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신륵사를 다시 찾아서
여주 신륵사는
봉미산 남쪽에 있는 절로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
하였다고 하며 앞으로는 여강 이라는
맑고 푸른 남한강이 굽이쳐 흐르고 있는데
고려 고종 때 건너 마을에 사나운 용이 나타나
행패를 부려서 피해가 극심하였는데 인당대사가
용을 잡아 굴레를 씌우니 사납던 용이 순해졌다고
하여 절 이름을 귀신신(神)자와 굴레륵(勒)자를 써서
신륵사(神勒寺)라고 하였으며, 인당대사가 아홉 마리
의 용에게 항복을 받고 지었다는 전설의 누각인 구룡
루와 신륵사 금당인 극락보전이, 앞에는 구름과 용무늬
가 아름다운 다층석탑이, 옆으로는 선각당과 묵객들이
자연을 노래했던 적묵당과 조사당, 나옹선사 석종형
승탑과 승탑 비 석등이 있으며 강가에는 다층전탑과
대장각기 비가 여 강을 굽어보고 있는 신륵사는
강변에 있는 사찰로 나옹선사가 입적한 곳으로
옛 부터 여주는 궁중의 진상미를 공급하는
곡창지대로 여주는 신륵사와 도자기가
여주의 대명사 라고 합니다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고려 고종 때 건너 마을에 사나운 용이
나타나 행패를 부리니 그 피해가 극심하였는데 인당대사가 용을 잡아 굴레를 씌우니
사납던 용이 순해졌다고 하여 절 이름을 귀신신(神)자와 굴레륵(勒)자를 써서
신륵사(神勒寺)라고 하였다고 하며 나옹선사가 입적한 곳입니다
여주는 남한강 중류의 평야에 있으며 옛부터 궁중의 진상미를 공급하는 곡창지대로
뒤로는 봉미산을 두고 앞으로는 남한강을 바라보고 있는 신륵사는 강변에 있는
보기 드문 사찰로 여주의 대명사가 신륵사 입니다.
남한강은 영월 동강과 서강이 합쳐진 곳으로 충북 단양을 지나 충주를 거쳐 여주 땅을
관통하고 있는 여주는 서울의 길목으로 조선시대 4대 나루터였던 이포나루, 조포나루,
광나루, 마포나루 중 이포와 조포가 바로 여주에 있습니다.
신륵사는 낮고 부드러운 곡선의 봉미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데, 절 앞으로는
‘여강’이라는 남한강이 유유한 자태로 흐르고 있는 아름다운 사찰로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지만 창건 시기를 뒷받침
할 만한 자료는 없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신륵사가 유명해진 시기는 고려 말부터인 것으로 김수온(1409~1481)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7
여주목 불우조에서 옛날 현릉의 왕사 나옹과 목은선생 두 사람이 서로 이어 와서 신륵사에서
놀았다. 이로부터 이 절이 드디어 기좌의 유명한 절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재 신륵사 경내에는 보물로 지정된 다층석탑, 다층전탑, 보제존자석종, 보제존자석종비,
대장각기비, 보제존자석등, 조사당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극락보전, 팔각원당형석조부도 등이 있습니다.
새로 지어진 여주 신륵사의 일주문입니다
봉미산 신륵사 라는 일주문 현판도 새로 만들어졌습니다
신륵사 경내에 들어서면 좌측 바위 언덕 위에 세워져 있는
승탑 모양을 하고 있는 석조물이 있습니다
여주 신륵사는 워낙 이름난 절이라서 5회 정도는 가 보았다고 생각되는데도
이 승탑은 처음 보는 것 같아서 담아 본 사진입니다
신륵사를 들어오기 전에 세심정의 물 한 모금으로 몸과 마음을
맑게 하고 들어오라는 세심정이 세로 들어서 있습니다
범종각에는 불교에서 말하는 사물이라고 하는 범종, 법고, 운판, 목어를 조성하여 둔 곳으로
아침과 저녁에 예불을 드릴 때 법고·목어·운판·범종 순서로 치게 됩니다.
범종은 그 소리로 인하여 일체 중생이 번뇌로부터 벗어나 지혜를 증장하고 깨달음을 얻게 하는데
그 의미가 있으며, 법고는 축생의 무리에게, 목어는 수중의 생명에게, 운판은 하늘을
나는 생명에게 부처님의 진리를 전하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종각 내에는 법고가 2점 있는데 대고는 매우 두꺼운 원통형의 형태이며 모두 조선말기의 작품이고
목어는 길이가 237㎝이며 몸에는 지느러미와 비늘을 선명하게 표현하였고 입에는
여의주가 물려있는데 조선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관음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사찰의 전각을 관음전이라고 하며 관음전에는
원통전, 대비전 등의 편액이 붙어 있는 곳도 있습니다
관세음 보살은 현세에서 괴로움을 겪는 인간에게 해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보살로 고난에 처해 있는 그 어떤 중생이라도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면
난을 피할 수 있고 복을 받을 수 있게 된다고 하는 보살입니다
관음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관한다는 말로 이 세상 모든 중생들의 온갖 고뇌의 소리를
다 들으시고 관찰하여 아시는 분으로 관음보살은 아미타불을 받들고 있으며
대자대비를 본 원력으로 하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명부전은 전면 3칸 규모의 아담한 건물로 맞배지붕을 구비하고 있으며 내부에는
나무로 조성된 지장삼존을 비롯해 역시 나무로 조성한 10왕과
판관, 명사 등 모두 29구의 조상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명부전의 앞에는 한 그루의 향나무가 있는데 무학대사가 그의 스승 나옹화상을
추모하기 위해서 심었다고 전하는 의미 깊은 향나무 입니다
명부전은 중생의 사후 세계를 주관하는 지장보살과 십대왕을 모셔놓고 죽은 자의
왕생극락과 이고득락을 기원하는 의식을 하는 전각입니다.
명부전의 중앙에는 저승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모두 구원하기 전에는 성불을
하지 않겠다고 서원을 세운 지장보살을 본존으로 하여 그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모셔놓았는데 좌우로 시왕상과 인왕상을
차례로 조성하여 위엄을 더하고 있습니다.
신륵사 명부전은 최초로 고려 광종때 도원대사가 신축한 것으로 전해져 오지만 지금의
건물은 조선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맞배지붕에 전면 3칸의 구조를 가진 이 명부전의
내부에는 현재 목조의 지장삼존상을 비롯하여 시왕, 판관, 명사 등
도합 21구의 조상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신륵사 명부전에 모셔진 조상들은 모두 목각으로 그 각 법이 사실적이며 생동감이
넘쳐 조선 중기 조각의 극치를 보는 듯하며 특히 해학적인 모습의 신장상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미소짓게 하고 있습니다.
조각의 기법으로 보아 현종 감수향이 신륵사를 중수했던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과거에는 7구의 동자상과 시왕불화가 함께 봉안되었으나 현재 별도의
장소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명부전은 사람의 사후 세계를 주관하는 분들을 모셔 놓은 곳으로 내생의 운명을 결정하는
곳이며 사람의 한 생애를 선악의 기준으로 평가해서 그에 해당하는 응분의 새 운명을
결정해 주는 분들이 집결해 있는데 그 중심인물이 지장보살입니다.
지장보살은 유명계, 저승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원하기로 서원을 세우고
그곳을 주관하는 보살이시며 그 좌우 보처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입니다.
도명존자가 지장 삼존의 보처가 되는 것은 당나라 도명 화상이 사후 명계에 다녀와
소생한 다음 그가 본 대로 명부를 재현한 데서 이런 신앙이 생겼다고 합니다.
명부전 안에는 중앙에 지장삼존상이 안치되고 좌우에 시왕이 늘어앉고 그 좌우로는 판관녹사가
선악의 행적을 적은 문서와 판결에 대비한 문방구들을 갖춰 가지고 시립하게 됩니다.
시왕 중에 다섯번째에 해당하는 제5염라대왕이 왕중왕으로 시왕을 통솔하니 그 권능이
가장 으뜸이라 다른 왕들은 오량관을 쓰고 있는데 염라대왕만은 책으로 된 면류관을
쓰고 그 앞에는 업경대를 놓고 있으며 최판관이 그를 보좌하는데
사람들은 염라대왕과 최판관을 가장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명부전에 대하여
사람이 죽으면 혼백인 중음신이 생전에 지은 선악의 업보대로 육도의 어느 곳으로
배속 받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명부에 있는 시왕에게 차례로
심사를 받으며 통과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 기간이 3년 상을 치르는 사이인데 처음 칠대왕은 칠재 즉 7일마다 올리는 49일재 사이에
거치게 되고, 제 8대왕에게는 백재날 심사를 받고 제9대, 제10대왕에게는
각각 소상과 대상날 심사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때를 대비해서 생전에 삼보에 예배 공양을 하였거나 불경을 읽고 염불하였거나 혹은
불보살상을 조성하는 등 많은 선행을 하였으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죄상을
낱낱이 파헤쳐서 그 죄 값에 해당하는 배치를 하게 되는데, 업경대 앞에만 세워
놓으면 그의 평생사가 거울에 영상처럼 차례로 비춰 나오기
때문에 속일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망자가 선업을 짓지 못하고 갔다하더라도 그의 가족 친지들이 그를 위해
심사가 있는 잿날 열심히 재를 올려 주면 그 공덕으로 죄를 용서받고 심사에
무난히 통과할 수 있으니, 3년 동안 49재와 백재, 소대상재를
지성으로 올려야 한다는 것이 이 경의 내용입니다.
명부전과 조사당 사이 서편 언덕에는 주인을 알 수 없는 두 기의 승탑이
있는데 위쪽에 있는 8각형 모양의 승탑은 원구형 승탑이라고 하며
아래쪽에 있는 것은 팔각원당형 승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승탑은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넣어두기 위해 만든 탑으로 위쪽에 있는 8각형
모양의 승탑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 합니다
주인을 알 수 없는 두 기의 승탑이 본래는 조사당 뒤 북쪽 구릉 너머에 있었다고
하는데 1966년 11월 17일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다고 하며 위쪽에 있는
승탑이 팔각원당형 석조승탑 이라고 하는 승탑입니다
팔각원당형 석조승탑은 방형의 지대석 상면에 평면 팔각의 기단부·탑신부·
상륜부를 차례로 중첩하였으며 지대석의 하대석은 일석으로
하대석에는 8판 복엽의 복련을 조식했습니다.
팔각원당형 석조승탑의 중대석은 낮은 원통형으로 조성되었는데, 표면에는
아무 조식이 없으나 상대석에는 8판의 앙련을 조식했으며 탑신부에는
평면 8각의 형태로 문비형을 새기고 범자를 양각했습니다
팔각원당형 석조승탑은 옥개석의 하면은 편평하게 처리하였고, 두툼하게 조성한
기와골의 끝에는 큼직한 귀꽃을 배치했으며 상면에는 복발, 보륜, 보주가
차례로 놓여있어 비교적 완전한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원구형 탑신의 승탑은 간략하고 폭이 좁은 기단과 도식적인 연화문 등 조선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고 하며 연주문 받침 위에 보주를 두른 삼단형으로 구성된 상륜부가 있습니다.
원구형 탑신의 승탑은 상륜부 아래 지붕에는 연잎을 얹어 표현하였으며 기와골은
선명하게 나타내고 4개는 번갈아가며 용머리를 표현하였는데 사각의 지대석
위에 중대석과 상대석을 마련한 기단부는 조각이 둔중합니다.
원구형 탑신의 승탑은 편평한 상대석 위에는 형식적인 연꽃을 모각하였으며
팔각의 중대석에는 2단으로 나누어 연주문형 기둥을 마련하였습니다.
조사당은 조선 전기 예종 때 지은 것으로 낮은 기단 위에 앞면 1칸·옆면 2칸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앞면은 6짝의 문을 달아 모두 개방할 수 있게 하고, 옆면은 앞 1칸만 문을 달아 출입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조사당은 보물 제 180호 인데 조선 전기의 조각 수법을 보이고 있으며 규모는 작지만 균형이 잘 잡힌 아담한 건물로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건물의 구조적인 특징으로서는, 가운데 기둥을 세우지 않아 대들보가 없으며 조사당은 전 후면이 각각 1칸이고 양 측면이 2칸으로 전면을 제외한 3면에는 벽을 돌리고 앞쪽만 띠살무늬의 분합문 6짝을 달아 전부를 개방할 수 있도록 조영하여 특수한 건축의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사당은 절에서 덕이 높은 승려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건물로, 신륵사 조사당에는 불단 뒷벽 중앙에 나옹을, 그 좌우에는 지공과 무학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있습니다
조사당은 신륵사에서 가장 오래 된 건물로 조선 태조가 스승 무학대사를 추모하기 위해 지었다고 하며 가장 뒤에 중수했던 1671년경의 건물일 것이라고 합니다
조사당에는 고려 말 기울어 가는 불교계의 한 줄기 빛이었으며, 도인으로서 법맥을 형성했던
지공, 라옹, 무학스님의 삼화상의 덕을 기리고 그들의 법력을 숭모하기 위해서 세워진
것으로 중앙에 나옹, 좌우에 지공, 무학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으며
목조 나웅의 독존을 안치하 였습니다
무학은 나옹의 법통을 이어 받은 후법 제자이며, 조선 태조의 왕사이기도
합니다만 조사당은 일찍이 그 절에서 어떤 인물이 살았던가를
보여주는 그 절의 산 역사이기도 합니다.
원효대사는(1327~1405)는 호는 무학·계월헌이고 삼기에서 출생하여, 18세에 소지선사의
제자로 승려가 되어 구족계를 받고, 혜명국사에게서 불법을 배웠다고 하는데 길상사.
묘향산 금강굴 등에서 수도하다가, 1353년(공민왕 2) 원나라 연경에 유학하여
그때 원에 와 있던 나옹과 지공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삼화상은 지공이 나옹의 스승이고 나옹은 무학의 스승인 관계로 가운데 지공은
인도 스님으로서 나옹이 중국 유학 중에 스승으로 모신 분으로 고려에 와서
그 명성을 날렸다고 하며 공민왕의 왕사로서 영원사를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한 고려 말의 고승입니다.
지공은 인도 마갈제국에서 태어나 원나라 순제 때 고승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고려 충렬왕 말기에 회암사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나옹선사는 영덕군 창수면 사람으로 본명은 원혜 라고 하며 법명은 혜근이고 법호가
나옹이고 왕사의 시호는 보제존자라고 하는데 나옹선사는 20세 때에 사랑하던
친구의 죽음을 보고 죽음에 대한 의문을 품고 출가를 하였다고 합니다
나옹선사는 출가 후 원나라에 유학하여 인도 승려 지공 스님의 제자가 되어 임제종법을
이어받고 귀국 후 공민왕의 왕사가 되었고 신륵사에서 입적을 하였다고 합니다
나옹은 고려 말의 고승으로 호는 나옹이고, 시호는 선각이며 초명 원혜로써 경북 영해에서
출생하였으며, 20세 때 친구의 죽음을 보고, 출가하여 공덕산 묘적암의 요연에게서
득도하고, 1348년(충목왕 4) 원나라에 가서 연경의 고려 사찰인 법원사에서
인도 승려 지공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나옹선사의 선시가 우리집 거실에도 표구를 하여 걸려 있습니다만
어느 스님이 써 주신 글인데 거실에 앉으면 읽어 보게 됩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 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조사전에서 산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석등, 석종, 석종비가 나타나는데
왼쪽에는 석종비가 있고 오른쪽이 석종인데 보물 제228호로
고려 후기의 석종양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제존자 나옹은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여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하였던
승려로 양주 회암사의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을 받아 밀양으로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고 하는데 이후 그를 따르던 문도들이
사리를 안치한 석종과 석비를 세워두었다고 합니다.
석종의 높이는 190㎝ 이고 1379년(우왕 5)에 나옹의 유골을 안치하기 위해
만든 것인데 신라 때부터 성행하던 팔각원당형 승탑이 고려 시대에
이르러 석종형으로 바뀌어 크게 발달하게 됩니다
보제존자 석종은 보물 제 225호로 나옹선사의 승탑이라고 하며
탑의 모양이 종 모양을 하고 있어서 석종이라고 합니다
나옹의 승탑으로 널찍하게 마련된 단층 기단 위에 2단의 받침을 둔 후 종 모양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은 돌을 쌓아 넓게 만들고 앞쪽과 양 옆으로 계단을 두었으며 탑신은
꾸밈이 없고,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불꽃무늬를 새긴 큼직한 보주가 있습니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운 것으로 나옹이 양주 회암사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으로 밀양에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니 그 제자들이
절 뒤에 터를 마련하여 이 탑을 세웠다고 하는데 고려 후기의
석종형 승탑 양식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 이라고 합니다.
석종비는 보물 제229호로서 신륵사에 있는 보제존자 나옹화상의 묘비로
1379년에 만들어졌고 높이 212cm. 너비 61cm.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이 짓고, 명서가인 한수가 쓴 것입니다
비는 3단의 받침 위에 비 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받침부분의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겨 두었으며 대리석으로 다듬은 비신은 양옆에
화강암 기둥을 세웠으며, 지붕돌은 목조건물의 기와지붕처럼
막새기와와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비의 앞면에는 끝부분에 글을 지은 사람과 쓴 사람의 직함 및 이름에 대해
적고 있는데 글 앞에 적지 않는 것은 드문 예로 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워진 비로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이 짓고, 유명한 서예가인
한수가 글씨를 썼는데 부드러운 필치의 해서체입니다.
보제존자 석종비석은 목조건물 형식으로 비부는 이중기단으로 상하갑석에 연꽃
문양을 새기고 비신 좌우에 우주를 새기고 가첨석은 기와를 덮은 팔작지붕
형태를 한 한옥집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석등은 보물 제 231호로 화사석은 납석으로 만들고 다른 부분은
화강암으로 고려말기의 대표적인 조각양식을 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장명등의 조형이라고 합니다
석종 앞에 세워져 있는 8각 석등은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세부분으로 이루어진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으로
받침에는 표면 전체에 꽃무늬를 가득 새겨 장식하고 있습니다.
화사석은 각 면에 무지개 모양의 창을 낸 후 나머지 공간에 비천상과 이무기를
조각했으며 지붕돌은 두꺼우나 여덟 귀퉁이에서의 치켜올림이
경쾌하여 무거운 느낌을 덜어준다고 합니다.
고려 우왕 5년(1379) 보제존자석종 및 석비와 함께 세워진 작품으로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며 고려 후기의
대표적 양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화사석 윗부분에는 비천상을 새기고 있습니다만
비천의 얼굴이 망가져 버렸습니다
화사창의 기둥에는 반룡을 새겨 놓았는데 반룡의
모습이 사실적이고 아름답습니다
이중기단의 상 하 갑석에는 연화문을 새기고 기단의 중대석에
탱주와 면석일 새겨놓아 아름답습니다
옥개석은 처마 귀를 접어 올려놓았고 상륜부는
그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극락보전은 신륵사의 주 법당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건물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장대석을 3단으로 쌓은 기단과, 중앙에 설치한 계단은 조선시대 건축기단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으며 부연을 달은 겹처마 지붕과 더불어 기둥 사이에도 공간포를
올린 다포계 양식의 화려한 건축수법을 보이고 있습니다.
신륵사는 세종의 능인 영릉의 원찰로 지정되어 1472년(성종 3) 대규모의 중창불사를
시작하여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는데 극락보전도 왕릉 원찰로 지정되면서
창건된 것이지만, 현존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1800년(정조 24)에 다시 중창한 것이라고 합니다.
내부에는 나무로 조성한 아미타 삼존불상을 봉안하였는데 본존의 높이는 1.5m,
협시보살상은 2m이며, 1977년에 개금했다고 하며 후불탱화는 화기를 볼 때
1900년(광무 4) 수영승호에 의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단을 향해 오른쪽에 있는 신중탱과 감로탱 역시 1900년(광무 4)에 조성되었고
왼쪽의 지장탱은 1908년(융희 2년) 금어 계은봉법에 의해 조성되었으며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화려한 닫집을 달아 내부의 장엄을 더했습니다.
극락보전에는 길게 뻗어 날렵한 반전을 보이는 지붕의 네 귀퉁이에 추녀를 받치기
위해 활주를 시설하였으며 내부에는 1773년(영조 49, 건륭 38)에
조성된 범종 1구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나무로 조성한 아미타 삼존불상을 봉안하였는데 본존의 높이는 1.5m,
협시보살상은 2m이며, 1977년에 개금했다고 합니다
나무로 조성한 아미타 불상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관세음보살상이
세워져 있는데 관세음보살은 지혜로서 중생의 음성을 관하여
고통으로 부터 벗어나게 해 준다고 합니다
나무로 조성한 아미타 불상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대세지보살상이 세워져 있는데
대세지보살은 지혜의 광명으로 모든 중생을 두루 비충어
무한한 힘을 얻게 해 준다고 합니다
극락보전은 아미타불을 주 존으로 모신 사찰의 중심 전각인데
신륵사의 극락보전은 입구에서 보면 2층입니다만
다층석탑이 있는 곳에서는 1층으로 보입니다
신륵사 극락보전 앞에 있는 탑으로, 기단을 2단으로 마련한 후 그 위로 여러 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각 부분의 세부적인 조형방법은 전혀 달라서 기단에서부터 탑신부 까지
전부 한 장씩의 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신륵사 다층석탑은 조선 성종 3년(1472)에 건립한 조선초기의 우수한 탑으로
극락보전 앞에 건립되어 있는 석탑으로 2층 기단 위에 탑신을 올린 평면
방형의 석탑이며 외형적인 면에서는 신라시대 일반형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층수가 불분명하여 다층 석탑이라 불르고 있습니다
탑신부의 각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얇은 한 단이며,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치켜
올려져 있으며 8층 몸돌 위에 지붕돌 하나와 몸돌 일부분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층수가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8층 탑신의 아래까지만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고 합니다
바닥 돌 윗면에는 연꽃을 돌려 새겼으며 아래층 기단의 네 모서리에 새겨진 기둥조각은
형식적이나 특이하게도 물결무늬를 돋을 새김 하였으며 아래층 기단의 맨 윗돌을
두껍게 얹어놓아 탑의 안정감을 높이고 있으며, 위층 기단의 모서리에 꽃
모양을 새긴 기둥을 두고 각 면마다 용무늬를 깊이 판 모습은
능숙한 석공의 솜씨를 드러낸다고 합니다
각 부분 아래에 괴임을 둔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 석탑 양식을 일부분 남기고
있으나, 세부적인 조각양식 등에서 고려 양식을 벗어나려는 여러 가지
표현이 돋보이는 탑으로 하얀 대리석이 탑을 더 아름답게 합니다
신륵사 다층 석탑은 보물 제 225호로 흰 대리석의 일반형 석탑 양식으로 기단부는
2층으로 하고 있으며 상하 갑석에는 연꽃무늬를 조각하고 면석에는 용트림과
구름무늬를 조각 하였습니다
문화재전문가인지 담당자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사찰 관게자의 입회하에
대학교수인듯한 분과 문화재 청 담당자인 듯한 분들이 다층석탑의 보존처리를 위하여
세밀하게 탑의 파손된 부위를 정밀관찰을 하고 있어서 자세하게 엿볼 수 있었습니다
관찰 1의 모습입니다
관찰 2의 모습으로 사방을 정밀관찰하고 있습니다
관찰 3의 모습을로 용두에서 부터 생긴 균열을 1차 보수를 하였으나
틈새가 다시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드군요?
관찰 4의 모습인데 이 부분은 균열이 제법 많이 간 곳으로
우려를 표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관찰 5의 모습으로 서면인 것 같은데 대리석 조각이 제법 크게 떨어져 나간 것
같아서 고우니도 함께 걱정을 해 본 부분입니다
신륵사는 절 이름을 ‘신륵’이라고 한 데는 몇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왕사 나옹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를 막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
나타난 용마가 걷잡을 수 없이 사나웠으므로 사람들이 붙잡을 수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가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으로 제압하였다고 하여
절 이름을 신륵사라 하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사찰에는 주불 전을 보호하고 사세를 안정시키는 전위누각이 주불 전의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누각은 사찰에서 행하는 모든 제반의식의 집전 장소로서
기능적 역할을 하는 곳으로 신륵사에서는 구룡루가 있습니다.
구룡루라는 명칭은 석가모니 부처님 탄생 시 물을 뿌려 부처님을 목욕시켰다는 아홉 마리
용에 대한 경전의 내용과 혹은 창건설화에 나타나는 승천한 아홉 마리의 용에서
따 왔을 것이라 추측되나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절이 대찰을 이루게 된 것은 나옹이 이곳에서 갖가지 이적을 보이면서 입적하였기 때문
이라고 하는데 나옹이 입적할 때 오색구름이 산마루를 덮고, 구름도 없는 하늘에서
비가 내렸으며, 수많은 사리가 나왔고, 용이 호상을 했던 일들이라고 합니다
나옹선사는 한양을 점지했다는 무학대사의 스승으로 고려 말 가장 이름난 선종의 고승으로
왕명을 받고 밀양 땅으로 떠나던 중 신륵사에서 열반에 들었다고 합니다.
구룡루는 1858년 김병기에 의해 중창된 전면 3칸, 측면 2칸의 이 건물은 원래 아래 부분이
트여있는 구조였으나 지금은 벽을 쌓아 이층만 사용하도록 하였는데 다른 사찰의 누각
건축물에서는 누대 밑으로 사람이 통과할 수 있도록 아래 공간이 어느 정도 여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비해 구룡루는 별도의 기단 위에 세워져 있으나
누대 밑의 높이가 상대적으로 낮습니다.
신륵사는 중심권역으로의 진입이 강가 쪽 전면이 아니고, 범종루와 극락보전 우측
통로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구룡루의 용도가 통로의 기능보다는
정자로서의 역할이 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병익 공덕비는 조선 철종 9년 순원왕후의 발원으로 당시 호조판서 김병기가 신륵사를
중수한 뒤 세운 공덕비인데 높이가 2.4m 이고, 비신은 1.37m 입니다
김병익 공덕비의 비석에는 판돈령김공병긱송덕비
라는 비문이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신륵사 다층전탑은 보물 제226호로 전탑이라는 것은 벽돌로 만든 탑을 말하는데 우리나라에는
전탑이 많지 않으며 경기도와 경상북도 안동 일대에 몇 기만 남아 있으며 고려 때부터
이 절을 벽 절 이라고도 불렀는데 동대 위에 다층전탑이 있어 이 탑 전체를
벽돌로 쌓아 올린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합니다.
한강이 굽어보이고 강 건너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경치 좋은 바위 위에 이 전탑이
세워져 있는데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말하며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안동지역에서 몇 기가 남아 있습니다.
탑은 기단을 2단으로 마련하고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 층의 탑신을 올렸으며 기단과 계단은
화강암으로 만들었고 탑신부는 흙벽돌로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그 위에 다시
몸돌 하나를 올려놓고 있어 7층 같아 보이기도 하는 애매한 구조입니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전탑과 달리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매우 얇으며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3층이 2단, 4층 이상은 1단이며 지붕돌 위로도 1층은 4단, 2층 이상은 2단의
받침을 두었는데 이 또한 특이한 형태로 꼭대기에 머리장식이 있기는 하나 얇습니다
탑의 북쪽으로는 수리할 때 세운 비가 전해오는데, 거기서 ‘숭정기원지재 병오중추
일립(崇情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이라는 연대가 있어서 조선 영조 2년(1726)에
다시 세워진 것이므로 지금 탑의 형태는 만들 당시의
원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신륵사 다층전탑은 높이 9.4m의 규모로 현존하는 국내 유일의 고려시대 전탑으로 기단부는
화강암을 이용하여 7단으로 구축했는데, 3·5·6·7단에서 체감을 이루며 층단형을
이루고 있는데 이 중 2층과 4층의 석재는 다른 부재보다 높게 조성되어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에서와 같이 2층 기단의 형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조성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신라 분황사 모전석탑(634년) 이후에
조성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전탑은 위치한 곳이 동대라 하여 이 탑을 동대탑이라고도 하며
탑의 모양이 아름답습니다
나타내는 북(子) 동(卯) 남(午) 서(酉)를 새겨 놓았으며 건립시에는
7층이었으나 수리과정에서 6층이 되었다고 합니다
대장각기비는 보물 제230호로 불교경전을 보관하는 대장각의 조성에 따른
기록의 내역을 새겨 놓은 비석으로 이 비석은 고려 우왕 9년(1383년)에
세웠다고 하며 비문은 고려 말 학자 도은 이숭인이 짓고
공민왕 때 문신 권주가 썼다고 합니다
이곳에 있던 대장각에 목은 이색과 나옹선사의 문하생들이 발원하여 경,율,논, 삼장을
만들어 수장하고 대장각기비를 세웠다고 하며 조선 영조 2년(1726년)에
탑을 수리한 기록으로 신륵사 동대 탑 중수비가 있습니다
길쭉한 사각형의 바닥 돌 위에 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비신을 세운 후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비신의 양 옆에 돌기둥을 세워 비신을 단단히 지탱하도록
하고 있는데 비신의 양 옆에 돌기둥을 세우는 형식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보이는 현상으로 주목되는 부분입니다.
대장각기비의 비문은 이숭인이 짓고 공민왕 때 문신 권주가 썼다고 하는데 권주의 글씨로 새긴 비문은
비신이 크게 파손되어 전체의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지만 비문의 뒷면에는 불경(경률론)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대장각기비는 고려 말 목은 이색이 공민왕과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복을 빌고자 나옹의 문도와 함께
대장경을 인출하고 대장각을 지어 봉안한 사실을 기록한 비문으로 비신은 대리석으로 된 비문을
보호하기 위해 보제존자 석종비와 동일한 수법으로 둘레에 돌기둥을 세워놓고 있으며
비의 형태는 조형 면에서 보제존자석종비보다 훨씬 간략해져 있다고 합니다
대장각기비는 비신의 높이가 133㎝, 폭은 88㎝로 비신 둘레에는 돌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연질의 대리석 비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하며 본래 신륵사에는 경율론 3장을
인출하여 이를 수장하던 대장각이 극락보전 서쪽 언덕에 있었다고 하는데
서쪽이라면 지금의 명부전 쪽이 되리라 추정된다고 합니다.
현재 이 비는 신륵사의 동쪽 언덕위에 위치해 있는데 비신은 좌단이 깨어져 몹시 손상되어
글자를 알 수 없고 따라서 이 비를 세운 연대를 밝힌 부분에도 손상이 있어 이를
알 수 없으나 대체로 1383년(우왕 9, 홍무 16)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신륵사에 세워져 있는 비로 극락보전 서쪽 언덕에 있었던 대장각의 조성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을 적고 있는데 비를 세운 시기는 고려 우왕 9년(1383) 때
이고 거북 모양의 비 받침, 용의 머리가 새겨진 비 머리가 고려 후기로
오면서 사각형 받침과 지붕 모양의 머릿돌로 간략화 되고 있습니다
삼층석탑은 다층전탑 앞 강변의 암반에 건립되어 있는 단층기단을 구비한 평면방형의 3층 석탑으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이며 넓은 1매 판석으로 구성된 지대석의 외곽에는 높은 1단의 각형
받침을 마련한 후 중앙에호각형 2단의 받침을 조출해 기단을 놓았습니다
기단은 1매의 석재로 조성했는데 각 면에는 양 우주와 탱주를 모각했다. 갑석 역시 1매의 석재로
놓았는데, 각 면 3구씩 그리고 모서리에 1구씩 모두 복엽 16판의 복련을 조식했으며
중앙에는 낮고 높은 각형 2단의 받침을 조출해 탑신부를 올려 놓았습니다.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1석으로 조성되었으며 매 층 탑신석에는 양 우주가 모각되었는데,
1층탑신은 2층에 비해 3배 정도 높게 조성되었으나 현재 3층 탑신석은 결실되었으며
옥개석은 3층 모두 그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삼층석탑은 낙수면의 길이가 짧고 경사가 급해 둔중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하단에는 1·2층은 각형 3단, 3층은 각형 2단의 받침이, 상단에는 각형 2단의
탑신받침이 있고 상륜부는 모두 결실되었습니다
고려의 마지막 학자 세 사람의 유명한 충신 삼은인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목은 이 색으로 삼은이라고
하는데 고려가 망하고 불사이군으로 정몽주는 이방원에게 선죽교에서 철퇴로 맞아죽고 길재는 선산
금오산에 들어가 나오지 않고 이색은 이 곳 신륵사에서 두문불출하였는데 이성계가 사람을 시켜
강제로 남한강에 뱃놀이를 시키면서 독주를 먹여서 죽였다고 하는 곳입니다
나옹화상의 화장터에 건립된 석탑과 인접해 건립된 6각형의 정자이며 강월헌은 나옹화상의
당호로 그를 추념하기 위해 건립했던 정자라고 하며 이 정자는 본래 석탑과 거의 붙어
있었으나 1972년 대 홍수 때 파괴되어현재의 위치에 콘크리트로 건립했습니다
육각정 강월헌에 올라 낭간에 몸을 기대어 잠시나마 여강을 따라 흘러가는 황포돗대에
마음을 싣고 휴식을 취하면서 나옹선사의 시를 한 번 되세겨 보면서
신륵사를 빠져나와서 영월루를 찾아가 보기로 합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 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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