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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묘를 찾아서

김후직의 간묘를 찾아서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12. 8. 27.

 

 

김후직의 간묘를 찾아서

 

 

경북도 기념물

31호인 경주 간묘는

신라 진평왕 때의 충신이었던

김후직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김후직은 진평왕 때의 왕족으로 죽은 뒤

무덤 속에서까지 왕의 잘못을 지적한 충신

으로 진평왕이 사냥을 너무 좋아하여 정사를 돌

보지 않자 김후직은 사냥을 누차 만류했으나 왕이

듣지 않자 병으로 죽을 무렵 신하로서 왕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죽게 되니 왕이 사냥 다니는 길가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했는데 김후직이 진평왕에게 간했

다는 상진평왕서는 후대 사람들에게 충간의 표본으로

여겨졌으며 김후직이 죽어서 했다는 충간은 간묘라

하며 기림을 받았다고 하는데 경주시 중심가에 있는

황성공원 북편 아파트 밀집지역에 그의 묘로 알려진

분묘가 있으며 사람들은 이 묘를 기리어 간묘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지금 묘 앞에 김후직 묘비가 서

있는데 1710년 경주부윤 남지훈이 세운 것으로

김후직간신지묘 라고 새겨져 있으나 관리가

허술하여 금이가 있으며 봉분 주위에는

녹음방초가 무성하여 드물게 찾아오는

관광객들의 발길을 돌리게 하는

간묘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 31호인 경주 간묘는 신라 진평왕 때의 충신이었던

김후직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김후직은 진평왕 때의 왕족으로

죽은 뒤 무덤 속에서까지 왕의 잘못을 지적한 충신의 묘입니다

 

  신라간신김후직묘(新羅諫臣金后稷墓)라고 내리쓴 글이 글씨가

선명하게 움푹 새김 되어 있습니다  

 

신라 시대의 무덤 중에서 이름이 전해 내려오는 묘는 김유신 묘, 김인문 묘,

김 양 묘, 설 총 묘, 그리고 김후직의 묘 뿐 이라고 합니다

 

진평왕이 사냥을 너무 좋아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자 김후직은 사냥을 누차 만류

했으나 왕이 듣지 않자 병으로 죽을 무렵 신하로서 왕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죽게 되니 왕이 사냥 다니는 길가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했다고 합니다 

 

김후직이 진평왕에게 간했다는 상진평왕서는 후대 사람들에게 충간의 표본으로

여겨졌으며 김후직이 죽어서 했다는 충간은 간묘라고 합니다

 

김후직의 묘는 경주시 중심가에 있는 황성공원 북편 아파트 밀집지역에

있으며 지금 간묘 앞에는 김후직 묘비가 서있습니다

 

김후직은 신라 진평왕 때의 왕족으로 죽은 뒤 무덤 속에서까지 왕의 잘못을

지적한 충신으로 관등은 이찬이었으며 진평왕 때 병부령이었다고 합니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 31호인 경주 간묘는 신라 진평왕 때의 충신이었던

김후직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는 간묘표지석입니다 

 

김후직의 묘비는 1710년 경주부윤 남지훈이 세운 것으로 김후직간신지묘

라고 새겨져 있으나 관리가 허술하여 금이 가 있습니다

 

신라간신김후직묘(新羅諫臣金后稷墓)라고 내리쓴 글이 글씨가

선명하게 움푹 새김 되어 있습니다

 

비석의 뒷면에는 이 무덤에 대한 내력을 적은 다음 이는 후대에 길이

알려 모범이 될 일이므로 비를 세운다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간 묘 비문의 글은 조선 숙종 36(1710)에 당시 경주부윤

남지훈이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김후직이 진평왕에게 간했다는 상진평왕서는 노자와 서경까지 인용하여

유학에 입각한 교훈을 갖춘 것으로서 후대 사람들에게

충간의 표본으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김후직 묘의 봉분 주위에는 녹음방초가 무성하여 드물게 찾아오는 관광객들의

발길 마져 되돌리게 하는 간묘를 다시 찾아가 보았습니다

 

 

 

김후직의 간묘는 황성공원(고성숲, 논호림, 황성숲) 북쪽에 있으며 계림중학교

북쪽 담장에서 50m 떨어진 곳에 있으며 밑 둘레 84m, 높이 5m인 이 묘는

경상북도 기념물 31호로 지정·보호하고 있습니다.

 

죽은 뒤 무덤 속에서까지 왕의 잘못을 지적한 충신으로 관등은 이찬(伊飡)

이었으며, 580(진평왕 2) 병부령(兵部令)이 되었습니다.

 

경주시 황성동 주택가 아파트 밀집지역에는 커다란 무덤이 하나 있는데

신라시대 김후직의 묘로 사람들은 그 묘를 간묘 라고 합니다

 

감묘는 간언하는 묘라는 의미가 담긴 뜻으로 김후직의 무덤은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고 무덤 속에서 왕을 간하여 왕의 잘못을

고친 충신 김후직의 무덤이라고 전해 오고 있습니다.

 

 

(간묘 바로 옆에는 베네라는 카페가 최근에 세워졌습니다)

봉분은 지름 25M, 높이 6M로 흙을 둥글게 쌓아올린 형태이며, 묘의 앞부분에는

후대에 만든 상석이 있고 그 좌측에 묘비가 있습니다

 

 

(카페 베네 라는 새로 지은 카페에서 조망할 수도 있습니다) 

김후직은 26대 진평왕 때의 사람으로 22대 지증왕의 종손이니 진평왕과는

가까운 7촌 숙으로 진편왕은 진지왕이 정치를 잘못하여 왕위에 있었는지

4년 만에 왕위에서 추방되었으니 그 뒤를 이은 진평왕으로서는 잘못된

정치를 바로 잡고 국민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어야 하는데

 

(베네라는 카페 주차장에 주차를 하면 됩니다) 

정치에는 흥미가 없고 오로지 사냥하는데만 열중하고 있었으니 신하들의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는데 당시 병부령(국방부장관)이였던 김후직은 도저히 그냥

있을 수는 없어서 중대결심을 하고 진평왕께 간하게 됩니다.

 

(황성농협 뒤로 들어가도 됩니다)

  "옛부터 임금된 분은 하루의 정사를 처리하는데에도 먼 훗날의 일까지 염려하여

시행하는 법이며 좌우에서 모시는 신하들의 올바른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받아 들이는데 인색함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 마음을 나라의 발전에

기울려 하루도 편안하게 쉬는 날이 없이 정치를 돌본 연후에라야 비로소 덕망있는

정치가 이루어지고 만백성이 태평을 누리고 나라가 보존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날마다 저 미친 사람과 같은 사냥군과 어울려 사냥에만 마음을

쏟고 정사를 살피지 않으시니 나라의 앞날을 장차 어찌 하실 작정이십니까?

부디 사냥을 그만 두시고 선현의 가르침을 따르시옵소서"

 

김후직의 간언은 간절했으나 왕은 김후직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간묘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옛날 신라 서울의 주변은

무성한 숲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서쪽에는 남정숲이 있었고,

남쪽에는 흥륜사로 유명한 천경림이 있었다.

 

동쪽에는 남천왕사로 이름난 신유림이 있었고,

북쪽에는 호원사로 이름난 논호림(지금 고성숲)

유림숲이 무성하게 울을 치고 있었다.

 

논호림과 유림 숲은

특히 울창하여 새들과 짐승들이 많이 서식했으므로

임금과 귀족들은 이 숲에서 사냥을 즐기는 일이 많았다.

 

 

지금 논호림과 유림숲 사이에

옛무덤 하나가 쓸쓸하게 자리 잡고 있는데

 

이 무덤은 신라 충신 김후직의 묘로서

간묘 라 불리우는 유서 깊은 묘소이다.

 

김후직은 신라 22대 지증왕의 증손으로

진평왕 때 병부령 이라는 높은 벼슬에 있었다.

 

진평왕은 신체가 장대하고, 힘이 장사일 뿐 아니라

무예도 능했으므로 사냥을 무척 즐겼다.

 

대궐을 비워 놓고, 사냥을 즐기는 무리와 함께

짐승들의 뒤를 쫓아 헤매는 날이 퍽 많았다.

 

 

어느날,

김후직이 사냥을 떠나는 임금의 말 고삐를 붙잡고

"옛 성인의 말씀에 사냥을 즐기면

마음이 거칠어져서 옳은 생각을 못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나라의 정무를 등한하시고,

사냥으로 시간을 낭비하신다면

선대에 보답하는 도리가 아니옵고

만대에 본보기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임금님께서 사냥을 거두어 주소서"

하며 눈물로 간청하였다.

 

 

그러나 왕은

김후직의 손을 뿌리치고 숲을 향해 말을 달렸다.

 

그 후에도 김후직은 여러번 임금님께 간청하였으나

왕은 후직의 말을 귀찮게 여길 뿐 아니라

끝내는 후직을 미워하게 되었다.

 

임금께 충성으로 바른 말을 올리려 애쓰던

김후직은 그만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

 

 

임종에 이르러 세 아들을 불러 놓고

"나는 임금의 잘못 행함을 바로 잡아드리지 못하고 죽는구나.

임금이 그릇되면 나라가 위태롭게 되는 것인데

 

이를 바로 잡아 드리지 못했으니

나를 어찌 임금의 신하라 하고, 나라를 사랑한다 하겠느냐.

내가 죽거든 임금이 사냥 다니는 길옆에 묻어 달라."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아들들은 고성 숲 서편

유림 숲으로 가는 길옆에 산소를 모셨다.

 

그 때 진평왕은

유림 숲으로 자주 사냥을 다녔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왕은

많은 사냥꾼을 거느리고, 유림 숲으로 사냥을 떠났다.

 

매사냥꾼들은 매를 손에 들고

짐승 사냥꾼들은 활과 창을 들고,

많은 개들을 앞세우거니 뒤세우거니 하면서

고성 숲 독산에서 유림 숲으로 향해 줄지어 갔다.

 

 

이때 바람결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 임금님, 사냥을 거두어 주소서..."

하는 간절한 소리에 사냥꾼들은 그만 가슴이 움찔하여

걸음을 멈추고, 사실을 임금께 아뢰었다.

 

그제서야 임금님이 귀를 기울이니

사냥을 거두어 달라는 애절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임금은

"이 소리가 어느 곳에서 들려오는가?"

하고 신하들에게 물었다.

 

 

"얼마 전에 죽은 김후직의

무덤에서 들려오는 소리인줄로 아뢰옵니다"

하고 신하들이 대답했다.

 

임금은 눈을 감고 말이 없었다.

감고 있는 임금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김후직은 죽어서도 나를 아껴 무덤 속에서 충간하니

내 어찌 이 말을 안 들으리오.

 

이 말마저 듣지 않는다면 무슨 면목으로 그의 영령에 대하랴."

하고, 사냥 길에서 되 돌아 섰다.

 

 

진평왕은 그 후부터

일체 사냥을 하지 않고, 정무에만 힘썼으니

사람들은 이 묘소를 기리어 간묘(諫墓)라 부르게 된 것이다.

 

지금 묘 앞에 김후직 묘비가 서 있는데 1710

경주부윤이 세운 것으로 김후직 간신지묘라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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