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팔도문화재답사

고달사지를 다시 찾아서

by 송강 (松岡) 최 재 모 2012. 7. 8.

 

 

고달사지를 다시 찾아서

 

 

고달사지는

여주 북내면 상교리에

있는 큰 사찰이 있었던 자리로

지금은 폐허가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당대 사찰의 규모를 알려주는 많은 석조

유물들이 남아 있어 문화재 탐방자 들이 으뜸

으로 꼽는 곳이 여주 고달사지와 양주 회엄사지

라고 할 정도로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764)

창건되었고 고려4대 광종 이후 왕실의 비호를 받으

면서 대가람으로 지내 왔으나 언제쯤 폐사가 되었는

지는 알 수 없다고 하는데 고달사지에는 국보 제4

인  석조 예술의 대표 작이라고  할 수 있는 승탑이

있고 보물 제 7호인 원종대사 혜진 탑이 화려함을

더해 주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폐사지로는 경주의

황룡사지와 양주의 회엄사지, 여주 고달사지가

우리나라의 3대폐사지라고 하는데 고달사지는

크기 뿐 아니라 유적들이 경주의 신라 석조

유물의 뒤를 이어 고려로 이어지는 불교

미술의 흐름을 볼 수 있는 중요한

곳이라서 다시 고달사지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여주 북내면 상교리 혜목산 기슭에 자리한 고달사지는 경주황룡사지, 양주

회엄사지와 함께 3대 폐사지중 하나로 지금은 폐허가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당대 사찰의 규모를 알려주는 많은 석조유물들이 남아 있어 문화재

탐방자 들이 으뜸으로 꼽는 곳이 여주 고달사지입니다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23(764)에 창건되어 봉황암 이라 불렀고, 고려 광종

(950) 원감국사가 중건하여 고려 초기 국가에서 관장하는 3대 선원의

하나로 그 사세가 막강하였다고 하는데 그 후 확실치는 않으나

임진왜란 때 패사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고달사지에 남아 있는 석조유물들은 그 양식이나 조각수법이 신라석조유물을

닮아, 신라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불교미술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는데

의미를 두고 있으며 모두 고달이라는 석공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고달사지는 옛 명성을 말해 주는 듯 석조물들이 많이 남아있는 데 그중 보물급이상의

 문화재로, 고달사지부도, 원종대사 혜진 탑과 원종대사 혜진탑 귀부 및 이수,

고달사지 석불대좌, 고달사지 쌍사자석등 이 있습니다 

 

고달사지에 외롭게 남아있는 석조입니다만 고달사지 석조는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으로

장변 321cm, 단변 149cm, 높이 98cm평면이 긴사각형으로 표면을 고르게 다듬어

전체적으로 정연하면서도 정교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바닥 중앙부에는 지름 7.5cm의 원형 배수공과 각 면의 모서리 부분을 부드럽게 다듬었고

모서리는 바깥 면 중간에 1단의 굴곡을 두었고 상면 모서리에는 안쪽으로 연꽃잎이

살짝 말려 들어가는 듯 한 양감 표현 및 상면으로 약 2cm 정도의

귀접이를 해서 장식적인 기교가 돋보이고 있습니다.

 

 

여주군 관계자는 이처럼 석조의 모서리부분을 화형으로 치석한 경우는 보기 드문 예로

전체적인 치석 수법과 고달사지의 연혁 등을 고려할 때 고려 전기에서도

이른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달사지 석불대좌는 보물 제 8호로 총 높이는 1.48m로 고달사 터에 남아 있으며,

대좌가 3단이고 각 단이 다른 돌로 되어 있는데 기본형은 4각형이며 윗 단의

윗면은 불상을 안치하던 곳으로 1단의 각형받침이 있습니다

 

 

석불대좌는 방형으로 연꽃과 안상을 교체하면서 소박하면서도 유연한 자태를 자랑하는

고려초기의 역작으로 대좌가 놓여 있는 곳은 금당의 중앙부분에 해당합니다.

 

 

이 석불대좌는 불상은 없어진 채 대좌만 남아 있는데, 보존상태가 거의 완벽하며

대좌의 크기가 큰 것으로 보아 불상도 매우 컸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받침돌은 위·중간·아래의 3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래 받침돌과 윗 받침돌에는

연꽃잎을 서로 대칭되게 돌려 새겼는데 이 대좌가 사각형으로 거대한 규모

이면서도 유연한 느낌을 주는 것은 연꽃잎의 묘사 때문이라고 합니다.

 

 

문화재 전문가들에 의하면 가운데 꽃잎을 중심으로 좌우로 퍼져나가는 모양으로 배열

하는 방법은 고려시대의 양식상 공통된 특징이라 하며 절터에 있는 고달사지

부도가 고려 전기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대좌도 10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고달사지 석조대좌 안내문

이 석불좌는 불상은 없어진 채 대좌만 덩그렇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보존상태가

거의 완벽하고 조각솜씨가 명쾌한 4각 대좌의 수작이다. 이 대좌는 정방형의 석재를

상 중 하대 등 3중으로 겹쳐놓은 이른바 방형대좌이다

상대는 앙련을 시원하고 뚜렸하게 조각했고 중대는 4면에 모두 하나의 큼직한 안상을

음각했는데 솜씨가 명쾌하며 하대는 상대와 같은 수법은 연꽃을 복련으로 새기고

그 아래로 안상도 조각하고 있다.

말하자면 방형의 중첩과 연꽃과 안상무늬의 교체를 명쾌하고 산뜻한 조각솜씨를

조화시킨 고려 초기 역작의 석조대좌라 할 수 있다.

 

 

경주의 석조처럼 화려한 연화무늬는 없어도 큰 석조로 고달사지는 유적들이 경주의 신라

석조유물의 뒤를 이어 고려로 이어지는 불교미술의 흐름을

볼 수 있는 중요한 곳 이라고 합니다  

 

 

 

고달사지 원종대사 혜진탑 귀부 및 이수는 보물 제6호로 석불대좌 뒤로 조금만 가면 나타나는 원종대사 혜진탑 비의

귀부와 이수는 혜목산 고달선원 조사 원종대사비를 받쳤던 귀부와 비신위에 얹혔던 이수이며 귀부와 이수는

현존하는 것 중 가장 규모가 크며 사실적이고 힘이 넘친다고 합니다.

 

 

비는 무너져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서 현재는 경복궁 근정전 서쪽화랑에 진열되어 있으며 이곳 고달선원 절 테에는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있는데 비문에 의하면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869) 13세에 출가하여 상주공산

삼랑사에서 융계선사에게 사사하였으며 22세에 양주 삼각산 장의사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23세에 입당하여 서주 동성현 적주산에서 자산화상에게 사사하였으며 경명왕 5(921)에 환국하여 봉림사에 거주 하다가

광주 천황사에서 고려 광종 9(958)8월에 90세로 입적하니 왕이 애도하여 원종대사혜진이라 추시하고

진영일정을 그리게 하였으며 대사입적 후 17년에 이 비가 세워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귀부는 거대한 단일 석으로 조성되고 6각 귀갑문이 장식되어 있으며 방방형의 비좌는 운문이 새겨져 있는

연화좌 위에 조출되고 상면 둘레에는 복련문이 조출되어 있습니다.

 

 

네 다리와 발톱 끝의 조형은 사실적이며 예리하나 귀 뒤의 통상 볼 수 있는 용형이며 이수는 구름과 용무늬로

장식되어 있으며 정상에 작은 구멍이 뚫어져 있어 보주가 꽃혔던 흔적으로 보입니다.

 

 

비는 귀부와 비신, 이수로 구성되어 있는데 귀부(받침돌)와 이수(머릿돌)만 남아 있고

몸통 부분인 비신은 1916년에 무너져 경복궁 근정전 회랑으로 옮겨졌다고 하는데

귀부를 받침돌, 이수를 머릿돌, 비신을 몸돌이라고도 합니다

 

 

거북의 발톱은 땅을 꼭 누르고 있고 다리는 앞으로 차고 나가려는 듯 사실적이며 목 부분은 머리가

등에 바짝 붙어 있어 웅크리고 있는 듯 하며 머리 부분은 눈을 부릅떠 정면을 노려보고 있는데

눈꼬리가 위로 길게 치켜 올라가 상대방으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이수 부분의 제액은 혜목산고달선원국사원종대사지비(慧目山高達禪院國師元宗大師之碑)라고 선명하게

 남아 있으며 이를 통해서 이 절의 원래 이름이 고달선원임을 알 수 있고 이 비가 원종대사인 것을

알 수 있고 이 절이 위치한 산 역시 혜목산임을 알 수 있는데 이 글씨는 비문에 따르면

수국사신 김정언이 글을 짓고, 내의승지 장단열이 썼다고 합니다.

 

 

신라의 무열왕릉 비와 비교를 해 본다면 신라의 귀부는 거북이 머리가 사실적으로 거북이 머리를 닮았으나

고달사지의 귀부는 거북이의 몸체에 머리는 거북이가 아닌 용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 이후부터

고려 초기로 오면서 귀부의 얼굴은 용의 얼굴 모습으로 변하게 된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거북의 머리가 용의 머리에 가깝고 목이 짧고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점, 이수의 표현이

격동적이며, 특히 소용돌이치는 구름무늬의 번잡한 장식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진전되는 탑비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합니다.

 

  고달사 원종대사 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옆에는 규모가 작고 표현 양식이 단순한 귀부가

하나 있는데 보물 제6호로 지정되었으며 원종대사 혜진탑비 귀부보다

이 전의 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고달사지에 있는 돌 조각품들은 어느 것이 더 훌륭한 것인가? 라는 질문은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할 정도로 모두가 아름다운 것으로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모두가 정교하면서도 숙련된 솜씨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절을 이루는 데에 혼을 바쳤다고 하는데,

절을 다 이루고 나서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훗날 도를 이루어

큰스님이 되니 고달사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고달사지 위에는 고달사지의 옛 명성을 되살리려는 듯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으로 고달사라는 작은 절이 세워져 있습니다

 

 

 

고달사에 전해오는 전설은

 

옛날 북쪽 어느 지방에 효심이 깊은 고달 이라는 석공이 노모를 모시고,

아내와 딸과 함께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았는데

 

 

어느 날 큰 사찰의 중건을 위해 부름을 받고 가족을 떠나 이곳으로 오게 되자

 딸과 노모를 아내에게 부탁하고 떠나온 석공은 불사 일을 시작하면서 백일동안

정한 수를 떠놓고 절을 잘 짓게 해 달라고 부처님께 빌었다고 합니다.

 

 

한편 고향에서는 몇 달이 지나도 남편에게 소식이 없고, 얼마 후 노모도 아들을 기다리다

 지쳐 세상을 뜨고 말았다고 합니다

 

마침내 아내는 딸을 업고 남편을 찾아 나섰으나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서 사랑하는 딸을 잃고

천신만고 끝에 고달이 일하는 절에 도착하여 스님께 남편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있지만 불사 일을 하는 중에는 누구와도 만날 수 없다고 거절하자 고달의 아내는

절문에서 며칠을 기다리다 고달을 만나지 못하고 하는 수 없어 발길을 돌렸지만

아내는 귀향길에 낙심과 고생으로 이절에서 이십 여리 떨어진 곳에서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서러움을 안고 그만 죽었습니다

 

 

고달은 삼 년 후 불사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서 이웃 사람들로부터 그간의 사정을 듣게 되자

객사한 아내의 무덤을 찾아 제사를 지내고 그길로 한 많은 속세를 떠나 자기가

지은 절에 와서 스님이 되어 훌륭한 대사가되어 불도에 전념하면서 살다가

구십 여세에 입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죽는 날까지 한시도 잊지 않고 자기로 인해 죽은 노모, 아내와 딸의 명복을 부처님께

빌었다고 하는데   지금 여주군 대신면에 원통이란 지명이 있는 데 고달의 아내가

원통하게 죽었다하여 부쳐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이절을 고달이 지극정성으로 지었다하여 석공 고달의 이름을 따서 고달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 고달이 원종대사의 속명이라고도 전해 옵니다.

 

 

 

 

 

 

 

 

고달사지 승탑은 국보 제 4호로 고려 석조미술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이 탑은 바닥의 형태가 8각을 이루고 있으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이

완전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잘 남아 있습니다.

 

 

고달사지 승탑은 고려시대 초기의 화강석제 부도로 높이는 3.4m이며, 8각원당형

부도 중에서 매우 뛰어난 작품으로 조형 양식이 신라의 기본형을 따르면서

세부적인 면에서는 고려시대의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고 있습니다

 

 

신라 말의 고승 원감대사의 묘탑이라고도 하지만 확실하지 않으며 그 절터에

남아 있는 원종대사의 묘탑인 혜진탑 보다는 앞선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승탑은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기단은 상··하 세 부분으로 갖추어져

있는데 중대석은 8각이라기보다는 거의 원을 이루고 있으며 표면에 새겨진

두 마리의 거북은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사실감이 느껴진다고 합니다.

 

 

거북을 사이에 두고 네 마리의 용을 새겨 두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웠는데 돌에 새겨진 무늬들이 세련되어 대담한 힘이 느껴지며 중대석을

중심으로 아래와 윗돌에는 연꽃무늬를 두어 우아함을 살리고 있습니다.

 

 

사리를 모셔둔 승탑의 몸돌에는 문짝 모양과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는데 문에 새겨진

자물쇠 모양의 조각은 밋밋하여 형식적으로 흐른 감이 있으며 이를 덮고 있는

지붕돌은 두꺼운 편으로 모서리를 따라 미끄러지면 그 끝마다 큼직한 꽃

조각이 달려 있는데 크기에 비해 얕아서 장식효과는 떨어진다고 합니다

 

 

고달사지 승탑의 상단부에는 보개가 얹혀져 있습니다.

 

 

정면에는 문짝 모양이 보이고, 양 옆으로 사천왕상이 있는데 이 승탑의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위의 상단부가 두꺼운 편이고 각 모서리를 따라 아래로 미끄러지면서 그 끝에는 큼직한

꽃조각을 달았으며 지붕돌 좌우측을 보면 비천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하단부에는 두 마리의 거북과 그 사이의 네 마리 용 그리고 나머지 공간에는 구름무늬를 새겨 넣었는데

두 마리의 거북은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사실감이 느껴지며 돌에 꽉차게 새겨진 무늬들이

세련되어 능숙하면서도 대담한 힘이 느껴진다고 합니다 

 

 

이 승탑은 비교적 완전하게 잘 보존되어 있으나 부도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서

승탑의 주인을 알 수가 없어 명칭을 고달사지 승탑 이라고만 지칭하고 있으나

최근에 원종대사의 스승인 원감대사의 승탑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승탑의 몸돌에 있는 선명한 사천왕상의 모습입니다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기단은 상··하 세 부분으로 갖추어져 있는데

중대석에는 사천왕상과 문비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중대석은 8각이라기보다는 거의 원을 이루고 있으며, 표면에 새겨진 두 마리의 거북은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사실감이 느껴지며 몸체는 거북이 형상입니다만

 머리는 용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승탑의 지붕돌 하단에는 팔각을 이루는 면마다 구름문양과 비천하는

 아름다운 상들이 시선을 멈추게 합니다 

 

이 승탑은 전체적으로 신라의 기본형을 잘 따르면서도 각 부분의 조각들이 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인 10세기 쯤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고달사지 승탑을 보고 좌측 산 중턱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원종대사 탑비와

상방하원 석실묘로 올라가는 길이 있습니다 

 

원종대사 탑비가 있는 곳으로 올라가는 돌 계단입니다 

 

석실묘가 있는 곳으로 올라가는 표지판입니다  

 

여주 상교리 석실묘는 도지정 문화재 기념물 198호이며 이 석실묘는 고달사지 부도에서 혜목산

정상 등산로를 따라 500m 정도 더 올라가면 되는데 이 석실묘는 위가 4각형이고 아래가 원형인

상방하원 석실묘이며 이 고분에서 상감청자 파편을 비롯한 몇 가지 발굴된 유물을 통하여

고려 말기로 추정하고 있으며 고려시대 묘제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 합니다  

 

이 고분은 198311~12월 한양대 박물관 발굴단에 의해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발굴 전에

이 고분의 기단부는 완전히 흙속에 묻혀 있었고 기단 2층과 석실 입구 부분의 돌만이 노출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이 고분 하부의 석실평면은 원형이고 연도가 달려있고, 상부는 네모난

방형의 2층기단으로 된 특이한 구조임이 밝혀져 그 구조상의 특징을 살려

상방하원석실묘 란 명칭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고달사지 원종대사 혜진탑은 보물 제 7호이며 건립연대는 원종대사 혜진탑비의

비문에 의하여 977(고려 경종 2)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고달사지 원종대사 혜진탑은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기단부는 4각 형태의 바닥 돌을 3단으로 쌓아 올려놓은 것이

특이한 형태라 할 수 있습니다.

 

 

탑신은 4면에 문 모양이 있으며 다른 4면에는 사천왕 입상이 새겨져 있고 혜진 탑의

지붕은 처마가 수평이나 귀퉁이 부분에서 위로 향하였고 꼭대기에는 지붕돌을

축소해 놓은 듯 한 머리장식이 올려져 있습니다.

 

 

혜진 탑은 가운데 돌을 중심으로 그 아래와 윗돌에는 연꽃무늬를 두어 우아함을 살리고 있으며

 사리를 모셔둔 몸돌에는 문짝 모양과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는데 문에 새겨진

자물쇠 모양의 조각은 밋밋하여 형식적으로 흐른 감이 있습니다

 

 

원종대사는 비문에 의하면 신라 경문왕 9(869) 13세에 출가를 하여 22세에 양주 삼각산

장의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고 하며 원종대사는 23세에 당나라에 들어가서

 서주에 있는 적주사 에서 자선화상의 사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경명왕 5년에 신라로 돌아와서 광주 천왕사에 주석하다가 90세로 입적을 하였다고

하는데 고려 광종이 애도하여 원종대사 혜진 이라는 시호를 내리시고

영정도 그리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고달사지 원종대사 혜진탑은 국보 4호인 고달사지 부도탑 과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섬세하면서도 세련미가 묻어나는 작품으로 탑의 양식이나

조각의 문양과 수법이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모두 닮았습니다   

 

 

지붕돌은 꽤 두꺼운 편으로 각 모서리를 따라 아래로 미끄러지면 그 끝마다 큼직한

꽃조각이 달려 있는데 크기에 비해 조각이 얕아서 장식효과는 떨어지고 있으며

지붕돌 꼭대기에는 둥그런 돌 위로 지붕을 축소한 보개가 있습니다

 

 

승탑은 전체적으로 신라의 기본형을 잘 따르면서도 각 부분의 조각들에서

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인 10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이며 돌을 다듬은 솜씨도 깨끗하고

조각에서도 세련미가 묻어나오는 작품입니다.

   

 

원종대사 승탑은 원종대사 입적 19년 만인 고려 경종 2(977)에 화강석으로 조성한

부도로 나말여초에 유행했던 팔각원당형의 기본형식에 각 부의 수법이 섬세하고

 우아하면서도 시대적인 특징도 드러나고 있으며 4매석이 맞물려 짜인 넓은

장방형의 지대석 위에 4매로 짜인 사각의 하대구조가 특이 합니다

 

 

고달사지 원종대사 혜진탑 앞에는 좌우측에 석주가 세워져 있는데 망주석이나 문인석

 같기도 합니다만 석주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들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고달사지 원종대사 혜진탑의 몸돌 위로 보이는 비천상인가

주악상인가 아름다운 조각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고달사지 원종대사 혜진탑의 중대석에는 굳게 잠긴

자물쇠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고달사지 원종대사 혜진탑의 중대석 위에는비천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누군가 근래에 탁본을 한 것 같은 흔적이 보입니다 

 

고달사지 원종대사 혜진탑의 중대석 위에 있는 지붕돌 밑면에는 

구름과 비천 주악상 등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습니다

 

고달사지 원종대사 혜진탑은 용두를 만들면서 용의 뿔을 따로 만들어서 용머리의 

윗부분인 정수리 부분에 깊게 파여진 홈 속에 끼워 넣었다고 합니다 

 

 

고달사지 원종대사 혜진탑의 중대석에는 4개의 문비와

4구의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고달사지 원종대사 혜진탑의 받침돌에는 거북모양의 귀부에

머리는 용의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고달사지 원종대사 혜진탑의 하대석에 조각된 연꽃 문양입니다

 

고달사지에는 승탑, 원종대사 혜진탑 비 귀부 및 이수, 원종대사 혜진탑, 석불좌대 등의

유물과 초석, 장대석, 계단석 등이 남아 있어 고달사가 융성했던 시기의 성대한

규모를 추측할 수 있으며 이곳에 있었던 쌍사자석등과 원종대사 혜진탑 비의

몸체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되어 보관하고 있습니다  

 

상교리의 작은 마을까지 포함하여 사방 30리가 모두 절터이었다는 고달사는 고려시대에

크게 번성했던 이 절은 화려한 유산만 남겨 놓은 채 쓸쓸한 폐사지로 남아있습니다

 

우리나라 3대 절터 중 하나인 고달사지는 신라 경덕왕23(764)에 창건되어 봉황암

이라 불렀고 고려 광종 때(950) 원감국사가 중건하여 고려 초기 국가에서

관장하는 3대 선원의 하나로 그 사세가 막강하였으나 그 후 확실치는

않으나 임진왜란 때 패사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국가사적 제382호인 고달사지에는 원감국사의 것으로 추정되는 우람하면서도 빼어난 자태의

국보 4호 고달사지 승탑, 강렬한 힘을 간직하고 있는 보물 6호 원종대사 혜진탑 귀부 및 이수,

섬세하고 아름다운 보물 7호 원종대사 혜진탑,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잘 생긴

보물 제8호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 경기도 유형문화재 247호 여주

고달사지 석조 5점의 문화재가 보존 돼 있습니다.

 

고달사는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있었던 신라시대의 절로 현재 절터는

대한민국의 사적 제382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신라 35대 경덕왕 23(764)

창건하였으며 고려 4대 광종 이후 역대 임금의 비호를 받은 절이었으나

어느 때 폐사되었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승탑은 전체적으로 신라의 기본형을 잘 따르면서도 각 부분의 조각들에서

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인 10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이며 돌을 다듬은 솜씨도 깨끗하고

조각에서도 세련미가 묻어나오는 작품입니다.

 

 

우리나라의 폐사지로는 경주의 황룡사지와 양주의 회엄사지, 여주 고달사지가

3대폐사지라고 하는데 고달사지는 크기 뿐 아니라 유적들이 경주의 신라

석조유물의 뒤를 이어 고려로 이어지는 불교미술의 흐름을 볼 수 있는

중요한 곳이라서 다시 고달사지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고달사지에 남아 있는 석조유물들은 ?

 

 여주 고달사지 승탑(驪州 高達寺址 僧塔) 국보 제4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驪州 高達寺址 元宗大師塔碑) 보물 제6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驪州 高達寺址 元宗大師塔) 보물 제7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驪州 高達寺址 石造臺座) 보물 제8

               여주 고달사지(驪州 高達寺址) 사적 제382

               여주 고달사지 석조(驪州 高達寺址 石槽)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7호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