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대조사를 찾아서
충남부여
성흥산 대조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로 6세기
초에 건립된 사찰로 고려 원종 때
진전이 중창하였고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보물로 고려 때 유행한 거대한 석조미륵
보살로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쌍벽을 이루고 있으며 미래세계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보살을 형상화한 것
으로 높이가 10m나 되는 거구로 머리 위에는
이중 보개를 얹은 네모난 관을 쓰고 있으며
보개의 네 모서리에는 작은 풍경이 달려 있
는데 한 스님이 큰 바위 아래서 수도 중에
관음조 한 마리가 날아와 그 바위 위에
앉자 스님이 놀라서 잠을 깨니 바위가
미륵보살상으로 변해 있어 절이름을
대조사라 하였다는 사찰입니다
충남 부여 성흥산 대조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로 6세기초에 건립된 사찰로 고려 원종 때
진전이 중창하였다고 합니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보물로 고려 때 유행한 거대한 석조미륵
보살로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쌍벽을 이루고 있습니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미래세계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보살을 형상화한 것으로 높이가 10m나 되는 거구입니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머리 위에는 이중 보개를 얹은 네모난 관을
쓰고 있으며 보개의 네 모서리에는 작은 풍경이 달려 있습니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한 스님이 큰 바위 아래서 수도 중에 관음조
한 마리가 날아와 그 바위 위에 앉자 스님이 놀라서 잠을 깨니 바위가
미륵보살상으로 변해 있어 절 이름을 대조사라 하였다고 합니다
충남 부여군 임천면 구교리 성흥산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痲谷寺)의 말사(末寺)이며,
사적기에는 527년(성왕 5) 담혜가 세운 것으로 되어 있고 부여읍지
에는 백제 불교를 중흥시킨 겸익이 세운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두 기록이 다른 까닭은 알 수 없으나 6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그 뒤
고려 원종 때 장로인 진전에 의해 중창되었다고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한 스님이 큰 바위 아래서 수도 중에 관음조 한 마리가
날아와 그 바위 위에 앉자 놀라 잠을 깨니 바위가 미륵보살상으로
변해 있어서 절 이름을 대조사라 하였다고 합니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7호)은 논산 관촉사의 미륵
대석불상(보물 제218호)과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관 밑으로는 머리카락이 짧게 내려져 있는데
이와 같은 머리 모양은 관촉사 석조미륵보살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얼굴은 4각형으로 넓적하며 양쪽 귀와
눈은 크나 코와 입이 작아서 다소 기이한 느낌을 주지만
관촉사 보살보다는 덜하다고 합니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왼손은 배에 대어
연꽃가지를 잡고 있으며 보살상 앞에는 제사 음식을 차려
놓기 위한 제단이 놓여 있습니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1984년 5월 17일
충남문화재자료 제9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보물 제217호로 높이 10m나 되는
거대한 미륵보살로 전칭되는 거불로 논산의 관촉사 석조보살
입상과 많은 유사성을 보인다고 합니다
보살상 앞에 놓여진 제단입니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높은 원통형의 관 위에 네모난 보개가 2중으로
얹혀 있으며 얼굴은 각이 지고 지나치게 평면적입니다.
석조미륵보살입상의 불신은 굴곡이 전혀 표현되지 않은 직4각형의
석주 형태를 하고 있어 원래 돌의 윤곽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생각될 정도입니다.
석조미륵보살입상의 법의는 통견에 가깝고 오른쪽 어깨부분을
둥글게 덮고 있는 옷자락선이 보이며 앞가슴이
벌어져서 속에 있는 띠 매듭이 보입니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옷 주름 선은 양팔에 걸친 긴 소매
자락에만 보이는데 도식적인 평행선으로 처리되어 있습니다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손에는 금속으로 된 연화가지를 들고 있는데
몸에 비해 작고 평면적으로 조각되어 있습니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전체적으로 직4각형 거석재의 한계를
탈피하지 못한 채 마애불상적인 표현을 보이고 있습니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관촉사의 보살상에 비해 입체적인 효과가
감소되어 시대적으로 약간 뒤지는 상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이중의 보개를 올린 관을 쓰고 있으며
보개의 네 모서리에는 풍경이 달려 있습니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백호와 눈동자를
금속으로 만들어 넣었습니다
보살상 뒷면은 옷 주름 등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이름모를 불자가 예를 올리고 있습니다
이 소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제석지위 라는 위폐가 새겨져 있습니다.
천룡지위라는 위폐도 새겨져 있습니다
거사의 공덕비도 세겨져 있습니다
원통보전의 뒤로는 석조미륵보살입상을 참견할 수 있는 길이 있고
석조미륵보살입상을 볼 수 있도록 용화보전이 있습니다
용화보전은 금강계단과 같이 따로 불상을 모시지 않고 창을 통해
석조미륵보살을 참배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용화보전에는 문이 굳게 잠겨 있어서 석조미륵보살을
참배할 수 없었습니다
대조사 석탑은 원통보전 앞에 서 있는 탑으로 문화재자료 제90호로
2층의 기단 위로 3층의 탑신을 올려놓은 모습입니다
대조사 경내에 있는 고려 초기의 3층 석탑으로 높이 약 520㎝이며
지대석과 1층 탑신은 시멘트로 보수하였습니다
대조사 석탑은 원래 탑신 없이 옥개석 3장만 남아 있었는데1975년
부근에서 탑신이 발견되어 보수하였다고 합니다
대조사 석탑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1984년 5월 17일
충남문화재자료 제9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대조사 석탑은 지대석과 1층 탑신, 옥개석은 화강편마암이고 2, 3층
탑신과 상륜부는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기단은 상하 이중 기단으로 옥개석만 있었으나 1975년
옥신이 발견되어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탑은 지대석 위에 2층의 기단을 두고, 그 위로 3층의 탑신을
올려놓은 모습인데 탑신의 2· 3층 몸돌과 상륜부는
새로 만들어서 올려 놓은 것입니다
대조사 석탑의 상층기단은 우주와 1주의 탱주를,
상층기단은 우주만 모각하였습니다.
대조사 석탑은 탑신의 몸돌은 각각 우주를 새기고 지붕돌은 밑면에 받침을
두었는데 1층과 2층은 3단이고 3층은 2단으로 새겨 불규칙합니다.
대조사 석탑은 지붕돌의 처마는 가운데에서 수평을 이루다
네 귀퉁이에 이르러 가볍게 위로 들려있습니다.
대조사 석탑의 상륜부는 노반과 복발, 앙화, 보륜 등이 표현되어 있는데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고 특히 노반이 좁은 편입니다.
대조사 석탑은 위로 올라갈수록 줄어드는 비율이 비교적 낮아 안정감을
주고 있는 탑으로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대조사의 원통보전은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으로
정면이 4칸이라 중심 칸인 어칸이 따로 없습니다.
대조사 원통보전의 닫집입니다
대조사 원통보전의 주불은 관음보살상입니다
대조사에는 원통보전의 동쪽으로는 향적당이 있습니다
불유정 왼쪽에는 명부전이 있습니다.
불유정 우측에 있는 산신각입니다
원통보전의 서쪽으로는 불유정이 있습니다
불유정에는 부처님의 젖이라 하여 목 말라 하는 이들에게 갈증을
해소해 주는 맑은 물이 샘솟고 있습니다
현존의 당우로는 원통보전과 극락보전 산신각 명부전
요사체 범종각 수각 등이 있습니다
대조사 원통보전 앞에는 석탑이 서 있고 석탑의
우측에는 새로 건립된 종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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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성흥산 대조사 전설
백제시대 대표적인 산성으로 서기 501년에 쌓은 임천 성흥산성 아래에
황금새의 전설을 간직한 대조사와 미륵석불이 있는데
백제성왕 5년부터 5년간에 걸쳐 창건했다는 대조사는
신비스러운 전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부여 대조사는 백제 고찰입니다.
겸익대사가 인도에서 수학하고 귀국한 후 72권의
경전역본을 만들어 흥륜사에 두었습니다.
어느 날 밤 꿈에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불경 번역을 찬탄하고는 갑자기
큰새로 변하여임천 가림성 위로 사라졌기에 겸익대사가 뒤쫓아가보니
큰 새는 간 곳이 없고 꿈에서 친견한 관세음보살이 앉아
계시기에 놀라서 소리치며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런 꿈이 며칠 반복되자 겸익대사는 이 사실을
임천성의 성주에게 알렸습니다.
성주는 반신반의하면서 대사와 산위에 올랐더니
전에 없는 황금 관세음보살이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나라에 알렸더니 성왕이
크게 감동하였습니다.
마침 성왕이 협소한 웅진(공주)에서 넓은 소부리(부여)로
수도를 옮길 마음을 가졌던 터라,
그렇게 되면 거림 성흥산성은 수도를 지키는
중요한 곳이 될 것이었습니다.
성왕은 이때부터 그 자리에 불력으로 국가안태와
소호를 비는 큰 절을 짓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성왕 5년 초파일을 기하여 공사를 시작하여 5년 만인 성왕 10년에
성을 쌓고 절을 다 지었습니다.
불사를 하는 동안 밤에도 큰 새가 날아와 대낮같이
밝혀주어 불사를 일찍 마칠 수 있었답니다.
그래서 절 이름을 황금빛 큰새가 나타났다 하여 대조사라 지었고
관세음보살이 나타난 큰 바위에 석불을 조성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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