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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묘를 찾아서

선덕여왕릉을 찾아서

by 송강 (松岡) 최 재 모 2012. 9. 15.

 

선덕여왕릉을 찾아서 

 

 

선덕여왕릉은

경주 낭산에 있는데

낭산은 해발100m의 야산

으로 위에서 내려다보면 이리가

엎드려 있는 형상이고, 누에고치

처럼 남북으로 길게 누워 있는 모양의

이 산은 선덕여왕이 자신의 죽음을 예견

하고 내가 죽으면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하자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디냐고 물으니 여왕은

낭산 이라 했다고 하는데 우연의 일치일까?

여왕을 낭산에 장사지낸 뒤 30년이 흐른 후

왕릉 아래 사천왕사가 세워졌다고 하는데

사천왕이 사는 사왕천의 위쪽을 도리천

이라고 하는바 선덕 여왕 릉의 지기

삼사를 확인해 주는 것 같습니다

 

 

 

선덕여왕은 신라 27대 왕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인데 신라에는

세분의 여왕이 있었다고 하며 첫째 여왕은 27대 선덕여왕,

28대 진덕여왕, 51대 진성여왕. 이렇게 세분입니다

 

 

 

당시 신라에는 백제와 고구려 등 주변국의 빈번한 침략과

  신라의 내부에서도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있었으며

 

 

 

당태종이 선덕여왕의 즉위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현실에서

 선덕여왕이 왕권을 강화하고 선정을 배풀기 위해서

 

 

 

선덕여왕은 지기삼사를 통해서 자기가 스스로 머리가 좋다 것을

사방에 알리고 황룡사 9층목탑, 분황사건립, 첨성대 축조 등

많은 업적을 남기고 선정을 배풀었습니다 

 

 

 

선덕여왕릉은 경주시내 동쪽 낭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데

낭산은 해발 100m 남짓한 야산으로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이리(狼)가 엎드려 있는 듯 하여 낭산이라고 합니다

 

 

 

신라가 숲을 중요시하던 시절에 낭산은 신이 내려와 놀던 곳

이라 해서 '신유림' 으로도 불렸다고 합니다다

 

 

 

삼국유사에 선덕여왕은 죽는 날을 미리 예언하고

도리천 에 장사지내 달라고 하였답니다.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디냐?"는 물음에 여왕은

"낭산"이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우연의 일치라고나 할까? 선덕여왕을 낭산에 모신 뒤

30년이 지난 뒤에 왕릉 아래에는 사천왕사가

세워졌다고 합니다

 

 

 

사천왕이 사는 사왕천의 위쪽을 '도리천'이라고 하는데

왕릉에서 남서쪽 아래에는 사천왕사지가

세워졌다고 합니다

 

 

 

부처의 세계는 수미산이라는 산 위에 층층이 쌓여있는

여러 하늘나라 위에 있다고 합니다. 

 

 

 

제일 밑바닥인 인간세상으로부터 불국정토까지는 수미산을

오르기 시작하여 28개의 하늘나라를 하나씩

차례로 거쳐야 한다고 합니다

 

 

 

처음으로 만나는 하늘나라가 사왕천인데 절에 들어갈 때

제일 처음 거치는 곳이 사천왕문입니다

 

 

 

두번째 하늘나라가 제석천이 지키는 도리천이라고 하는데 

 이 도리천의 위치는 바로 수미산의 최정상 입니다 

 

 

 

그 위로 공중에 떠 있는 다른 26개의 하늘나라를 차례로 통과해야

부처님의 나라인 불국정토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인간이 걸어서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하늘 나라는 바로 도리천입니다

 

 

 

 

 

선덕여왕의 사람들을 찾아서

 

Ⅰ. 오늘의 답사를 열어가는 말

 

신라 제26대 진평왕은 마야부인에게서 두 딸이 있었는데 첫째는 천명이고 둘째는 덕만입니다  천명은 진지왕의 아들 김용수에게 시집을 갔으므로 왕위에 오를 사람은 사위인 김용수가 1순위 이지만 폐왕의 자식이라 신하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진평왕은 화백회의의 지지를 얻어 덕만을 후계자로 정하였습니다

 

이 무렵 공교롭게도 마야부인이 죽고 진평왕은 승만부인을 왕비로 책봉해서 아들을 하나 낳았으므로 왕위 계승권이 그 아이에게 돌아갈 뻔 했으나 그 아이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어버렸습니다

 

그 후 진평왕이 죽자 632년에 덕만이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으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만 삼국사기에는 여왕이라 칭하지 않고 선덕왕이라 했으나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답사할 내용은 선덕여왕이 즉위한 다음 난국타계를 위하여 중용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문화유산들을 찾아가 보게 됩니다

 

분황사 ↦ 황룡사지 ↦ (안압지. 월성. 계림) ↦ 첨성대 ↦ (중식. 영묘사지) ↦ 김유신장군 묘 (선도산)↦ 무열왕릉(김인문, 김양 묘)↦ 진평왕릉(명활산성) ↦ 선덕왕릉(사천왕사지)

 

오전에는 선덕여왕의 부왕이신 진평왕릉을 찾아가서 신라 3보를 생각해 보고 난국타계와 호국불교의 염원으로 세워진 분황사와 황룡사지를 둘러 본 다음 신비스러운 첨성대를 보면서 선덕여왕의 지기삼사를 되새겨 볼 것입니다

 

오후에는 가야왕족 출신의 김유신장군 묘와 폐위왕의 손자가 왕위에 오르게 된 무열왕릉을 보면서 선덕여왕의 탁월한 인사등용 과정을 알아 보고자 합니다

 

비담의 난과 명활산성 그리고 도리천에 올라 선덕여왕릉에서 남산의 석양을 바라보면서 선덕여왕의 사람들을 한 번 더 생각해 보면서 답사일정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Ⅱ. 진평왕의 천사옥대와 선덕여왕의 등극

 

진평왕은 왕이 즉 부처라는 왕즉불 사상에서 이름을 백정으로 하여 석가모니 아버지의 이름을 가졌고 왕비인 마야부인은 석가모니 어머니의 이름을 하고 있어서 그들이 둘 사이에서 장차 태어날 첫 아이는 석가모니가 되어야 한다는 강한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덕만은 여자로 태어나 온 왕실을 크게 낙심케 합니다. 진평왕 후반, 왕의 뒤를 이을 성골 남자 후계자가 없기 때문에 왕과 측근 신하들은 그녀를 여왕으로 세우기로 내정하자 진평왕 53년에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의 난이 일어났는데, 진평왕은 이 난을 진압하고 구족을 멸족시켰습니다.

 

진평왕이 자신의 후사로 선덕왕을 지목한데 대한 반발이 반란의 원인이라고 보는 설도 있지만, 그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반란을 진압하는 정치적 분위기가 여왕의 즉위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추대라는 형식을 빌려 선덕왕이 즉위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여기에는 진평왕의 내면적 의도가 강하게 작용하였을 것입니다. 결국 선덕왕의 즉위는 신라 진평왕의 왕권강화정책의 성과가 가져온 결실입니다

 

진평왕이 죽은 후 덕만은 화백회의의 의결 형식을 밟아 왕으로 추대되었고 신하들은 덕만에게 ‘거룩한 조상을 가진 여황’이라는 뜻에서 ‘성조황고’라는 칭호를 올렸습니다.

그녀가 거룩한 성골 황실의 계통을 이은 여자 대왕 이라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1. 신라의 3보

고려왕이 신라를 치려고 모의하면서 말하기를 신라에는 3가지 보물이 있어서 침범할 수 없다고 하니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

 

황룡사 장육존상이 그 첫째요 그 절에 있는 9층탑이 둘째며 진평왕의 천사옥대가 셋째라 하여 고려왕이 신라를 칠 계획을 중지하였다고 하는 천사옥대입니다

 

상황이 진평왕에게 천사옥대를 내려줄 정도로 정통성이 확보된 임금이란 것을 강조하고 하늘이 준 옥대 즉 천사옥대는 불교와 무속신안앙의 융합을 상징하는 설화로 왕즉불 이라는 논리로 왕권강화를 하면서 백성들에게는 누구든지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평등사상으로 불교가 평민들에게도 널리 전파되기 시작 합니다

 

 

 

 

Ⅲ. 분황사를 짓게 된 사연은?

 

간절한 염원은 생명의 기운을 샘솟게 하고, 그 생명은 만물을 소생시킨다고 합니다. 신라불교를 진흥시키고, 불력으로 외침을 막으려고 했던 향기로운 여왕 선덕여왕의 염원이 서린 분황사에 서면 어디선가 향내가 풍겨 오는 듯 합니다.

 

분황사란 이름은 향기로운 황제가 세운 절 이라는 뜻으로 선덕여왕의 존재를 정당화 하기 위해서 선덕여왕 3년(634)에 건립된 사찰입니다

 

분황사는 7처가람(흥륜사,영흥사,황룡사,분황사,영묘사,사천왕사,담엄사) 중 하나로 부처님 위력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세워진 원찰로 신라문화권에선 처음으로 1탑 3금당의 품(品)자형 가람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고구려지역에선 3금당이 모두 탑을 향하고 있으나 분황사는 모전석탑을 중앙 금당 앞에 두고, 좌우 금당이 모두 남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 분황사는 희망을 주는 절

분황사는 앞이 보이지 않는 아이에게 광명을 되찾아준 절로 유명합니다.

 

신라 제35대 경덕왕 때 한기리에 사는 희명이라는 여인의 아이가 다섯 살 때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천지를 모르고 뛰어놀던 아이가 시력을 잃다니, 내가 전생에 무슨 큰 죄를 지어 이렇게 업보를 받나? 이게 무슨 업보인가?

 

희명은 무너지는 억장을 안고 분황사를 찾아가 천수대비 앞에서 아이와 같이 노래를 부르면서 눈을 뜨게 해 달라고 간절히 빌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합장하여 천수관음전에 간절히 비옵니다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 중에서 손 하나를 놓아 눈 하나를 덜어 내어 두 눈 다 먼 나에게 하나쯤은 슬그머니 주셔서 꽂아 주소서 

 

아 아!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천수대비야 말로 자비심이 큰 부처가 될 것입니다

천수천안을 가지고 계신 관세음보살은 세상의 모든 병을 낫게 해준다고 합니다

특히 당시 신라사회는 솔거가 그린 관세음보살이 있는 분황사에서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을 이룬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 희명의 애타는 심정을 굽어 살피셨는가?

희명의 아이는 눈이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이 소문이 퍼지자 분황사는 다시 한 번 희망을 주는 절로 온 신라인들의 가슴 깊숙이 새겨졌다고 합니다.

 

 

◈ 천수대비와 약사여래입상 (문화재 자료 319호)

좌전 북쪽 벽에 천수대비그림이 있고 도천수대비가는 범종에 새겨져 있는데 이 범종은 불기 2534년 (1990)에 제작된 것입니다.

 

현존하는 약사여래입상은 조선 영조 50년(1774)에 제작된 것으로 왼손에 들고 있는 건칠제 약그릇 뚜껑 안에<건륭 삼십구년 을미 사월 이십오일 조성야> 라고 붉은 글씨로 씌여져 있습니다

 

 

 

 

◈ 원효와 설총의 쓸 대 없다는 이야기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쓸 대 없다는 말은 원효가 아들 설총에게 빗자루를 주면서 네 마음을 쓸듯이 절 마당을 깨끗이 쓸어라 고 했는데 설총이 마당에 나와 보니 누군가 마당을 다 쓸어 놓아서 쓸 대가 없었다는데서 생겨난 말이라고 합니다

 

 

◈ 사리함 속에서 발견된 금바늘과 은바늘 

안산암을 벽돌처럼 깎아서 만든 모전석탑입니다. 황룡사 9층 목탑처럼, 분황사 모전석탑도 9층으로 추정되는데, 지금은 3층만 남아있습니다. 

 

석탑의 한쪽면만 7m에 이를 정도로 큰 규모를 지녔는데 1층 탑신의 사방 중심에는 감실을 만들었고 감실 양옆에는 장방형의 돌을 세워 붙이고, 반나체의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습니다.

 

원래 동서남북 4면 감실 입구에 선 8체의 금강역사는 옷의 무늬가 다 다르고, 얼굴은 분노상이며, 머리에는 음각의 광배가 있으나 세월에 닳고 달아서 금강역사가 입을 벌렸는지, 다물었는지 얼핏 봐서는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탑 기단의 네모서리에는 돌사자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탑 층은 상부로 올라갈수록 알맞게 작아져서 거대하지만 균형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안삼암 돌 벽돌과 대비되도록 감실 부분은 밝은 화강암으로 짜서 분노하는 모습의 힘찬 금강역사상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1915년 분황사 탑을 수리하자 2층과 3층 사이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습니다.

 

사리함 속에는 옥류, 가위, 금바늘, 은 바늘과 함께 숭녕통보와 상평오주(고려 숙종 예종 연간의 화폐)가 들어있었습니다. 

 

이를 보면, 고려시대에 분황사 탑을 해체 수리하면서 창건 당시의 사리함 속에 고려의 동전을 추가하여 넣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위 금바늘 은 바늘은 여인의 물건인데, 사리함 속에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선덕여왕이 사용하던 물건을 넣은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습니다. 

 

 

 

◈ 호국룡이 살고 있다는 삼룡 변어정 (경북문화재 자료 9호)은 

 

우물의 겉모양이 8각 (8정도 :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이고 내부는 원형 (원불의 진리 - 윤회 화합)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물 안의 사각형 격자는 사성제(고, 집, 멸, 도)를 의미한다고 하며

38대 원성왕11년(795) 당나라 사신이 팔각정 우물에 살고 있는 호국용을 가져가는 것을 알고 되찾아 왔다는 설화가 있어 호국변어정 이라고 합니다.

 

 

◈ 기도하는 설총을 돌아보는 원효 고상 

원효는 신라 귀족불교를 만백성을 위하는 중생구제의 불교로 물꼬를 튼 장본인입니다.

 

원효대사가 요석공주와 세속인연을 맺어서 낳은 아들 설총은 열반한 원효대사의 유해를 부수어 찰흙으로 빚은 소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고 항상 예를 올렸습니다.

 

설총이 예를 올릴 때마다 소상은 고개를 돌려 돌아보았다고 해서 ‘고상’(돌아보는 상)이라고도 불리었습니다.

 

 

◈ 화쟁국사 비편 (문화재 자료 97호)

고려 숙종6년(1101)8월에 원효가 동방의 성인인데도 비석이나 시호가 없어 덕이 들어나지 않음을 애석하게 생각하여 <대성화쟁국사>라는 시호를 내리시고 세운 비입니다만 비는 없어지고 비석 받침이 발견되었는데 추사 김정희가 이를 확인하고 비 받침 위에 <차화정국사지비적>이라고 작은글씨로 써 놓았습니다

 

1965년에 북쪽 담에서 조금 덜어진 우물에서 좌불 13기, 보살입상 1기, 광배 1점  불두 5점을 찾아내어 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 광덕과 엄장 스님

문무왕 대에 광덕과 엄장이라는 두 승려가 절친하게 지냈습니다. 둘은 먼저 극락으로 들어가면 반드시 서로에게 알리자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석양이 마음을 선하게 물들이던 어느 날, 창 밖에서 “나는 먼저 가니 그대는 잘 있다가 따라 오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튿날, 광덕이 살던 곳으로 가서 그 처와 함께 유해를 거두어 장사를 지내고 엄장은 광덕의 아내에게 말하였습니다. 

 

“남편이 죽었으니 나와 함께 살면 어떠하오?” 광덕의 아내가 그러자고 하였으므로 엄장은 그 집에 머물렀습니다.

 

밤에 엄장이 광덕의 처와 관계를 하려 하니, 그 아내는 광덕을 보고 “스님이 서방극락을 구함은 연목구어” 라고 쏘아붙였습니다. 

 

엄장이 “광덕도 이미 그러했는데, 나는 왜 안 되오?”

 

“남편은 저와 10년 이상 살았지만, 단 한 번도 잠자리를 같이한 적이 없습니다. 밤마다 단정히 앉아 달빛 아래 가부좌를 틀며 아미타불을 외웠습니다.

 

정성이 이와 같았으니 어찌 서방 극락정토에 이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대개 천 리를 가는 사람은 그 첫걸음으로 알 수 있는 것인데, 지금 스님의 생각은 동쪽에 있으니 서방정토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낯부끄러워진 엄장은 그길로 분황사 원효대사를 찾아 간곡히 법을 구하고 오로지 한마음으로 관을 닦아 극락으로 갔다고 합니다.

 

 

 

 

Ⅳ. 황룡사와  9층목탑을 건립하게 된 배경

진흥왕 14년에 월성의 동쪽에 새 궁궐을 지으려고 땅을 파보니, 거대한 황룡이 나와서 절을 짓고 이름을 황룡사라 했다고 합니다  황룡사지는 8만 2천여㎡에 이르는 사지에 놓여있는 주초석을 보면 천년 숨결이 느껴지는 곳 입니다.  

 

경주 낭산(狼山)에 묻혀있는 선덕여왕은 지금부터 1362년 전, 파란만장한 삶과 현실적 어려움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려는 원대한 꿈을 현실화 시켰습니다.

 

동양최대의 목탑으로 한국인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있는 불멸의 탑, 황룡사 9층 목탑입니다. 일본을 포함한 주변 9개국을 불력으로 물리치려던 선덕여왕의 비원이 서린 황룡사 9층 목탑은 몽골의 침략으로 세세대대 나라를 이어가려던 선덕여왕의 염원을 간직한 탑은 연기로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 황룡사지 장육존상의 신통력 

황룡사 1차 가람이 569년에 완공됐고. 5년 뒤 황룡사 장육존상을 지었습니다. 키가 크다는 의미를 지닌 장육존상은 4.7m 내지 5m쯤 되는 거대한 서있는 부처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황룡사 장육존상은 나라에 위기가 있을 때 마다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지는데, 어느 해 황룡사 장육존상이 흘린 눈물이 발꿈치를 적셨다고 합니다.

 

이듬해에 진흥왕이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

그리고 다시 10년 뒤에는 금당을 완성하였습니다.

 

금당이 완성된 뒤 60여 년이 지나 선덕여왕 때(645년)에 황룡사 9층 목탑이 세워졌습니다. 금당은 사방 9칸 크기로 64개의 주초석이 심어져 있습니다. 

 

장육존상의 조성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지금의 경북 울주지방에 큰 배가 와서 닿았는데 그 배에는 편지와 1불 2보살상의 모형이 실려 있었다. 편지에 인도 지방의 아쇼카 왕이 황 철 3만 4천201kg과 황금 11.25kg으로 석가삼존불을 만들려고 했는데 이루지 못하여 바다에 띄워 보내니 인연 있는 나라에서 장육존상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를 황룡사에 모셔 약 5m(1장 6척)의 장육존상을 1차 가람의 금당에 모시니 금당이 너무 작아 다시 금당을 지었다고 합니다.

 

중금당 좌우에 동금당, 서금당이 서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원래는 1탑 1금당이었으나 나중에 1탑 3금당으로 바뀐 셈이 됩니다.

3금당은 일직선상으로 나란히 서있습니다. 

 

황룡사 9층 목탑은 경주 분지의 모든 곳에서 바라볼 수 있는 거대한 탑이었습니다.

 

황룡사는 신라가 가장 중요시하였던 최대 규모의 절로 신라 3보인 장육존상과 황룡사 9층 목탑을 지닌 호국사찰이었습니다. 

 

 

 

 

 

◈ 9층탑과 아비지

신란 제27대 선덕여왕 때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한 자장율사는 태화지를 지나다 갑자기 나타난 신인을 만나 법을 전해 받았습니다.

 

『지금 그대의 나라는 여자를 왕으로 삼았으므로 덕은 있어도 위엄이 없소.

 

 때문에 이웃나라에서 침략을 도모하는 것이니 그대는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시오.』 『돌아가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요?』

 

『황룡사 호법룡은 나의 장자로서 범왕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 그 절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9개국의 야만족이 와서 조공을 바치며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오. 또 탑을 세운 후 팔관회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의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오.

 

그리고 나를 위하여 경기 남쪽에 한 정사를 짓고 나에게 복을 빌면 나도 또한 그 덕을 갚을 것입니다.』 신인은 말을 마친 후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선덕여왕 12년(643), 당나라 황제로부터 불경, 불상, 가사 등을 받아가지고 귀국한 자장율사는 즉시 왕에게 아뢰었습니다.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시면 외국의 침략을 막을 뿐 아니라 이 나라 백성들이 안녕을 누릴 것이옵니다.』 선덕여왕은 이 의견을 신하들에게 물었습니다.

 

신하들은 명장으로 소문난 백제의 아비지를 데려다 탑을 조성하자고 말했습니다.

신라 조정에서는 보물과 비단을 백제에 보내어 아비지를 청했습니다.

신라의 대탑 조성을 위해 특별히 초청을 받은 아비지는 내심 즐거웠습니다.

 

『신라에는 나만한 장인이 없는 모양이지. 이 기회에 내 예술성을 과시해야지.

 아냐, 하필이면 원수국에다 백제인의 솜씨를 심을 필요가 있을까?』

 

즐거움도 잠시, 망설임에 마음의 결정을 못 내리는 아비지에게 백제의 벼슬아치들과 가까운 친구들은 「예술에는 국경이 없다」며 서라벌 중심부에 백제인의 넋을 심고 돌아올 것을 권했습니다.

 

사비성을 떠나 서라벌에 도착한 아비지는 용춘이 거느린 소장 2백 여 명과 함께 탑 불사에 들어갔습니다. 두 달 남짓한 세월이 지나 황룡사 법당 앞에는 높다란 탑 주가 세워졌습니다.

 

탑 주가 세워지던 날 밤, 아비지는 절 마당에 내려와 탑 주를 바라보며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습니다.

 

『영겁에 빛날 탑을 세워야지.』 순간 아비지의 뇌리엔 하나의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신라는 왜 갑자기 9층탑을 세우는 것일까?

 

절을 지을 때 함께 세울 일이지 이제 와서.』 그날 밤 아비지는 백제가 적국의 침공으로 멸망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뒤숭숭한 꿈자리가 아무래도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한 아비지는 백제로 도망칠 결심을 했습니다.

 

『예술이고 백제의 넋이고 뭐고 간에 얼른 처자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야지.』

짐을 챙긴 후 밤이 되길 기다린 아비지는 용춘의 집을 빠져 나와 황룡사로 갔습니다.

 

부처님 앞에서 꿈 이야기를 하면서 백제로 돌아가기를 기원했습니다.

 

『나라 없는 백성이 되기 전에.』 마음을 다져먹고 막 돌아서려는데 어디선가 일대 광풍이 몰아치면서 달빛이 먹구름에 가리더니 천둥번개가 천지를 진동하는 것이었습니다.

 

광풍이 멈춘 법당 앞에는 어디선가 노스님 한 분과 키가 구척이나 되는 장수가  나타나더니 자기가 세운 탑 주와 똑같은 탑 주를 순식간에 세웠습니다.

 

『이는 필시 부처님께서 날보고 탑 불사를 계속하라는 계시일 것이다.』

 

아비지는 생각을 고쳐먹고 다시 일에 몰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비지의 가슴에 또 하나의 파문이 일었습니다.

 

『이 탑이 완성되면 9개 나라에서 우리 신라에 조공을 바친다며….』

 

『그렇다는구먼.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3층 오월, 4층 탁라, 5층 응유, 6층 말갈, 7층 단원, 8층 여적, 9층은 백제와 고구려를 상징한다는구먼.』

 

인부들이 주고받는 말을 듣게 된 아비지는 그 동안의 수수께끼가 풀리면서 더 이상 탑을 조성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몸져누워 생병을 앓았습니다.

 

아비지에게 사모의 정을 품은 채 가슴만 조이던 용춘의 딸 아미는 아비지의 방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정성껏 간병했습니다.

 

『낭자, 낭자는 9층탑을 세우는 이유를 자세히 알고 있지요?』

 

『소녀, 아무것도 모르옵니다.』 『그대 역시 신라의 여인이구려.』

 

아미 낭자는 가슴이 아팠으나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습니다.

 

며칠간 병석에서 번민한 아비지는 모든 것을 부처님의 뜻으로 돌리고 탑 불사에 전력하여  높이가 225척이나 되는 거대한 탑을 완성했습니다.

 

찬란한 햇살 속에 새로 탄생된 신라의 보물을 바라보는 아비지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그는 무슨 생각에선지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 앞에서 잠시 발길을 멈춘 그는 물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풍덩」 소리에 뒤이어 또 하나의 「풍덩」소리가 들렸습니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 아비지를 따르던 아미가 말없이 그의 뒤를 따른 것입니다.

신라는 이 탑을 세운 뒤 삼국을 통일했고 황룡사 9층목탑은 신라의 3대 보물 중의 하나가 됐습니다.  

 

 

 

 

 

◈ 황룡사 목탑 기술 지금도 어려워 

황룡사는 꼭 복원되어야 하지만 결코 쉽지 않다고 합니다.

돈만으로, 혹은 의욕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난제를 안고 있습니다. 25층이 넘는 아파트에 해당하는 82m 높이를 지닌 황룡사 목탑이 어떻게 가능하였을까?

 

지금도 황룡사 9층 목탑의 건축기술은 신이에 가까운 불가사의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21세기 첨단기술로도 황룡사 목탑기술을 구현해내기 힘들다고 합니다 .

 

 

◈ 쏟아진 4만여 점의 유물들 

신라 진흥왕 14년(553년)부터 선덕여왕 14년(645년)에 걸쳐 93년간 조성된 황룡사지 발굴에서는 금동불입상 사리함 등 4만여 점의 유물과 높이 182㎝의 대형 ‘치미’( 현재 경주국립박물관 전시)가 출토되었습니다. 

 

황룡사지 발굴에서는 연대와 발원자가 뚜렷하게 하얀 한지에 붓글씨로 기록된 두루마리 식 불경인 '신라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이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이 '신라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은 전라도 화엄사의 창건연대뿐 아니라 이두, 회화, 종교, 건축, 제지기술, 문학 등 다방면에 걸친 신라문화 추적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남산 탑곡마애조성군에는 황룡사 9층 목탑인 듯한 9층목탑이 새겨져 있습니다. 

 

 

 

☸ 3기 팔괴

우리 동양에서는 3 이라는 숫자를 좋아합니다

진평왕이야기에서 3보를 이야기 드렸습니다만 황룡사 9층탑, 황룡사 장육존불, 진평왕의 천사옥대를 신라의 3보라고 합니다

 

신라 왕실에는 박, 석, 김의 3성이 왕위에 올랐고 3기, 3기종 등 3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3기종은 황룡사에 있었다는 49만근이 넘는 황룡사 대종과 성덕대왕 신종 그리고 효자 손 순이 땅 속에서 얻었다는 석종으로 아름다운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종입니다

 

 

◈ 3기8괴의 3기

첫째는 금척으로 박혁거세 왕이 천신으로부터 얻었다는 보물로 병든 사람을 이 자로 재기만 하면 병이 쾌유되고 죽은 사람도 되살아난다는 금척(금자)은 신이 보낸 물건이라 소중히 여겨 인공으로 30여개의 산을 만들어 금척을 어느 한 곳에 감추어 두었다고 하는데 경주에서 건천 못미쳐 모량에 금척리가 있습니다

 

 

둘째는 옥적으로 만파식적이라고 하는 옥적(옥피리)은 문무왕이 죽어서 동해의 용왕으로 화한 뒤 김유신장군의 혼령과 의논하여 나라의 영원한 평화를 위해 신문왕에게 보낸 것으로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없어지며 필요에 따라 비도 오게 하고 바람을 멈추게 하는 신기한 만파식적으로 세상의 파란을 없애고 평안하게 하는 피리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서라벌을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나면 소리가 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셋째는 에밀레종으로 성덕대왕신종이라고도 하고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3기 중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으로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데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종으로는 세계에서 제일이라고 합니다

 

 

◈ 3기 8괴의 8괴

신라에는 여덟 가지의 괴이한 현상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을 8괴라고 합니다

 

남천의 모래는 물이 흐르는 방향과 반대로 거슬러 올라 간다는 문천도사

 

안압지에 있는 말밤은 그 뿌리가 땅에 닿지 않고 떠 있다고 하는 압지부평

 

백률사에 있는 소나무는 가지를 잘라도 거기서 새 순이 돋아난다는 백률송순

 

서라벌을 지나가는 기러기는 금장대에 반드시 쉬었다 간다는 금장낙안

 

무영탑의 아사달과 아시녀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불국영지

 

최치원의 상서문에 곡령청송 계림황엽이라고 하여 송악의 고려는 청송과도 같이 성하는데 계림의 신라는 황엽이 되어 이미 국운이 다하였다고 한 이후부터 계림의 나무들은 항상 누렇게 물들었다는 계림황엽

 

바위 밑으로 명주실을 넣고 당기면 실이 바위 밑으로 빠져나온다는 남산부석

 

천수백년이 지나도록 순백의 색깔이 변하지 않는다는 나원백탑

 

 

이 외에도 선도산의 아침 노을은 아름답다는 선도효색

 

금오산(남산)의 저녁노을이 아름답다는 금오만화를 꼽기도 합니다

 

 

 

 

 

Ⅴ. 첨성대를 축조한 것은?

 

현존하는 천문대로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탈해왕의 16대손인 석오원이 감독하여 만들었다고 전해지는데 선덕여왕이 천기를 잘 알고 있는 여왕으로 인식되기를 바라는 염원과 선덕여왕의 도리천 이상을  반영하여 도리천으로 행하는 통로를 상징한다고도 합니다 (재석천의 강림과 도리천에 환생할 통로)

 

형태는 재석천이 지배하는 33천의 도리천을 형상화하였다고도 하며 제기를 받치는 기대의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전체의 모양은 천원지방으로 기단은 정사각형으로 땅을 상징하고 몸체는 원으로 하늘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 지기삼사

1. 전왕 생존 시에 당 태종 이세민이 붉은 색, 자주색, 흰색의 세 가지 빛깔로 그린  모란꽃 그림과 꽃씨 석 되를 보내 와서 덕만에게 보여주었더니 덕만이 말하기를  “이 꽃은 …향기가 없겠습니다”  

“네가 어떻게 아느냐”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알았습니다

 

☸ 모란꽃에는 향기가 있다 = 코 막힘?  이 이야기는 선덕왕이 왕위에 오를 때 왕이 ‘명석한 인물이며, 초능력의 보유자이므로 왕위에 오를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을 미리 알리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2. 영묘사 옥문지에 겨울철에 때 아닌 개구리가 모여서 3, 4일 동안이나 울고 있어서  이를 괴이히 여겨 왕에게 물었습니다.

 

왕은 급히 각간 알천. 필탄 등을 시켜 정병 2천명을 뽑아서 빨리 서쪽으로 가서 여근곡을 탐문하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것이니 덮쳐서 죽여라 했습니다.

 

선덕여왕의 명을 받은 두 명의 각간이 병사 1천명 씩을 거느리고 서쪽 교외로 가보니 부산 밑에 여근곡이 있었는데 그 곳에 숨어있던 백제장군 우소의 군사 500명과 뒤에 온 군사 1,200명을 모두 물리쳤습니다

 

그 당시에 여러 신하들이 왕에게 묻기를 “어떻게 개구리 우는 일이 그렇게 될 줄 아셨습니까” 하니…

 

“개구리의 노한 형상은 병사의 형상이며, 옥문이란 것은 여자의 성기니 여자는 음이고 음은 그 빛이 백색이며, 백색은 서방이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음을 알 수 있었으며 남자의 성기는 여자의 성기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게 되니 이로써 쉽게 잡을 줄 알았노라”하니 여러 신하가 모두 그 성지에 감복했다고 합니다

 

 

3. 왕이 병이 없었을 때에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도리천에 장사지내도록 하라.”는 예언을 하자 여러 신하는 그것을 알지 못하여 도리천이 “어느 곳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선덕여왕은 “낭산의 남쪽이다.” 라고 하셨답니다

 

그 달 그날에 이르러 왕이 과연 세상을 떠났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낭산 남쪽에 선덕여왕을 장사 지내었다고 합니다.

 

그 후 10여 년에 문무대왕이 사천왕사를 왕의 무덤 아래에 세웠다고 합니다.

 

불경에 사천왕사의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했으니, 그제야 대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왕의 즉위를 합리화하기 위한 명분이 ‘지기 3사'의 이야기입니다.

 

지기삼사는 선덕왕에게 처음부터 예언의 능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언적 능력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필요가 절실했기 때문입니다

 

 

 

◈ 경주공고 앞길을 지나면서

"신라 선덕여왕 때에 지귀 라는 젊은이가 있었는데 선덕여왕을 보고 첫눈에 여왕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지귀는 선덕 여왕을 너무 사모하여 잠도 자지 않고 밥도 먹지 않다가 미치고 말았습니다.

 

여왕이 어느 날 영묘사라는 절로 가는데 길목에서 지귀가 여왕을 보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서 달려오다  호위하는 군사에게 붙들렸습니다.

 

그러나 여왕은 지귀가 그냥 따라오게 놔두라고 이르고는 다시 절로 향하였습니다.

 

선덕여왕이 오랜 불공을 마치고 나와 보니 지귀는 탑 아래에서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선덕여왕은 팔목에 차고 있던 금팔찌를 뽑아서 지귀의 가슴 위에 놓고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잠에서 깬 지귀는 금팔찌를 꼭 껴안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 기쁨은 불씨가 되어 가슴 속에서 활활 타오르다 온몸이 불덩이가 되어 가슴 속에서 타올랐습니다.

 

가슴 속의 불길은 어느새 지귀를 불덩이로 만들어 가슴이 타고 머리와 팔다리도 활활 타올랐습니다.

 

이 불은 탑으로 옮겨져서 탑도 불기둥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지귀는 사라져가는 여왕의 모습을 보기위해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는데 이로 인해 불기운이 거리에까지 퍼져서 온 거리가 불바다를 이루었습니다.

 

이 때 혜공은 풀로 새끼를 꼬아 가지고 영묘사에 들어가 금당과 좌우에 있는 경루와 남문의 낭루를 둘러 묶고 3일 후에 걷으라고 하였습니다.

 

지귀로 인해 영묘사가 불이 났을 때 새끼를 둘러 맨 곳은 화재를 면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지귀는 불귀신으로 변해 온 세상을 떠돌아 다녔습니다.

 

사람들은 불귀신을 두려워하게 되어 여왕이 백성들에게 부적을 지어주었습니다. 백성들은 부적을 대문에 붙여 화재를 예방하는 풍습이 생겼습니다

 

 

 

 

  

 

 Ⅵ. 가야왕족 김유신 장군의 야망은?

 

김유신장군은 김수로왕의 13세손으로 금관가야국 마지막 왕인 김구해왕의 증손이며 15세에 화랑이 되고 18세에 국선이 되었으며 김춘추를 도와 태종 무열왕이 되게 하고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하였습니다.

 

이러한 공로로 문무왕으로부터는 태대각간이라는 신라 최고의 관직을 받았고 후대에 와서는  흥덕왕으로부터 흥무대왕으로 추봉되어서 무덤의 크기가 왕릉처럼 조성되었다고 합니다.

 

 

 ◈ 김유신 장군 묘

 

경주시 충효동  송화산 줄기가 남쪽으로 뻗은 옥녀봉 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태대각간 김유신장군의 묘가 있는 곳입니다

 

묘의 모양은 지름이 30m 둘레 50m, 높이 5.3m의 큰 원형 봉토분이고 둘레에는  호석과 돌난간을 둘렀고 호석 밖에는 38개의 돌기둥을 세워 난간을 만들었으며 바닥에는 돌을 깔아 놓았습니다

 

 

둘레에는 24장의 호석을 둘렀는데 호석은 12지신 상을 조각한 것과 없는 것을 교대로 배치하고 있으며 어느 왕릉과 비교해 봐도 손색이 없는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김유신의 부모 서 현과 만 명의 사랑이야기

 

서 현(김유신의 아버지)이 길에서 갈문왕의 아들인 숙흘종의 딸 만 명을 보고 마음에 들어 그녀에게 윙크를 하여 중매도 없이 야합하게 되었습니다.

 

서 현이 만노군 태수가 되어 만 명을 데리고 함께 가기를 청하자 숙흘종이 비로소 자기 딸이 서 현과 야합한 것을 알게 되어 광속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그 광문에 벼락이 쳐서 지키던 자가 놀라 기절을 하였습니다.

 

이때를 틈타 만명이 구멍으로 빠져나와 서 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도망갔습니다.

 

서현이 경진일 밤에 화성과 토성 두별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꿈을 꾸었고, 만명 역시 꿈에 동자가 금 갑옷을 입고 구름을 타고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는데, 얼마 후 태기가 있어 스무 달 만에 유신을 낳았다.”고 합니다

 

진평왕은 여동생이 괴로워하자 서현공을 만노에 봉했습니다. 

 

유신이 자라자 태양과 같은 위용이 있었습니다.

만호태후가 외손자인 유신이 보고 싶어 돌아올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만호태후가 유신을 보고는 “참으로 귀여운 나의 손자다 하며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이로서 가야파가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신라의 만명과 서현은 아들인 유신을 잘 키워 후일 삼국을 통일하는 주역으로 만들었으니 만명은 그 때 올바른 선택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12지신 상

띠를 나타내는 12짐승을 십이지라 하고 형상으로 나타낸 것을 십이지신상 이라고 합니다 시간과 방향에 따라 수호신 역할을 하는데  쥐는 밤 11시부터 1시까지이며 방향은 정북을 맡고 있으며 소는 1시부터 3시까지를 맡으며 북동쪽을 맡고 있습니다

 

이 묘의 12지신 상은 수두인신 상으로  얼굴은 짐승이고 몸은 사람 모습인데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었으며 몸체는 정면을 보고 있으나, 고개는 오른쪽으로 돌리고 있으며 무장을 하지 않아 매우 온화해 보입니다.

 

방위에 따라 쥐, 소, 범,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의 순서대로 조각이 되어 있는데 조각의 깊이는 얕지만 세련된 조각 솜씨입니다

 

중국에서는 묘실 내에 12지신 상을 만들어 넣은 것은 있어도 봉분 주위에 조각해 놓은 것은 신라만의 독특한 창의물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중국에서 받아들인 문물을 우리 것으로 소화하여 변형 발전시켜 나간 점은 통일신라 문화의 창의성이라 하겠습니다

 

 

◈ 쥐가 십이지의 첫자리가 된 설화

 

옛날, 하늘의 대왕이 동물들에게 지위를 주고자 했답니다.

 

선발 기준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정월 초하루에 제일 먼저 천상의 문에 도달한 짐승으로부터 그 지위를 주겠다고 했답니다 

 

정월 초하루가 되어 동물들이 앞 다투어 달려왔는데, 소가 제일 먼저 도착하였으나, 도착한 바로 그 순간에 소 머리위에 붙어 있던 쥐가 뛰어내리면서 먼저 문을 통과하였다고 합니다

 

소는 분했지만 두 번째가 될 수밖에 없었고 합니다.

 

   

 

 

 

역사의 방향을 돌려놓은 결혼

 (언니인 보희가 동생인 문희에게 꿈을 파다)

 

김유신의 아우는 김 흠순 이며, 맏누이는 보희 이고, 누이동생은 문희 입니다. 

아주 오래 전, 둘이 모두 처녀였을 적에 언니인 보희가 꿈을 꾼 적이 있었습니다. 

보희는 문희에게 꿈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간밤에 괴상망측한 꿈을 꾸었어." "무슨 꿈인데?" 

"꿈에 서산에 올라가서 소변을 보았는데,

글쎄 서울이 온통 오줌으로 가득 차지 않겠니?"

 

 '언니, 그 꿈 나에게 팔아요~!" "내 꿈을 사겠다고? 무엇을 주겠니?" 

 

"비단 치마를 드리겠어요~! 만들어 놓고 한 번도 입어보지 않았어요."

 

 "그래." 보희는 말로, "내 꿈을 너에게 판다." 하고는 문희에게 그 값으로 비단 치마를 받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꿈은 왕비가 될 꿈이었습니다.

 

영특한 문희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언니에게 꿈을 산 것입니다.

 

이 무렵 신라 사회에는 신분 제도가 엄격하여 왕족 출신의 성골이나 귀족 출신의 진골이 아니면 높은 벼슬에 오를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든지 신라의 귀족들과 혼인을 맺어야 합니다." 

 

진골인 김유신은 성골인 김춘추와 사귀었습니다.  

어느 해, 정월 보름날이었습니다. 

 

김유신은 김춘추를 초대하여 집 근처 넓은 뜰에서 축국놀이를 즐겼습니다. 

축국놀이는 꿩 깃이 꽂힌 공을 발로 차는 놀이였습니다. 

 

김유신은 축국을 하다가 일부러 김춘추의 옷자락을 힘껏 밟았습니다.

 

옷은 짝 소리를 내며 터졌습니다. 

김춘추는 놀이에 팔려 옷이 터진 줄도 몰랐습니다.

 

한참 놀고 난 김춘추는 돌아가려고 할 때 비로소 소매 자락이 터진 것을 알았습니다.

 

"너무 재미있게 놀아서 옷이 터진 줄도 몰랐네." 김춘추가 중얼거렸습니다.

 

김유신이 얼른 말했습니다. "상공, 옷이 터졌으니 그대로 돌아갈 수야 있소?"

 "괜찮소. 대단치 않으니까 집에 가서 꿰매겠소."

 

"아니올시다. 우리 집에 오셨다가 그렇게 되었으니, 소생의 집에서 꿰매는 게 좋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합시다."  김유신은 김춘추를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방 안에 있던 보희와 문희가 얼른 일어나서 김춘추에게 인사를 하였습니다. 

 

 "상공께서 옷이 조금 터졌으니, 보희 네가 꿰매드려라."  

 

김유신이 말하자, 보희는 "어찌 하찮은 일로 귀공자를 가까이 하겠습니까?" 하고 다른 방으로 건너 갔습니다.

 

김유신이 이번에는 문희에게 청했습니다.  

 

"네가 좀 꿰매 드리겠니?"  "그러겠습니다." 

문희는 얼른 승낙을 하였습니다. 

 

김춘추는 문희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문희는 제 반짇고리에서 비단 실과 바늘을 가지고 와서 얼굴을 다소곳이 숙인 채 터진 곳을 꿰매기 시작했습니다.  

 

'문희가 보희 보다 마음씨도 곱고 훨씬 낫구나~!' 김춘추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옷을 다 꿰맨 문희가 김춘추에게 말했습니다. 

"천한 소녀가 귀공자의 옷을 꿰매드리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김춘추는 문희가 얼굴만 예쁜 줄 알았는데, 목소리도 아름답다고 느꼈습니다.

 

마음씨 곱고, 얼굴 예쁘고, 목소리가 고운 문희를 한 번 본 김춘추의 가슴은 마구 뛰었습니다. 

 

 

 

 

김춘추는 30살이 넘어 이미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런 김춘추였지만, 문희에게 마음이 끌려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김춘추는 이튿날부터 축국을 한다는 핑계로 김유신의 집을 뻔질나게 드나들었습니다. 그리고 꼭 한 차례 문희를 만나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김춘추와 문희는 남의 눈을 피해 만났습니다. 

 

하루는 김유신이 문희에게 다그쳐 물었습니다. 

"너, 상공(김춘추)의 아기를 가졌지?" 

오라버니, 그러니 어쩌면 좋아요?'

 

"상공은 본부인이 있다. 그렇지만, 너를 첩으로 들여보낼 수는 없어."

 

김유신은 문희를 김춘추의 정식 부인으로 들여보낼 궁리를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덕여왕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김유신의 집 앞에 있는 남산으로 거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김유신은 선덕여왕과 신하들이 남산에서 놀고 있을 때, 자기 집 마당에 나무를 잔뜩 쌓아 두고 불을 질렀습니다.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 올랐습니다.

 

"저게 무슨 연기인고?" 선덕여왕이 신하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김유신이 누이동생을 태워 죽인다 하옵니다." 

 

신하의 말을 들은 선덕여왕은 기겁을 하였습니다.  

아니, 무슨 까닭으로 ?" "남편 없이 아기를 배었기 때문이랍니다."

 

"남자가 누구인 줄은 알 것이 아니오?"

"어느 진골의 소행이라 하옵니다." 

 

이 말을 곁에서 들은 김춘추는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선덕여왕은 김춘추를 보자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춘추공의 안색이 좋지 않군. 왜 그러시오?" 

 

'황공하옵게도 그 진골이 바로 저입니다." 

 

"책임을 져야겠군~! 어서 내려가 어명으로 혼인을 하도록 하고, 김유신의 누이동생을 구하시오." 

 

이렇게 하여 김유신은 문희와 감춘추가 정식 결혼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 또한 김유신이 김춘추의 옷을 일부러 밟은 것처럼, 계획적으로 꾸민 일이었습니다. 

 

뒷날, 김춘추는 태종무열왕이 되었으며 문희는 왕비가 되었습니다. 

 

언니가 꿰맸어야 할 김춘추의 옷을 문희가 꿰매었고, 마침내 왕비가 된 것입니다.

 

문희가 왕비가 되던 날, 보희는 비단 치마 하나를 태우며 울었습니다.

 

그 비단 치마는 동생인 문희에게 꿈과 바꿔 가진 것이었습니다.

 

 

◈ 묘역 복원

1973년에 봉분 북서쪽에서 납석으로 된 돼지상 한개가 발견되어 경주박물관에서 1974년에 김유신장군 묘의 발굴조사와 석조물 복원을 위한 실측작업을 하였는데 그 때 또 동편에서 토끼상의 파편이 발견 되었습니다   

 

묘역 서쪽에는 산신제를 지내던 제단도 묻혀 있었고 혼유석이 있던 자리도 찾아내어 복원하였으며 없어진 난간도 복원 하였습니다

 

 

◈ 비석 비문

묘의 양 옆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있는데 서편 비는 1710년에 경주 부윤이 세웠다고 하며'新羅太大角干 金庾信墓(신라태대각간 김유신묘)'라 새겨져 있으며, 

 

비문의 내용은 묘소에 아무런 석물이 없으니, 오랜 세월이 흘러 산천이 변하여 흔적이 없어져서 전하지 못할 까 두렵다.  이에 작은 비석을 세워 표시해 둔다.

 

이조 숙종36년(1710)겨울   부윤(시장)  의령 남지훈 지음 이라는 내용이며

 

 

동편 비는 1934년에 세운 것으로 '開國公純忠壯烈興武王陵(개국공순충장열흥무왕릉)'이라 새겨져 있으며. 

 

비문의 내용은 공렬은 오직 이 나라에서 처음일 뿐 아니라 중국에도 비길만한 사람이 드물도다.

 

중국에도 관운장과 곽분양, 악무목 세분정도가 있을 뿐 이라네.

 

1934년 갑술 가을에 후손 용희가 짓고 우곤이 글씨를 썼다고 하며.  근래에 세운 것으로 김유신장군 묘를 흥무왕릉으로 지칭하고 있으며 가운데 있는 혼유석은 1974년에 만든 것입니다

 

1996년 3월 4일 정월 대보름 낮에 송화산 옥녀봉에서 산불이 나 이곳 둘레의 도래솔과 무덤을 모두 태운 일이 있었는데 이 때 김해김씨 종친회에서 사죄 의식을 했는데 묘 동편에 후손들이 꿇어 엎드려 용서를 빌었던 일이 있습니다

 

 

◈ 12지신 상이 조각된 능묘

경덕왕릉(내남). 원성왕릉(괘릉). 헌덕왕릉(동천). 흥덕왕릉(안강). 진덕왕릉(현곡) 김유신장군묘는 돋을세김으로 되었고 성덕왕릉(조양동)은 두리세김으로 세웠습니다 

 

 

◈ 12지신상의 복장

28대 진덕왕릉(무복)   33대 성덕왕릉(무복)  35대경덕왕릉 (무복)  38대 원성왕릉(무복) 41대 헌덕왕릉(평복)  42대 흥덕왕릉(무복)  불국사역 방형분(무복)  김유신장군묘 (평복)

 

 

 

 

 

◈ 신라의 최고 미녀인  미실이가 사랑한 사다함

미실은 신라의 대표적인 색공지신으로 용모가 아름답고 교태와 가무에 능해서 남녀관계를 잘 했는데 미실이 관계를 한 남자들은 세종, 사다함, 진흥왕, 동륜태자, 진지왕(금륜태자), 진평왕, 동생인 미생 등 권력을 가진 남자 중에서 미실의 품에 안겨보지 못한 남자들은 아마 신라의 남자가 아닐 것입니다

 

지금까지 향가는 35대 경덕왕 19년에 지은 도솔가를 최초의 향가라고 합니다만 미실은 정치적 수완이 있고 문서를 잘 처리하여 30년간 신라 조정을 좌지우지하면서 700 여권의 수기 저술을 남겼을 정도로 재색과 정치적인 수완을 겸비한 탁월한 능력을 소유한 신라 최고의 미인입니다

 

이러한 미실이 가야를 치러가는 16세의 사다함을 위하여 지은 향가입니다

풍랑가 또는 송출정가 라고도 합니다   (정연찬 역)

 

바람이 분다고 하되   임 앞에 불지 말고    물결이 친다 하되   임 앞에 치지 말고

빨리 빨리 돌아오라   다시 만나 안고보고   아흐  임이여  잡은 손을 차마 물리라뇨

 

미실의 풍랑가 에 회답하는 청조가 가 또 있습니다

 

전장에 나갔던 사다함이 목숨을 걸고 싸워서 이기고 돌아와 보니 사랑했던 미실이 세종의 아내가 되어 버린 것을 알고 너무 슬퍼서 지은 청조가 입니다   

 

파랑새야   파랑새야   저 구름 위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나의 콩 밭에 머무는가

파랑새야   파랑새야   내 콩밭에 파랑새야  어찌하여 날아들어  구름위로 가는가

 

이미 왔으면 가지말지  또 갈 것을 어찌하여 왔는가   부질없이 눈물짓게 하며

마음 아프고 여위어  죽게 하는가   나는 죽어 무슨 귀신 될까   나는 죽어 신병되리

 

전주에게 날아들어  보호하여 호신되어   매일 아침 매일 저녁   전군 부처 보호하여

천년 만년 오래 오래 죽지 않게 하리

 

 

 

 

Ⅶ. 폐위된 왕의 손자가 무열왕이 되기까지는?

 

무열왕이 된 김춘추는 603년에 태어나서 661년 59세로 세상을 뜨게 됩니다

신라 제29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년 3개월(654, 3~661, 6)이며, 김유신장군보다 8살이나 아래입니다

 

 

◈ 김춘추의 귀토지설

고려 26대 충선왕 1년(1309년) 8월에는 토끼가 왕궁에 나타난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토끼가 거북이를 타고 용궁에 갔다가 빠져나오는 이야기는 삼국사기에도 전하는 민족 설화입니다.

김춘추가 위기를 극복하는데 이용했다는 이 설화는 토끼의 지혜로움과 순박함을 풍자적으로 묘사했습니다.

 

남해의 용왕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토끼의 간이 영약이라는 말을 듣고 거북이로 하여금 토끼를 꾀어오게 합니다.

 

꾐에 빠져 용궁까지 업혀 간 토끼는 마지막 순간에 기지를 살립니다.

간이 뺏길 위기에도 토끼는 침착하게 볕에 말리려고 꺼내 놓고 왔다면서 다시 뭍으로 오게 되는 것입니다.

 

김춘추는 왕이 되기 전 백제한테 진 울분을 풀기 위해 고구려로 청병을 갔습니다. 그러나 고구려에서는 김춘추를 염탐꾼으로 생각하고 죽이려 합니다.

 

다급해진 김춘추는 보장왕이 총애하는 신하 선도해 에게 뇌물을 바치면서 살려줄 것을 애원합니다.

 

이 때 선도해가 넌지시 들려준 것이 이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였습니다.

 

이에 크게 깨달은 김춘추는 보장왕에게 글을 보내어 마목현(지금의 문경)과 죽령은 본디 대국(고구려)의 땅이므로 신이 귀국하면 곧 넘겨주겠노라고 약속하고서 위기를 면하는 것입니다.

 

 

◈ 태종무열왕릉의 외형 및 구조  (사적 제 20호)]

왕릉은 높이가 12m 밑 둘레가 110m의 원형봉토분으로 횡혈식 석실분입니다

 

 

◈ 활동과 업적

무열왕이 즉위할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 연합하여 신라를 노리고 있었고 일본도 백제와 내왕하며 연합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신라의 희망이라고는 멀리 떨어진 당나라가 군대를 파견해 주는 것 뿐 이었습니다. 

 

김춘추는 웅변에 능하고 외교수단이 뛰어나 사신으로 여러 차례 당나라에 파견되어 외교성과를 거두었습니다.

 

642년(선덕여앙11년)에 백제장군 윤 충의 침입으로 대야성(합천)이 함락되고 사위인 성주 김품석(큰 딸 고타소의 남편)이 죽은 뒤 백제에 보복하고자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러 갔으나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죽령 서북 땅을 반환하라는 문제로  오히려 억류되었다가 돌아왔습니다.

 

김유신 여동생과의 정략 결혼으로 새로 진골귀족에 편입된 금관가야계의 군사력을 흡수하여 진골 귀족 내에 신귀족 집단을 형성하였습니다.

 

이에 대항하여 647년에 일어난 비담의 반란을 진압하고 진덕여왕을 세우는 과정에서 구 귀족세력을 배제하고 정치적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였습니다.

 

신라의 연호를 버리고 당나라 연호를 사용하는 등 적극적인 친당 정책을 추진한 끝에 당태종에게서 군사지원을 약속받아 삼국통일의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즉위년인 654년 이방부령 양수에게 이방부 격 60여조를 개정하도록 하여 율령정치에 의한 왕권강화를 꾀하였습니다.

 

 

 

 

 

655년 아들 법 민을 태자에 임명하여 왕권의 안정을 꾀하고 직계친족을 요직에 임명하여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였습니다.

 

655년 정월에 고구려와 백제, 말갈 등의 군사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해 왔고 33개 성이 함락되는 지경에 처했습니다.

 

왕은 급히 당에 사신을 파견 구원 요청을 했고 당 고종은 정명진(영주도독)과 소정방(중량장)을 파견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구려는 퇴진하고 백제도 물러섰습니다.

 

(이 무렵 백제에서는 임자파와 성충파가 내분을 일으키고 의자왕은 임자를 지지하고 성충은 감옥에서 죽는 사태가 발생하고  의자왕은 술과 향락에 빠지게 됩니다)

 

660년 측근 김유신을 과거 귀족세력의 대표로서 왕권견제세력이었던 상대등에 임명하여 왕권전제화의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같은 해 3월 나당연합군이 결성되어 당나라군 13만명이 백제를 침공하자 5월에 태자 법민, 김유신등과 함께 정병 5만명을 이끌고 본격적인 백제정벌에 나서 7월 백제를 멸망시켰습니다.

 

660년 정월에 상대등 금강이 죽자 김유신을 임명하고 그해 3월에 당고종은 소정방(대총관), 김인문(부총관)으로 하여금 13만 군사를 파견하게 됩니다.

소정방은 7월10일에 백제도성을 칠 계획을 세우고, 무열왕은 법민과 김유신에게 5만 군대를 안겨 소정방과 연합하게 했습니다.

 

7월 9일 김유신이 황산벌로 진격하니 백제 명장 계백이 5천 결사대와 함께 대적했습니다.

김유신의 아우 흠 순은 자신의 아들 반굴에게 적진을 돌파할 것을 명했으나 계백에게 죽었고 품일이 아들 관창에게 적진을 뚫을 것을 명했으나 계백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계백장군은 어린 관창을 되돌려 보내게 됩니다

 

품일은 돌아온 관창을 다시 돌려보내니 계백은 관창의 목을 베어 벤 머리를 말안장에 매어 다시 돌려 보내게 됩니다

 

이것을 본 신라군이 비분강개하여 진격하니 계백은 전사하고 7월 12일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피했으나  7월 18일에 의자왕이 태자와 휘하 장수들을 데리고 항복하였습니다.

 

무열왕은 숙원이었던 백제 병합은 성공했으나 잔병을 완전히 소멸 시키지 못한 채 661년 6월에 59세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  귀부

국보 제 25호, 661년(문무왕 1년)에 무열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로 비신은 없어지고 이수와 귀부만 남았습니다.

 

조각이 뛰어나고 남아있는 귀부 중 가장 오래 된 것이며 양쪽에 3마리 씩 6마리의 용이 서로 얽혀 한 가운데는 <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8자가 두 줄로 내리 새겨져 있습니다. (왕의 둘째아들 김인문의 글씨)

 

막 걸음을 떼려는 거북이의 생동감있는 조각. 머리를 치켜들고 힘차게 땅을 밀치는 모습으로 뒷발가락이 넷입니다.

 

힘을 줄 때 턱밑이 붉어지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연석의 붉은 부분을 거북이의 턱을 삼았습니다.

 

등에 새겨진 구름무늬와 당초문, 보상화문, 머리와 목의 주름 그리고 입가에 입김과 콧김까지 새겨둔 조각의 치밀함이 볼수록 놀랍습니다.

 

◈ 김인문의 묘 와  귀부,

길 건너편에 두기의 고분 중 큰 것이 김인문 묘이고, 다른 하나는 김양 묘로 알려져 있는데 무열왕의 둘째아들이며 30대 문무왕의 친동생으로 28대 진덕여왕 5년(651)에 당나라에 일곱 차례나 왕래하면서 삼국통일 전후 당과의 외교에 큰 공로를 세운 뛰어난 외교관이었습니다.

 

김인문은 글씨도 잘 써 태종무열왕릉의 비문을 썼습니다.

 

 

◈ 김인문 묘 앞 귀부

비신과 이수는 없어진지 오래되었으며 무열왕릉비와 비슷하나 무열왕릉비에 견주어 전체적으로 형식화 되고 약해 보입니다.

 

무열왕릉비는 발가락이 앞이 다섯 뒤가 넷인데 반하여 이 귀부는 앞도 다섯 뒤도 다섯으로  정지해 있을 때와 전진할 때의 차이라고 합니다

 

1931년 김인문의 비가 발견되었으나 몹시 풍화되고 마멸되어 알아보기 곤란할 정도입니다.

 

 

◈  김양 묘

김양은 무열왕의 9대손으로 통일 신라와 당나라와의 화평교섭에 지대한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Ⅷ. 비담의 난과 명활산성

 

645년 상대등에 취임한 비담은 국내 정치와 대외 정책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김춘추(金春秋), 김유신(金庾信)과 경쟁합니다.

 

그러다가 점차 세력이 밀리게 되자, 647년선덕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고자 염종 등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신라 최고의 관직인 상대등이 일으킨 반란이므로 그 규모가 컸고, 사태도 매우 위급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초기에는 명활산성을 근거지로 삼아 세력을 떨쳤으나 김유신이 10여 일만에 반란을 진압하고 비담 등 주모자의 구족(九族)을 멸하였습니다.

 

반란의 와중에 선덕여왕이 죽고 진덕여왕이 즉위하는 등 왕실이 위기를 맞이합니다.이 반란은 단순한 왕위쟁탈전이 아니라 신라 정치사에서 한 획을 긋는 사건입니다.

 

선덕여왕은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인 김춘추와 가야 멸망 이후 새로이 포섭된 금관가야 왕실의 후손인 김유신과 손을 잡고 이러한 왕권강화 정책을 더욱 강하게 밀고 나갑니다.

 

이에 자신들의 위치가 불안하게 된 귀족은 불만을 표출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대대적으로 표출된 것이 바로 비담의 난입니다.

 

그러나 승리는 결국 김춘추, 김유신에게 돌아갔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더욱 강력한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체제에 필요한 여러 시책들이 실시됩니다.

 

이후 김춘추가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함으로써 귀족 연합 체제를 이루던 신라 상대가 막을 내리고, 신라 중대가 시작되었으며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체제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결국 이 난은 신라 상대 말기에 왕권을 견제하려던 귀족세력과 왕권강화를 통한 중앙집권체제를 수립하려던 왕실세력의 싸움이었고, 여기서 김춘추, 김유신의 신귀족 세력이 승리함으로써 장차 신라 중대 왕실이 성립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선덕여왕 16년(647년) 정월에 상대등 비담과 염종이 난을 일으키고 그해 정월 8일에 선덕여왕이 죽어 낭산에 장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나오고  진덕여왕 원년(647년) 정월 17일에 진덕여왕이 반란의 무리 비담과 30인을 처형 했다는 기록이 진덕여왕 편에 나옵니다.

 

그러나 김대문이 지은 <화랑세기> 천광공편에 보면 선덕여왕이 몹시 아플 때 비담과 염장이 모반을 했다는 기록과 함께 김유신이 진덕여왕을 도와 반란군을 격퇴시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내용은 선덕여왕이 반란군에 의한 피살이 아니라 숙환(와병)으로 죽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갖게 합니다.

 

선덕여왕이 왕의 엄무를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병환이 위독하자 후계문제가 대두되었고 화백회의에서 진덕여왕이 후계자로 결정합니다

 

이에 여왕의 취임을 반대하던 상대등 비담과 그의 무리 염장이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군과 정부군이 명활성과 월성에서 10여일 대치한 상황에 선덕여왕이 병으로 결국 사망하자 진덕여왕은 왕으로서 유신과 천광공 알찬공의 도움을 받아 반란군을 제압하고 비담과 그 무리들을 17일에 처형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편에 보면

월성에 별이 떨어지니 “별이 떨어진 자리는 반드시 피를 보게 됨으로 여왕이 지게 될 것이다“ 라고 비담이 신하에게 말하면서 반란군의 사기를 높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의 실상은 월성에 떨어진 별이 유성일 수도 있지만 선덕여왕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에 김유신은 왕을 안심시키고 군사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허수아비를 만들어 연에 매달아 불을 붙여 공중으로 날려 보내고, 이튿날 아침에 “어젯밤 떨어졌던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라고 선전하였습니다.

 

김유신은 백마를 잡아 제를 지낸 뒤 장졸을 독려해 반란군을 공격하였습니다. 마침내 비담이 패해 달아나는 것을 추격해 진압하고 9족을 멸하였습니다.

 

반란의 우두머리 비담은 상대등으로 반란의 명분을 "여자 왕이 정치를 잘 못한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실상은 왕위계승권을 놓고 벌인 권력 싸움에서 미실파가 왕당파와 가야파의 연합에 패하여 진덕여왕이 선출되자 미실파가 위기를 느끼고 반란을 일으켰고 이 비담의 난 실패이후 미실파는 권력에서 축출되고 신라의 권력은 가야파에 넘어 가는 계기가 됩니다.

 

선덕여왕 이후에는 귀족에 의해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인 김춘추와 가야 멸망 이후 신라의 새로운 김 씨로 편입된 가야  왕실의 후손 김유신이 손을 잡고 일종의 새로운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왕권 강화를 위한 정책을 추진해 나가게 됩니다.

 

이에 자신들의 위치가 불안하게 된 구귀족파는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미 진평왕 대에 이찬 칠 숙과 아찬 석 품의 모반사건으로 표출된 바 있으며 비담의 난도  구 귀족세력들의 위기의식이 대대적으로 표출된 사건입니다.

 

그러나 승리는 결국 김춘추와 김유신에게 돌아가, 신라 왕실은 이들을 중심으로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체제에 필요한 여러 시책들을 더욱 강력하게 실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김춘추가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함으로써 중대 왕실이 성립되었습니다.

 

이후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체제가 갖추어졌습니다.

결국 이 난은 신라 상대 말기에 왕권을 견제하려던 귀족세력과 왕권강화를 통한 중앙집권체제를 수립하려던 왕실세력의 싸움이었고, 여기서 김춘추ㆍ김유신 등의 왕실 친위세력이 승리함으로써 이후 신라 중대 왕실이 성립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Ⅸ. 도리천에 계신다는 선덕여왕

◈ 선덕왕의 사망일은 『三國史記』선덕왕 본기에 의하면 16년 1월 8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책 김유신 전에는 비담이 난을 일으켜 10일 동안 대치상태에 있었다고 하였는데, 난을 진압한 1월 17일에서 10일을 빼면, 선덕왕 사망일과 같은 날이 됩니다.

 

그러므로 비담의 난은 선덕왕을 왕위에서 폐출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진덕여왕을 옹립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 사천왕사의 건립은 당의 신라공격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 하에 세워진 사찰이며, 선덕왕이 도리천에 묻힌다는 것은 ‘사후의 호국의 뜻을 말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덕’이란 왕호는 도리천 내의 선법당에 거주하면서 선악을 주재하는 선덕으로 상징되므로, 문무왕이 무덤 바로 밑에 사천왕사를 창건하여, ‘선덕왕이 가졌던 재석신앙을 구체화시켰을 것’입니다.

 

이러한 신성한 장소에 사원을 건립하면, 그로 인한 신령의 가호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 줄 수 있고, 동시에 사원 건립의 노역부담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석가족으로 관념된 성골왕, 호국의 일념으로 황룡사 9층탑을 쌓았으며, 선지적 예언을 통하여 신하들의 존숭을 받아왔던 선덕왕이 도리천에서 국가를 수호하고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당과의 결전을 앞두고 동요될 수 있는 민심을 진정시키는 데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선덕여왕과 두 영웅

한 시대에 두 영웅은 없다지만 이들은 항상 같이 영웅으로 추대됩니다. 실제로 이들은 강한 결속력으로 결합하여 많은 일들을 힘을 합쳐서 이루어 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두 집안의 사정이 있습니다.

김춘추는 조부인 진지왕이 왕위에 올랐지만 4년 만에 귀족회의에 의해 폐위되었기 때문에 김춘추의 가문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세력에서 밀려나게 됩니다.

 

김유신은 가야의 왕족출신으로 귀순하였을 때 진골로 합류하였습니다.

 

조부인 김 무력이 백제와의 한강유역 쟁탈전에서 백제의 성왕을 죽이는데 큰 공을 세웠고 아버지인 서 현은 많은 전공을 세우게 되지만 ‘신 김씨’로 분리 되며 기존의 귀족세력들에게 정치적으로 소외당하게 됩니다.

 

특히 김유신의 탄생과정을 보면 신라 전통 귀족 가문의 딸인 만 명이 서 현과 결혼을 했을 당시에 그 결혼을 반대하여 만 명을 집에 가두기까지 했을 정도면 김유신의 가문이 받았던 푸대접을 가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능력은 있지만 정치적으로, 가문으로 기반이 약한 이들에게는 서로를 의지할 수 있는 세력이 필요하게 됩니다.

 

 먼저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김유신인데, 김유신은 계책을 통해 자신의 누이인 문희와 김춘추를 혼인하게 합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결혼이 아니라 김춘추를 중심으로 한 귀족세력과 김유신을 중심으로 한 가야계 귀족세력간의 결합을 의미하며, 이 결합은 앞으로도 계속 단단함을 과시합니다.

 

이들은 무릎까지 꿇어가며 주군으로 모시겠다고 맹세했던 비담의 반난을 제압하면서 권력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하였고 드디어 654년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때에 김유신이 일조를 합니다.

 

그리고 김춘추가 왕위에 오른 지 6년 만인 660년에 김유신이 상대등의 지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볼 때 이들은 단단한 결속을 통해 신라의 정권과 군권을 모두 장악하게 됩니다.

 

두 사람은 이렇게 정권을 잡아가며 통일을 이룩합니다.

 

김춘추는 당과 일본에 외교를 통해서, 김유신은 직접 전투에 참가하고 계책을 전해주면서 위기에 빠져 있었던 신라를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만들어낸 영웅이 됩니다.

 

 

◈ 선정 베푼 여왕의 고단한 삶 

선덕여왕은 영국튜더왕조의 마지막왕인 헨리 6세의 딸로서 구빈법을 통해 빈민구제에 앞장섰던 엘리자베스 여왕처럼 구휼사업에 앞장서는 등 선정을 베풀고, 분황사와 첨성대를 건립하는 등 신라 문화를 진작시키며 삼국통일의 기초를 놓은 성군입니다. 

 

그러나 밖으로는 백제와 고구려의 침략을 끊임없이 받았고, 나라 안에서는 비담 염종 등이 역모를 도모하였습니다. 선덕여왕은 이 모든 어려움을 불심으로 타개하고자 하였습니다.

 

선덕여왕은 아버지 진평왕처럼 불교를 통해 사회통합에 주력하였고, 이 같은 목적에서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습니다. 

 

태종무열왕과 김유신은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을 거치며 신라 최고 권력자가 되었고 선덕여왕은 그 상황을 정치적으로 능수능란하게 이용한 것 같습니다.

 

선덕여왕이라는 드라마를 생각하면서 선덕여왕의 사람들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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