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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문화재답사

천호산 개태사지를 찾아서

by 송강 (松岡) 최 재 모 2013. 6. 8.

 

천호산 개태사지를 찾아서

 

 

개태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물리친 후 태조

23년에 지은 사찰로 천호산

아래 황산벌에서 치열한 전쟁끝에

후 백제군을 정벌하여 신검 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고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은 기념으로 개태사를 완공하고

황산이라부르던 뒷산을 천호산이라하였는데

개태라는말은 앞으로 태평성대를 열것이라는

의미라고 하며  개태사는 고려의 호국사찰로

창건 당시에는 대규모의 사찰이었으나 고려

후기 왜구의 약탈로 폐사가 되고 조선조에

이르러 개태사지에서 약 500 여m 떨어진

자리에 새로 개태사를 지었다고 하며

개태사지에는 지금도 건물 자리와

주춧돌, 석조, 불상의 대좌,

축대들이 남아 있습니다

 

개태사지는 충남 기념물 제44호로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에 있으며

개태사로부터 약 500m 떨어진 외딴 곳에 있습니다

 

개태사지는 백제의 계백 장군이 5천 결사대를 이끌고 근처 황산벌

에서 신라와 최후의 전투를 벌였던 장소로 유명한 곳입니다

 

개태사지는 태조 왕건의 영정을 모셨던 진전지와 부처를 모신 불전지의

가람 배치가 확인되고 진전지 남쪽으로는 다양한 건물지와 관련

유구 등이 발견돼 관심을 끌고 있다고 합니다

 

개태사지는 금당지와 중문지를 포함해 개태사지 전역에 10동 이상의

건물지가 있으며 이와 관련된 기단, 초석, 적심, 배수로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개태사지는 부처를 모신 불전지의 경우 금당 양 측면으로 건물지가 배치되고

동쪽으로 넓은 대지에 별도의 건물들이 배치된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개태사지는 불전지와 계단, 중문과 화랑의 기단석축이 길이 약 51m, 높이

약 4m의 규모로 남아 있고 고려시대의 장대석 석축이 있습니다. 

 

개태사의 옛 터에 남아 있는 것으로 스님들이 사용하는 물을 담아두던

충남 문화재 자료 275호로 지정된 개태사지 석조 입니다

 

충남 문화재 자료 275호로 지정된 개태사지 석조는 2기가 있는데 1기는 풍화

작용으로 마모가 심하며 석조가 마을 안길에 있어 더 이상의 마멸을

방지하고자 땅속에 묻힌 그대로 본존중이며,

 

1기는 가정집 담벼락 아래 가로로 반 이상 묻혀있는 상태로 있는데

이 가정집은 개태사지 복원을 위하여 문화재청에서 매입하여

현재는 빈집으로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화강암을 파서 만든 이 석조는 가로 305cm, 세로 133cm 크기로 개태사에서

저수용으로 사용했던 석조물로 담장 안쪽에 보이는 석조의 바깥

면에는 안상무늬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개태사지 석조는 논산 지역에서 거의 볼 수 없는 고려시대 석조로 개태사의

사세와 규모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개태사지 절터에서 출토된 지름 105cm 크기의 청동 북은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이 절터에 있었던 석조불좌상 1구는 개태사지에서

북쪽 약 200m 떨어진 용화사라는 작은 사찰에 모셔져 있습니다

 

이 석불은 원래 개태사석탑 앞에 봉안되어 공양을 올리는 형태로 조성

되었던 보살상인데 1946년 현 위치에 용화사를 건립한 주지 스님이

지금의 사찰로 모셨다고 합니다.

 

개태사는 서기 936년 천호산 아래 황산벌에서 치열한 전쟁 끝에 후

백제군을 정벌하여 신검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은 그 기념으로 4년의 대역사 끝에 태조 3년(940)

개태사를 완공하고 통일신라시대에는 황산이라 부르던 그

뒷산을 천호산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개태라는 말의 뜻은 앞으로 태평성대의 시대를 열 것이라는 의미라고 하는데,

당시 절 안에는 태조의 초상화가 있어서 나라에 전쟁의 기미가 있으면

그 앞에 기원문을 올려 나라가 태평하기를 빌었다고 합니다.

 

개태사는 고려의 호국사찰로 창건 당시에는 승려가 무려 1,000명이나 기거하는

대규모의 사찰이었으나 고려 후기에 이르러 왜구의 빈번한 약탈에 의해

차츰 기울어지면서 폐사가 되고 조선조에 이르러 당시 개태사지에서

아랫쪽 약 500여m 떨어진 지금의 자리에 새로 개태사를 지었습니다.

 

개태사지가 지금은 폐사 되었지만 창건기의 개태사지에는 지금도 건물

자리와 주춧돌, 석조, 불상의 대좌, 축대들이 남아 있습니다.

용화사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논산 천호리 비로자나불상은

유형문화재 91호로 지정된 석불상입니다

 

고려 태조의 개국사찰이었던 개태사지로부터 북편 언덕 위로 약 200m

떨어진 용화사라는 작은 개인 사찰 대웅전에 있는 석불상입니다.

 

논산 천호리 비로자나불상은 그동안 행방을 알 수 없었는데

1972년에 알려졌다고 합니다.

 

이 공양상은 발견 당시 머리가 잘려지고 없던 것을 다시 복원 하였는데

석질이 다르고 석공기술이 높지 못해 없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석불상은 왼쪽 무릎은 세우고 오른쪽 무릎은 꿇은 공양하는 자세를

하고 있으며 두 손은 가슴 앞에 들어 연꽃가지 등을 들고 있는

형태로 보이나 지금은 없어졌습니다.

 

원래는 부처님을 의미하는 불탑 앞에서 오른쪽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가슴에 대고 꽃을 바치는 모습으로 손 안에 홈이 파져 있는데

쇠붙이로 만든 연꽃 줄기를 꽂았을 것으로 추정 됩니다

 

약왕보살이 부처님께 꽃을 공양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상을 공양보살상

으로 부른다고 하는데 보살의 크기를 보아 인체 크기와 거의 같게

만들어진 등신상으로 추정됩니다.

 

이 공양상은 발견 당시 머리 부분이 없어진 상태였으며 그 후 머리를 복원

하였으며 통견의 두꺼운 천의를 걸쳤으며 군의에는 넓은

띠 주름이 아래로 드리워져 있습니다

 

이 공양상은 단정하면서 통통한 몸집과 큼직한 손과 부피감 있는 팔,

두꺼워진 옷의 선 주름 등이 고려 초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후삼국의 통일을 기념하여 만든 점에서 의미가 높다고 합니다

 

이 석상의 문화재명은 논산 천호리 비로자나불로 되어 있는데

수인이 비로자나불과 비슷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보이지만

논산 개태사지 석탑공양자상으로 불러야 할 것입니다

 

암자이름이 용화사라면 미륵불을 주불로 모셔야 하는데 대웅전에는

좌우의 협시보살 보다 작은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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