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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묘를 찾아서

[스크랩] 헌덕왕릉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12.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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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솔에 둘러쌓인 강변의 평지왕릉 - 헌덕왕릉

 

 

 

 

 

신라 제 41대 헌덕왕의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언승으로  38대 원성왕의 손자이자  39대 소성왕(昭聖王)의 동생이다. 800년에 조카인 애장왕(哀莊王;재위 800-809년)이 13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섭정을 하였다. 그러나 애장왕이 친정체제를 갖추고, 그에따라 정치일선에서 물러나자, 여기에 불만을 품고 809년 난을 일으키고 무력으로 왕권을 찬탈하였다.

통일신라의 안정기가 지나고 지배계층간의 권력투쟁이 심화되었던 시기의 왕이라고 할 수 있다.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809년에 왕이 되어 826년까지 18년간 왕위를 재위하면서 농사를 장려하고 친당정책을 폈다 .헌덕왕은 당나라와 외교 관계를 유지하면서 김헌창, 김범문 등이 일으킨 두 차례의 반란을 평정하고 패강(대동강)에다 300리에 달하는 패강장성(긴 성)을 쌓는 등 국방에도 힘쓴 임금이다. 

 

죽은  뒤 시호를 헌덕이라하고 천림사(泉林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헌덕왕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헌덕왕의 동생인 수종이 왕위를 계승히였는데 바로 42대 흥덕왕이다

 

 

 

헌덕왕릉

 

헌덕왕릉

 

헌덕왕릉은 시내에서 보문으로 가는 북천북로에서 약 100 미터 북쪽으로 들어간 지점에 있다. 산지에 조성되어 있는 신라 후기의 일반 능과는 달리 평지에 조성되어 있는데 능 주변은 울창한 소나무 숲(도래솔)으로 둘러쌓여 있고 능의 입구에는 큰 주차장이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헌덕왕릉 주차장과 도래솔

 

헌덕왕릉과 알천(북천)

 

 

능의 앞에는

 경주 도심 북쪽을 흐르는 북천(알천)이 있다. 북천(알천)은 그의 할아버지인 원성왕이 즉위할 때 원성왕(연승)보다 서열이 높은 김주원이 홍수로 알천을 건너오지 못해서, 왕으로 추대된 일화가 있는데, 그런 사연을 가진 알천 북쪽에 능의 자리를 잡은 것은 이런 일화를 상기시키면서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한 측면이 아니었을까? 

『삼국사기』에 “왕이 18년(826) 10월에 돌아가시니 시호를 헌덕(憲德)이라 하고, 천림사(泉林寺) 북쪽에 장사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 왕력 편에는 " 왕릉은 천림촌(泉林村) 북쪽에 있다.”고 했다. 천림사(泉林寺)나 천림촌(泉林村)의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능의 남동쪽에 절이 있었음은 틀림없다.

 

30여 년 전, 북천 하류의 자갈 모래를 채취한 이래 큰물이 져서 물살에 강 바닥이 많이 패였을 때 탑 돌과 주춧돌, 다듬은 돌 등이 드러났다.

사찰의 흔적이 뚜렷하였으나 사찰명은 알 수가 없었고. 아마 임천사지일거라는 추정이 높다

 

유물은 가능하면 원래의 위치에 두는 것이 좋다는 견해에 따라 북천 북쪽 높은 곳에 땅을 고루어 울타리를 치고, 냇바닥의 석조 유물들을 모아서 보존하였으나 시일이 지나면서 도난의 우려가 있고, 강변 도로를 북쪽으로 내면서 박물관으로 옮겨, 지금은 그나마 절 터의 흔적도 알아볼 수 없다.

 

 

 

 

 

또한 능 북쪽에는 수원이 풍부한 오래된 샘이 있으니, 지통(地通)우물 또는 동천(東泉)이라 부른다.

보문저수지를 막은 1950년대 후반부터는 옛날같이 물이 많이 나오지 않고, 지금은 시멘트로 덮어 씌워두고 양수기로 물을 퍼내어 쓰고 있다.
 

조선시대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헌덕왕릉은 부(府)의 동쪽 천림리에 있다.”고 했다. 이런 기록들을 종합하여 볼 때 경주 동쪽 동천동에 있는 이 무덤이 헌덕왕릉임을 추정하기에 무리가 없어보인다.

 

 

 

왕릉은 당나라 능묘제를 받아들인 원성왕릉(괘릉)이나 흥덕왕릉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무덤의 높이는 6미터이고 지름은 26미터 이며 둘레에 12지상이 조각되어 있다

헌덕왕때는 이미 통일신라의 국력이 매우 쇠약해져 있었는데도 신라의 왕릉으로서는 호화롭게 축조된 것은 이례적이다

 

무덤의 외형은 흙으로 덮은 둥근 봉토분으로 봉토 밑에 지대석(地臺石)을 깔고, 무덤 밑둘레를 따라 잘 다듬은 판석을 사용하여 병풍처럼 돌려 무덤의 보호석을 마련하였다. 판석과 판석 사이에는 두 판석을 맞물리게 하는 탱석을 끼워 판석을 고정시키고 그 위에 갑석(甲石)을 덮었다.

 

 

 헌덕왕릉의 상석과 난간석

 

 

난간과 호석의 12지

 

 

 

 

 

 

 

또, 탱주 표면에는 방향을 따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조각되었고, 호석에서 일정한 거리에 박석을 깔았으며, 그 밖으로 난간을 돌렸다. 난간 기둥에는 상 ·하에 구멍이 있어 기둥과 기둥 사이에 2개씩의 관석(貫石)을 끼웠는데, 이는 다른 왕릉과 같은 형식이다

 

탱석에 조각된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중에서 현재 남아있는 상은 쥐(子), 소(丑), 호랑이(寅), 토끼(卯), 돼지(亥) 등 5개 상(像)뿐인데 나머지는 조선 영조 18년(1742) 8월 22일에 경주에 태풍과 비가 몰아쳐 북천이 범람하자 헌덕왕릉이 무너졌는데 그 때 유실되어 없어졌다.

이에 대해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9월에 영조에게 사실을 아뢰자 관찰사에게 향축(香祝)을 보내어 수축토록 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7개상은 유실되어 다시 찾기가 어려웠던 것으로 추정이 된다.

 

 

 

남아있는 5상

 

 

 

헌덕왕릉 12지의 돼지상

 

 

남아있는 5개상은 모두 김유신장군묘나 황복사지 기단의 12지상 등과 마찬가지로 평복을 입고 있으며 머리는 오른쪽으로 보고 있다.

또한 왕릉 주변은 신라 제42대 흥덕왕릉과 마찬가지로 무덤의 전면에 석인상 및 석사자, 화표석, 혼유석 등을 갖추고 돌난간을 능 호석 주위에 두른 것으로 추정이 되고 있으나, 현재 석인상,석사자,화표석은 사라지고 없으며 주위의 돌난간은 1979년에 복원을 한 것이다

 

 

헌덕왕릉의 남쪽 내 건너편에 경주중고등학교가 있다.  이 학교의 정원에는 출처가 어디인지 모르는 무인석의 머리 부분이 하나 놓여 있다. 다른 냇돌에 많이 부딪혀 닳았지만, 괘릉이나 흥덕왕릉의 무인석과 같이 머리를 동여맨 넓은 띠가 뒤로 늘어뜨려 있는 것으로 보아 왕릉에 세워졌던 석인상이며 가까운 헌덕왕릉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마 홍수로 유실되어 북천바닥에 뒹굴고 있던 것을 수습한 것으로 보여진다.

 

 

 

분황사 모전석탑의 사자

 

또 분황사 모전석탑 기단 위에 돌사자 두 마리가 남서, 북서 방향으로 안치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헌덕왕릉의 것을 옮겨왔다고 하는 이야기도 회자되고 있는데 사실일 것으로 보여진다.
그 이유로,

첫째  삼국시대에는 탑 주위에 돌사자를 배치한 예가 없다는 것이고,

둘째  사자의 조각 솜씨와 석질(石質)이 분황사석탑 1층 사방에 새겨진 금강역사상과 다르다는 점.

셋째  성덕왕릉이나 괘릉(원성왕릉) 주위에 배치된 돌사자와 이 돌사자의 분위기가 흡사하다는 점이다.

 

 

 

일제강잠기의 헌덕왕릉-향로석이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헌덕왕릉을 찍은 사진이다. 사진에 보면 향로석이 한 점 보이는데 그 크기는 길이 80cm, 넓이 42cm, 높이 35cm라고 한다

 

받침대 위에 안상문이 사방에 투각되어 있어서 사찰에 사용되는 일반형의 배례석과 흡사한 형태이지만,

중앙의 연화문이 도드라져서 음식을 차려놓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발견 장소가 왕릉인 점으로 보아 배례석일 가능성은 적으며 오히려 향로석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많으나 확실한 용도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다

이 향로석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야외 전시장에 진열되어 있다

 

 

 

왕릉 주변의 도래솔

 

 

2003년 태풍 14호 매미로 인하여 난간이 무너지고 소나무가 쓰러지는 피해를 입은 헌덕왕릉.

곧바로 복원을 하였다

 

 

 

 

1930년대 일본 건축학자 노세 우시조(能勢丑三)가 경주 헌덕왕릉을 발굴조사하였다. 노출된 십이지상 옆에서 포즈를 취라도 있는 노세 우시조

 

일제강점기때의 헌덕왕릉빈번한 홍수로 인하여 북천의 돌이 능의 앞까지 덮혀 있다

 

 

 

분황사와 헌덕왕릉의 물싸움

 

알천의 홍수와 관련하여 강의 남북에 있는 동천 마을과 구황 마을 사람들 사이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매년 여름이면 북천(알천)을 사이에 두고 냇가 양쪽 마을 사람들은 홍수로 늘 불안에 떨어야 했다. 그래서 동천리 사람들은 홍수의 피해를 막아달라고 헌덕왕릉에 가서 빌고, 구황리 사람들은 분황사 부처님께 기도를 드렸다.

홍수 때마다 동천의 헌덕왕 혼령은 물길을 남으로 돌리려고 애를 쓰고, 분황사 부처님은 구황 사람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물길을 북쪽으로 돌리려고 하였다. 물길이 북쪽으로 흐를 때는 헌덕왕릉의 석상과 비석이 땀을 흘리고, 남쪽으로 치우쳐 흐를 때에는 분황사 부처님이 땀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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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덕왕의 혼령과 분황사 부처님이 워낙 치열하게 다투니 알천 냇물이 한 때는 하늘로 치솟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홍수를 막기 위해 동천 사람들은 제방을 쌓고 구황 사람들은 보문동 숲머리에 5리에 걸쳐 나무를 심었다. 숲머리라는 마을 이름도 숲의 시작 부분이라 하여 생긴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힘을 거스릴 수는 없어 분황사 북편은 황무지로 변하고 헌덕왕릉은 반 이상 허물어 졌을 뿐만 아니라 석사자며 문무인상도 모두 홍수로 유실되었다. 현재 분황사 모전석탑 모서리에 있는 석사자는 헌덕왕릉에 있던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블로그-"정헌의 문화재기행" : 분황사와 헌덕왕릉의 물싸움>에서</블로그-"정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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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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