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백장사를 찾아서
백장사는
조계종 본사 금산사의
말사인 실상사 소속 암자이며
신라 흥덕왕 때 홍척이 실상사를 창건
하면서 함께 세웠다고 하는데 백장이라는
이름은 평상심이 도이며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한 8세기경 활동했던 마조도일 선사의 제자인
백장선사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데 백장선사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를 먹지 않는다는 일일
부작 일일불식실상사가의 백장 청규를 만들고 실
천하였다고 하는데 실상사가 전소되자 실상사의
승려들은 약 200년 동안 백장암에서 기거 했다고
하는데 백장암에는 국보인 백장암 삼층석탑과 보
물인 백장암 석등, 보물인 청동은입사 향로 등
귀중한 문화재들이 많이 있으며 현재 백장암
에는 스님들이 한국 선불교의 전통을 계승
하여 참선 수행하는 백장선원이 있으며
백장암 삼층석탑은 현재 초등학교
5학년 미술 교과서에도 나오는
아름다운 미술품입니다
백장암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인 실상사에
소속된 암자이며 828년(신라 흥덕왕 3) 홍척이 실상사를
창건하면서 함께 세웠다고 합니다
백장암은 1468년(조선 세조 14) 실상사가 화재로 폐허가 된 이후부터
1679년(숙종 5)까지는 이 암자가 중심 사찰로 승격되기도 하였는데
실상사가 사세를 크게 떨칠 때에는 참선 도량으로 유명하였습니다.
백장이라는 이름은 평상심이 도이며 마음이 곧 부처라고한 8세기경
마조도일선사의 제자 백장선사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백장암은 실상사 소속의 암자로, 이곳의 백장선원은 구산선문 중에서
가장 먼저 문파를 이루어 한국 선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곳입니다
백장 선사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를 먹지 않는다 라는 일일부작 일일
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백장 청규를 만들고 실천하였습니다
(남쪽에서 바라 본 삼층석탑의 모습입니다)
백장암의 창건 시기는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원래 명칭은 백장사
였다고 하는데 1679년(숙종5)에 화재를 당하자 대중들은 백장사에서
10년간 두 번이나 화재가 일어났고 장소도 협소하므로 실상사
옛터에 실싱사를 다시 세우기로 하였다고 합니다
백장암은 실상사에서 인월 방향으로 3㎞ 정도 떨어진 지점에 있는 매동
마을에서 산 위쪽으로 1㎞ 정도 올라간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백장암에는 국보 제10호인 백장암 삼층석탑과 보물 제40호인
백장암 석등, 보물 제420호인 청동은입사향로 등
귀중한 문화재들이 많이 있습니다
청동은입사향로는 1584년(선조 17)에 만들어진 것으로 현재 전주시립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백장암 보살좌상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신라 불교의 선풍을 일으키며 번창했던 실상사는 그 이후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화재로 전소됐다가 3차례에 걸쳐 중수
복원돼 오늘에 이른다고 합니다.
세조 때(1468) 원인 모를 화재로 전소됐다는 기록과 정유재란 때 왜구에 의해
전소됐다는 설이 동시에 전해지고 있으며 화재로 인해 실상사의 승려들은
숙종 5년(1680)까지 약 200년 동안 백장암에서 기거했다고 합니다
(대웅전을 향하여 서쪽에서 바라 본 삼층석탑의 모습입니다)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은 국보 제10호이며 초등학교 미술에서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미술품으로 미륵사지 석탑,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삼층석탑은 1998년 여름에 기단부에서 팔부신중 조각이 발견되어 학계의 큰
관심을 끈 바 있는데 보통 팔부신중은 서 있는 모습이지만 이곳에 표현된
것은 악귀를 깔고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양식은 국내에서
최초로 발견된 것이며 신라 후기의 걸 작품으로 평가된다고 합니다
(대웅전을 등지고 동쪽에서 바라 본 삼층석탑의 모습입니다)
실상사는 지리산 천왕봉 서 편에 위치한 절로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이 창건하였는데 이곳에서 북쪽으로 3km 쯤 가다보면 산 위에 있는
백장암은 실상사에 딸린 암자로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은 낮은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
으로 각 부의 구조와 조각에서 특이한 양식과 수법을 보이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탑은 위로 올라갈수록 너비와 높이가 줄어드는데 비해 이 탑은
너비가 거의 일정하며 2층과 3층은 높이도 비슷하다고 합니다
백장암 삼층석탑은 층을 이루지 않고 두툼한 한단으로 표현된 지붕돌 받침도
당시의 수법에서 벗어나 있으며 탑 전체에 조각이 가득하여 기단은
물론 탑신에서 지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조각이 있습니다.
기단과 탑신 괴임에는
난간모양을 새겨 멋을 내었습니다
대웅전을 향하여
탑신의 1층 면을 본 장면입니다
대웅전을 뒤로 하여
탑신의 1층면을 본 장면입니다
탑신의 1층에는
보살상과 신장상을 새겨 놓았습니다
2층 탑신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천인상을 새겨 놓았습니다
3층 탑신에는
천인좌상을 새겨 놓았습니다.
백장암 삼층석탑은지붕돌 밑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3층 만은 삼존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백장암 삼층석탑은 백장암 남쪽 아래에 새워져 있는 지금의 자리가
탑 바로 뒤에 있는 석등과 함께 본래의 자리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백장암 삼층석탑과 석등이 있는 곳에서 북쪽으로 법당 터로 생각되는
건물터가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서 본래는 백장암이
그 건물터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삼층석탑의 양식을 보면 1층 탑신 각 면에 사천왕상·신장상 각 2체씩을,
3층 탑신의 각 면에는 천인좌상을 각 1체씩을 새겼습니다.
탑의 기단부는 방형의 대석이며 그 위에 다른 방형의 탑신 받침을 얹고
다시 방형 탑신을 놓았는데 기단부의 구조나 기단부 전체에 표현된
화려한 조각은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석탑에 비해서 매우 특이한
양식이라서 이 탑의 가치를 더해주고 있다고 합니다
백장암 삼층석탑의 옥신은 각층 높이의 체감율이 적고 옥개석은 층별로 받침
없이 앙화문 받침으로 경사 처리를 했으며 크기는 전체 높이 500㎝입니다.
백장암 삼층석탑의 상륜부는 일부 없어진 부분도 있지만 찰주 위로 노반·
복발·보개·수연 등 각 부재가 잘 갖추어져 있는 편입니다.
백장암 삼층석탑은 전체적으로 볼 때 어떤 일정한 양식과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창작 의욕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한국 탑파연구사상
중요한 작품의 하나로 초등학교 미술 교과서에도 안내됩니다.
( 북쪽에서 바라 본 삼층석탑의 모습입니다)
백장암 삼층석탑은 기단부의 구조와 각 부의 장식적인 조각에서 특이한
수법을 보여주는 것으로 신라하대에 유행한 불국사의 다보탑과 같은
이형석탑의 하나로 각부의 구조가 특이할 뿐만 아니라 탑신부의
탑신과 옥개석 밑에 조각이 많아서 더욱 더 좋은 작품입니다
동남쪽 측면에서 바라 본 삼층석탑의 모습인데 어느 한 면도 빠진 곳이
없을 정도로 각 면 마다 불보살의 모습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백장암 석등은 보물 제40호 이며 통일신라 시대의 석등으로
백장암 삼층석탑과 대웅전 사이에 세워져 있습니다
석등은 일반적으로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밑에 3단의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는데, 이 석등은
받침의 밑 부분이 땅속에 묻혀있는 상태입니다.
받침은 가운데에 8각의 기둥을 두고, 아래와 윗 받침돌에는 한 겹으로 된
8장의 연꽃잎을 대칭적으로 새겼으며 화사석 역시 8각형으로 네 면에
창을 뚫어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하였습니다.
석등의 지붕돌은 간결하게 처리하였으나 그 위의 머리장식으로는
보주(연꽃 봉오리 모양의 장식)가 큼지막하게 올려져 있습니다
백장암 석등은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인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
시대의 석등의 기본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석등의 양식은 통일신라 석등의 전형을 보이는데 팔각의 지대석 위에
16각의 낮은 기대·연화 하대·앙련의 간주 굄대 등이
하나의 돌에 조각되어 있습니다.
석등 기대의 각 면에는 흔히 표현되는 안상 대신에 역호형 안상이 조각된
것이 특이하며 복판의 8엽 단판연화의 판 안에는 4엽의 이른바 오주문을
장식했으며 그 윗면의 원형대 안에는 옆에 단판의 앙련을 새겼습니다
팔각의 옆면에는 동자주와 난간을 새겼고, 팔각의 화사석에는 네 면에
화창을 놓고 창호를 고정시키기 위한 철정공이 있습니다
옥개석은 팔각이며 밑면은 화사석을 놓기 위해 파놓았으며 정상에는
사다리꼴의 원주 위에 보주가 얹혀져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기대의 안상 무늬, 상대석에 장식된 난간 등은
국내에서는 드문 표현방법으로 크기는 높이 250㎝입니다.
석등 보주 부분이 1989년에 도난당하여 공개수배 중이라고 하며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데 현재 이 자리에는 상륜부 보주 부분이
상실된 상태로 탑신부와 하단부 만 남아 있습니다
천년의 세월 동안 스쳐간 비바람과 여러 차례의 전쟁, 일제 강점기 등 온갖
수난을 겪어오면서도 꿋꿋이 서 있는 이 석등은 하루 속히 상실된 보주
부분이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 간절 합니다
연화대석 위에 간주를 세우고 그 위에 다시 연화대석을 놓았는데 이 석등
에서 특이한 것은 앙련의 윗부분에 난간을 표현한 점으로 앙련대석에
난간을 둘러 장식한 것은 석등으로는 유일한 예라고 합니다
화사석은 8각으로 4면에만 직사각형의 불을 켜는 구멍인 화창이 있으며 다른
4면은 아무런 조각이 없는데 화창구에는 창문을 고정시키기 위한 못구멍이
있는데 실상사 경내에 있는 석등과 같은 형식이라고 합니다
백장암 청동은 입사 향로(百丈庵靑銅銀入絲香爐)
(참고 자료)
백장사 만력12년명 청동은입사향로는 넓은 전이 달린 몸체에 나팔형
받침이 붙은 전형적인 향로이며 몸체에 비하여 받침이 빈약한 감이
있지만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합니다
백장암 청동은 입사 향로(百丈庵靑銅銀入絲香爐)는 보물 제420호 이며
향로란 절에서 마음의 때를 씻어주는 의미를 지닌 향을 피우는데
사용하는 기구로 화완·향완 이라고도 합니다.
향로는 향을 피우는 도구를 총칭하는 말로 화완, 향완은 그릇 모양의
몸체에 나팔 모양의 높은 받침대를 갖춘 향로를 말합니다
청동 은입사 향로는 높이 30㎝가 입 지름 30㎝이며 몸체와 받침대를 따로
만들어 연결하였고 은실을 이용한 은입사장식이 훌륭한 작품입니다
향로는 입 주위 넓은 테인 전에는 가는 선으로 된 원이 9개가 있고 그
안에 범자를 새겼고 그 사이에 덩굴무늬를 가득차게 새겼습니다.
몸통 표면에 이중의 가는 선으로 된 원을 은실로 새기고 그 안에 5개의
작은 원을 만들고 안에 범자를 각각 새겨 넣었으며 원과 원 사이에는
덩굴무늬가 차 있고 몸통 아래쪽에 18개의 연꽃잎이 있습니다
받침대는 2단으로 되어 있으며 위에 길쭉한 연꽃잎 6장이 있고 그 아래로
덩굴무늬가 있으며 이 화로에 사용된 은실로 만든 가는 선 모양은 매우
아름다워 놀라울 정도이며 무늬도 화려하고 우아합니다.
예부터 부처님께 올리는 주된 공양물은 향과 꽃이었는데, 향은 몸의 냄새
뿐만 아니라 번뇌와 망상까지도 소멸시켜 주기 때문에 향공양은 매우
중시되었으며 천축은 무더위와 냄새가 심하므로 몸에 향을 바르고
여러 부처님과 스님께 공양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구연 윗부분에는 범어가 새겨진 9개의 작은 원과 당초문양이 빈틈없이
새겨졌고 몸체에는 범자가 있으며 몸 아랫 부분에는 앙련이 있고
큼직한 굽받침에는 소용돌이 무늬가 있으며 받침대는 날렵한 형태로서
정상에 소용돌이 무늬가 있고, 곡면에는 연꽃무늬가 있습니다.
백장사 만력12년명 청동은입사향로는 몸체의 넓은 전 안에 운봉백장사
은사향완으로 시작되는 명문이 있고 끝에는 '만력12년 갑신3월주성’
이라고 하여 조선 1584년(선조17)에 만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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