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용암사지(龍巖寺趾)를 찾아서
해주 정씨의 사유지 일부로 전락
석불ㆍ부도ㆍ석등ㆍ석비 옛 자리 지켜
용암사지 전경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龍岩里) 절골 안쪽에 옛 천태도량 용암사지가 있다.
수많은 전각과 스님들의 끊이지 않는 염불소리가 들렸을 용암사의 도량은 온데 간데 없고, 귀부와 승탑, 석등, 그리고 작은 전각속에 홀로 앉아계신 불상 한 기가 과거 절터였음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용암사지는 용암마을 뒷쪽의 영봉산(靈鳳山)에 있다. 영봉산 줄기가 용암을 애워싸고, 주변의 산세와 암석의 형태가 용과 같은 형세라 하여 용암마을로 불렸으며 산벼랑에 층층히 쌓인 암석들이 용의 비늘과 같다고 한다.
용암사에 관한 기록은 고려시대 박전지(朴全之)가 쓴 ‘영봉산용암사중창기(靈鳳山龍巖寺重創記)’, 고려학사 최자(崔滋 1186~1260)가 쓴 ‘만덕산백련사원묘국사비(萬德山白連社圓妙國師碑)’ 등 일부 문헌에 전해지고 있으나 당시의 사세나 주석했던 스님 등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고 한다.
영봉산용암사중창기에는 ‘도선국사가 지리산 성모천왕(聖母天王)으로 부터 세 개의 암사(巖寺)를 창립하면 삼한(三韓)이 통일되어 전쟁은 저절로 그치게 된다는 은밀한 부촉을 받고, 순천 선암사(仙巖寺), 광양 백계산 운암사(雲巖寺)와 함께 이 절을 지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도선국사가 비보사찰인 세 곳의 암사(巖寺-선암사.운암사.용암사)를 지은 것은 이 주위가 예로부터 마한과 진한 그리고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대여서 치열한 전쟁이 자주 벌어졌던 곳이기 때문에 그곳을 완충지대로 삼아 분열된 나라를 통합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한다.
승탑과 석등부재. 뒷쪽 전각 안에 불상이 있다
1315년 고려 충숙왕은 제찰사 한중희 등에게 전지를 내려 사찰을 경영하게 했고, 1316년 가을에는 제찰사 박효수에게 사찰을 중창하도록 명했다. 이 때 무외국통(無畏國統)은 1318년 80여 칸을 새로 짓고 20여 칸을 중수했다. 당시 전각 안에는 닥나무 종이를 바르고 왕골을 깔았다고 하며, 금당에는 석가여래를 봉안했다고 한다.
무외국통의 제자 승숙ㆍ일생 스님 등은 강화도 판당에 가서 부족한 장경을 찍어와 모두 600여 함을 만들어 비단으로 치장한 뒤 봉안했다. 같은 해 11월 18일 방우정이 다시 왕명을 받아 7일 동안 낙성법회를 성대하게 베풀었다고 전한다.
밀양의 영원사와 함께 고려 후기 천태종의 중심사찰이었지만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으나, 이 사찰은 폐사가 되고 임진왜란 이후 이 지역에 터를 잡은 공신 정문부(1565~1624) 후손들의 세거지(世居地)가 되면서부터 해주 정씨 문중의 사유지로 바뀌었고, 용암사는 장덕재(章德齋)라는 재실의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불교가 퇴락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명당에 위치한 고찰들은 조선 중기 성리학자들에 의해서 수많은 절이 훼손되고 절을 폐하여 자기 선조들의 묘를 세우거나 사우, 재실들을 만든 사례가 많았다.
원래 복주머니 형태의 명당에 자리잡은 용암사지 바로 앞에도 재각이 번듯이 서 있어 역시 그와 같은 사례에 들지 않을까?
앞쪽 건물은 장덕재의 관리사이고 뒷쪽 건물이 장덕재이다
앞면에 사슈로 덧문을 달아서 이상한 형태의 집이 되었다
해주 정씨들이 세운 장덕재라는 재각의 뒷모습.
재각을 살펴보면 그 부재들이 옛 용암사의 것들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석탑의 몸돌(탑신)은 재각 기둥의 초석으로 쓰였다
절골마을에서 약 300m쯤 좁은 시멘트 포장길을 오르면 길이 끝나고 솟을삼문이 가로막는다. 재실의 정문인 비연문(斐然門)이다. 이곳은 해주 정씨 문중의 재실인 장덕재(章德齋)가 있는 곳으로, 정씨 집안의 사유지다.
비연문(斐然門) 밖에서는 용암사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재실 관리인의 허락을 받아 비연문을 들어가서 마당을 지나 돌계단을 올라서면 장덕재(章德齋)라는 건물이 있고 그 오른쪽에 귀부와 비의 머리장식인 이수가 보인다. 귀부와 이수 뒤로 부도 한 기와 석등, 불상이 봉안된 자그마한 전각이 하나 서 있다.
이곳이 바로 용암사지이다
길의 마지막 집.솟을삼문(비연문)으로 들어가면 뒷쪽에 용암사지가 있다.
현재 용암사지에 남아있는 문화재는 보물 372호 용암사지부도와 경상남도유형문화재 4호 석불좌상, 비지정문화재인 석등과 홍자국통비 귀부와 이수를 비롯해 해주 정씨 재실인 장덕재(章德齋)의 기둥을 떠받치고 있는 석탑의 부재 등이 있다.
홍자국통비(弘慈國統碑)
비신은 사라지고 귀부와 이수(螭首)만 남았다
앞면
측면
뒷면
잘려진 귀두(龜頭)
앞면 제액-대천태종홍자국통비(大天台宗弘慈國統碑) 뒷면-용암((龍嵒)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만 있는 홍자국통(弘慈國統)의 부도비가 서 있는데, 홍자국통(弘慈國統)이라는 스님의 행적을 찾을 수가 없다
일설에는 충숙왕 시절에 용암사로 내려와 용암사를 중건한 무외국사(정오스님)가 홍자국통이라고 한다.
이수 앞 뒤면에는 용 두마리가 영켜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으며 이 용두마리는 발톱을 가운데로 모으고 있는데 이수의 앞면 중앙에는 '대천태종홍자국통비(大天台宗弘慈國統碑)'라는 전서체의 글씨가 석자씩 세줄에 걸쳐 조각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용암(龍嵒)'이라는 글씨가 조각되어 있어 용암사지임을 확실하게 해준다
귀부의 귀두는 잘려졌으나 제자리에 놓여 있으며 당시에 유행하던 용머리가 아닌 거북의 머리이다
용암사지승탑[龍巖寺址僧塔]-보물 372호
1963년 1월 21일자로 보물 제 372호로 지정된 이 승탑은 용암사 터 서북쪽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62년에 원래의 위치로 옮겨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어느 스님의 사리탑인지 분명치는 않지만 전체적으로 잘 맞는 비례와 8각의 기본형으로 되어 있어, 고려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석
하대석의 천부상
팔각의 각 면마다 안상문을 깊게 파고 가운데 천부상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아래 받침돌의 8면은 꽃 잎 모양으로 움푹하게 파고 ,구름 무늬를바탕으로 불법을 수호하는 천부상(天部像)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는데 동그란 눈, 오똑한 코, 작고 도톰한 입을 가진 천부상(天部像)은 연화대좌(蓮華臺座) 위에 가부좌(跏趺坐)해 있으며 휘날리는 천의(天衣)에서 생동감아 느껴진다
아랫받침돌의 윗면은 경사가 져있으며 중앙에 1단의 낮은 괴임이 있다.
중대석과 상대석
가운데받침돌(중대석)은 복원을 할 때 새로 만들어 넣은 것인데 팔각면 모서리에 우주만 새겨져 있으나 원래는 둘레에 용과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위의 받침돌(상대석)은 윗변에 단판의 연화가 돌려져 있으며 중앙에는 3단의 받침을 낮게 새긴 후 그 위에 몸돌을 올려놓았다. 몸돌 역시 복원시 새로 만들어 넣은 것으로 문비가 새겨져 있다
몸돌 역시 복원을 할 때 새로 만들어 넣은 것으로 팔각에 우주가 있으며 한쪽 면에 문비가 새겨져 있다
사라진 몸돌은 장덕재건물에 쓰여진 것으로 생각된다
지붕돌의 귀꽃
승탑의 상륜부
지붕돌은 꼭지에서 8각의 모서리로 내려오는 마루선을 약하게 새겼고 끝에는 길쭉한 귀꽃을 조각해 마감하였다. 낙수면은 경사가 완만한며 지붕의 꼭대기에는 데 연화(蓮花)가 돌려져 있다
지붕돌 꼭대기의 장식(상륜부)은 석탑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복발(覆鉢)·앙화(仰 花)· 수연(水煙) 등 상징적 의미가 있는 조각들이 차례로 올려져 있으며 정상에는 보주도 올라가 있다
전체 높이 1.93m에 견주어볼 때 몸돌과 중대석, 하대석, 지대석의 둘레가 커서 안정감은 있어 보이나 비례가 맞지않고 둔중해보인다. 이 승탑은 고려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귀부가 '홍자국통' 비좌이므로 이 승탑도 홍자국통의 승탑일 가능성이 많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용암사 석불좌상
지장보살인가? 비로자나불인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4호인 이 불상은 용암사지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불상이다. 석불좌상은 단칸의 전각에 봉안돼 있는데 조성경위는 알 수 없다.
이 석불좌상의 불두 부분은 지장보살의 모습을, 수인은 비로자나불의 지권인을 하고 있어 특이한 불상이다.
두건(頭巾)을 머리에 쓰고 있는 것으로 보면 지장보살(地藏菩薩)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어깨까지 두건을 길게 내려쓴 불상은 얼굴 오른쪽 빰 부분이 훼손되었지만 눈가에 어린 미소는 불성(佛性)을 충분히 느끼게 해 준다.
전체적인 얼굴 윤곽은 타원형으로 이목구비가 단정하고 온화하다. 사각형의 받침대(臺座)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데, 일반적인 불상에 비해 무릎이 약간 넓고 높다.
양쪽 어깨에 걸치고 있는 옷자락(法衣)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가슴 쪽을 넓게 파지 않은 것은 인도식 불상에서 나타나는 옷의 표현법이다. 또 옷주름은 선으로 처리되어, 몸매가 뚜렷이 드러난다.
하체는 무릎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마멸 상태가 심한 편은 아니다.
경주 중생사지의 본존처럼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어 지장보살로 보인다
수인은 오른손 손가락을 왼손이 감싸고 있어 비로자나불로 보인다
두 손은 가슴 앞에서 맞잡은 모양(智拳印)을 하고 있는데 이는 부처와 중생이 원래 하나임을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의 고유한 손 모양이다.
이 불상은 머리 부분은 지장보살을, 손 모양은 비로자나불의 모습을 한 특이한 형태의 불상인데,
지장보살은 고려 시대에 아미타불을 본존불로 모시고 그 옆에 자리한 협시보살로 등장하고 있어 석불 역시 고려 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석등의 잔재
2개의 연화대좌를 쌓고 그 위에, 불을 켜는 화사석과 옥개석, 상륜부를 올려놓았다
석등의 하대석인 연화대좌
불을 켜는 화사석
옥개석과 상륜부
승탑 옆에는 석등의 부재를 쌓이 석등처럼 만들어 놓은 석조물이 보인다
연화대석 두 개를 쌓아놓고 그 위에 화사석과 상륜부까지 갖춘 지붕돌(옥개석)을 올려놓았다. 화사석 아래에 놓여있어야 할 간주석은 어디론지 사라지고 없다.
아마 장덕재를 지으면서 건축의 구조물로 쓰이지는 않았을까?
장덕재의 기둥 초석이 석탑의 몸돌인 것을 보면 그럴 개연성은 충분히 있으리라. 석등 받침돌이 두 개인 것을 보면 석등도 두 개 이상이었을 것이다.
장덕재 안의 석재
용암사지에 흩어져 있는 와편
장덕제(章德齋)
폐허가 된 장덕재
가산 정찬의(可山 鄭鑽毅)가 그의 종족으로 더불어 공동으로 용암사터에 세워서 장수(藏修)하던 곳이었으나
현재는 마을 아래에 세워진 충의사에서 모든 행사를 하는 탓이지 관리가 전혀 이루어지지않고 있어 폐허나 다름없다.
장덕재 앞의 작은 전각은 농포집장판각(農圃集藏版閣)으로 농포(農圃) 정분부 충의공의 문집판을 소장하던 곳이다.
농포집(農圃集)과 목판본은 현재 서울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으며 나머지 판각은 용암사지로 들어오기 직전
에 있는 정문부의 사당 충의사(忠懿祠)에 따로 판각을 만들어 그곳에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농포집장판각(農圃集藏版閣)
충의사(忠懿祠)에 새로 지은 장판각과 보관중인 목판
농포집(農圃集)
농포집은 조선 중기의 학자요, 의병장인 정문부(鄭文孚:1565~1624)의 시문집으로, 전체 7권 4책의 목판본이다.
1758년(영조 34) 현손인 상점(相點)이 간행했고, 1890년(고종 27) 9대손인 혁교(奕敎)가 중간했다.
책머리에 민우수(閔遇洙)의 서문과 김익용(金益容)의 중간서가 있고, 책끝머리에 상점·혁교, 송병선(宋秉璿)의 발문이 있다.
권1·2에 시, 권3에 전문(箋文)·여문(儷問)·격문(檄文)·장계·순영첩보(巡營牒報), 권4~7에 부록으로 서(書)·계·소·교서 등이 실려 있다.
'격문'은 임진왜란 때 함경도의 수령들과 사민(士民)들에게 국가의 위급을 호소하여 의병에 참가할 것을 권유한 글이다.
'장계'는 자신이 직접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대파하고 경성(鏡城)에 들어가 백성을 안정시켰으며, 뒤에 반적 국경인(鞠景仁) 등을 사로잡은 경로와 상황을 보고한 것이다.
부록은 저자에 대한 포상·칭송 등에 관한 글들이다. 이 책은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데 참고자료가 된다.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용암마을에 있는 정문부의 사당, 충의사(忠懿祠)
정문부 장군의 사당인 충의사(忠懿祠)-경남문화재자료 제61호
충의사는 조선시대 명장 충의공 정문부(1565∼1624)장군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충의사(忠懿祠)는 박정희 대통령때 장군의 공을 기려 진주시 귀곡동에 세워졌으나 남강댐 숭상공사로 인하여 1995년 귀곡동에서 현재 용암리의 장소로 이건하였다
찾아가는 길
네비에 '용암사'를 입럭하면 잘 나오지 않는다.
'충의사'를 치거나 주소창에 '용암리'를 입력하고 가다보면 이정표가 잘 되어 있다.
마을 안까지 들어가서 우회전하여 바로 좌회전하면 산기슭 아래 밭이고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승용차로 용암사지까지 갈 수는 있으나 길이 좁고 커브가 심해 아래쪽에 주차하고 약 300m 숲속 길을 걷는 것도 좋다.
충의사를 방문하려면, 정문(숭의문 崇義門)은 닫혀 있으므로 왼쪽 가호서원의 문으로 들어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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