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팔도문화재답사

강경 미내다리를 찾아서

by 송강 (松岡) 최 재 모 2013. 5. 17.

 

강경 미내다리를 찾아서

 

 

염라대왕도

알고 있는 미내다리

춘향전의 이도령도 밟고

지나갔다던 무지개 모양의

미내다리는 강경천변을 따라

동쪽으로 조금만 가면 뚝 아래

강바닥에 있는데 이 하천을 미내

라고 해서 미내 다리라고 하며 미내

라는 스님이 시주를 받아 만들었다고도

하는 3개의 아치형 돌다리로 이 다리는

충청도와 전라도를 잇는 다리로 과거를

보러 가던 유생들이 이 다리를 건너면서

과거에 급제해 달라고 소원을 빌었고 급

제하면 고향으로 돌아갈 때 남은 은전을

다리 밑에 던지면서 공직생활에 선정을

약속한 다리였다고 하니 선조들이 우리

에게 물려준 선비정신의 소중한 문화

유산으로 충남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된 강경 미내다리입니다

강경읍으로 들어가는 상강경교를 건너기 직전 강경천의 왼편 둑을

따라 1km 쯤 남쪽 제방 안에 있는데 이 하천을 미내(渼奈)라고

부른데서 '미내 다리 라고 합니다.

염라대왕도 알고 있다는 미내다리. 춘향전의 이도령도 밟고 지나갔다는

무지개 모양의 미내다리는 강경천변을 따라 동쪽으로

조금만 가면 뚝 아래 강바닥에 있는데

이 곳을 흐르는 하천을 미내라고 해서 미내 다리라고 하며 미내 라는

스님이 시주를 받아 만들었다고도 하는 다리입니다

미내다리는 강경천변 뚝 아래 강바닥에 복원되어 있는데 다리의 방향이

강경천을 가로질러 있지 않고 강물의 흐름과 같은 방향으로 복원되어

어색한 감은 있으나 곡선이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홍예교입니다

미내다리는 3개의 아치형 돌다리로 이 다리는 충청도와 전라도를 잇는

다리로 과거를 보러 가던 유생들이 이 다리를 건너면서 과거에

급제해 달라고 소원을 빌었다고 하는데

선비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고향으로 돌아갈 때는 남은 은전을 다리

밑에 던지면서 공직생활에 선정을 약속한 다리였다고 하니

미내다리는 선조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선비정신의 소중한 문화유산

으로 충남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된 강경 미내다리 입니다

비문에는 '미내'라는 스님이 시주를 받아서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예전에 나무다리가 있었는데 조수가 물러가면

바위가 보인다해서 조암교 또는 미교라 했다고도 합니다.

강경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금강을 통하여 강경∼군산(37km) 간 정기

운항선이 다녔는데 금강 하구둑이 생긴 이후로 뱃길이 끊기고 강경의

황산포구엔 불 꺼진 등대만 외롭게 서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강경의 황산나루엔 하루 100여 척의 고깃배와 상선이 줄을 섰고,

전국의 내로라하는 장사치들이 2만∼3만명 모여들어 원산에 이어 조선

2대 내륙 항구로 논산은 강경 덕에 산다는 말도 있습니다.

국가차원이 아닌 민간차원에서 돌다리를 놓는다는 것은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나 지금도 남아있는 다리의 흔적으로 볼 때

옛 강경시장의 높은 경제력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강경은 지금도 젓갈생산지로 유명한 곳으로 물자의 소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민간인들이 주도하여 놓은 조선시대의 돌다리 두 곳이 남아

있는데 이 곳 미내 다리와 원목 다리라고 합니다.

강경에는 죽어서 염라대왕 앞에 가게 되면 염라대왕이 너는 이승에 살 때

개태사의 가마솥과 관촉사의 미륵불, 강경의 미내다리를 보았으냐 라고

묻기 때문에 죽기 전에 꼭 미내다리를 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미내다리는 정월 보름날과 팔월 열 나은날 밤, 이 다리 위를 일곱 번 거닐며

소원을 외우면 소원이 이루어지고, 아들 낳기 원하는 아낙들도 이 다리를

밟으면 아들을 얻는다는 속설이 있다고 합니다

염라대왕도 알고 있는 미내다리 !

춘향전의 이도령도 밟고 지나갔다던 무지개 모양의 미내돌다리 !

여지승람에는 미내천에 다리가 있었는데 조수가 물러가면 바위가

보인다 해서 "조암교(潮岩橋)"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비문에는 조선 영조 7년(1731)에 건립된 것으로 조암교로도 불리웠다는

미내다리는 강경천을 미내라고 부른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당시에는 이 다리가 있는 곳은 큰 시내로서 바닷물과 서로 통하였다

하였으니 조수가 왕래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해주고 있습니다.

여름 장마철과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릴 때면 홍수와 눈이 쌓여 교통이

두절되고 인명의 피해가 자주 발생되자 다리를 놓았는데

처음에는 지금처럼 무지개모양의 홍예교가 아닌 평교였다고 합니다

은진미교비에 적힌 건립기에 의하면 강경사람인 석설산, 송만운이

주동이 되어 황산의 유부업과 승 경원, 설우, 청원과

여산의 강명달, 강지평이 재물을 모아 1년 만에 전라도와 충청도를

잇는 현재의 다리를 축조하였다고 합니다.

미내다리는 석재만을 사용된 3개의 아치형 돌다리로 수학적 계산과

역학적 구성 및 예술적 토목 건축술의 종합적 공법으로

이룩된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다리 라고 합니다.

세개의 아치형 교량 중 가운데 홍예가 크고 남북 쪽 홍예는 약간 작으며

받침은 긴 장대석을 쌓아 올리고 그 위에 홍예석을 돌려 만들었으며

석재는 40㎝×50㎝×110㎝의 장대석을 사용하여 만들었습니다.

미내다리는 가운데 홍예 정상부에 호랑이 머리를 깊게 선각한 종석을

다리 난간 밖으로 돌출시켜 놓았으나 부분적으로 파손되었습니다.

북쪽 홍예는 용머리를 새겼고 난간석에는 화문을 새긴 듯 하나 마멸

되었으며 남쪽 홍예 정부는 조각이 없습니다.

미내다리는 가운데 홍예의 중심에 용머리를 새겨서 끼워넣었는데

이는 사악한 귀신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비보사상에서

조성한 것이라고 합니다

난간석에는 화문을 새긴 듯 하나 지금은 마멸되어 식별하기 어려우며

남쪽의 홍예 정상부에는 조각이 없고 홍예와 홍예 사이의 간지에는

양쪽의 보이는 면으로 가로 35cm, 세로 150cm 정도의 장대석을

잘 조화시켜 쌓았으며,

다리 윗면에는 턱진 장대석을 난간 밖으로 돌출시켜 보도와의 경계석을

끼우도록 하였으며 교각의 석축은 다듬은 돌로 쌓아올렸습니다

홍예 사이의 간지에는 드러난 면이 35㎝×150㎝ 정도의 장대석을 잘 치석

하여 반월형의 둘레에 따라 개개의 돌을 사다리꼴로 다듬은 솜씨는

수학적 계산과 정확성을 나타낸 것으로

교각 지반을 쌓아 놓은 것과 부착제를 사용하지 않고 제형의 돌을

맞추어 아치를 형성케 한 구성은 당시 석축 조성 기술이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리 난간의 용머리

다리 위의 보도는 긴 장대석을 두 줄로 깔았습니다

다리를 가로지르는 긴 장대석의 양쪽 끝에는 보도의 경계석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홈을 파서 끼워 넣었습니다

다리 옆 자연석 위에 파손된 "은진미내교비(恩津渼奈橋碑)"가 방치되어

있었으나 근래에 부여박물관에 옮겨 보존하고 있다고 하며,

대신 근래에 새운 사적비가 다리 옆에 있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