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악산 금산사를 찾아서
모악산 금산사는
미륵신앙의 도량으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의
본사로 백제 법왕 원년(599)에 아주
작은 규모로 세워졌던 것을 신라 경덕왕
21년(762) 진표율사가 크게 고쳐 짓고 쇠로
만든 33척의 미륵불상을 모시면서부터 미륵
신앙의 근본도장으로 모습이 바뀌었다고 하는데
석조 유물은 노주(보물22)·6각 다층석탑(보물27)
5층석탑(보물25),석종(보물26),당간지주(보물28)
혜덕왕사 진응탑비(보물24),동양 최대를 자랑하는
미륵전(국보62),대적광전,대장전,명부전,나한전
일주문,금강문,보제루,종각,중향각,칠성각 등
의 건물과 수계의식을 행하는 방등계단이
있으며 후백제 견훤이 그의 아들 신검
에게 쫒겨 유배생활을 했던 사찰로
더욱 유명하다는 전북 김제의
모악산금산사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금산사 소재 국,보물급 문화제 목록
사적 제496호 김제금산사일원.
국보 제62호 금산사 미륵전.
보물 제828호 금산사석등.
보물 제827호 금산사대장전.
보물 제28호 금산사당간지주.
보물 제27호 금산사육각다층석탑.
보물 제26호 금산사방등계단.
보물 제25호 금산사오층석탑.
보물 제24호 금산사혜덕왕사진응탑비.
보물 제23호 금산사석련대.
보물 제29호 금산사심원암북강삼층석탑.
보물 제22호 금산사노주
모악산금산사는 전북 김제시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이며 조선 성종 23년(1492)에 작성된 5층석탑 중창기에 금산사는
이미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의 가섭불 때에 있었던 옛 절터를 다시
중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금산사의 터전이 오래 전부터 부처님과 인연이 깊었던
것임을 알 수 있는데 통일신라 진표율사에 의하여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중창자이지 창건주는 아니라고 합니다.
금산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금산사사적의 내용을 근거로 불 때 599년 백제
법왕의 자복사찰로 창건되었으며 이후 진표율사에 의한 6년여의
중창으로 사찰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합니다.
금산사는 신라 경덕왕 때인 762년에서 766년 사이에 진표율사에
의해 중창되어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이후로 법상종의 근본도량이 되었다고 합니다.
진표 이후에 후백제 견훤에 의해 부분적인 보수가 이루어졌다고 하나
확실치 않으며 고려초 1079년에 법상종의 대종사인 혜덕왕사가 주지로
부임해 간경·법석을 주관하는 장소인 광교원을 설립하는 등
창건 이래 가장 큰 규모의 도량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현존하는 석연대·5층석탑·노주 등이 이때 세워진 것이라고 하며 1598년
정유재란 때 왜병의 방화로 모든 암자와 건물 40여 채가 불타버렸으나
1601년 수문대사가 재건을 하여 1635년 완공했다고 합니다.
(금산사 일주문입니다)
조선 고종 때 미륵전·대장전·대적광전 등을 보수하고 1934년 대적광전·
금강문·미륵전 등을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6년 다시 화재로
대적광전이 소실되었으며 현재 복원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지금 절에 남아 있는 유물·유적은 석조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임진왜란 이후의 조형물이라고 합니다.
모악산 금산사는 일주의 두 기둥이 육중한 맞배지붕을 받히고 있는데
다포계 지붕의 하중을 두 기둥만으로 건물이 서 있는데
일주문의 기둥 둘레가 약 4.8m 라고 합니다
(금산사 경내로 들어가는 해탈문입니다)
문화재로 지정된 중요 석조유물은 노주(보물 제22호)·혜덕왕사진응탑비
(보물 제24호)·5층석탑(보물 제25호)·석종(보물 제26호)·6각다층
석탑(보물 제27호)·당간지주( 보물 제28호) 등이 있으며
륵전(국보 제62호)·대적광전이 있고, 대장전·명부전·나한전·
일주문·금강문·보제루·종각·중향각·칠성각 등의 건물과
수계의식을 행하는 방등계단이 있습니다
금산사는 백제 법왕 원년(599년)에 아주 작은 규모로 세워졌으나
신라 경덕왕 21년(762년) 진표율사께서 크게 고쳐 짓고 쇠로 만든
33척의 미륵불상을 모시면서부터 미륵신앙의 근본도장,
법상종의 본산으로 그 모습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선조 31년(1598년) 정유재란 때 임진년의 승병활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왜적들에 의해 80여 동의 건물과 40여 암자가 전부
불타버리는 재난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동양 최대를 자랑하는 국보 62호 미륵전도 1993년 봄에 완전 복원되어
대가람 금산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고 하는데 최근에 다시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금산사에는 국보 제62호인 미륵전을 비롯하여 대적광전, 대장전 등의
건물과 오층석탑과 당간지주,석등,노주 등 10개의 보물이 있습니다
(금강역사가 있다는 금강문입니다)
금산사는 후삼국시대에 견훤이 그의 아들 신검에게 쫒겨 유배생활을 했던
사찰로 더욱 유명하다고 하는데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비극적인 몰락은
적이 아닌 바로 자식들로부터 였다고 하는데
다음 왕위를 장자에게 계승하지 않고 넷째 아들 금강에게 물려주려 하니 금강보다
위인 신검∙양검∙용검이 알고 모의하여 동생 금강을 죽이고, 935년 3월 견훤은
아들들에 의해 금산사 불당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고 합니다.
견훤은 금산사에서 석 달 동안 갇혀 있다가 탈출하여 엉뚱하게도 고려의
왕건을 찾았다고 하는데 왕건은 견훤을 상보라 하면서 받아들였는데
견훤은 왕건에게 부탁하여 자신을 내쫒고 반역한 자식들을
죽여 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왕건은 후백제를 평정하고 신검 일당 등을 잡아 견훤의 부탁대로
죽이지를 않고 살려 주었는데 견훤은 이 소식을 듣고
울화병으로 비참하게 죽었다 합니다.
모악산 금산사는 599년(백제 법왕1)에 창건돼 1400년이 넘은 사찰로 동양
최고의 사찰로 수많은 말사를 거느리고 있는 미륵신앙의 성지입니다.
금산사는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으나 인조 때 재건되었고 지금도
석련대, 당간 지주, 석종, 각종 탑 등 보물이 많습니다.
미륵신앙은 미륵보살이 주재하는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상생신앙과 말세를
구제하러 미륵이 내려오기를 바라는 신앙으로, 이상사회를 제시하는
미래불인 미륵을 믿는 불교적 이상 사회관이라고 합니다.
미륵신앙은 신라와 백제에서 국가의 통치 이념이었기에 백제는 금산사와 함께
익산 미륵사를 세워(601) 왕권을 강화했으며 신라 선덕여왕은 황룡사에
거대한 9층 목탑을 세워(645) 미륵전쟁을 하였다고 합니다
(사천왕상을 모신 천왕문입니다)
부처님 오신날 봉축법어
모든 생명을 부처님처럼 받들 때 당신이 곧 부처님입니다.
모든 생명은 자기 안에 불성을 갖고 있다 부처님이 우리들에게 펼쳐 보이신
가르침의 정수입니다. 부처님은 자신의 본성만 제대로 보면, 남에게
기대거나 구걸하지 않고도 행복을 성취할 수 있다고 확언했습니다.
부처님이 태어나 외친 최초의 한 마디는 천상천하유아독존
삼계개고아당안지(天上天下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이 세상에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 는 뜻입니다. 이것을 부처님의 자화자찬
이라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모든 생명 각자가 그 자체로 존귀하다는
것을 깨우치라는 경책입니다.
질투심과 열등감에 시달리며 스스로를 탓하거나 업신여기지 말고
당당한 부처로 거듭나라는 당부입니다. 불교 이외의 종교는
진리가 자기 밖에 있다고 강변합니다.
신에게서 구원을 받으려 하고 절대자에 의지해 행복을 얻으려 합니다.
반면 불교는 구원의 시작도 행복의 출발도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강조합니다. 내가 부처라고 마음먹으면,
그 순간부터 끝없는 복락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역사상에 실존했던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이지만 부처님은
시공을 초월해 무한의 삶을 누리고 부처님의 육신은 광대무변하며
수명은 영원무구 합니다.
우주가 생기기 전부터 살아 있었고, 우주가 소멸하더라도 죽지 않으며
부처님의 능력은 신통하고도 오묘해, 상대의 소원과 처지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바꾸어 나타납니다.
부처님의 자비는 철천지원수라도 마치 품 안의 자녀를 아끼듯 대하며
걸림이 없고 치우침이 없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중생에게 바칩니다.
부처님은 우리들의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가까이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의 지혜로 세상을 바라보고 부처님의 자비로 중생을 보살필 때,
여러분이 바로 부처님인 것입니다.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우리 모두 자등명,
법등명을 실천합시다.
마음의 등불을 밝히고 온누리에 진리의 등불을 밝힙시다.
모든 생명을 부처님처럼 받들 때 당신이 곧 부처님입니다.
자등명은 자기 마음의 등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마음에 탐(탐욕), 진(분노), 치(어리석음) 삼독심을 떨쳐 버리고,
본래 마음 바탕자리에 있는 진리를 깨달아 지혜의 등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는 보제루 입니다)
법등명은 이웃과 중생에게 진리를 전하여 진리를 깨닫도록 하고,
함께 살고 있는 이웃과 일체 중생들에게 자비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당신을 우상처럼 떠받드는 이가 아니라 진정으로 당신처럼
살아가는 이를 참다운 제자라고 여겼으며 당신의 지혜와 자비를
우리가 앞장서 실행에 옮길 때 부처님 오신날의 궁극적인
의미가 비로소 빛을 발할 것입니다.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이 부처님의 진리에 눈뜨고 이 땅에 평화가 실현
되기를 간절히 서원하면서 마음에 지혜와 자비의 법등이 밝혀지고
온 우주법계에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두루 원만하시어 마음에
평안과 가내 행복이 가득하기를 거듭 기원합니다.
(3개의 간구와 간공이 있는 가장 완성된 당간지주라고 합니다)
금강문에서 동북쪽으로 50 m 쯤 떨어진 곳에 보물 제28호로 지정된 당간지주가
있는데 절에 중요한 행사나 법회가 있을 때 깃발을 걸어서 이를 알리는
일종의 안내판이 당간이고, 이를 지탱하는 것이 지주 입니다.
당간지주는 반드시 절의 입구에 세워지는데 장방형의 계단식 3층
기단과 그 위에 당간을 받치고 있던 간대, 지주를 놓던
기단석 등이 잘 남아 있습니다.
당간지주는 기단부와 지주의 다양한 조각 등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당간지주가운데서 가장 완성된 격식을 갖춘 작품이라고 합니다.
당간지주에 세 곳의 홈을 마련한 예는 익산의 미륵사지와 경주 보문리 당간지주
에서도 볼 수 있어 같은 조성연대, 곧 8세기의 조성으로 추정됩니다.
금산사는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한 것이 766년(혜공왕 2)의 일이므로
당간지주의 조성시기를 이 때 쯤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금산사 당간지주는 보물 제28호로 금강문에서 동북쪽으로
50m 쯤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절의 중요한 행사나 법회가 있을 때 깃발을 걸어서 알리는
안내판이 당간이고 이를 지탱하는 것이 지주입니다.
(대적광전 앞에 있는 육각다층석탑입니다)
육각다층석탑은 고려 초기의 점판암제 석탑으로 보물 제27호이며
높이 218cm. 현재 대적광전 앞 왼쪽에 있으나 원래는 금산사에
속했던 봉천원에 있던 것이라고 합니다.
육각다층석탑은 탑신과 상륜부 일부가 없어져서 원래 모습과 많이 달라진 것으로
평면이 6각형인 이 탑은 고려시대에 유행된 다각형 석탑의 한 예로서 중요하며
부분적인 장식조각이 섬세하여 공예적 성격이 강한 특수한 탑입니다.
육각다층석탑의 기단부는 6각형의 화강석을 3단으로 쌓고
측면에 각각 사자를 양각했습니다
그 윗부분부터 점판암으로 되어 있는데 맨 밑에 복련과 앙련을 각각 조각한
석재가 2매 놓여 있어 탑신부를 받치는 연화대석으로 보이며
그 사이에는 중석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고 합니다
금산사 육각다층석탑의 탑신부는 옥신이 거의 없어지고 맨 위의 2개
층만 남아 있으며 옥개석이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육각다층석탑은 상층부의 옥신은 각 모서리마다 기둥을 모각하고
각 면에는 둥근 테두리 안에 좌불을 선각했습니다.
육각다층석탑의 옥개석은 추녀 밑이 수평이며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고 전각에서의 반전이 뚜렷합니다.
금산사 육각다층석탑의 옥개석 밑면에는 초화와
용 등이 선각되어 있습니다.
금산사 육각다층석탑의 상륜부에는 둥근 보주형의
화강석재가 놓여 있습니다.
탑 전체를 볼 때 옥개석이 이루는 점진적인 체감비례가 온화하고,
검은색 돌에 섬세한 조각장식이 어울려 아름다움을 지닙니다
탑의 층수는 경주 정혜사지 13층석탑(국보 제40호)의 형태로
미루어 보아 13층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고 있으며 대체로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용화세계를 상징한다는 미륵장육상이 있는 미륵전입니다)
제루를 지나 가람의 중심에 이르면 오른쪽으로 국보 제62호인 미륵전이
있는데 미륵전은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이 그분의 불국토인 용화세계
에서 중생을 교화라는 것을 상징화한 법당입니다.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을 사찰 속에 응축시킨 것이 미륵전이요 미래의 새로운
부처님 세계에서 함께 성불하자고 다짐하는 참회와 발원의 장소입니다.
미륵전은 신라 경덕왕 21년(762)부터 혜공왕 2년(766) 사이에 진표율사가
가람을 중창하면서 미륵보살에게 계를 받았던 체험 그대로를
가람에 적용하여 세웠다고 합니다.
미륵전 안에는 미륵장륙상을 본존으로 모셨으며 남쪽 벽에 미륵과 지장
보살에게서 계를 받는 광경을 벽화로 조성하였다고 하는데 이 건물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고 지금의 모습은 인조 13년(1635)에
수문대사가 재건한 것 이라고 합니다
미륵전은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 등의 각기 다른 편액이 걸려있으나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 미륵불의 세계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미륵불 본존은 높이가 11.82m이고 삼존불 중의 협시는 8.79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가 미륵전을 조성할 당시에는
3년간에 걸쳐 완성한 미륵장륙상 한 분만이 모셔졌었다고 합니다
그 뒤 조선시대에 수문대사가 다시 복원 조성하면서 소조 삼존불로 봉안
했는데 1934년에 실화로 일부가 소실되었다고 하며, 4년만인 1938년
우리나라 근대 조각의 개척자 김복진(1901~1940)이 석고에 도금한
불상을 다시 조성한 것이 현재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본존불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하고, 왼손 역시 손가락을
조금 오므렸지만 밖을 보이게 한 시무외인으로 미륵불은 다른 불상과
구별되는 별개의 특징을 지니지 않는다고 합니다.
본존불 양 옆의 협시보살은 왼쪽이 법화림 보살이고, 오른쪽이 대묘상
보살인데 협시보살 좌우에는 언제 봉안하였는지 모르는 또 다른 것이
2구가 있는데 본존의 협시보다 약간 작지만 금을 입힌 소조상입니다.
건물 뒤편으로 비닐 가림막이 미륵전 건물 전체를 덮고 있는데 외벽에는
쇠파이프로 된 구조물로 얽혀 있으며 미륵전 안에도 벽면에 비닐
가림막이 처져있는데 공사 때문인가 불상들이 온통 흙먼지로
분단장을 한 것처럼 보여 집니다
미륵전은 1, 2층은 정면 5칸, 측면은 4칸이고, 3층은 정면 3칸에
측면이 2칸으로 겉으로 보기엔 3층 건물이지만 안에서 보면
내부는 대불을 모셔 놓은 단층건물입니다
미륵전은 미래에 출현할 미륵부처님이나 미륵보살을 주불로 모신
불전으로 미륵불이 용화수 아래에서 성도하여 용화세계를 이룩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미륵전 혹은 용화전 이라고도 합니다
미륵전은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으로 높이 20m, 폭 15m의 3층 건물로
법당 안에 모셔진 장육삼존불상은 본존은 높이가 11.82m이고,
협시불은 8.79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라고 합니다.
미륵전에는 층 마다 각기 다른 편액이 걸려 있는데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름은 각층 다르지만 모두가 미륵불의 용화세계를 의미하는 이름으로
미륵전과 용화지회는 용화세계를 만드는 일꾼들이 모인다는 뜻으로
미륵불을 자씨보살로 번역해서 대자보전이라고 합니다
미륵불은 어떠한 두려움도 없애 준다는 의미로 오른손 끝을 위로 향하게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보이게 하는 시무외인과 중생의 모든 소원을 들어
준다는 의미로 왼손 끝은 아래로 하여 손바닥을 밖으로 보이는 여원인을
하고 있는데 본존불의 왼손 수인에 약함 같은 것을 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벽화는 금산사 미륵전의 품격을 한층 더 깊게 해 주고 있으나
안타깝게도 오랜 세월동안 너무 퇴색되어 선명도는 물론이고 그림의
모습도 구분키 어려울 정도였다고 합니다.
퇴색된 벽화의 완전 복원은 불가능하고 현재 상태에서 더 이상 손상이
가지 않도록 특수 보존처리작업을 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미륵전 장육불의 본존은 높이가 11.82m이고, 양 협시불은 8.79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경주 황룡사 장육존상의 높이가 1장6척(약5m)으로서
황룡사 장육존상 보다 두 배인 11m가 넘는다고 합니다
미륵불의 협시보살은 닮은꼴인데 두 손의 위치만 다르며 두 보살은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는데 조선 후기 표현양식이라고 합니다
미륵전은 지금 한창 보수 중이었는데 알고 보니 건물의 보수가 아니라
내외 벽에 그려진 벽화를 보존처리 작업 중이라고 합니다.
(벽화를 보존 처리하기 위해서 동원된 특수 차량으로
무진동장착 차량이라고 합니다)
황룡사 장육존상은 금동불이고 금산사 장육 미륵불은 진흙으로
만든 소조불이라는 점이 다르다고 합니다
미륵전에는 약 185폭의 수많은 벽화가 그려져 있다고 하는데 범천,
제석천, 사천왕, 금강역사, 동녀, 수행승, 보살상, 지장보살 등
다양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고 합니다.
(무진동장착 차량의 내부에는 보존 처리를 하기 위한 미술품들이
신주 모시듯이 조심 조심 옮겨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진표율사가 미륵전을 조성할 당시에는 미륵장륙상 한 분만이 모셔져 있었는데
조선시대에 수문대사가 다시 복원 조성하면서 소조 삼존불로 봉안했다가
1934년에 실화로 일부가 소실되었으나 4년만인 1938년 김복진이 석고에
도금한 불상을 다시 조성한 것이 현재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석련대는 보물 제23호이며 높이 1.67m.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석련대는 석조연화대좌의 준말로 불상을 올려놓는 받침대입니다.
(한 개의 돌로 다듬어진 화려한 석련대 입니다)
금산사 대적광전에서 동남쪽으로 10m쯤 되는 돌단 밑에 있는데
이 석련대는 크기가 매우 크며 세부 조각수법이 뛰어납니다.
석련대는 거대한 하나의 돌로 조각한 것이지만 여러 개의 돌을
사용한 것 처럼 상·중·하의 구성이 정연합니다.
석련대는 불상을 안치했던 상대는 윗면이 평평하며 중앙에 불상의 양발을
세워놓았던 것으로 보이는 네모난 구멍 2개가 있습니다.
석련대는 바깥쪽으로 이중의 둥근 테를 음각하여 장식성을 높였으며
밑면에는 윗면을 떠받치는 연꽃이 에워싸고 있습니다
석련대는 꽃잎 사이에도 밖으로 향하는 작은 잎들이 틈틈이
새겨져 있어 화려함이 엿보이는 작품입니다.
중대는 6각형으로 각 면에 좁고 긴 안상을 조각하고,
그 안에 꽃무늬를 돋을 새김을 했습니다.
하대는 10각형인데 각 면마다 가늘고 긴 안상을 새기고 그 안에는 엎어
놓은 연꽃 모양이 출렁이는 물결무늬처럼 전면을 채우고 있습니다.
석련대는 사치스러운 조각 및 장식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고 합니다
연화장세계의 주인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신 대적광전입니다)
백제 부흥운동이 실패(663)하고 꺼져가는 금산사를 중창한 진표율사는
백제의 김제평야에서 태어나(734) 12세에 금산사로 출가합니다
삼국유사에는 진표율사가 미륵불을 친견하고 깨우침을 얻은 후 미륵불의
계시를 받아 금산사로 돌아와서 미륵전을 짓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금산사에는 커다란 연못이 있었다고 하는데 진표율사가 이를 메우고
미륵장존불을 조성하는데 이상하게도 흙으로 메우면 다음날
어김없이 다시 파헤쳐지곤 했습니다.
연못에 사는 용이 파헤친다고 해서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이때
지장보살이 현신하시어 진표율사에게 숯으로 연못을 메우면
용이 떠날 것이라고 방도를 알려 주게 됩니다.
하지만 연못을 메우려면 어마어마한 양의 숯이 필요했으나 그 많은 숯을
구할 길이 없어 고민을 하고 있는데 그때 갑자기 마을에 눈병이 창궐
하기 시작해서 진표율사는 묘안을 냈습니다.
누구든지 연못에 숯을 한 짐 쏟아 붓고 그 물로 눈을 닦으면
낫는다고 널리 알렸더니 연못은 순식간에 숯으로 메워졌고
신기하게 눈병도 말끔히 나았습니다.
금산사는 1985년 미륵전 보수공사를 위해 굴착기로 땅을 팠더니,
실제로 검은 숯이 나왔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후 만들어진 지금의 미륵불은 진흙으로 만든 소조불
이지만 처음엔 쇠로 만든 철불 이었다고 합니다.
호남의 사찰이 신라 승려나 왕족들이 창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금산사만은 백제 사찰임을 분명히 명기하고 있습니다.
백제 왕족의 기복을 비는 것으로 창건된 금산사임에도 불구하고,
백제 법왕의 창건임을 밝힌 이유는 백제 유민들을 회유하기 위한
정략적인 포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왕족이 아닌 민중들의 땀방울이 한 방울 한 방울 모인 미륵불은 백제인의
정서를 대변하는 미륵의 성지로 백제의 혼을 이어나갔습니다.
모악산은 높고 큰 산을 뜻하는 엄뫼 에서 비롯됐다고 전해지는데
순수한 우리말이던 산 이름은 한자가 들어오면서 바뀌었습니다
금산사지(金山寺誌)에는 엄뫼를 어머니 산이라는 뜻으로 의역해서
모악(母岳) 이라 적었다고 했습니다.
모악산 꼭대기에 흡사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 모습 같은 큰 바위가
있어 모악산이라 했다는 얘기도 전하며 어떤 이는 모악산이
한반도의 자궁 자리에 해당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금산사 대적광전은 조선 중기의 목조기와집으로 우리나라 법당 가운데
규모가 큰 편에 속하나 1986년 불에 타서 현재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대적광전은 공간포도 넓은 주간에 1개씩만 두어 특수한 구조로
보이는데 중앙 칸만은 공간포를 2개 두었습니다.
건물 내부에는 바닥에 마루를 깔고 뒷면에 6개의 기둥을 세운 뒤
그 기둥 사이를 후불벽으로 만들었습니다.
그앞에 불단을 설치하고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 2구씩 모두 5구의
불좌상과 그 사이에 보살입상 6구를 안치했는데 이러한
불상의 배치는 매우 독특하다고 합니다
대들보는 둥그스름하게 다듬어졌는데 좌우측면 평주에서 충량이 3개씩
올라가 대들보에 걸리게 하고 닫집을 설치했습니다
천장은 불단 바로 위를 1단 더 높이고 가장자리는 대들보 위 충량 위쪽에
붙여 반자를 꾸며 전체적으로 층급천장을 이루고 있습니다.
건물내부는 낮고 가득 찬 느낌을 주고, 건물외부의 정면관도 낮고
옆으로 길게 전개되어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준다고 합니다.
이 건물은 1705년에 기록된 금산사사적에서 이름을 찾아볼 수 없어서
그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18세기경의 건축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장대석기단 위에 세워진 앞면 7칸, 옆면 4칸의 단층팔작지붕 건물로 앞면의
7칸에는 모두 빗살무늬로 장식된 두 짝 열개문을 달았는데 중앙 칸만
출입문이고 나머지는 밑 부분에 머름을 설치한 광창입니다.
(머름: 미닫이 문지방이나 벽아래 중방에 대는 널조각)
대적광전의 옆면은 4칸으로 제일 앞쪽 툇간에 한 짝 출입문을 달아
사용했고 나머지는 회벽으로 위쪽에 인방을 가로질렀습니다.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금강문과 나한전을 남북으로 잇는 중심축과 미륵전과
대장전을 동서로 잇는 중심축이 교차하는 이러한 도량배치는 금산사가
불타의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서 어느 하나의 사상이나 종파에
치우침이 없이, 선과 교가 공존하며 모든 사상과 내용을
포용하고 있는 대승불교의 신앙체계를 모두 갖춘
종합사찰 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통일신라시대의 진표율사에 의한 금산사의 중창과 미륵전의 건립은 이 지역이
미륵신앙의 중심지가 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그후, 고려 문종 때
혜덕왕사에 의해 대가람으로 중수되었고, 조선시대에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부처와 보살들을 모두 수용한 대적광전을 세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대적광전에 화엄의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좌우에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의 삼신불을 봉안하여 정토사상의
연화장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대적광전 뒤에 있는 오백나한을 모신 나한전입니다)
금산사는 청정한 불국토에 가기위해서 자기완성과 이웃구제의 원을 세워
끊임없이 정진하는 보살도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는 사찰입니다
화엄사상은 ?
첫째, 화엄사상은 법신불사상이다.
법신불(法身佛)이란 “진리의 붓다”라는 뜻이다.
이것을 화엄경에서는 비로자나불(vairocana)이라고 이다.
(석가여래를 본존으로 문수,보현보살을 협시불로 봉안하였습니다)
둘째, 화엄사상은 보살사상이다.
보살사상은 어떻게 하면 부처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 문수, 보현,
관음보살의 보살행에 대해 설하고 있다.
셋째, 화엄사상은 유심사상이다.
불교는 만물의 주체가 신이 아닌 마음임을 밝히는
심본 주의에 가까운 종교이다.
마음(心)은 초월의 절대적인 유심(唯心)이 아니라, 연(緣)하여
생(生)하면서 동시에 멸(滅)해 가고, 멸하면서 동시에 생하는
연기의 작용, 그 자체임을 설하고 있다.
넷째, 화엄사상은 법계 연기사상이다.
만물은 어떤관계로 존재하는가에 대해 설하고 있으며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절대평등을 그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설한다. 이 법계연기사상은
수직사관이 아니라 수평사관이다.
다섯째, 화엄사상은 정토사상이다.
청정한 불국토라는 뜻으로써 연화장장엄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그 연화장세계 혹은 화장세계에 대해
설하고 있는 사상이다.
수문대사에 의해 화엄신앙과 아미타신앙, 약사신앙, 나한신앙이 한곳에
모여 `대적광전'이라는 명칭 아래 하나의 법당으로 건립되어졌으나
1986년 화재에 소실되고 월주스님에 의해 대적광전과
나한전으로 따로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표율사,혜덕왕사,원명대사 역대 조사들의
영정을 모신 조사전입니다)
(조사전은 대적광전 뒷편 나한전과 나란히 있습니다)
금산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금산사사적"의 내용을 근거로 불 때
599년 백제 법왕의 자복사찰로 창건되었으며, 이 후 진표율사에
의한 6년여의 중창으로 사찰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진표율사가 출생한 곳은 완산주 벽골군 두내산현 대정리로서 지금의
김제지역이고 그의 속성은 정씨로 아버지 진내말과 어머니 길보량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가계는 향리에서 대대로 사냥을 하면서
살았으며 진표율사는 날쌔고 민첩했으며 활을 잘 쏘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진표는 사냥을 나가서 짐승을 쫓다가 잠시 밭 두덕에서
쉬었는데 그때 개구리가 많은 것을 보고 그는 그 개구리를 잡아
버드나무 가지에 꿰어, 꿰미를 만들어서 사냥이 끝난 뒤에
가져가기 위해 물 속에 담가 두었다고 합니다
사냥을 하던 그가 집으로 갈 때는 다른 길로 갔기 때문에 그 개구리는
잊어버렸는데 이듬해 봄 진표는 다시 사냥을 나갔다가 물속에서
30 여마리의 개구리가 꿰인 채 그때까지 살아서 울고 있었던 것을
보고 그제서야 지난해의 그 일이 생각났다고 합니다
그는 잊어버리고 1년을 지났는데 입을 꿰매인 개구리는 그때까지 살아
있었던 것을 보고 잘못을 뉘우치면서 개구리를 풀어 주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하여 그는 출가의 뜻을 품게 되고 마침내 깊은 산으로
들어가 스스로 머리를 깎았다고 합니다
그는 발연사의 동쪽 큰 바위 위에 앉아 입적했는데 제자들은
그 시체를 옮기지 않은 채 공양하다가 해골이 흩어져 떨어짐에
흙을 덮어 무덤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진표의 명성은 출가 동기부터 개구리의 고통에 대한 참회에서 비롯되어,
각지를 편력하면서 가는 곳마다 설법과 교화에 힘썼다고 합니다.
진표는 금산사 순제법사에게로 나아가 출가하여 수행을 떠나 명산을
두루 다니다가 부안 변산의 부사의암에 머물면서 삼업을
수련했으며 망신참회로써 계를 얻었다고 합니다.
진표율사는 금산사로 돌아와 연못을 숯으로 메우고 미륵장륙상을
모시고 그 다음에 금당을 지어 미륵하생신앙의 불국토를
이루려는 백제 유민의 애환을 달랬다고 합니다.
진표가 태어난 지는 백제가 멸망한 후 100년이 지난 후로서 백제 유민들에
의하여 신라에 항전을 하던 시기로 통일신라에 대한 원성이 드높았으며
억압받던 백제 유민의 고통을 달래주고 앞으로 올 좋은 세상
미륵하생의 간절한 희망을 원하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금산사가 진표율사에 의해 대가람으로 변모한 뒤 미륵전을 중심으로 하는
단일형 법당으로 있다가 고려 혜덕왕사에 의해 화엄사상이 유입되어
종합불교의 성격을 띤 대 가람으로 중창되게 되었습니다.
화엄사상은 7세기경에 신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에 커다란 충격을
주게 되고 의상대사에 의해 전국에 보급 되었다고 합니다
삼성각은 방등계단과 5층석탑의 동쪽으로 적멸보궁과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건물입니다)
삼성각은 산신과 칠성, 독성을 함께
모시고 있는 전각입니다
산신은 재물, 칠성은 수명, 독성은 복을
관장한다고 합니다
전각의 건물이 세칸일 때는 산신과 칠성, 독성을 함께
모시면서 삼성각이라 합니다
한 칸의 건물을 지어 산신 독성, 칠성을 따로 미실 때는 산신각, 독성각,
칠성각 이라고 독립된 편액의 이름을 붙이게 됩니다
(송대라고 하는 미륵전 북쪽 높은 곳에 있는 방등 계단 입니다)
금산사 5층석탑은 보물 제25호로 미륵전 북쪽 위 송대(松臺)라는
높은 받침 위에 세워져 있는 5층 석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방등 계단 위에 있는 오층 석탑입니다)
금산사 5층석탑은 1971년 석탑을 해체 수리 할 때 발견된 모악산 5층석탑
중창기'에 의하면 이 탑은 979년(경종4년)에 조성하기 시작하여 981년에
완성했다고 하며 탑 속에서 중창기와 금동관음보살상을 비롯한 여러
소 불상들이 발견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금산사 '방등계단은 보물 제26호로 송대라고 불리는 미륵전의 북쪽 높은
대지에 방등계단이 있는데 이 계단의 중앙에 부도 1기가 있어
형태에 따라 석종형부도 라고 합니다.
금산사 방등계단에는 과거의 부처님이신 정광여래의 사리 2과와 현세의
부처님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 5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미륵전의 북쪽 위 송대에 보물 제25호인 오층석탑이 있는데 정사각형 판재를
이용한 이 석탑은 높이가 7.2m로서 소박하고 단순한 구조로 본래 기록에
따르면 9층이라 하였는데 지금 남아있는 옥개석의 형태나 체감율
등에서 6층 이상이 손실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후백제의 견훤이 금산사를 창건하면서 이 석탑을 건립하였을 것이라
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고,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다는 확실한 기록이 전합니다.
오층석탑은 1971년 11월에 석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모악산금산사오층석탑
중창기가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 가운데 979년(경종 4)에 시작하여 981년에
완성했다는 사실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오층석탑 속에서는 중창기와 함께 금동관음상을 비롯한 여러 소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이 탑의 복장품은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송대라고 부르는 미륵전의 북쪽 높은 대지에 방등계단(方等戒壇)이 있는데
이 계단의 중앙에 보물 제26호인 부도가 1기 있어 그 형태에 따라
석종형 부도라고 합니다.
방등 계단의 수계 법회를 거행할 때 수 계단을 중앙에 마련하고,
그 주위에 삼사와 칠증이 둘러앉아서 계법을 전수하는데
사용했던 일종의 의식법회 장소라고 합니다.
( 방등 계단 중앙에는 석종형 부도가 있습니다)
이러한 예는 경상남도 양산의 통도사와 개성의 불일사 등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한국 불교의 독특한 유산이라고 합니다.
불교의 정신을 대표하는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 가운데
계는 으뜸으로서 계를 지킴은 불교의 기본 토대가 된다고 합니다.
이 계의 정신이 일체에 평등하게 미친다는 의미에서 방등계단
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방등계단의 성격을 도솔천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보기도 하는데 미륵
신앙의 근본도량인 금산사에는 미륵의 하생처로서 미륵전을 조성하고,
그 위에 도솔천을 구현하여 미륵상생신앙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금산사는 미륵상생신앙과 하생신앙을 조화롭게 겸비하였다는
신앙적 성격을 지녔다는 뜻이 된다고 합니다
조선조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김시습(1435~1493)이 절을 찾아 이곳
방등계단에서 남긴 시가 한 수 전해지고 있습니다
구름 기운 아물아물, 골 안은 널찍한데,
엉킨 수풀이 깔린 돌에는 여울소리 들려오네.
중천에 별들은 금찰(금산사)을 밝히는데,
밤중에 바람과 우레가 석단(방등계단)을 감싸 도는구나.
낡은 짐대「당」엔 이끼 끼어 글자가 희미한데,
마른 나무에 바람 스치니 저녁 추위가 생기누나.
초제(객실)에서 하룻밤 자고 가니,
연기 속 먼 종소리에 여운이 한가롭지 않다.
방등계단 옆에 세워져 있는 적멸보궁입니다
이 자리는 옛 나한전이 있던 곳이라고 합니다
적멸보궁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예배하는 법당 입니다
적멸보궁은 예배각으로 유리벽을 통하여 방등계단이 있는
사리탑에 경배를 하며 예불을 드리게 됩니다
적멸이란 번뇌의 불빛이 꺼진 상태로 부처의 깨달음을
따르게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적멸보궁에서 보궁이란 말은 보배스러운 궁전
이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적멸보궁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으므로 불단은 있지만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적멸보궁에는 법당의 바깥 뒤쪽에는 부처의 진신사리를 넣은 사리탑을
세우고 불상이 놓일 자리에는 창문으로 만들어 뒷쪽의 사리탑을
조망할 수 있도록 유리벽을 마련하였습니다
노주 는 보물 제22호로 대적광전에서 대장전으로 가는 길에 있는데
탑의 일부인 이 노주가 왜 별도의 조성물로서 만들어
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사중기록에 보면 광명대로 미륵전 앞에서 미륵불에게 광명을 공양하던
석등이었다고 하나 쓰이는 용도가 불분명해서 노주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대적광전 오른쪽에는 독특한 형태의 노주가 있는데 노주란
‘노반지주(露盤之柱)’의 줄임말로서 처음에는 전각의 정면
귀퉁이에 세우는 두 개의 장대였다가 나중에 탑의
상륜부를 구성하는 부재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사중기록에 보면 노주는 잘못 된 명칭이고 광명대로서 미륵전
앞에서 미륵불에게 광명을 공양하던 석등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모습은 불을 밝히는 곳인 화사석이 없어진 상태가 된는데
고려시대의 조성 기법을 간직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보물 제22호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단순히 형태에 따라 그 이름을 노주라고는 했으나 실제로 어떤 용도로
사용한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하며 꼭대기에 놓인 보주만 없으면
불상을 얹는 사각형의 대좌처럼 보이는 석물입니다.
노주는 땅 위에 바닥 돌을 놓고 그 위에 아래·중간·위 받침돌을
얹어 놓았으며 아래받침돌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기고 좌우에 1구씩 안상을 조각했습니다.
안상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가늘고 긴 형태가 아니라 2줄의 선으로
타원형이고 아래받침돌 윗면과 윗 받침돌에는 연꽃잎을 새겼습니다
아래받침돌의 연꽃잎이 넓고 짧은 반면, 윗 받침돌의 연꽃잎은 좁고
길쭉하게 표현했습니다.
대적광전의 좌측으로 대장전과
나란히 있는명부전입니다
명부전은 저승의 유명를 사찰 속으로
옮겨놓은 전각이라고 합니다
명부전 안에는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기
대문에 지장전이라고도 합니다
명부전은 유명계의 심판관인 시왕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시왕전이라고도 합니다
명부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명부전 안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하여
무독귀왕, 도명존자를 봉안합니다
지장보살은 왼 손에 금강보륜을
쥐고 있습니다
지장삼존의 좌우에는 시왕상 10구와 판관, 녹사. 인왕상, 동자상, 각 2채가
명부세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건물입니다
명부전 내부 정면의 출입문 위 의 산사시왕전중수기 를 통해 1857년
철종 8년에 중건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금산사 '대장전은 보물 제 827호이며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하면서 세운
목조탑으로 원래는 불경을 보관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대장전은 다포계 공포로 구성 되어있으며 용마루에는 석조 복발과
보주가 설치된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대장전의 법당에는 석가모니불을 모셔져 있으며 가섭과
아난존자를 협시불로 모셔져 있습니다.
대장전은 본래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하면서 세워졌다고 하는데. 미륵전을
짓고 이를 장엄하는 정중목탑(庭中木塔)으로서 가운데에서 우측부분에
있으며 정팔각 원당형으로 조성했던 건물입니다.
대장전은 당시의 양식은 탑과 같이 산개형의 층옥으로서 맨 꼭대기
옥개에는 솥뚜껑 모양의 철개를 덮고, 다시 그 위에 불꽃
모양의 석조 보주를 올렸습니다.
선시대에 들어와 1635년(인조 13)에 가람을 중창하면서 본래
목탑이었던 것을 지금과 같은 전각의 형태로 변형하면서
대장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대장전은 지금의 위치로 이전된 것은 1922년으로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지만 전각 꼭대기에는 복발과 보주 등이 아직 남아 지금도
신라 때의 목탑 양식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삼면의 벽은 모두 10폭의 벽화로 장엄하였는데 흔히 볼 수 있는 십우도나
극락세계의 장엄 등이 아니라 구체적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는 모습으로
‘오달국사인명창’‘저지화상도담’‘치계전생담(雉鷄前生譚)’
‘부설거사도술담(浮雪居士道術譚)’‘용파수상행(龍波水上行)’
‘희운선사행적기(喜運禪師行迹記)’ 등이 있고 외벽에도
좌우로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대장전의 내부 출입문 위에는 1974년 건물을 중수할 때 참여한 사람들의
인명과 개금불사에 시주한 사람들 이름을 적은 현판이 있습니다.
금산사 대장전 앞에 보물 제828호인 고려시대의 팔각석등이
있는데 지대석에서 보주까지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고 전체 높이는 3.9m 입니다.
석등은 사각형의 지대석위에 하대석을 얹고 그 위에 간주석, 연화석,
화사석, 옥개석, 보개, 보주의 순서로 조성되었습니다.
대장전 앞에 있는 석등은 화창에 시설했던 창문만을 제외하면
현재 거의 완벽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석등은 오랜 가람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제자리를 잃지 않고 법등을 밝혀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귀중한 성보문화재라 하겠습니다.
자등명은 자기 마음의 등불을 밝히는 것으로 마음에 탐(탐욕), 진(분노),
치(어리석음) 삼독심을 떨쳐 버리고, 본래 마음 바탕자리에 있는
진리를 깨달아 지혜의 등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법등명은 이웃과 중생에게 진리를 전하여 진리를 깨닫도록 하고, 함께
살고 있는 이웃과 일체 중생들에게 자비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석등은 하대석, 간주석, 연화석, 화사석, 옥개석,
보개, 보주의 순서로 조성되었습니다.
금산사 석등은 보물 828호로 대장전 앞에 있는
고려시대의 팔각석등입니다.
범종각은 보제루의 서편으로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하여
볼 때 오른 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범종각이 대적광전의 오른 쪽에 위치를 하고 있는 이유는
불교의 채용설에 입각하여 볼 때 오른 쪽은 채
왼쪽은 용이 되는데 소리는 곧 용에
해당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범종각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는 곧 우리들의 일심의 작용이요
부처님의 위대한 작용을 상징화 한 것일라고 합니다
그소리는 스스로를 밝히고 중생을 교화하는
큰 울림이라고 합니다
범종각에는 불전 사물인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이 걸려 있습니다
금산사 성보박물관 입니다
금산사 성보박물관 안에서는 사진 촬영을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관리자의 말입니다
금산사 입구에 세워져 있던 석문입니다만 이 석문을 지나면서
금산사를 그리던 고색찬란하던 옛 자취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수 많은 예산을 투입하였을 것 같은 석문은 옛 산성의 성문을 연상하는 우람한
대궐문 처럼 변하고 있어서 옛 정취가 그리워 지는 것 같습니다
'팔도문화재답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달사지를 다시 찾아서 (0) | 2012.07.08 |
---|---|
완주 종남산 송광사를 찾아서 (0) | 2012.06.30 |
모악산 귀신사를 찾아서 (0) | 2012.06.24 |
지리산 백장사를 찾아서 (0) | 2012.06.17 |
지리산 실상사를 찾아서 (0) | 2012.06.1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