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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문화재답사

모악산 귀신사를 찾아서

by 송강 (松岡) 최 재 모 2012. 6. 24.

 

 

모악산 귀신사를 찾아서

 

 

모악산귀신사는

전북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모악산 기슭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로 676년 의상

이 창건하고 국신사라 하였으며 신라 말

도윤이 중창한 뒤에 이름을 귀신사로 개칭

을 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화재로 폐허가 된

것을 1873년 춘봉이 다시 중창을 하였는데 고운

최치원 선생은 이곳에서 법장 화상전을 편찬하였

다고 합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물 인 대적

광전과 명부전 등이 있으며 주요 문화재는 귀신

사 삼층 석탑과 귀신사 부도, 사자가 남근석을

등에 지고 있다는 귀신사석수. 소조비로자나

불 좌상, 등이 있는 고찰로 조선시대 생육

신 김시습이 이 절을 찾은 뒤에 지었다는

귀신사허 라는 시문으로 유명한 사찰

모악산귀신사를 찾아 보았습니다

=== 모악산 귀신사 ====

 

 

 

 

 

 

모악산 귀신사는 전북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로 창건 당시의 명칭은 국신사였다고 합니다.

 

 

 

 

귀신사(歸信寺)676(문무왕 16)에 의상대사가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백제 법왕 때 왕실의 내원사로 처음 세워졌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창건 당시의 명칭은 국신사(國信寺)였다고 하나 그 후 통일신라 말기

도윤(道允)이 중창한 뒤 귀신사로 개칭하였다고 합니다

 

 

 

모악산 귀신사는 고려시대에 원명국사[1090~1141]가 중창하였다고 하는데

원명국사는 숙종의 넷째 아들로 8세 때 대각국사 의천에게 출가하여

1122(예종 17) 오교도승통이 되었으나, 이자겸의 횡포를 보고

귀신사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현존하는 건축물로는 대적광전, 영산전, 명부전, 요사채 등이 있으며

주요 문화재는 귀신사 삼층 석탑과 귀신사 부도, 사자가 남근석을 등에

지고 있다는 귀신사석수. 소조비로자나불 좌상, 등이 있습니다

 

 

 

귀신사는 금산사에서 모악산 서쪽 고개를 통하여 전주시로 넘어가는 길옆

청도마을에 자리 잡고 있으며 지금은 대한불교 조계종에 속해 있으나

본래는 화엄종 소속이었다고 합니다

 

 

 

귀신사는 신라 문무왕 16(676) 의상대사가 모악산 자락에 창건했다는

절로 1992년 이상 문학상을 수상한 양귀자의 소설인 ' 숨은 꽃 '

무대가 바로 모악산 귀신사 라고 합니다.

 

 

 

그는 귀신사에 있었다. 나는 그를 귀신사에서 만났다 ' 이렇게 시작되는 소설은

영원을 돌아다니다 지친 신이 쉬러 돌아오는 자리, 이름에 비하면 너무 보잘

것 없는 절이지만 조용하고 아늑해서 그 절을 찾는다고 했습니다

 

 

 

귀신사 대적광전은 보물 제828호 이며 신라 문무왕 16(678) 의상대사가

세운 절로 8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전하며 이 절에는 예스러운 맛이

배어 있는 건물과 연꽃무늬로 된 받침대, 동물 모양의 돌 등

많은 석물들을 볼 수 있습니다.

 

 

 

지혜의 빛을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은 17세기 경에 다시

지은 것으로 짐작되는데 앞면 5·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사람 인자 모양의 맞배지붕입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 맞추어 놓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앞면 3칸 문에는 빗살무늬 창호를 달았고,

오른쪽과 왼쪽 끝 칸인 퇴 칸은 벽으로 만든 점이 특이합니다.

 

 

 

신라시대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로 창건된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사찰로 창건 당시의 이름은 국신사 (國信寺)였다고 합니다

 

 

 

화엄십찰(華嚴十刹)이란 새로운 통일국가의 지배이념이 된 화엄사상을

전파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 세운 십대사찰을 말합니다

 

 

수도가 동남쪽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려 한 효율적인

국토 경영과도 관련이 깊다고 합니다.

 

 

 

의상대사가 부석사에서 화엄교학의 터전을 연 이후 그의 제자들은 전국에

퍼져서 수많은 화엄사찰을 건립하였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서도 중요한

10개의 사찰에는 화엄사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화엄십찰(華嚴十刹)이 화엄사, 부석사, 해인사, 갑사, 범어사, 불국사 등은

지금도 대단한 가람들이며 현재는 거대한 절터만 남아 있는

서산의 보원사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화엄십찰은 고운 최치원 선생의 법장화상전에 의하면 부석사, 비마라사,

해인사, 옥천사, 갑사, 범어사, 화엄사, 미리사, 보원사,

청담사 등 10개 사찰을 화엄십찰이라고 합니다

 

 

 

귀산사가 이러한 쟁쟁한 사찰들과 함께 "화엄십찰'의 하나이었다고 하나 화엄

십찰 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두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 지리적 위치인데 통일신라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가 아닌 변방에

있었든 것으로 부석사는 옛 고구려와의 경계지역에, 해인사와 화엄사는 옛

백제와의 경계에, 불국사와 범어사는 왜와의 경계지에, 갑사, 보원사,

귀신사 등은 백제의 고토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는 점입니다

 

 

 

 

또 하나의 특징으로, 명칭은 '화엄십찰'이지만, 실제로 수용한 신앙은

화엄이 아닌, 아미타신앙, 부석사, 정토신앙의 불국사, 미륵신앙의

범어사 등으로 범종파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삼국이 통일된 이후에 국가적 과제는 분열되었던 민족문화를 하나로 합칠

수 있는 통합적 사상이었고, 모든 불교를 포용하는 화엄학은 통합의

불교로서 신라의 국가적 신앙이 되었다고 합니다

 

 

명부전은 저승의 유명계를 사찰 속으로 옮겨 놓은 전각으로 지장보살을

주불로 하고 왼 편에는 도명존자를, 오른편에는 무독귀왕을

협시로 봉안하여 삼존불을 이루게 합니다

 

 

 

지장보살의 뜃쪽 벽에는 지장탱화를 봉안하고 좌우에는 명부시왕을

세우고 그 앞에는 금강역사와 판관, 사자상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명부시왕상은 태광대왕, 초강대왕, 송제대왕, 오관대왕,

염라대왕, 변성대왕, 태산대왕, 평등대왕, 도시대왕,

전륜대왕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지장보살을 주불로 하고 왼 편에는 도명존자를, 오른편에는

무독귀왕을 협시로 봉안하여 삼존불을 이루게 합니다

 

 

 

시왕상 앞에는 시봉을 드는 동자상 10구를 안치합니다

명부전에는 대왕을 대신하여 심판을 하는 2인을 둡니다

 

 

  문 입구를 지키는 수문장인 금강역사상 2인을 서로 마주

보게 배치하여 모두 29체의 존상을 배치합니다 

 

 

석가삼존과 십육나한상을 봉안하였는데 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어서 영산전이라고 합니다

 

 

 

영산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도의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시던

당시의 광경인 영산회상을 재현하여 모신 곳으로,

 

 

 

영산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10대 제자, 16나한

또는 500나한을 모시기도 합니다

 

 

영산회상도나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를 여덟 단계로 묘사한

팔상도를 봉안하기도 하는 곳입니다.

 

 

 

귀신사 삼층석탑은 대적광전 뒤편 축대 위의 넓은 공간에 봉안되어 있으며,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삼층석탑은 높이 4.5m의 크기로 화강암으로 조성되었으며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대체적으로 고려 초기의 석탑 양식을 보이면서도 백제탑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는 점이 주목되고 있습니다.

 

 

 

이 석탑의 선은 정밀하고 옥개석의 곡선이 거의 평면을 이루면서도 신라시대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뛰어난 석탑인데 석탑의 양식은 한 단의

야트막한 지대석 위에 단층의 기단을 쌓고 그 위에 4매의 판석으로

구성된 갑석을 얹은 다음 3층의 탑신을 올렸습니다.

 

 

 

초층 탑신은 탱주가 없이 각각 독립된 석재로 우주를 세우고 그 위를 4장의

갑석으로 덮었는데 우주 사이에는 1매의 판석을 끼워서 면석을 구성

하였으나 2층과 3층 탑신은 양 우주를 모각한 단일석입니다

 

 

얇고 넓은 옥개석은 낙수면이 완만한 반면 처마에 네 귀가 살짝 반전

되었으며 받치는 옥개받침은 8 매석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옥개석 위에는 사각형의 탑신받침을 끼워서 탑신을 받치게 하였는데

2층의 옥개석과 옥개석 받침은 4매의 석재로 구성된 반면

나머지는 모두 단일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귀신사 3층석탑은 전체 높이가 545cm이며 상륜부에는 노반만 남아

있는데 여기에도 별석의 노반받침이 끼워져 있습니다.

 

 

 

2층탑신은 초층에 비해 거의 절반 정도 크기로 줄어들었으며, 우주가 있고,

옥개석 사이에 1장의 돌로 된 받침이 끼워져 있습니다다.

 

 

  3층탑신은 2층 탑신보다 조금 더 줄어 들었으며 탑신과 옥개석 사이에

2장의 돌로 받침을 끼웠는데 옥개석 위에는 무늬가 없는 노반이

있으며 그 위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백제탑의 전통을 계승한 고려 초기의 석탑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폭이

넓어 장대한 초층 탑신에 비해 급격하게 줄어드는 체감율은 익산

미륵사지 석탑의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이 석수(전북 유형문화재 제64)3층석탑 앞쪽에 놓여 잇는 문화재로,

웅크리고 있는 사자상의 등 위로 남근석이 놓여 있습니다.

 

 

 

이 석수는 불교와 남근숭배사상이 어우러진 신앙 미술품으로, 앉아 있는

사자상의 등 위에 남근석을 올려놓아 예술 감각이 뛰어난 조각품으로

무엇보다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된 것이 특징입니다.

 

 

 

사찰 내에서 이러한 남근석의 조각상을 찾아보기란 매우 드물다고 하며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이 설이 제기되고 있는데 불교와 무속이 합쳐진

귀신사의 석수와 남근 조각품은 풍수지리에 의하여 이곳 지형이 구순

(개의 음부를 상징)이므로 터를 누르기 위해 세워졌다는 설이

있는데 음란한 기운을 누르면 마을이 평온의 안녕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 같다고 합니다.

 

 

또 한 가지는 백제 왕실의 내원 사찰로 남근과 합쳐진 돌사자

상으로 세웠다는 설이 있습니다.

 

 

 

 

귀신사 경내 북쪽에 자리한 삼층석탑을 등지고 엎드려 있는 이 사자상은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평평한 타원형의 받침돌 위에 앉은 사자상은

머리를 들고 앞을 바라보는 모습은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습니다.

 

 

 

사자의 등 위에는 남자의 성기처럼 생긴 돌기둥을 세웠으며 그 위에 또

하나의 돌기둥을 얹었는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사자상은 이곳

지형의 나쁜 기운을 누르게 하기 위하여 세웠다고 합니다.

 

 

 

사자상과 좌대가 하나의 돌로 조각되었는데 좌대 아래는 땅에 묻혀

있어 하대석이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좌대는 길이 1.7m, 너비 0.9m의 타원형 평면이며 간주석은 높이 0.72m,

너비 0.2m의 크기이며 가운데 등 위에는 지름 0.3m의 천공부가

있어 여기에 죽절형 간주를 세웠는데 이러한 것은 유례가

없는 매우 특이한 형태 라고 합니다

 

 

귀신사 경내 여러 곳에는 옛날 건물이 들어서 있던 터가 남아 있으며

여기저기에는 장대석과 주춧돌들이 흩어져 있어

사찰의 큰 규모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귀신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폐허가 되었으나 1624년 이후 대대적인

중창을 하였는데, 이때의 중창은 옛터가 아닌 새로운 터 위에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연화문이 뚜렸한 석재입니다만 주위에 흩어져 있던 석재들을

모아서 하나의 탑 모양을 한 부재들입니다 

 

 

귀신사 부도는 청도리 마을 입구의 들 가운데 자리하고 있으며

누구의 부도인지는 그 주인공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부도가 귀신사와는 멀리 떨어져 있으나 귀신사가 한창 전성기 때에는

이 곳 까지도 귀신사 경내 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며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시는 곳으로

이 부도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63호로 지정 되었습니다

 

 

 

이 부도는 모든 부재가 8각형을 기본으로 기단부와 탑신부,

머리장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기둥처럼 길쭉한 기단의 가운데 받침돌은 여러겹의 연꽃을 둘러서

조각을 하고 윗 받침돌을 받치고 있습니다

 

 

  그 위에는 탑신의 몸돌과 여덟 귀퉁이가 높이 치켜 올라간

지붕돌을 얹었습니다

 

 

 

부도의 꼭대기에는 둥근 공 모양의

머리장식이 놓여 있습니다

 

 

 

 

이 부도는 전체적으로 각 부재의 비례가 맞지 않아 안정감이 없고 조각

장식이 소박한 편으로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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