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제28대 진덕여왕릉을 찾아서
경주 현곡면
오류리에 있는 신라
제28대 진덕여왕의 왕릉은
사적 제24호로 오류마을의 뒤편에
있는 안태봉 중턱에 있으며 선덕여왕의
뒤를 이은 신라 2번째 여왕으로 김춘추와
김유신이 삼국통일을 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닦은
임금이며 성은 김 휘는 승만이고 진평왕의 동생인
국반갈문왕과 월명부인의 딸로 신라의 마지막 성골
출신왕으로 김춘추와 김유신의 보좌에 힘입어 즉위
한지 9일 만에 비담의 난을 종식시켰으며 진덕왕릉은
원형봉토분으로 아래 부분에는 둘레돌을 배치하였고
둘레 돌 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12개의 탱석을
끼워 넣었는데 방향에 따라 12지신 상을 새겼으며
그 위에는 긴 돌을 한 번 더 올려 놓았으며 무덤
앞에는 이 외에 별다른 석조물은 없는데 진덕여
왕의 왕릉은 도굴꾼들이 4.5m정도 파 들어가
석실에 닿았으나 석실 안에 있던 흙을 모두
파낼 엄두를 내지 못하여 도굴을 중단한
적이 있으며 현재의 모습은 1975년에
수리 보수 된 왕릉의 모습입니다
=신라 제28대 진덕여왕릉=
경주시 현곡면 오류리에 있는 신라 제28대 진덕여왕의 왕릉으로 사적
제24호이며 오류마을의 뒤편에 있는 안태봉 중턱에 있습니다
진덕여왕은 선덕여왕의 뒤를 이은 신라 2번째 여왕으로 김춘추와 김유신이
삼국통일을 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닦은 임금으로 성은 김 휘는 승만입니다
진덕여왕은 진평왕의 동생인 국반갈문왕과 월명부인의 딸로 신라의 마지막
성골 출신 왕으로 김춘추와 김유신의 보좌에 힘입어 즉위한지
9일 만에 비담의 난을 종식시키고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진덕왕릉은 원형봉토분으로 아래 부분에는 둘레돌을 배치하였고 둘레 돌 사이
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12개의 탱석을 끼워 넣었는데 방향에 따라 12지신
상을 새겼으며 그 위에는 긴 돌을 한 번 더 올려놓았으며 무덤
앞에는 이 외에 별다른 석조물은 없습니다
진덕여왕의 왕릉은 도굴꾼들이 4.5m정도 파 들어가 석실에 닿았으나 석실 안에
있던 흙을 모두파낼 엄두를 내지 못하여 도굴을 중단한 적이 있으며
현재의 모습은 1975년에 수리 보수 된 왕릉의 모습입니다
진덕여왕의 왕릉은 흙으로 덮은 둥근 모양이고, 아래 부분에는 둘레돌을 배치
하였으며 둘레돌 사이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12개의 탱석을 끼워
넣었는데, 방향에 따라 12지신상을 새겼습니다
둘레돌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돌난간을 세운듯하나 지금은 거의 다
없어져 남아있지 않고 무덤 앞에는 이외에 별다른 석조물이 없고,
최근에 만든 통로와 축대가 있습니다.
경주시가지에서 대중교통편을 이용할 겨우에는 현곡면 오류리
오류등나무 앞 버스 승강장에서 내리고 탑니다
삼거리 사이로 푸르게 보이는 숲이 오류등나무 입니다
이 곳에서 작은 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신라진덕왕릉이라는 표지판이 가르키는 방향을 따라 계속 직진을
하다 보면 제 1주차장이 나오게 됩니다
이 곳에서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500m 쯤 올라가면 제2주차장이 나오게 됩니다만
제1주차장에 주차를 하지 말고 제2주차장까지 게속 올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 곳에 주차를 하고 표지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산길을 따라 약 200m 쯤
올라가노라면 진덕여왕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솔길이 끝나는 부분에서 다시 능선을 따라 윗쪽으로 조금더
올라가면 능선 중앙에 진덕여왕의 왕릉이 있습니다
잘 생긴 소나무 줄기 사이로 진덕여왕의 왕릉이 보입니다
진덕여왕은 7년간 왕으로 있는 동안 국력을 기르고 당나라와 적극적 외교를
통해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하여,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진덕여왕은 647년 사촌언니인 선덕여왕이 비담의 난을 토벌하던 도중에 서거
하자 왕위를 계승하여 즉위하였는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654년 3월에
왕이 죽자 시호를 진덕이라 하고, 사량부에 장사지냈다고 합니다.
반란군을 토벌한 진덕여왕은 알천을 상대등에 임명하고 대아찬 수승을 우두주의
영주로 임명하는 등 왕권 강화를 통한 정치적 개혁을 실시함과 동시에
국내 안정을 꾀하여 비교적 안정된 위치에서 정무를 집행하였습니다
백제가 신라의 내정이 내분으로 불안해진 틈을 타 그해 음력 10월 신라를 침공
하였을 때 진덕여왕은 김유신을 출전시켜 백제군에 대적하도록 하였습니다.
백제의 지속적인 공략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던 신라는 설상가상으로
고구려까지 신라 공격에 가세하자 진퇴양난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진덕여왕은 648년에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필요한 군사 지원을 얻기
위해 김춘추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는데 당나라 역시 고구려 정벌을
위해서는 신라의 협조가 절실했기 때문에 환영하였습니다.
진덕여왕과 당 태종은 서로 간에 친교를 돈독히 한 다음, 나당 연합을
체결하였으며 김유신으로 하여금 국방력을 증강시켜서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당 태종이 죽고 고종이 즉위하자,
진덕여왕은 김춘추의 아들 김법민을 사신으로 보내
자기가 직접 지은 시 ‘태평송’ 을 올리게 했는데,
그 내용은
위대한 당나라여, 왕업을 열었으니
높고 높은 황제의 앞길 번창하리라.
전쟁을 끝내고 천하를 평정하고,
학문을 닦아 백 대에 이어지리라.
하늘의 뜻 받드니 은혜의 비 내리고,
땅의 만물 다스려 빛나는 이치 얻었네.
어짊 깊고 깊어 일월과 어울리고,
시운도 따라오니, 언제나 태평하네.
큰 깃발 작은 깃발 저리도 빛나며,
징소리 북소리 어찌 저리 쟁쟁한가?
외방의 오랑캐 황제 명령 거역하면,
하늘의 재앙으로 멸망하리라.
시골이나 도시에나 풍속이 순박하고,
멀리서 가까이서 좋은 일 다투어 일어나네.
빛나고 밝은 조화 사계절과 어울리고,
해와 달과 오성이 만방을 도는구나.
산신의 뜻으로 재상이 보필하고,
황제는 충신 인재를 믿으시니,
삼황과 오제의 덕이 하나가 되어
우리 당나라를 밝게 비추리로다.
태평송은 한마디로 ‘아부가’ 라고 할 수 있는데 당시 신라의 사정이
얼마나 급박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백제의 지속적인 공략에 밀리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신라는 설상가상으로
고구려가 가세하여 신라를 공격하면 회복할 수 없는 결과가
초래될 수도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당나라의 군사 지원을 이끌어 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김춘추가 스스로 당나라의 복장을 입겠다고 말한 것이나,
신라가 써 오던 연호를 버리고 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한 것도 모두 당나라의 지원을
얻어 내기 위한 것으로 김춘추의 외교 노력은 나당연합군으로 결실을 맺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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