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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문화재답사

상주 천주산 북장사를 찾아서

by 송강 (松岡) 최 재 모 2012. 7. 29.

 

 

상주 천주산 북장사를 찾아서

 

 

천주산북장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말사로 833년에

진감국사가 창건한 고찰이며  임진

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24년 이곳에 온

중국인 승려들이 중건했다고 하는데 1650

화재로 소실되자 서묵과 충운스님이 중창했으며

그 후 여러 승려들이 많은 전각을 지어 번성했으나

1736년 화재로 소실된것을 승려들이 당우를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현존 당우는 극락보전·명부전

산신각. 요사채가 있으며 극락보전에 봉안 되어 있는

목조 아미타삼존불상을 비롯하여 파랑새가 그렸다는

전설이 있는 영산회 괘불탱과 우암산 정상 부근에

흩어져 있던 탑재를 1998년 이 곳으로 옮겨와서

북장사 삼층석탑 이란 이름으로 바꾸어 복원한

석탑이 있으며. 이곳은 삼악의 영산이 있어

그곳에 으뜸 장자(長字)로 이름을 한 네

곳에 절을 세우니 갑장사, 승장사,

남장사, 북장사 라고 합니다

= 상주 천주산 북장사 =

 

 

경상북도 상주시 내서면 북장리 산 35번지에 자리한 북장사는 대한 불교 조계종

8교구 직지사의 말사로 상주에서 보은으로 가는 길 속리산 끝자락의

넓은 계곡과 평평한 산세의 노악산 뒤 천주산 중턱에 있습니다.

 

 

천주산 북장사는 천주산 중턱에 있는 사찰로 북장사의 일주문은 근래에 새로 증축한 일주문인데

천주산 북장사라는 일주문 현판이 걸려 있으며 일주문 기둥의 둘레가 하나의 나무라고 하면

믿기가 힘들 정도로 굵은 목재를 사용한 것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북장사 일주문은 한국에서 최초로 도로에 건축허가를 받고 지어진 일주문이라고 합니다

  

천주산 이란 이름은 북장사에서 500m 쯤 떨어진 산 중턱에 수미굴이 있고

이 굴속이 밑이 좁고 위가 넓은 천연의 돌기둥이 하늘을

받치는 것처럼 서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상주는 속리산의 지맥이 백 여리를 달려와 이곳에서 낙동강을 만나 멈추니,

경치가 뛰어나고 신선이 살 만큼 아름다워 중국의 명승지인

상산과 비유되었다고 합니다.

 

경상도란 이름도 경주와 상주에서 따올 만큼 대표적인 지역으로 이곳에 삼악의 영산이 있어

그곳에 으뜸 장자(長字)로 이름을 한 네 곳에 절을 세우니

갑장사, 승장사, 남장사, 북장사 라고 합니다 

 

상주 천주산 북장사는 833(흥덕왕 8)에 진감국사가 창건한 고찰이지만 그는

이보다 앞서 832년 남쪽에 남장사를 창건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상주 천주산 북장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24(인조 2) 이곳에 온 중국인

승려 10여 명이 중건했다고 하는데 1650(효종 1) 화재로 모두 소실되자

서묵(瑞默)과 충운(忠雲)이 중창했다고 합니다 

 

상주 천주산 북장사는 그 뒤 여러 승려들이 많은 전각을 지어 번성했으나 1736(영조 12)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절의 승려들이 몇몇 당우를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상주 천주산 북장사의 현존 당우로는 극락보전·명부전·산신각·요사채 등이

있으며 이밖에 극락보전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아미타삼존불상(1676)

비롯하여 괘불·부도·석등 부재 등이 남아 있습니다.

 

상주 4장사라고 하여 북장사, 남장사, 갑장사, 승장사의 4개 사찰이 조계종 산하의 전통

사찰로 1962928일 등록되어 있었다고 하나 승장사는 현재 없어졌다고 하며

노악산은 상주 쪽에서 부르는 이름이며, 노음산은 외서면 쪽에서,

천주산은 내서면 쪽에서 부르는 이름입니다.

 

북장사 사적기에 의하면, 천주산이라 함은 산 위에 수미굴(須彌屈)이 있고 그 굴

가운데에 저절로 생긴 돌기둥이 있는데 아래는 좁고 위는 넓어서 마치

하늘을 괴어 받친 기둥처럼 보이기 때문에 천주산이라 했다고 합니다.

 

상주 천주산 북장사는 최근에 기왓장에서 '천주산'이라는 명문이

출토되어 이를 뒷받침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상주 천주산 북장사는 신라 시대인 833년 진감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추정하며,

창건 이후 이 사찰을 중심으로 수미암, 상련암, 은선암 등의 부속암자가

있었는데, 한 때는 600여 승려가 살았을 만큼 큰 국찰 이었으나

임진왜란때 병화(兵火)로 완전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상주 천주산 북장사가 한때는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20여 동의 대찰이었고,

삼보백물을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하나 지금은 극락보전, 명부전,

삼성각, 일주문, 명월당과 요사가 남아 있습니다

 

 

  극락보전은 주전각으로 숙종 때 조성된 2m 높이의 거대한 목조 삼존불인 아미타여래,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을 모셔 놓은 주 전각이라고 합니다 

 

극락에서 중생들을 맞아주시는 아미타 부처님은 과거세 자재왕여래 시절 국왕

이었는데 출가하여 법장비구가 되어 48가지 큰 서원을 세웠다고 합니다

 

극락보전은 열 번의 염불로 극락세계 왕생을 서원하고 임종 시 아미타불이

나타나길 서원하고 염불하는 모든 중생이 극락왕생하길 서원하고 

 

극락왕생하는 사람은 바른 깨달음을 얻고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장수하고,

광명하기를 서원하는 원을 세우고 이를 실천해 아미타불이

되신 법장비구가 계신 곳입니다

 

북장사 극락보전엔 설법하시는 후불탱화 대신 1000분의 원불이 각각의

원을 담고 삼존불을 호위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법당은 2001년 새로 지은 것으로 이조 초기, 불교 전성시대의 화려했던 단청

기법을 써서  지붕 꼭대기, 치미엔 금색의 용두를 안치고 지붕 구석구석을 금색의

귀면와로 장식하여 자주 발생하는 화마의 침입을 막으려 한 것이라고 합니다

 

  상주 천주산 북장사는 주요 유물로, 파랑새가 그렸다는 전설이 있는 보물 1278호로

지정된 영산회괘불탱이 있는데 괘불의 크기는 총 높이 1,337cm, 총 폭 807cm이며

화폭은 1,237X778cm 으로, 1688(숙종 14)에 제작되었으며,

마본 채색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산회 괘불에 대한 이야기가 전하는데 이 괘불은 비가 오게 하는 힘이 있다고

이곳 사람들은 믿고 있으며 현지의 구전은 이 괘불은 영험이 있어서 가뭄이

심할 때 괘불을 노천에 걸고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온다고 합니다

 

이 영산회괘불탱이 파랑새가 그렸다는 전설이 있는 보물 1278호로 지정된 영산회괘불탱인데

괘불의 크기는 총 높이 1,337cm, 총 폭 807cm이며 화폭은 1,237X778cm

 1688(숙종 14)에 제작되었으며 마본 채색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산괘불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옛날 당나라에서 왔다는 한 스님이 북장사를 찾아왔는데 아마 탱화를 그리는

유명한 화승이었던 분으로 마침 북장사 에서는 거대한 탱화를 제작할

참이라 주지 스님은 그를 반겨 맞아 주었다고 합니다 

 

"지금부터 3일 동안 이 법당 안에서 일 할 것이니 들여다보지 말아 주시오."  

화승은 북장사 주지에게 이렇게 일러 놓고 법당으로 들어갔다고 하는데.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고 합니다 그날따라 법당은 쥐 죽은 듯 고요하여

 

'도대체 어떤 그림을 그리기에 저토록 고요할까?

아니 왜 들여다보지도 마라고 했을까?'

법당 뜰을 쓸던 부목승은 의아한 생각에 젖기 시작했습니다

 

일을 하면 무슨 소리라도 들린 텐데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다니?'

또 다시 부목승은 의문에 잠겼습니다.

 

 

순간 '이건 분명 엉터리일 것이다 도대체 뭘 하는지 들여다 볼 수밖에

부목승은 주지스님의 엄명도 잊은 채 살그머니 법당으로 올라가

문구멍으로 법당 안을 들여 다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스님은 갓 곳이 없고 파랑새 한 마리가 온 방안에 광채를

뿌리며 부리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다가 문구멍으로 들여다보는 부목승으로

목을 돌리더니 이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부목승은 깜짝 놀라 눈을 의심하며 법당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불러도 스님은 간 곳이 없었습니다.

  곧 절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모두들 찾았지만 화승은 간 곳 없고 파랑새가 날아간 자리에는 오른손 한 짝을

미완성으로 남긴 괘불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3백년이 지난 오늘날도 한쪽 팔이 없는 이 거대한 괘불의 마음은 경솔한 인간을

한탄하고 있을까? 오랜 침묵을 지키던 이 괘불은 1998629일 보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고 합니다

 

영산괘불은 평시에 두루마리로 말아서 이 나무 함 속에 보관하여 두었다가 큰 불사가

있을 때 내다 건다고 하는데 영산괘불이 워낙 커서 영산괘불을 한 번

걸려면 장정 30명 정도가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 뜰에 걸어놓고

예불을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으로 이 그림은 괘불에서 많이 그려지는

영산회상도로 석가가 설법하는 장면을 나타낸 것입니다.

 

 

영산괘불은 숙종 14(1688) 승려 화가인 학능 등이 그린 이 괘불은 길이 13.2m,

8.07m이며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파랑새가 그림붓을 입에 붓을 물고

그린 그림으로 오른손 한 짝을 미완성으로 남긴 괘불입니다

 

 

영산괘불은 본존불인 석가불이 중앙에 서 있고 여러 보살 등이 석가를 에워싼

형태인데, 석가의 얼굴표정은 둥근 얼굴과 조화로운 이목구비, 어깨선의

균형 잡힌 신체에서 부드럽고 원만한 느낌을 준다고 합니다

 

 

영산괘불은 주로 홍색과 녹색을 사용하였고 중간색과 금색무늬는 화면을  경쾌하고 화려하게 해준다고 하는데

이 괘불은 치밀하고 정교한 필치로 신체의 표현이 분명하고, 밝고 선명한 색채로 나타낸 다양한

꽃무늬가 돋보이는 17세기 후반의 뛰어난 작품이라고 합니다.

 

 

극락보전 앞에는 통일신라시대 조성한 석탑이 자리 잡고 있는데 본래 인평동

사지에 있었으며 도굴꾼에 의해 무너진 것을 부재를 수습하여

용흥사에 보관하다 1998년 북장사로 옮겨 복원했다고 합니다

 

북장사 삼층석탑은 1991325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38호로 지정되었는데

원래는 폐탑이었던 것을 상주시 인평동에 있는 해발고도 400m의 우암산에

흩어져 있던 석탑의 부재를 수습하여 북장사에 원형 복원한 것입니다

 

북장사 삼층석탑의 부재중에 옥개석 3개는 확실했으나 탑신석은 3

탑신석 1개만이 보일 뿐 1층과 2층의 탑신석은 없어졌습니다.

 

 

북장사 삼층석탑은 기단석 석재의 형태로 보아 2층 기단이나 부재가

많이 보이지 않았으며 복원한 뒤 옥개석의 너비는 190이고

삼층탑신석 너비는 68, 높이는 28입니다 

 

북장사 삼층석탑은 상주시 인평동에 있던 탑으로, 우암산 정상 부근에 흩어져

있었던 것을 용흥사로 옮겨 관리하였다가, 1998년 현재의 자리인 북장사

경내로 옮겨 북장사삼층석탑으로 이름을 바꾸어 복원한 탑입니다

 

 

북장사 삼층석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원래 기단 일부와

탑신의 3층 몸돌 1, 지붕돌 3개만 남아 있었으며 아래·위층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습니다.

 

북장사 삼층석탑의 지붕돌은 낙수면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 올라갔으며, 밑면에 5단의 받침을 두었습니다.

 

  북장사 삼층석탑은 남아있던 기단과 지붕돌 등 부재들의 양식상 특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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