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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문화재답사

지리산 실상사를 찾아서

by 송강 (松岡) 최 재 모 2012. 6. 14.

 

 

지리산 실상사를 찾아서

 

 

지리산실상사는

통일신라 흥덕왕 때

홍척이 지은 절로 당나라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홍척은 풍수지리학

적으로 이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고 하여 이 절을 지었다고

하는데 정유재란 때 화재를 입어 200여 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고, 승려들은 백장암에 머물며 그 명맥을 이어

오다가 숙종 때 다시 지었고, 고종 때 화재를 입어 작게

지은 것이 현재의 모습으로, 현존하는 건물로는 보광전·

약사전·명부전 등이 있으며 이 절에는 많은 중요문화

재가 있는데 수철화상능가보월탑, 수철화상능가보월

탑비, 실상사석등, 실상사부도, 실상사동서3층석탑,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비,

실상사철조약사불좌상· 등이 있으며 중요민속

자료는 실상사 입구의 해탈교 양쪽에 석장승

있는 명승대찰로 아마도 대여섯 번 정

도는 다녀왔다고 생각 되는데 그래도

다시 가 보고 싶은 실상사는 대한

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로구산선문

최초가람 입니다 

 

 

지리산 북쪽 기슭에 자리 잡은 이 절은 흥덕왕 때 당나라에 유학하였던

홍척이 선종의 도를 깨치고 돌아오자 왕이 국승으로 초빙하여

설법을 듣고 선종을 받아들이며 선종구산 중 처음으로

이 절을 세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실상사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선문의

효시인 구산선문은 이곳 실상산문에서부터 시작 되었습니다

 

 

 

실상사는 구산선문 최초 가람으로서 한국 선풍의 발상지이지만 가람 안팎에

화려하고 고색창연한 경관은 없으나 도내에서 단일 사찰로는 가장

많은 수의 국보와 보물을 가진 곳이기도 합니다

 

 

실상사는 조선시대 정유재란 때 화재를 입어 200여 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고, 승려들은 백장암에서 머물며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숙종 때

다시 지었으나 또 화재를 입어 작게 지은 것이 현재의 모습입니다

 

 

 

문화재로는 실상사 수철화상능가보월탑(보물 제33)과 탑비(보물 제34

실상사 석등(보물 제35부도(보물 제36) 등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으며 절 입구에는 중요민속자료인 석장승들이 남아 있습니다.

 

 

 

실상사 경내에는 보광전이 있고 그 앞 양쪽에 창건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 2기와 약사전, 명부전, 요사체 등이 남아 있습니다

 

 

 

실상사에는 수철화상 능가보월탑과 탑비(보물 제33, 34), 실상사

석등(보물 제35), 부도(보물 제36), 삼층석탑 2(보물 제37),

증각대사 응료탑과 탑비(보물 제38, 39), 철제여래좌상

(보물 제41) 등 많은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실상사가 처음 이곳에 자리할 때는 심산유곡 이었던 곳이 부처님의

품을 찾아든 사람들로 마을이 이루어지고 그들을 위한 논밭이

만들어지다 보니 오늘과 같은 모습이 되었습니다

 

 

 

출가 수행자의 교육기관인 실상사 화엄학림은 1994년 조계종의 교육

개혁의 성과로 이루어진 조계종 최초의 전문교육기관입니다.

 

 

 

실상사에는 불교의 연기 사상을 교육이념으로 삼은 중고등 과정의 학교인

실상사 작은 학교가 있는데 교계 최초이자 유일한 대안학교입니다

 

 

 

실상사에는 교계 최초이자 유일한 실상사 귀농학교에서 현대

도시인들에게 새로운 삶의 철학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재가불자들의 협동농장으로서 친환경농사를 짓는 실상사농장, 절을

중심으로 지역공동체를 꿈꾸는 사단법인 한생명, 그리고 그곳에서

벌이는 지역 주민을 위한 갖가지 복지와 교육사업 등 다른 절

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모습들을 가진 곳이 실상사입니다 

 

 

실상사의 주법당인 보광전은 1884(고종 21)에 월송대사가

세운 것으로 정면 3, 측면 3칸의 건물입니다.

 

 

 

보광전 안에 모셔진 삼존상 중 본존불은 조선시대에 조성한 것이고,

좌우의 관음, 세지 두 보살은 원래 극락전에 아미타불과 함께

봉안되었던 것으로 월씨국(베트남)에서 모셔왔다고도 합니다

 

 

 

 

보광전은 현재 단청이 되어 있지 않아 소박한 모습이지만

조선후기의 건축양식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로써

 

 

보광전 주변에는 83평을 추정케 하는 주춧돌이 남아 있어

 굉장한 규모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국대 박물관에서 1991년 보광전 주변을

발굴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보광전 주변에서 주춧돌 흔적으로

확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보광전 불상 뒤에는 아미타여래도가 있고,

 

 

 불단 오른편에는 981년에 만든 신중불화와

산신불화가 있습니다

 

 

실상사에는 통일신라시대의 범종이 있었는데 깨진 상태로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고 강희33(1694)에 주조한 범종은 현재 보광전에 있습니다

 

 

 

실상사 동종은 시도유형문화재 137호로 높이 123, 입 지름 83의 종으로

종을 매다는 고리는 용이 종 머리를 딛고 있는 형상이며,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용통은 간략화 된 용이 꼬리를 휘감은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몸통 위쪽은 원안에 범자를 양각한 문양을 12곳에 배치하였으며 그 아래

사각형을 이룬 유곽이 4면에 있으며, 사이사이에 두 손으로 꽃가지를

잡고 보관을 쓴 보살상이 1구씩 배치되어 있습니다

 

 

 

유곽의 테두리는 덩굴무늬로 장식되었고, 안쪽으로는 꽃 모양의 유두

9개가 있는데 종기에 강희 33년으로 기록되어 있어 조선 숙종

20(1694)에 주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상사 동종은 몸체의 위는 좁고 아래로 가면서 넓게 퍼진 모습으로

 종에 기록된 글에 의하면 강희 33년에 만든 것으로

무게는 800근이라고 합니다.

 

 

 

종을 만든 사람은 김상립, 정칠립, 김천수, 김선봉 등으로 여기에서 처음

으로 범종을 만든 사람을 편수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기록으로 보아

이 종은 침허대사가 실상사를 중창할 때 만든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용두는 앞을 바라보고 있고, 뒤에 붙은 소리통은 작게 만들었으며

범자를 돌아가며 새겼으며 유곽은 종 몸체 중간쯤에 배치하였느데

유곽대에는 당초무늬와 연꽃 모양의 유두가 9개씩 있고

보살상은 유곽을 중심으로 합장한 채 서 있습니다.

 

 

 

보살이 서 있는 아래 부분에는 명문이 있고 당좌와 하대는 표현하지

않았는데 이 종에 얽힌 이야기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전해 옵니다

 

 

실상사를 중창하고 난 후 국왕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종을 만들고

아침 저녁으로 나라가 번창하기를 기도하며 종을 쳤다고 하는데

 

 

이 범종에는 우리나라 지도와 일본의 지도가 새겨져 있어,이 종을

치면 일본의 경거망동을 경고함과 동시에 우리나라를

흥하게 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소문 때문에 일제 말기에는 주지스님이 문초를 당하기도

하였으며 종 치는 것이 금지되기도 하였다고 하는데 지금도 지도

 일부가 그대로남아 있어 그러한 사실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습니다

 

 

절에서 사용하는 종을 흔히 범종이라고 하며 그 소리로써

 하루의 일과를 대중에게 알리는 역할을 한다고 하는데.

 

 

범종은 소리로 장엄하고 시간을 알려주며, 귀신을 쫓고 지상 및 하늘과

 지옥의 모든 중생을 구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실상사 약사전은 몸과 마음의 질병을 낫게 함으로써 중생을 교화하는 서원을

세운 약사여래를 봉안하는 전각으로, 정면 3, 측면 2칸의 건물이지만

불사 중이라 가 건물에 약사불을 모셔 놓은 상태입니다

 

 

 

철제여래좌상은 보물 41호로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실상사

창건 당시부터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는 유명한 철불로 신라 후기

에는 지방의 선종사원을 중심으로 철로 만든 불상이 활발하게

만들어졌는데 당시의 불상 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머리에는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기교 있게 붙여 놓았고 정수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육계가 아담한 크기로 자리잡고 있으며 귀는 긴 편이고

목에 있는 3줄의 주름인 삼도는 겨우 표현되고 있습니다

 

 

 

통견의 불의도 얇고 탄력있게 표현하고 있으며 오른손을 들고 왼손을 내린

9품인 두 손은 새로 찾아낸 원래 철제손 그대로 1986년도에 복원한 것이고

무릎 아래 부분도 원래 모습대로 복원한 것이라고 합니다 

 

 

 

약사불상이 다른 불상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한 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는데 약사불로 신앙되고 있는 불상 가운데 약그릇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실상사의 약사여래도 약그릇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약사전은 1883년 함양, 산청 유생들의 방화에도 불타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데 전각 안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철로 만든 약사불상과

불상 뒤에는 조선 후기에 그린 약사불화가 있습니다.

 

이 불상은 실상사가 중창될 때까지 들판에 있었으며, 약사전을

세운 후 그 안에 봉안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이 불상에는 보화가 많이 들어 있다는 말이 있어 일찍부터 도굴꾼에 의해 훼손된

적이 있는데 불상의 복장 품에는 효령대군의 발원문과 사경 및 인경이 수백 권

이나 있었고, 고려판 화엄경소 등 보기 드문 서적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 중

일부는 도난 당하였고, 나머지는 건물과 함께 불탔다고 합니다.

 

 

 

실상사 약사여래불상은 9세기에 접어들면서 유행하는 철불의 초기작품으로써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데 이 불상은 건장한 신체와 물결식의 옷주름에서

가장 융성했던 시기의 양식이 남아 있음을 엿볼 수 있다고 합니다.

 

 

 

현재의 두 손은 나무로 만들어 끼워넣은 것으로, 1987년 복원할 때 나온

철제 손과 같은 모양이며. 대좌는 흙으로 만들었으나 허물어진 곳이

많아 자세한 모습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명부전은 갖가지 지옥의 장면을 그린 시왕(十王)의 그림이나

조각을 모신 전각으로 주존은 지장보살입니다.

 

 

실상사의 명부전은 길선당의 옛터에 건립된 것으로 장육전 동쪽에 있던 것으로

1821(순조 21)에 의암대사가 옮겨 지은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로

안에는 지장보살 삼존상, 시왕상 10, 판관상 6, 인왕상 2구가 있습니다

 

 

지장보살상 뒤에는 1987년에 조성한 지장시왕도가 있는데 시왕상은 본존을 중심

으로 오른쪽으로는 제1 진광대왕, 3 송제대왕, 5염라대왕, 7 태산대왕,

9 도시대왕이 있고, 왼쪽으로는 제2 초강대왕, 4 와관대왕, 6 변성대왕,

8 평등대왕, 10 전륜대왕이 배치되었습니다.

 

 

명부전은 저승의 유명계를 사찰 속으로 옮겨 놓은 전각으로 지장보살을

주불로 하고 왼 편에는 도명존자를, 오른편에는 무독귀왕을

협시로 봉안하여 삼존불을 이루게 합니다

 

 

 

명부시왕상은 태광대왕, 초강대왕, 송제대왕, 오관대왕,

염라대왕, 변성대왕, 태산대왕, 평등대왕, 도시대왕,

전륜대왕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명부전에는 대왕을 대신하여

 

 

심판을 하는 2인을 둡니다

 

 

문 입구를 지키는 수문장인 금강역사상 2인을

 

 

서로 마주보게 배치하고 있습니다 

 

 

 

실상사 삼층석탑은 보물 37호 이며 실상사의 중심법당인 보광전

앞뜰에 동·서로 세워져 있는 두 탑입니다.

 

 

 

이 쌍탑은 신라 흥덕왕 3(828) 실상사를 창건할 때 조성된 탑으로

높이가 8.4m이며. 탑신과 옥개석이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통일신라

정형탑의 원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실상사는 통일신라 흥덕왕 3(828)에 홍척(洪陟)이 창건하였으며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이 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 하여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탑은 2층으로 된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동서 두 탑

모두 탑의 머리장식이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져 통일신라시대의 정형을

보이며,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습니다다.

 

 

 

지붕돌은 처마 밑이 수평이며, 밑면의 받침은 4단이고,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는데, 그 정도가 부드러우면서도 경쾌합니다.

 

 

 

실상사 삼층석탑은 특히 탑의 머리장식이 원래대로 잘 보존되어

각 장식부재들이 차례대로 올려져 있는 모습입니다.

 

 

 

이와 같이 두 탑은 규모나 양식이 같아서 동시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대작은 아니지만 돌의 구성이 정돈되어 있는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쌍탑 중 동탑의 상륜부에는 찰주를 중심으로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 수연, 용차, 보주가

모두 있으나,

 

  

 

 서탑은 수연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실상사의 칠성각입니다 만 칠성각은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특유한 전각이라고 합니다

 

 

칠성각은 수명장수 신으로 칠성을 봉안하고 있는데 칠성은

원래 도교신앙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실상사는 지리산 천왕봉의 서쪽 분지에 있는 절로, 이 석등은

실상사 보광명전 앞뜰에 세워져 있습니다.

 

 

 

석등은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밑에 3단의 받침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는데, 평면은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받침부분의 아래 받침돌과 윗 받침돌에는 8장의 꽃잎을 대칭적으로

새겼으며 화사석은 8면에 모두 창을 뚫었는데, 창 주위로 구멍들이

나 있어 창문을 달기 위해 뚫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가 모두 위로 치켜 올려진 상태로,

돌출된 꽃모양 조각을 얹었으며.

 

 

 머리장식에는 화려한 무늬를 새겨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장식성을 잘 보여준다고 합니다.

 

 

 

이 석등은 규모가 커서 석등 앞에 불을 밝힐 때 쓰도록

돌사다리를 만들어놓았으며,

 

 

지붕돌의 귀퉁이마다 새긴 꽃모양이나 받침돌의 연꽃무늬가

형식적인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석등 위에는 복발형의 노반이 놓이고 그 위에 고복형의 간과

8각의 보개와 보주가 장식되었습니다

 

 

실상사 극락전은 시도유형문화재 45호로 조선 선조 30(1597) 정유재란 때

불에 탔다가 다시 지어졌다고 하는데 절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자료에 의하면 순조 31(1831)에 지어졌다고 합니다.

 

 

 

극락전은 앞면 3·옆면 2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 옆면은 맞배지붕집이며.

가운데 칸에는 세 짝의 문을 달고 양쪽은 한 짝의 문을 달았습니다

 

 

 

실상사 극락전의 건물 안은 바닥에 마루를 깔고, 뒤쪽 높은 기둥 사이에

후불벽을 설치하고 불단 위에는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습니다

 

 

극락전의 옛이름은 부도전로 계오대사가 1684(숙종 10)에 건물을

짓고 부도전이라 하였는데 부도전이라 한 것은 근처에 홍척국사와

수철화상의 부도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1751(영조 27)에 포문비구 한심이 옛 연하당과 금당의 기와를 사용하여

 요사채를 수리하고 부도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1788(정조 12)에 금파 관오대사가 대시주 이휘와 별좌 홍찬, 재민이

중수하였다고 하며 1832(순조 32)에 의암대사가 기봉, 처윤과 함께

중건하여 극락전으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극락전은 명면 3, 측면 2칸인 맞배지붕의 목조건물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45호로. 불단 위에는 아미타여래좌상이 있으며 그 좌우에는

목조보살상이 있었으나 몇 년 전에 분실하였다고 합니다

 

 

극락전 요사채는 1932년에 남성법(南性法) 스님이 영원사에서 옮겨

세운 것으로, 지리산의 기운이 솟아오르는 명당으로 알려져

수행납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극락전을 향하여 우측에 요사체있습니다

 

 

 

실상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은 보물 33호로 실상사 안에 극락전을 향하여

그 오른쪽에 서 있는 탑으로, 수철화상의 사리를 모셔 놓은 사리탑입니다

 

 

 

팔각원당을 기본형으로 삼고 있는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부도탑으로

높이는 3m로 특히 옥개석에서 목조건축의 세부 양식을 모각하였으며,

탑신부 각 면에는 사천왕입상이 양각되어 있습니다.

 

 

 

수철화상은 신라 후기의 승려로, 본래 심원사에 머물다가 후에

실상사에 들어와 이 절의 두 번째 창건주가 되었다고 합니다.

 

 

 

수철화상은 진성여왕 7(893)77세로 입적하니, 왕은 그의 시호를

수철화상이라 하고 탑 이름을 능가보월이라 내리었다고 합니다

 

 

 

수철화상 능가보월탑은 신라 석조부도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맨 아래 바닥돌에서 지붕까지 모두 8각을 이루고 있습니다.

 

 

 

기단은 아래받침돌에 구름과 용무늬와 사자가 새겨져 있으나 마멸이 심하고.

윗 받침돌에는 솟은 연꽃무늬가 삼중으로 조각되어 둘러져 있습니다.

 

 

수철화상 능가보월탑은 8각의 탑신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고, 각 면에는 문비와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지붕돌은 얇고 경사가 완만하며, 처마부분에는 엷은 곡선을 이루고 서까래를

새겼으며 지붕 경사면에는 기와골을 표시하였고, 그 끝에는 막새기와까지

표현함으로써 목조건축의 지붕 양식을 충실히 모방하였습니다.

 

 

 

수철화상 능가보월탑은 꼭대기에 몇 층의 단이 있고, 그 위에

원형이 작은 돌에 있을 뿐 모두 없어졌다고 합니다 

 

 

탑 옆에는 탑비가 건립되어 있어서 이 부도의 주인공을 비롯한 여러 관련된

내용을 알 수 있는데 비문에 의하면, 수철화상이 진성여왕 7(893)

입적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탑을 세운 시기를 추측하고 있습니다

   

 

실상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는 보물 34호로 진성여왕 7(893) 77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자 왕이 시호와 탑명을 내렸다고 하는데 비문에는

수철화상의 출생에서 입적까지의 행적과 사리탑을 세우게 된

경위 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실상사에서 입적하였으나 심원사의 승려이었기 때문에 비문에는

심원사수철화상으로 적고 있으며 비문을 짓고 쓴 사람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마멸과 손상이 심한 편입니다

 

 

 

탑비의 형식은 거북모양의 받침돌 대신 안상 6구를 얕게 새긴 직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비를 세웠으며 비좌에는 큼직한 연꽃을 둘렀습니다.

 

 

 

머릿돌에는 구름 속에 용 두 마리가 대칭하여 여의주를 다투는 듯 한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그 앞면 중앙에는 능가보월탑비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건립 연대는 효공왕(재위 897912)대로 추정되고, 글씨는

당대를 전후하여 성행한 구양순체를 따랐습니다

 

실상사 증각대사 응료탑은 보물 38호로 홍척국사의 사리를 모신 탑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전형적인 팔각원당형 부도입니다

 

 

홍척은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로 시호는 증각 입니다.

 

   

 

실상사 증각대사 응료탑 기단8각형의 석재를 여러 층 쌓은 뒤 연꽃이

피어있는 모양의 돌을 올렸는데 각 면의 조각들은 닳아 없어져 거의

형체를 알아보기가 힘들고 윗 받침돌의 연꽃잎만이 뚜렷합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로 구성되었는데 낮은 편이며

몸돌은 기둥 모양을 새겨 서리를 정하고

 

 

 

각 면에 아치형 문을 새기고 그곳에 문을 지키고

있는 사천왕상을 돋을새김 하였습니다.

 

 

지붕돌에는 목조건축의 처마선이 잘 묘사되어 있으며 전체적인 조형과

조각수법으로 보아 9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이 부도는 신라 구산선문 가운데 최초의 산문인 지리산 실상산문의

개산조 홍척국사의 사리탑으로 신라 말인 9세기 후반의 우수한

조각수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극락전 안쪽에서 바라본실상사 증각대사 응료탑비의 모습입니다만 

극락전 출입문 바로 앞에 세워져 있는데 비신이 없습니다 

 

 

 

 실상사 증각대사 응료탑비는 보물 39호로 증각대사의 탑비이며 증각대사는

일명 홍척국사·남한조사로 불리며, 통일신라 헌강왕 때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흥덕왕 1(826)에 귀국한 뒤 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사파를 일으켜 세운 고승입니다.

 

   

 

실상사 증각대사 응료탑비는 비신이 없어진 채 현재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이 남아있는데 받침돌은 용의 머리를 형상화 하지 않고

거북의 머리를 그대로 충실히 따랐습니다

 

 

 

실상사 증각대사 응료탑비의 머릿돌은 경주의 태종무열왕릉비

 계열에 속하는 우수한 조각을 보여주는데,

 

 

 앞면 중앙에 응료탑비 라는 비의

 명칭을 새겨 두었습니다

 

 

남원 실상사 석장승은 중요민속자료 15호이며 실상사 입구에 있는 3기의

돌장승인데 장승은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마을이나 사찰 입구에 세워져

경계를 표시함과 동시에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호신의 구실을 합니다.

 

 

실상사 입구의 만수천을 가로지르는 해탈교 양쪽에 세워져 있는 석장승은

벅수라고도 하는데 보통 한 쌍으로 세워져 있으나 이곳의 장승은  남녀를

판별할 수 없으며 만수천 양쪽에 원래는 4기가 세워져 있었다고 하나 

절을 향해 건너기 전에 세워진 한 쌍의 돌장승 중 오른편 장승은

 1936년 홍수 때 떠내려 가고 없습니다.

 

   

해탈교를 건너기 전 상가 옆에 있는 석장승은 긴 수염이 새겨져

있고 몸체에는 옹호금사축귀장군(擁護金沙逐鬼將軍)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옹호금사축귀장군은 벙거지를 쓰고 육중한 거구를 하고 있는데

찌푸린 이마 살에 튀어나온 눈과 코는 주먹코이며

송곳니가 길게 뻗어 나온 모습입니다 

 

 

 

실상사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개울을 사이에 두고 2기의 석장승이

마주하고 있는데 하나는 논두렁에 있고 다른 하나는 큰 고목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데 10m 간격으로 사이가 넓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세 장승은 거의 같은 모습으로 머리에 벙거지를 쓰고 있으며

크고 둥근 눈에 뭉툭한 주먹코이며 윗 송곳니 두개가 삐져나와

 험상궂은 듯 하지만 입가의 미소가 순한 심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고목 아래 세워져 있는 석장승도 길게 수염이 표시되어 있고

몸체에는 대장군(大將軍)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좌측 장승을 받치는 기단석에 있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 영조

원년(1725)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수염이 반대로 향하고 있어 상원주장군과 대장군은

대칭적인 한 쌍을 염두에 둔 조각인 것 같습니다.

 

 

 

노두렁 아래에 서 있는 석장승은 길게 수염이 표시되고 몸체에는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이라는 이름이 새겨있습니다.

  

 

상원주장군은 두 눈이 크고 둥글며 툭 튀어나왔고 코가 크며 머리에는

벙거지처럼 생긴 모자를 쓰고 있고, 손은 창을 든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서 옛 장승의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장승은 실상사 어귀에 잡귀를 막기 위하여 세워 놓은 것으로 다른

장승과는 달리 돌로 만들었기 때문에 썩지 않고 오래 보존되어

장승의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구산선문 [九山禪門] 참고 자료

 

9~10세기에 신라 말 고려 초의 사회변동에 따라 주관적 사유를 강조한 선종

산골짜기에서 전파하면서 당대의 사상계를 주도한 아홉 갈래의 대표적 승려

으로 이들은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보아 중생이 본래 지니고

있는 불성에 눈떠 대립과 부정을 상징하는 문자를 뛰어넘어 초월의 세계로 지향

하여 번쇄한 교리를 일삼은 교종 종파들이 소홀히 다루어 온 부처의 가르침에

감추어진 본래 의미를 전한다4구의 구절로 자신들의 세계관을 정리합니다

 

이것이 4구표방 4구가 처음부터 함께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고 하며 대체로

시간면에서 따져보아 교외별전을 제외한 3구는 신라말 고려 초의 선종에 관한

논의에 그대로 다루어서 무방하다.

 

 

 

9세기 중엽을 넘어서면서 9산선문이 집중적으로 세워지자 교종에 대비되는 선종의

 정체에 질문이 시작된다. 선종의 극성과 함께 대두한 선교의 우열에 관한 판단이

그것이다.  당시 선사들은 선교간 상호위치 정립에서 대립 관계보다 양립 관계를

선택했다. 예컨대 9산선문으로 정착해 가던 9세기 후반의 선종 승려들이 교종과

일정한 동반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 그렇거니와, 선종이 정착되기 이전의 9세기

전반에는 화엄종의 대표적 3대사찰이 교선일치의 성향에 입각하여 선종을 수용한

것이 증거이다 그렇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단순하게 논의할 성격의 것이 아니지만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선종 입론의 근거가 그때까지는 아직

교종에 의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이 시기 선승(禪僧)들을 대표하는 낭혜무염(郎慧無染)이 선교의 시시비비를

내치는 구절도 그렇거니와, 다른 선사들에게서도 보이는 것처럼, 선을 교의 상징

들과 동격으로 병렬하면서 그것조차 뛰어넘고자 한 불립문자적 세계관이 바로 그

점을 웅변하고 있다. 이 두 측면의 결합, 하나는 선종의 입론이 불가피하게종에

근거할 수밖에 없는 논리적 한계성과, 하나는 교종과 조화를 이루되 그것을 포함

하여 뛰어넘는 자기초월적 관점에 기초했다는 세계관이, 신라 말 고려 초에 선사

들이 선교의 상호 위치 정립이라는 이념적 과제를 선교 대립 보다는 선교 양립적

방법으로 해결하게 끔 한 것이다. 가령 교종 부정 또는 교종 대립의 한 표방으로

선문보장록에 나타나는 신라선종조사들과의 관련내용은 1290년대 천책이 정리한

선종우위의 특색을 반영한 설화 모음의 한 부분일 뿐이다.

 

 

 

960년 무렵 혜거(慧炬)에서 추상적으로 나타나서, 바로 뒷 세대인 1000년 무렵 영준이

구체화해 나간 소극적 선 우위의 사유자세는 뒤 시대에 정립된 교외별전이라는 적극적

선 우위의 사고체계를 이끌어냈다.신라 말 고려 초의 법맥승계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사문 안에서의 자유로운 교류, 다른 가르침이나 다른 스승의 허용, 자칫 스승이나

시간 위주의 보수적으로 경색되기 쉬운 사제간의 관계설정이, 배우는 이 자신에게

 달려 있을 만큼 자유분방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삼국유사

실린 신라 말 해룡왕사의 개산조인 보요선사, 조당집에서 높이 평가한 오관산 서운사

 순지화상, 최치원이 높이 평가한 쌍계사 진감혜명은, 그들의 후예가 번성하지 못함

으로써 9산선문의 계보에서 제외된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 점에서는 활동한 시기와

제자들에 의한 활약 이 두가지가 9산선문의 성립요건으로 작용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즉 왕건에 의한 후삼국통일 이전 시기에 국사와 왕사의 지위에 오르거나 이에 비견될

예우를 받은 이들이 산문을 열고 그 후예들 가운데 뛰어난 승려들이 계속하여 배출된

곳은 역시 9산선문 밖에 찾아볼 수 없다.

 

 

 

절과 산문을 동일한 대상물로 파악하지 않고 한 절이 산문으로 불린 이래의 산문

이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일정한 계통의 흐름이 계속하여 이어진 곳을 말한다는

원칙에 합의한다면 신라 말 고려 초의 불교계를 주도한  선승들 대부분은 수미

산문을 제외한 나머지 9산선문의 계보 안에서 활동한 존재들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조심스럽게 사용하기만 한다면 당대의 선종을 총망라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을 대표한 것은 9산 선문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좀더

비약하여 말하는 것을 허용한다면, 고려시대의 선종과 신라 말 고려 초의 9

선문이란 용어의 차이는 의식하건 않건 간에, 지역분포, 국가와의 관계,

수행의 내용, 각 산문과의 관계 등에서, 두 시대 간의 선종에 차별성이 존재

하는 것을 인정하는 용어로 쓰여 마땅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9산선문의 성립은 신라 하대에 이르러 이전 시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성장지방민의 사회경제적 토대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며 비록 특정한 신분

집단이나 개인의 지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정한 세력 일변도의 지지

속에서 선종의 기반이 세워지지않았음이 주목된다

 

 

그러나 농민전쟁기를 고비로 호족과 선사들의 밀착관계가 형성되고 후삼국

쟁패가 치열한 지역에서는 세력권의 변화 따라, 연고지의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거나 새로운 변화를 꾀하게 된다.

 

이와 같은 변화는 농민전쟁 발발 이전에 혁명적으로까지 보이던 선종이,

사실상 양심적인 개인의 지성만으로 만족하는 진보적인 지배 이데올로기

였음을 반증한다.

 

 

이는 선종의 관념성이 지닌 현실인식의 한계가 농민전쟁 이후의 농민군

에게 물리적 압박을 받으면서 점차 지배계급에게로 기울 수밖에 없던 점

에서 잘 나타난다 결국 무논리의 주관적 사유세계를 강조한 선종은 다소

진보적인  사회성을  띠기는 했지만, 이전의 화엄종의  대안으로  등장한

신라 말 고려초의 주요한 이념이었다고 정의할 수 있다

 

 

실상사 입구에 있는 석장상 앞에서 발견한 지네의 모습인데

 우리지방에서는 보기 힘든 크기의 지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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