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능.묘를 찾아서

신라 제42대 흥덕왕릉을 찾아서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12. 8. 22.

 

신라 제42대 흥덕왕릉을 찾아서

 

 

신라56왕 가운데

확실하게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있는 왕릉은 선덕여왕릉,

무열왕릉 문무왕릉 성덕왕릉 원성왕릉,

헌덕왕릉, 흥덕왕릉 7기 뿐 이라고 하는데

안강 육통리에 있는 흥덕왕릉은 능 주변에서

흥덕(興德)이라 새겨진 비석 파편이 발견되어서

왕릉의 주인공이 흥덕왕 이란 것을 알 수 있으며

신라 역대 왕릉 중에서 규모가 크고 형식이 완전히

갖추어진 대표적인 신라 왕릉으로 봉분 밑에는 판석과

탱주를 세우고 위에 갑석을 얹었고 십이지신상을 조각

하였으며 봉분 4방에는 돌사자가 1구씩 사방을 지키고

있고 전방의 좌우에는 문인석과 무인석 1쌍이 있으며

전방 왼쪽에는 능비를 세웠던 귀부가 있으나 비신과

이수는 망실되었고 전방에는 석화표가 1쌍 있으며

흥덕왕은 임금이 된 첫해에 장화부인이 별세하자

11년 동안 죽은 장화부인만 생각하며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데 왕이 장화부인의

무덤에 합장하기를 유언하여 흥덕왕릉

에 합장하였다고 합니다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에 있는 신라 제42대 흥덕왕의 능으로 사적 제30호로

지정되었으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왕비와 합장한 것으로

되어 있어 봉분의 규모가 비교적 크다고 합니다

신라 56왕 중에서 능의 이름을 찾은 왕릉은 38릉이고 화장을 해서

능이 없다는 왕은 34대 효성왕과 37대 선덕왕 의 2릉이고

아직까지도 능을 찾지 못한 왕이 16왕입니다

   

신라 56왕 중 확실하게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있는 릉은 27대 선덕여왕릉,

29대 무열왕릉, 30대 문무왕릉, 33대 성덕왕릉, 38대 원성왕릉,

41대 헌덕왕릉, 42대 흥덕왕릉 7기 뿐 이라고 합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장지가 안강북 비화양(安康北 碑火壤)이라고 하여 현재의

위치와 대체로 부합되며, 특히 왕릉의 주위에서 흥덕(興德)이란 명문의

비편이 발견되어 이 능이 흥덕왕릉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조선시대 지리지에서 조차 언급 된 적이 없던 고분이

어떻게 조선후기에 와서 어떤 방법으로 무덤 속의 주인공을 확정하게

되었는지 사학자들의 입장에서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영조때 학자 화계 류의건은 "문헌의 기록도 없는 천년전의 잃을

천년 후에 아는 방법은 없으며 설사 천년전의 사람을 불러와서 보인다

해도 어느 왕의 무덤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조선후기에 가문을 중시 하던 풍조가 생기면서 김씨 가문과 박씨 가문에서

조상 찾기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게 되고 서로 자기 조상의 능이라

하여 남산을 기준으로 고분을 나누어서 명명하였다고 합니다.

   

흥덕왕릉은 신라 왕릉 중에서 봉분의 규모가 비교적 크고 형식이 완전히

갖추어진 대표적인 왕릉으로 봉분 밑에는 판석과 탱주를 세워 판석을

고정하고 위에 갑석을 얹었고 탱석에 십이지신상을 조각 하였습니다

   

이중 박씨 왕릉은 오릉을 중심으로 하여 다 찾았고 석씨왕은 시조 왕을

제외한 7왕을 찾지 못하였으며 신라 56왕 중에 합장을 한 흥덕왕과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왕의 왕비릉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습니다

봉분 4방에는 돌사자가 1구씩 사방을 지키고 있고 전방의 좌우에는 문인석과

무인석 1쌍이 있으며 전방 왼쪽에는 능비를 세웠던 귀부가 있으나 비신과

이수는 망실되었으며 능의 앞쪽에는 석화표가 좌우로 1쌍이 있습니다

 

흥덕왕은 임금이 된 첫해에 장화부인이 별세하자 11년 동안 죽은 장화부인만

생각하며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데 왕이 장화부인의 무덤에 합장

하기를 유언하여 흥덕왕릉에 합장하였다고 합니다 

통일신라 이후 무덤 주위에 세운 석수는 12지신상을 조각한 호석이 대표적이며,

단독으로 세운 석수로는 석사자·석마·석양·석호·석우 등이 있는데

성덕왕릉, 괘릉, 흥덕왕릉의 석사자상은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조각입니다

십이지신상은 자(, ), (, ), (, 호랑이), (, 토끼),

(, ), (, ), (, ), (, ), (, 원숭이),

(, ), (, ), (, 돼지)입니다.

신라 왕릉의 호석에 십이지신상을 새긴 것은 내남 부지리에 있는 경덕왕릉,

외동에 있는 괘릉, 동천동 헌덕왕릉, 현곡면 오류리에 있는 진덕여왕릉,

충효동에 있는 김유신 장군 묘, 구정동에 있는 방형분 등이 있습니다

신라 왕릉의 호석에 있는 십이지신상은 시간과 방향에 따른 수호신

역할을 하는데 쥐는 23시에서 1시까지 북쪽을 맡고 있습니다.

 

십이지신상은 시계방향으로 쭉 돌아가면서 시간과 방향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데 하나는 가운데, 다른 하나는 왼쪽, 또 다른 하나는 오른쪽

씩으로 말입니다 

신라의 왕릉 중 12지신 상이 조각된 능묘는 경덕왕릉(내남). 원성왕릉(괘릉).

 헌덕왕릉(동천). 흥덕왕릉(안강). 진덕왕릉(현곡) 김유신장군묘

돋을세김으로, 성덕왕릉(조양동)은 두리세김으로 세웠습니다  

12지신 상은 시간과 방향에 따라 수호신 역할을 하는데 쥐는 밤 11시부터

1시 까지 이며 방향은 정북을 맡고 있으며 소는 1시부터

3시까지를 맡으며 북동쪽을 맡고 있습니다

  

띠를 나타내는 12짐승을 십이지라 하고 형상으로 나타낸 것을 십이지신상

이라고 하는데 북- (), - (토끼), - (),

- ()의 방향을 나타냅니다

중국에서는 묘실 내에 12지신 상을 만들어 넣은 것은 있어도 봉분 주위에

조각해 놓은 것은 신라만의 독특한 창의 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중국에서 받아들인 문물을 우리 것으로 소화하여 변형 발전시켜

나간 점은 통일신라 문화의 특성이라 하겠습니다  

12지신 상은 능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갑옷을 입은 상들이 새겨져 있으나

이 묘의 12지신 상은 수두인신 상으로 얼굴은 짐승이고

몸은 사람 모습입니다

12지신 상은 방위에 따라 쥐, , , 토끼, , , , , 원숭이,

, , 돼지의 순서대로 조각이 되어 있는데 조각의 깊이는 얕지만

세련된 조각 솜씨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신라의 왕릉 중 12지신상의 복장은

28대 진덕왕릉(무복) 33대 성덕왕릉(무복) 35대 경덕왕릉(무복)

38대 원성왕릉(무복) 41대 덕왕릉(평복) 42대 흥덕왕릉(무복)

불국사역 방형분(무복) 김유신장군묘 (평복)을 하고 있습니다  

 

쥐가 십이지의 첫자리가 된 사연을 말해 주는 설화

옛날 하늘의 대왕이 동물들에게 지위를 주고자 했는데 선발 기준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정월 초하루에 제일 먼저 천상의 문에 도달한

짐승으로부터 그 지위를 주겠다고 했답니다  

 

정월 초하루가 되어 동물들이 앞 다투어 달려왔는데 소가 제일 먼저 도착

하였으나 도착한 바로 그 순간에 소 머리위에 붙어 있던 쥐가 뛰어

내리면서 먼저 문을 통과하여 쥐가 1등 소가 2등을 하여

쥐띠 다음에 소띠가 되었다고 합니다

 

둘레돌은 먼저 바닥에 기단 역할을 하는 돌을 1단 깔고 그 위에 넓적한

면석을 세우고 면석 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끼워 넣었는데

각 탱석에는 방향에 따라 12지신상을 조각하였습니다

   

왕릉 둘레돌의 주변에 방사형으로 박석을 깔고 그 주위에 난간을 돌렸는데

난간 기둥에는 상,2개의 구멍을 뚫어 관석을 끼우게 되어 있으나

지금은 관석이 하나도 남지 않습니다 

 

 

무덤의 주위 4모서리에는 각각 돌사자를 한 마리씩 배치하였고, 앞쪽의

왼쪽과 오른쪽에 문인석·무인석을 각 1쌍씩 배치하였습니다 

왕릉 주위에서흥덕이라는 글자가 쓰여진 비석조각이 발견되어

이 무덤이 흥덕왕의 무덤이라는 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신라사람들은 왕릉을 지키는 장수의 얼굴을 서역인으로 조각한 것은

덩치가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아랍인의 거칠은 몸체와 용모가

능을 지키는 지킴이 역할을 하게 한 것이라고 합니다

돌로 만든 짐승상을 석수라고 하는데 피장자를 수호한다는 의미로 무덤

안이나 주위에 세운 조각이나 석탑·석등의 기단부로 사용한 조각을

말하며 무덤을 수호하는 석수는 백제 무령왕릉 안에서

발견된 진묘수가 최초라고 합니다.

 

무인석의 이목구비는 서양인의 모습이 분명하며 터번(아랍인 두건)이나

의복 등을 보면 아랍인 모습인 걸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무인석상은 신장이 약 250이나 되는 큰 체구이며 부릅뜬 큰 눈과 콧등이

우뚝한 매부리코 그리고 광대뼈가 튀어나온 큰 얼굴이며 머리에는 아랍식

둥근 터번을 쓰고 있어 퍽 인상적입니다  

서역인상의 뒷모습 중에서 뒤 허리춤에 주머니를 차고 있는 것이 보이는데

우리 고유의 복주머니라고도 하지만 사실은 산낭이라는 것으로 호인들이

계산하는 기계 즉 주판 같은 것을 넣어두는 주머니라고 합니다 

 

표식물을 보면 봉분 밑의 둘레돌이나 십이지신상의 조각은 원성왕릉의 형식을

따랐고 돌사자의 배치는 성덕왕릉의 형식을 취하였으며 문인석과

무인석의 배치는 성덕왕릉 또는 원성왕릉의 형식과 같습니다. 

이와 흡사한 무인석상은 괘릉에도 있는데 경주를 방문한 이라크국립박물관

연구원들은 괘릉의 무인상을 보고 자신들의 조상을 닮은 모습에

놀랐다고 합니다

   

왕릉 무인상에 아랍인의 얼굴을 조각할 정도로 신라인들은 서역인과 활발한

국제교류를 한 것으로 국제 무역왕 장보고가 활약한 시대를 전후로

괘릉과 흥덕왕릉이 축조된 것으로 보아 이는 설득력이 있습니다

흥덕왕릉 귀부는 여러 곳이 깨어져 자세한 모습을 알아볼 수 없으며

발톱도 깨어졌고 등의 일부도 깨어졌으며 머리 부분은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목을 잘라버린 것 처럼 잘려져 있습니다.

무덤 전면 왼쪽에는 비석을 세웠는데 지금은 비석을 받쳤던 거북 모양의

귀부만 남아 있으나 손상이 심하고 탑신과 이수는 없습니다

흥덕왕릉에서 흥덕왕릉 비편들이 발견되었으나 아직까지 비문의 복원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비의 비신과 이수가 없어졌고, 받침돌인 귀부만 남아있지만 귀부 자체

만으로도 본래 모습이 얼마나 크고 웅장했을까 추정이 됩니다

망주석은 무덤 앞에 세우는 1쌍의 돌기둥.으로 망두석·망주석표·화표주

라고도 하며 망주는 준말로 주로 돌 받침 위에 8각기둥을 세우고,

맨 위에 둥근 머리를 얹었다고 합니다 

중국의 진서 예의에 507년 양나라의 묘제를 바로 잡았는데 석인, 석수, 석비의

건립을 금하고 석주 만을 세워 그 위에 이름·지위를 적는 것을 허락했다고

한 기록을 통해 망주석의 기원이 오래되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화표석 또는 망주석 이라고도 하는데 양쪽 방향에 있으며 용도는 능역의

입구를 표시하는 팔각형 돌기둥으로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 표시이며

또한 죽은 자의 부활 염원과 후손의 번창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신라왕릉은 현재 명칭이 붙여진 신라 왕릉 가운데 문화재지정명칭, 문헌기록상의

위치,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천되는 무덤양식 등 3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진짜 왕릉은 제27대 선덕여왕릉, 29대 무열왕릉, 30대 문무왕릉, 33

성덕왕릉, 38대 원성왕릉, 41대 헌덕왕릉, 42대 흥덕왕릉 등 7기 뿐

이며, 나머지는 모두 주인공을 잃어버렸거나 잘못 알려져 왔다고 합니다  

 

신라 중고기 왕릉으로 전승되어오던 제23대 법흥왕릉, 24대 진흥왕릉,

25대 진지왕릉은 규모와 형식으로 보아 왕릉이 아닌 왕공귀족들의

묘로 해석하였으며, 26대 진평왕릉은 제31대 신문왕릉으로,

28대 진덕왕릉은 제45대 신무왕릉으로 비정하였습니다   

무열왕릉 뒤쪽의 서악동 고분군을 중고기 왕릉으로 비정하였는데 4호분을

법흥왕릉, 3호분을 법흥왕비 보도부인릉, 2호분을 진흥왕릉,

1호분을 진지왕릉으로 비정하였습니다  

 

신라 중대 왕릉 중에는 제31대 신문왕릉은 제32대 효소왕릉으로, 32

효소왕릉은 왕릉이 아닌 성덕왕릉에 딸린 배장묘로, 35대 경덕왕릉은

39대 소성왕릉으로 비정하였습니다.

52대 효공왕릉을 문무왕비 자의왕후릉으로, 황복사지 동편 폐릉을

효성왕비 혜명부인릉으로, 김유신묘를 제35대 경덕왕릉으로,

김인문묘를 김유신묘로 비정하였습니다.

 

신라 하대 왕릉 중에는 제35대 경덕왕릉을 제39대 소성왕릉으로 제44대 민애왕릉을

40대 애장왕릉으로, 능지탑의 석물을 제43대 희강왕릉의 것으로,

 

구정동 방형분을 제44대 민애왕릉으로, 28대 진덕왕릉을 제45대 신무왕릉으로,

49대 헌강왕릉과 제50대 정강왕릉을 제46대 문성왕릉과 제47대 헌안왕릉으로,

 

7대 일성왕릉을 제52대 효공왕릉으로 비정하고, 45대 신무왕릉, 46

문성왕릉, 47대 헌안왕릉, 53대 신덕왕릉, 54대 경명왕릉, 55

경애왕릉은 왕릉이 아닌 왕공귀족의 분묘로 보았습니다.

 

이렇게 볼 때 현재 명칭이 붙여진 경주의 신라 왕릉은 거의 대부분 남의 이름으로

문패를 달고 있는 셈인데 이러한 속사정이 있기에 그동안 많은 학자들이

이 문제에 관심은 보였어도 조심스럽게 접근하였으며,

결국은 적당히 비켜가는 편에 서 왔습니다

 

흥덕왕은 성이 김씨, 이름은 수종·경휘이며 아버지는 원성왕의 큰 아들인

인겸이며 어머니는 성목태후 김씨이며 헌덕왕의 동복아우입니다.

 

 

앵무새와 흥덕왕 이야기

   

삼국유사에 왕비를 잃은

흥덕왕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사람이

앵무새 한 쌍을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오래지 않아 암놈이 죽자

홀로 남은 수놈은 슬피 울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왕은 사람을 시켜 그 앞에 거울을 걸어 놓게 했더니

 

앵무새는 거울 속의 그림자를 보고는 자기의

짝인 줄 알고 그 거울을 계속 쪼아대다가

제 그림자인 것을 알고는 슬피 울다 죽었다고 합니다

 

이에 왕이 앵무새를 두고

노래를 지었다고 하나 가사는 알 수 없습니다.

 

흥덕왕이 짝을 잃고 슬퍼하다 죽은 앵무새를 두고

노래까지 지어 공감을 나타냈던 것은

자신의 처지가 실제로 그와 비슷하였기 때문입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에 의하면

흥덕왕이 즉위하던 해에 아내인 장화부인이 죽었다.

 

왕은 아내를 잊지 못하고 슬퍼해서

군신들이 재혼할 것을 청하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새도 자기의 짝을 잃고 슬퍼하는데,

 

좋은 배필을 잃고 어찌하여

무정스럽게도 바로 다시 부인을 얻겠는가?”

 

왕은 끝내 요청을 듣지 않고,

시녀들조차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좌우의 심부름꾼은 오직 내시뿐이었다.

 

그 후 흥덕왕은 11년 동안

죽은 장화부인만 생각하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왕이 장화부인의 무덤에 합장하기를

유언하여 흥덕왕릉에 합장하였다고 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