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관촉사를 찾아서
관촉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로 반야산 기슭에 있는
미륵부처님의 성지로 968년 혜명이
창건하였으며 논산에는 많은 설화가
전해오고 있지만 그 중에서 염라대왕의
설화는 유명하여 지금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왔는데 염라대왕은 저승에
논산사람들이 오면 개태사의 가마솥과 강경
미내다리와 관촉사의 은진미륵을 보았느냐고
물어 본다고 하여 죽기 전에 이 세개 보물을
꼭 보고 간다고 할 만큼 논산의 유명한 보물
들인데 그중 단연 논산 제1경에 꼽히는 것이
은진미륵으로 은진미륵부처님의 가피가 살아
쉼 쉬는 천년미륵도량 관촉사인데 경내에
석조미륵보살입상. 연화배례석. 사적비.
석등. 관음전. 석조해탈문. 삼성각이
있으며 관촉사 미륵부처님께서 계신
이곳 지명이 은진이었기 때문에
은진미륵이라고 합니다.
관촉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로 충남 논산시
관촉동 254번지 반야산 기슭에 자리잡은 미륵부처님의 성지로
968년(광종 19) 혜명이 창건하였다고 합니다
관촉사가 자리 잡은 논산에는 많은 설화가 내려오고 있는데 그중에서
염라대왕의 설화는 유명하여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왔습니다
염라대왕은 저승에 논산사람들이 오면 물어보는 말이 있다고 하는데
개태사의 가마솥과 강경의 미내다리 그리고 관촉사의
은진미륵을 보았느냐는 것입니다.
은진미륵은 그만큼 논산의 유명한 보물이기에 전해오는 말인데 그중 단연 논산 제1경에
꼽히는 것이 은진미륵 부처님으로 은진미륵부처님의 가피가 살아
숨 쉬는 천년미륵도량이 관촉사입니다
관촉사의 유래는 38년간에 걸친 불사가 완성되고 1006년(목종)에
드디어 높이 18.1m 둘레 11m 귀의 길이만 해도 3.3m에
이르는 동양 최대의 불상이 968년 모셔졌습니다
동쪽을 수호하는 지국천왕은 비파를들고 있고 남쪽을
관장하는 증장천왕은 보검을 들고 있습니다
서쪽을 관장하는 광목천왕은 용과 여의주를 들고 있고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은 보탑을 들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 미륵부처님의 미간의 백호 수정에서 찬란한 빛이 발하여,
중국 송나라에 까지 이어졌으며,
그곳의 지안이라는 고승이 빛을 따라 찾아와 배례한 뒤
"마치 촛불을 보는 것 같이 미륵이 빛난다"
라고 하면서 사찰 이름을 관촉사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관촉사 경내에는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218호)을 비롯하여
석등(보물 제232호), 연화배례석. 사적비, 관음전,
삼성각, 석조 해탈문 등이 있습니다.
대광명전에는 비로자나 부처님이 주불로 모셔져 있는데 비로자나부처님은
두루 빛을 비추는 존재라는 의미로 태양을 뜻하기도 하는 부처님의 자비
광명이 온누리에 함께하길 기원하는 대광명전 입니다.
대적광전의 본존불은 연화장세계의 교주이신 비로자나 부처님으로 연화장
세계가 진리의 빛이 가득한 대적정의 세계라 하여 대적광전 이라합니다.
비로자나 불상을 모신 대광명전으로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석가여래와 노사나불의 삼존을 모셨습니다.
대적광전에는 비로자나 부처님을 중심으로 한 삼신불을 모시는데 법신불인 비로자나 부처님,
보신불인 아미타 부처님, 화신불인 석가모니 부처님을 봉안하는 것이 상례이지만
관촉사를 비롯한 선종사찰에서는 선종의 삼신설에 따라 청정법신 비로자나 부처님,
원만보신 노사나 부처님, 천백억화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십니다.
관촉사 은진미륵(灌燭寺 恩津彌勒)
미륵부처님을 은진미륵이라 부르는 것은 예전 논산지역은 은진과 노성으로
행정구역이 나뉘어졌는데 관촉사의 지명이 은진이었기 때문입니다.
관촉사 은진미륵 부처님은 서기968년 고려 광종 때
모셔진 것으로 전해옵니다.
전해오는 창건 설화에 의하면 한 여인이 관촉사가 자리 잡은 반야산에
고사리를 꺾으러 갔다가 아이가 우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산속에서 들리는 아이 울음소리가 이상하여 가보니 아이는 없고
큰 바위에서 아이 울음소리만 들렸다고 합니다.
이 소문은 고려 조정에까지 퍼졌고, 광종은 당시 최고의 고승이었던
혜명을 불러, 그 바위로 불상을 만들라고 명하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은진미륵 부처님께서 자리 잡게 되었으며
관촉사가 창건되었다고 전해옵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불상으로 흔히 은진미륵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미륵불의 높이가 18m 입니다
당시 충청도에서 유행하던 고려시대의 지방화 된
불상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합니다.
머리에는 원통형의 높은 관을 쓰고 있고, 그 위에는 이중의
네모난 갓 모양으로 보개가 표현되었는데 모서리에는
청동으로 만든 풍경이 달려 있습니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체구에 비하여 얼굴이 큰 편이며, 옆으로 긴 눈,
넓은 코, 꽉 다문 입 등에서 토속적인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옷 주름선이 간략화 되어 단조롭습니다.
불상의 몸이 거대한 돌을 원통형으로 깎아 만든 느낌을 주며 대형화된
신체에 비해 조각수법은 이를 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광종 19년(968)에 만든 관음보살상이라 전해지는데
이 보살상은 경기·충청일대에서 특징적으로 조성되었던 토착성이
강한 지방적 미의식을 나타내고 있어 주목된다고 합니다
천연의 화강석 암반 위에 허리 아랫부분, 상체와 머리 부분을
각각 하나의 돌로 조각하여 연결하였습니다.
머리에는 구름무늬 같은 머리카락이 조각되어 있고 그 윗부분의 관까지는
정으로 다듬은 흔적이 있고, 관은 8각형으로 깎았습니다.
석조미륵보살입상은 8각형으로 깎은 관 위에 2중의 보관을
올리고 관의 네 귀에는 청동제 풍경을 달았습니다.
석조미륵보살입상의 얼굴은 이마가 좁고 턱이 넓은 사다리꼴로
눈이 옆으로 길게 돌아갔고 코, 입, 귀는 모두 큽니다.
석조미륵보살입상의 굵은 목에는 3도가 있고, 귀는 어깨까지 내려오며,
좁은 어깨에는 법의가 걸쳐져 있고, 양손은 가슴까지 들어 올려
한손에는 연꽃가지를 들고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습니다
고려시대 최대의 석불입상으로서 일명 은진미륵이라고도 하는데
고려시대에는 각 지역에 걸쳐 투박하지만 거대한 불상들이
많이 조성되었다고 합니다.
고려 전기인 968년(광종 19)에 제작된 이 불상은 경기· 충청 일대에서
특징적으로 조성되었던 토착성이 강한 불상으로,
새로운 지방적 미의식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허리를 중심으로 두 개의 커다란 돌을 이어서 만들었는데, 머리만
거대하고 전체적인 비례나 균형이 맞지 않습니다.
석조미륵보살입상의 머리 위에는 높은 원통형 관을 쓰고 그 위에
사각형의 보개(寶蓋)를 이중으로 올려놓았는데,
관의 윗부분은 팔각형으로 다듬어 보개 밑 부분의
팔각 홈과 맞추었습니다.
팔각 홈의 주위에는 단판연화문을 조각하고
네 모퉁이에는 풍경을 달았습니다.
위의 보개는 훨씬 작은 것으로 밑에는 연판 4엽이 조각되어 있으며,
위에는 보주가 올려 져 있습니다.
원통형 관에는 3척 가량의 금동불입상이 있었다고 하며
불상 머리 위의 보개가 이중으로 되어 있습니다.
얼굴은 거대한 장방형으로 이마 위에는 머리칼이 도식적으로 표현되었으며,
눈 · 코 · 입이 아주 큼직하고 뚜렷하게 표현되었습니다.
목에는 삼도가 있으며 귀는 길어서 거의 어깨까지 닿는데 가운데에
구멍이 뚫려 마치 귀걸이를 한 것처럼 보입니다.
대의는 통견으로 몇 가닥의 주름이 얕게 새겨져 있으며 두 손은 몸에
비해 크게 조성되었는데, 가슴 높이까지 들어 올리고 있습니다.
오른 손은 금속으로 된 연꽃 가지를 잡고 있고, 왼손은 약간 아래로 내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어 중품중생인의 수인을 하고 있습니다.
대좌는 따로 마련하지 않고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으며 거대한
돌기둥 같은 신체, 토속적인 얼굴 모습, 도식적이며 비사실적인 조각
수법 등 고려 초기 충청도 지방에서 유행하였던 불상 양식과 같은
것으로서 당시의 지방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백호를 수리할 때 발견된 묵기에 “정덕 16년(968) 신사 4월 15일
(正德十六年辛巳四月十五日)”이라고 적혀 있어 이 시기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968년(고려 광종 19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006년(목종 9년)에 완성되었습니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18호로 지정되었으며
높이 18.12m, 둘레 9.9m로 국내 최대의 석불입니다.
돌을 다듬어서 받침을 만들고 석재를 결구 시켜서 만들었습니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을 받들고 있는 단의 석물입니다
관촉사 석등은 1963.01.21 보물 제232호로 지정 받았으며
앞뜰의 미륵부처님 앞에 놓여있는 4각 석등입니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이 중심이 되어, 아래에는 3단의 받침돌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습니다.
평면이 정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고려식으로,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 새겨진 연꽃무늬가 두터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석등은 특히 중간의 세 줄기 중에서 가장 굵게 두른 가운데 띠에는
8송이의 꽃을 조각하여 곱게 장식하였습니다.
각 층의 지붕들은 처마가 가볍게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네 귀퉁이에는
큼직한 꽃 조각이 서 있어 부드러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관촉사 석등의 꼭대기는 불꽃무늬가 새겨진 큼직한 꽃
봉오리모양의 장식을 두었습니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함께 고려 광종 19년(968)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남한에서는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 제12호)
다음으로 거대한 규모를 보여준다고 합니다
이 석등은 방형 석등으로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입상 앞에 세워져 있으며
조성연대가 뚜렷할 뿐만 아니라 형태 또한 거의 완전합니다.
네모꼴 지대석 위에 복련대를 놓고 간석을 받고 있는데 간주는 굵고
둥근 모양으로 위· 아래와 중앙에 도드라진 테두리가 둘려 있습니다.
상· 하에는 2조의 테두리가 마련되고 중간에는 3조의 테가 둘려 있는데,
가운데의 굵은 테 위에는 꽃 장식을 하였습니다.
석등은 꽃잎이 두껍게 조각된 앙련대 위에는 방형 화사석이 2층으로 만들었는데
주된 화사석인 1층 화사는 화창을 별도로 만들지 않고
네 개의 사각 기둥만 세웠습니다.
2층 화사는 한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 뒤쪽에만
감실처럼 화창을 설치하였습니다.
얇고 납작한 각 층의 옥개석은 방형으로 낙수 면의 경사가 완만하며, 약간
반전되어 경쾌한 네 귀에는 귀꽃을 장식하여 변화를 주고 있습니다.
옥개 정상에는 보주가 놓여 있는데 조각수법이 앙련석의 꽃잎
표현과 비슷하게 두툼하게 만들었습니다.
고려 전기에 조성된 대형 석등으로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함께
968년(광종 19)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며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다음으로 규모가 크다고 합니다
관촉사 석탑은 석등과 배례석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석탑은
미지정문화재 이며 파손이 심한 편입니다.
관촉사 석탑은 원래 5층 석탑이었으나 세월의 흔적과 파손 등으로
현재는 4층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관촉사 석탑은 화강석으로 만든 높이 3.43m의
고려시대 석탑입니다.
관촉사 석탑은 현재 남아있는 모습은 2층의 기단 위 4층 석탑이지만
옥개석의 체감 비율로 보아 오층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며
파손이 심하여 군데군데 시멘트로 보수를 하였습니다.
석탑의 지대석은 땅에 묻혀있고 하층시단은 면석과 갑석만 드러나 있으며
상층 기단은 하대갑석 위에 새겨진 2단의 중석받침 위에 있습니다.
상대중석의 각 모퉁이에는 우주가 있고, 우주와 우주 사이에는
1개의 탱주가 있으며 상대중석 위의 상대갑석과 초층 옥신
사이에는 별석 1매가 놓여 있습니다.
석탑의 상대갑석과 초층 옥신 사이에는 별석 1매가 놓여 있고 그 위로
탑신부가 놓여 있으며 옥신의 각 모퉁이에는 우주가 조각되어 있고,
옥신 위의 옥개석에는 3단의 층급 받침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상륜부는 특별한 조각이 없이 보주만 올려 있고 옥개석의 체감비로 보아
3층의 옥신과 옥개석이 없어진 듯하며 상륜부는 보주만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고려시대의 배례석으로, 연화문의
장식 등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으며 1976년 1월 8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배례석은 관촉사 석탑 앞에 있는 직사각형의 대석으로 길이 204cm, 너비 103cm, 높이 40cm이며
바닥에는 2단의 괴임을 새기고 그 위 면석에는 전면에 3개, 측면에 2개의 안상을
새겼으며 안에는 버섯구름 형태를 양각했습니다.
배례석 상면에는 복판 8엽 연화문 3구가 조각되어 있으며, 연꽃은 판단첨형의
연화돌 대문이며 가운데에는 커다란 씨방이 융기되어 있으며. 연꽃은 단판
8엽이고 중앙에는 커다란 원좌가 있으며, 그 안에는 가운데에 1개,
주변에 8개의 자방이 연주문 처럼 음각으로 돌려져 있습니다.
연꽃의 잎 끝은 뾰족하며 그 사이에 다시 중판의 연꽃잎이 뾰족하게 양각되어
있으며 연화문 사이에는 약간 작은 연화 두 송이가 양각되어 있습니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관촉사의 조성 경위를 기록한 사적비로
측면에는 관촉사사적비명이 새겨져 있고 관촉사의 역사와 미륵불의
조성 경위를 알 수 있도록 해 주는데 그 가치가 있는 것으로
1743년(영조19)에 건립하였습니다.
사적비의 내용은 968년(광종 19) 사제촌의 여자가 반야산 서북쪽 모퉁이에서
고사리를 채취하고 있는데, 홀연 동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상하게 생각하고 가보니 큰 돌이 땅 속에서 솟아나오고 있었다.
괴이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집으로 돌아와 사위에게 말하니,
사위가 곧 현감에게 고하였다.
관에서는 조사와 함께 회의를 통하여 이는 반드시 불상을 만들 징조다.
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혜명이 공사를 맡을 사람과 불상을 만들 사람 천거되었다.
조정에서는 공장인 100여 명을 선발하여 968년(광종 19)에 일을 시작해서
37년이나 경과한 1006년(목종 9)에 만들어졌으며,
불상의 몸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서려 중국의 승려 지안이 이를 보고 쫓아와서
‘광명이 동시에 서로 응한다’라고 하여 관촉사라 하였다.
사적비의 측면에 '관촉사 사적비명'이라는 글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관촉사에 현존하는 당우로는 관음전과 삼성각 사명각·
해탈문 현충각 등이 있습니다,
문화재는 보물 제218호로 지정된 석조미륵보살입상과 보물 제232호인
석등,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3호인 배례석, 충남도 문화재
자료 제79호인 석문, 오층석탑 사적비 등이 있습니다.
관촉사에는 1499년(연산군 5) 가야산 봉서사에서 개판한 목우자수심결·
『몽산법어·심우십도 등의 판본이 소장되어 있었으나,
뒤에 해인사로 옮겨갔다고 합니다.
윤장대는 석문 가까이 윤장대가 놓여 있으며 내부에는 불경을
넣어두었는데 이것을 한번 돌리면 불경을 한 번 읽은 것과
같은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미륵부처님 바로 앞에 세워진 전각으로써 미륵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는
법당으로 미래의 부처님이신 미륵부처님을 모신 전각입니다.
미래에 미륵부처님이 제도하는 세계를 '용화세계'라고 하여 용화전이라고도
하고, 미륵의 한문의역인 '자씨'를 붙여 자씨전이라고도 부르는데
관촉사에서는 은진미륵부처님 바로 앞에 전각을 세워
'미륵전'이라고 칭합니다.
명부전은 시왕전 또는 지장전이라고도 하며 주불은 지장보살님이
모셔져 있으며,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협시로 봉안하며
좌우에 명부시왕상을 모셔져 있습니다.
관촉사 삼성각 입니다
관촉사 삼성각은 산신각으로도 불리워져 왔으며
곧 산신·칠성·독성을 함께 모신 경우를 삼성각이라 하며
원래 각각 별도로 모셨을 때는 산신각,
칠성각, 독성각이라 불리워집니다.
삼성각으로 올라 가는 길 옆에 음각된 낙서 입니다
관촉사 종각에 있는 범종입니다
사찰 입구 양쪽에 돌기둥을 세우고 윗면 천정에 다섯 개의 장대석을 얹은
4각형의 석문이 있으며 문기둥의 오른쪽에는 관촉사,
왼쪽에는 해탈문이라고 음각되어 있습니다.
석문은 충남 문화재자료 제79호로 크기는 바깥너비 194cm, 안너비 137cm,
바깥높이 196cm이며 석문 자체의 크기는 높이 1.8m, 너비 2.0m입니다.
다른 사찰에서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문으로 입구의
양쪽에 돌기둥을 세우고 윗면 천장에 5개의 장대석을 얹음으로써
4각형의 석문을 이루고 있습니다.
구전에 의하면 관촉사를 창건하였을 때 참배객이 너무 많이 몰려 이를
막기 위해 담장을 쌓고 사방에 문을 내었는데 그중 동문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이 석문이라고 합니다.
관촉사에서 내려오는 길이 반공청년단 논산북지부에서 세운
이승만 대통령의 추모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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