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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문화재답사

[스크랩] 국립대구박물관을 찾아서(3)

by 송강 (松岡) 최 재 모 2013. 5. 2.

국립대구박물관을 찾아서(3)

 

섬유복식실

 

 

섬유복식실

 

 

섬유복식실은 실, 직조, 색채, 옷이라는 4개의 키워드를 통해 과거부터 현재까지 우리 옷의 기원에 대해 전반적으로 소개하는 전시실이다. 옷이 되기까지의 과정과 우리 옷의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전시구성은 씨실과 날실이 만나다, 문무백관의 복식, 특별한 날, 왕실의 옷, 혼례, 부부의 인연, 의관정제, 무덤에서 나온 옷, 출토복식, 처음 맞이하는 생일, 아시아의 염색과 무늬, 아시아의 전통복식, 손 끝의 예술, 규방소품 등으로 전시되어 있으며 대표전시품으로는 가락바퀴, 흥선대원군 기린무늬 흉배, 허리띠, 떨잠, 활옷, 진주하씨 장옷 등이 있다

 

남성용 복장

 

조선시대의 남자들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아치가 되면 품계와 의례의 종류에 따라 정해진 관복을 입었다. 관복의 종류에는 조복(朝服), 제복(祭服), 상복(常服)이 있다.

조복은 왕실의 경축일이나 조칙을 발표할 때 혹은 중요한 자리에 문무백관(文武百官)들이 입고 참가하는 옷이다.

제복은 종묘사직에 제사할 때 착용하는 옷으로 조복과 구성이 같으나 옷의 색상과 장신구가 다르다.

상복은 평상시 집무할 때 착용하는 옷이다

 

 

곤룡포

 

 

 

               흥선대원군 기린무늬 흉배                                                       오조룡보

 

 

대원군 기린무늬 흉배/조선 19세기. 세로 25.5㎝, 가로 23.1㎝. 중요민속자료 제65호

 

흥선대원군(1820~1898) 이하응이 착용한 기린무늬 흉배로, 대궐에서 집무를 볼 때 착용한 상복 단령에 부착하였던 것이다. 1745년(영조21)에 수정된 흉배제도에 의하면 대군과 대원군의 단령에는 기린무늬 흉배를 부착하도록 규정되었다.
금실로 수놓은 기린은 하늘을 나는 듯 구름 속을 지나며 머리와 꼬리의 털이 휘날리는 입체감을 잘 표현한 흉배이다.

 

 

                        홀                                                                         후수

 

 

후수는 문무백관의 조복과 제복 뒤에 늘이는 장식이다.
품계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표시 중의 하나로 품계에 따라 무늬, 색실의 수, 환의 재료가 다르게 쓰인다.
뒤에 늘어 들인다 하여 후수라 부르며, 대대에 고정하여 허리에 둘렀다.
이 유물은 붉은색 비단 바탕에 청/황/청/백색의 순서로 학을 수놓고 2개의 금환을 단 1, 2품에 해당하는 후수이다

 

 

양관

 

조복과 함께 착용하는 것으로 관의 앞면 중앙부분에 양이라고 하는 세로선이 있어 양관 혹은 금관이라고도 한다. 관의 머리둘레와 뒷부분은 당초무늬가 새겨져 있고 금니를 칠하였다.
품계에 따라 양의 수가 달라지며 이 양관은 5량관으로 1품에 해당한다

 

 

 

 

 

 

전통사회에서 남성들의 옷차림은 단순한 치장이 아니라 그 사람의 정신과 연결된다고 사람들은 생각하였다. 따라서 남성들은 외출 시에는 물론 집안에서도 예의를 갖추기 위해 다양한 겉옷을 입었으며 각 옷차림에 맞는 모자류도 발달하였다.

또 머리를 다듬기 위한 다양한 머리수식도 함께 갖추었다. 일상복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철릭, 직령, 도포, 창의, 두루마기 등이 있고 소매가 없는 옷으로 답호와 전복이 있다

 

 

갓과 갓끈

 

망건과 동곳

 

 

여성용복장

 

 

왕비복의 봉황무늬

 

 

활옷

 

 

활옷은 공주나 옹주 또는 사대부가에서 주로 혼례 때 입던 예복으로 홍색 비단에 여러 색실로 화려한 길상무늬를 수놓아져 있다.
안감은 청색인데, 이는 음과 양의 조화이자 ‘청실홍실’로 대표되는 전통 혼례의 색을 반영한다고 한다.
소매의 끝에는 백색 한삼을 달며, 소매에 달린 색동은 황색/홍색/청색으로 예복의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고이댕기

 

 

 

아기용복장

 

돌잔치와 돌잡이 풍속에 관한 연원은 정확하지 않으나. 왕가의 기록에는 조선시대 초기부터 나타나며, 반가(班家)에서의 풍습은 '양아록(養兒錄), '쇄미록' 등 16~17세기의 기록에 전해지고 있다.

 

첫돌에 아이는 흰색의 배냇저고리를 벗고 오방색과 화려한 무늬를 수놓은 옷으로 갈아입는다.

남자아이는 저고리에 밑이 트인 풍차바지를 입었고, 여자아이는 치마를 입었다. 또한 다섯 색의 천으로 만든 오방장 두루마기(까치두루마기)를 걸치고 쓰개를 썼다.

남자아이의 쓰개는 호건(虎巾)이나 복건(福巾)이라 부르고, 여자아이의 쓰개는 조바위라고 한다

 

 

 

까치 두루마기

 

 

                        복건                                                                               굴레

 

굴레와 돌띠

 

버선

 

 

무덤에서 나온 옷

 

 무명솜 장옷

 

 

미투리

 

 

조선시대에는 죽은 사람 뿐만 아니라 그 가족의 옷가지로 관(棺) 속의 빈틈을 채우는 수례라는 풍습이 있었다. 무덤 속에 넣은 옷의 재질과 수량은 집안의 경제력 및 신분에 따라 격차가 있었고, 옷의 조합은 남녀에 따라 달랐다.

출토복식은 대부분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무덤을 이장할 때 수습된다. 특히 조선시대 전기의 사대부계층은 예법에 따라 회곽(灰槨)에 매장하는 장례방식을 선호하였는데, 이 회곽은 콘크리트와 같은 성질을 지닌 석회로 관을 밀봉시킨 것이기 때문에 시신은 미라 상태가 되고 옷가지들도 고스란히 남겨질 수 있었다

 

 

 

야외전시장

 

야외전시장에는 대구 옥산동 유적 7호 가마를 이전·복원하여 전시 중인 토기가마전시장과 경북 칠곡 복성리 지석묘와 대구 파동 청동기시대 주거지를 이전, 복원한 유적공원이 있다. 박물관 정원에서는 고려시대 보물 제357호인 칠곡 정도사지 5층석탑을 볼 수 있다.

야외에는 청동기시대 고인돌과 집터, 삼국시대 토기가마,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 곳곳에 있어 산책을 하며 둘러볼 수 있다.

 

 

 

칠곡 정도사지 오층석탑-보물 357호

 

 

 

 

 

 

높이 463cm이며 고려시대(1031년)에 조성된 이 석탑은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복성리 정도사 터에 있던 것인데, 1924년 경복궁으로 이전했다가 1994년에 이곳으로 옮겨 왔다.
신라 석탑의 양식을 이은 고려 초의 석탑으로, 원래 5층이었으나 현재는 5층 지붕돌은 남아 있지 않고, 5층 몸돌 위에 노반만 올려져 있다.

아래층 기단 각 면에는 안상을 세 구씩 조각하고 안상무늬의 아랫부분에 귀꽃을 표현하여 장식미를 더하였으며 위층 기단 한 면에는 이 탑이 고려 현종 22년인 태평11년(1031)에 국가의 안녕을 빌기 위하여 건립하였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으나, 명문을 보존하기 위해 2001년 새로운 면석으로 교체하여 조립하였으며, 원래의 면석은 별도로 보관하고 있다.

1층 몸돌 정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이 새겨져 있다.
탑 안에서는 형지기와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는데 형지기에는 이 탑의 이름과, 1019년부터 1031년에 걸쳐서 상주계 경산부에 속하였던 약목군의 향리와 백성들이 발원하여 건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달성군 설화리 1호 돌방무덤

 

 

달성 설화리고분군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설화리 556-5번지의 구릉에 위치하고 있다.

(재)영남문화재연구원이 건물신축에 앞서 2012년 3월 19일부터 9월 4일까지 발굴조사하였고, 그 결과 청동기시대의 돌널무덤(石室墓) 15기·독무덤(甕棺墓) 1기·돌방무덤(石室墓) 16기기 조사되었다.

 

문화재위원회는 2012년 10월 26일에 온전하게 남은 1호 돌방무덤의 이전을 결정하여 대구박물관으로 이전하고 일반린에게 공개를 하게 된 것이다

이 돌방무덤은 널방(玄室)· 널길(羨道)· 호석(護石)· 봉분(封墳)을 갖춘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墓)이다.

널방은 깬 돌로 벽을 쌓고 큰 판석으로 천장을 덮었으며, 서쪽에 출입구인 널길을 두었다.

널방에서는 귀걸이(金銅製耳飾)· 쇠도끼(鐵斧)· 미늘쇠(有刺利器)· 쇠칼(刀子)이 출토되었고, 봉분 안에서는 뚜껑달린 굽다리접시(有蓋高杯)가 여러 개 확인되었다

 

 

 

 

 

출처 : 토함산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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