 북정리 고분군 내에 있는 소형 무덤으로 능선 정상부에 있는 부부총의 남사면 조금 낮은 곳에 위치하며, 1990년 북정리와 신기리 택지 조성 사업으로 인해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된  돌방무덤[石室墳]이.

발굴 당시, 봉분은 민묘의 축대에 걸려 있었으므로 위쪽은 평평하고 남쪽은 매우 경사진 상태였으며 경사진 서남쪽 사면에는 자갈이 얇게 덮여 있었고, 봉분은 거의 깍여진 상태로 평평한 위쪽은 잔디와 잡목이 자라고 있었다.

 

발굴 조사 결과, 출토된 유물 중 금으로 만들어진 조족(鳥足-새의 발) 형태의 유물이 특징적이어서 고분 이름을 금조총(金鳥塚)으로 지었다.

내부 매장 시설은 수혈계 횡구식 석실로 장방형 석실의 북서쪽 단벽 상부에 횡구부가 설치되어 있었다.

출토된 유물은 금제 조족(새발)·금동관·금제 귀걸이·금제 팔찌·은제 허리띠·청동자루솥·철제 가위·소도자(칼)·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금조총의 유물상태 모형

 

금조총은 소형의 고분이긴 하나 출토 유물상으로 볼 때 삼국시대 양산 지역 최상위층 지배자 부인의 무덤으로서 신라의 왕족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추정되며 고대 양산 지역 최상위층 지배자의 문화를 파악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특히 출토 유물 가운데 금제 조족(금으로 만든 새의 발)은 우리나라 고분에서는 처음으로 출토된 공예품이다.

금제 귀걸이 또한 경주의 왕릉급 고분군에서 출토된 것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당시로선 최고 수준급의 금속 공예품이라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금동관, 은제 허리띠, 굵은귀걸이가 두 쌍 출토되었다

 

양산 금조총 금귀걸이는 보문리 부부총 귀걸이와 함께 신라 귀걸이를 대표하는 명품 중의 하나이다

귀걸이는 시상대 위와 아래에서 각각 한 쌍씩 두 쌍이 발견되었는데, 장식에 따라 이 두 귀걸이를 만든 시기는 서로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금조총 출토 금제 굵은고리귀걸이

 

금조총 출토 귀걸이

 

시신을 안치하는 시상(屍床) (1차 시상)에서는 천마총 출토품과 비슷한 귀걸이가 한 쌍, 시상 위에서는 보문리 부부총에서 출토된 부인의 귀걸이처럼 중심고리에 금알갱이를 붙여 장식한 귀걸이가 한 쌍 출토되었다

 

굵은고리귀걸이(시상 위에서 발굴)

 

삼국시대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제작된 순금 귀걸이의 모습이다.

은제 허리띠 아래에서 출토된 것으로  총 길이가 9.4㎝로 지금까지 알려진 56세기대 신라 귀걸이 중 가장 길다.

고리는 가운데가 뚫린 통 모양을 둥글게 구부린 형태이다. 굵은고리인 중심고리와 노는고리[遊環]에는 금알갱이를 붙여 육각형의 거북등무늬와 둥근무늬를 표현하였다. 육각의 거북등무늬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유물 등에도 나타나고 있어 그 계보와 제작시기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는 실물 자료이다.
중간 장식은 가는 고리로 되어 있는데 고리의 지름은 3.1㎝이다.

샛장식은 경주 노서리 215번지 출토품과 마찬가지로 새김눈테가 장식된 작은 고리를 이어 붙여서 만든 원형과 반원형이고, 드림은 펜촉 모양이다

 

출토 금동관의 좁쌀모양 금알갱이 장식, 드리개[垂飾]와 꼬리 장식이 경주 보문리에서 출토된 것과 거의 비슷하지만 시기적으로는 보문리출토 귀걸이보다는 늦은 것으로 보여진다.


 

양산 금조총 출토 귀걸이                                       경주 보문 부부총 출토 귀걸이

 

 

시상 아래에서 발견된 귀걸이(시상 아래)

 

시상(屍床) 아래 생토 층에서 출토된 것은 총 길이 7.2㎝로, 가운데가 뚫린 원통을 구부려 만든 소문(素文)이고, 지름은 3.0㎝이다. 가운데가 뚫린 원통 지름은 1.0㎝이다. 중간 장식 역시 소문으로 가는 고리이며, 지름 3.2㎝이고, 가는 고리 지름은 0.4㎝이다.

드리개는 작은 고리로 중간 장식과 연결되었고, 중심부에는 금사(金絲)를 새끼처럼 꼬아 만든 구형(球形)과 반구형(半球形)이 연결된 장고 모양 장식이 있고, 바깥으로 상하 각 9개의 고리가 있으며, 심엽형 보요가 각각 매달려 있다.
양산부부총 금제 귀걸이와 많이 닮았고 제조 수법상 앞의 것보다 고식(古式)으로 편년된다.

 

귀걸이의 명칭

 

 

금조총 출토 금제 새다리

 

금으로 만든 새다리(鳥足) (R)

 

금조총에서 출토된 장신구 가운데 하나로, 한 쌍의 금제 새다리이다. 몸통은 부식되어 없어졌으며, 발가락은 4개로 끝이 뾰족하고 쫙 벌어져 있으며 길이 2.8㎝, 발가락 길이 0.6㎝, 몸통 접속부 지름 1.0㎝이다

몸통과 밀접한 부분을 납작한 판상(板狀)으로 만든 뒤 못 구멍 세 개를 조화 있게 배치하였다. 작지만 구부러진 다리와 쫙 벌어진 발가락이 곧 날아갈 듯하다.

 

금조총 출토 금제 새다리는 신라, 가야 지역에서 출토되는 새모양 토기[鳥形土器]나 천마총 출토 칠기조형배(漆器鳥形杯), 고구려 진파리 1호 고분의 「천마도(天馬圖)」, 백제 무령왕릉 왕비 두침(頭枕)의 장식조(裝飾鳥) 처럼 의미가 내포된 유물로 생각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진조의 “큰 새 깃털로 장례를 치르는데, 그 뜻은 죽은 자가 날아가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라는 내용과도 서로 통하며, 고대인의 정신 세계를 알 수 있는 자료로서 의의가 크다.


 

북정동 금조총 출토 금제 팔찌

 

금조총출토 금 은제 장식구

 

순금으로 단조(鍛造)한 원형의 팔찌로서 전체 직경 7.6㎝, 윤선 지름 0.5㎝이다.
사각형의 금사(金絲)로 바깥 부분에 원형 돌기상(突起狀)의 타출문(打出文)을 새긴 뒤 이를 둥글게 구부려 양쪽 끝을 이었다.
양산 부부총에서 같은 형식의 부인용 팔찌가 출토된 적이 있어 피장자가 여성임을 증명해 주는 자료이다.

 

은제허리띠

 

은제 허리띠(R)

 

은제 허리띠 장식(R)

 

은제 허리띠는 띠고리[鉸具], 띠꾸미개[銙板], 드리개[垂飾], 띠끝꾸미개[帶先金具]로 구성되어 있다.

띠고리는 주연부(周緣部)의 선단이 원형에 가깝고, 기부에 T자형의 조(釣)를 부착하여 고정구로 사용하고 있다. 방형 띠꾸미개는 삼엽문(三葉文)이 투조(透彫)되어 있고, 하부에 볼록한 모양의 물고기를 심엽형의 수식과 연결시켜 놓았다.
드리개는 모양이 심엽형에 가깝지만 내부에 초엽문(草葉文)이 투조되어 있는데, 이는 보기 드문 예이다. 띠고리가 연결된 첫번째 띠꾸미개는 은판을 절반으로 접어 통상의 접(蝶)을 만든 뒤 교구 기부 횡주(橫柱)와 연결시켰다. 띠끝꾸미개는 구단형(矩短形)으로, 반으로 접힌 복륜에 피혁이나 포면(布綿)의 대단(帶短)을 끼워 여섯 개의 못으로 고정시킨 뒤, 구형(矩形) 은판과 경첩으로 연결하였다.

각 띠꾸미개 뒷면에는 당시 피혁이나 포를 부착할 때 사용되었던 못이 각각 여섯 개씩 있다. 띠고리, 띠끝꾸미개를 제외한 띠꾸미개는 30매이며 대부분 검게 녹슬었고, 12매는 방형 띠꾸미개가 부분적으로 산화되었다. 띠고리는 지름 4.5㎝, 넓이 3.5㎝이고, 띠꾸미개는 길이 6.9㎝, 넓이 2.9㎝이며, 드리개는 지름 3.5㎝, 넓이 3.9㎝이다. 띠끝꾸미개는 길이 11.2㎝, 넓이 2.7㎝이다.

 

 

금동신발(R)

 

 금동제말안장(R)

 

금동제 말장식(R)

 

 

 

양산유물전시관의 전시품

 

금동반가사유상

 

금동반가사유상

 

‘금동반가사유상’은 양산시 유산동에서 출토된 불상으로,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반가사유상 가운데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해 매우 높은 예술적 평가를 받고 있는 불상이다.

삼국시대 약 7세기경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삼강행실도

 

 ‘삼강행실도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160호)’는 조선시대 기본 윤리덕목인 삼강(三綱), 즉 충신·효자·열녀의 정신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그림과 함께 해설을 붙여 간행한 책이다.

펼쳐진 부분은 신라 충신 박제상의 이야기가 실려있는 부분이다

 

 

은제내관

 

 

십방삼보패

 

 

청동자루솥

 

아동문학가 이원수님의 친필원고와 유품

부부총 발굴모습

출처 : 토함산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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