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수영대첩비와 타루비를 찾아서
좌수영대첩비는
전남 여수시 고소동에
있는 조선 중기 이순신 장군의
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대첩비로 조선 광해군 7년에
세워졌으며 비의 왼쪽에는 숙종 24년 남구만이
지은 비의 건립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이순신의
막료로 활약 하였던 수군 통제사 유형과 좌수영.
지역의 유지 및 후손들의 노력으로 건립하게 되었다
고 하며 이 때 타루비도 대첩비 옆으로 옮겨 세우고
비각을 세워 보존하였다는 비 건립 전후 기록이 있고
좌수영대첩비는 일제강점기에 여수경찰서장 마쓰키
가 1942년 우리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기 위하여 대첩
비각을 헐고 대첩비와 타루비를 반출했던 것을
수소문 끝에 1946년 경복궁 근정전 앞 땅속에서
김수평이 발견하여 1948년 5월 24일 지금의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고 합니다
==== 좌수영대첩비 ===
좌수영대첩비는 전남 여수시 고소동에 있는 조선 중기 이순신 장군의
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대첩비로 조선
광해군 7년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좌수영대첩비는 일제강점기에 여수경찰서장 마쓰키가 1942년 봄
우리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기 위하여 대첩 비각을 헐고 대첩비와
타루비를 반출했던 것을 1946년 경복궁 뜰에서 김수평이 발견
하여 1948년 5월 24일 여수에 복구하였다고 합니다
좌수영대첩비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부하로 있다가 전라좌수사,
황해병사를 지낸 유형이 돌을 보내 김상용이 전을 쓰고,
이항복이 비문을 짓고 비문은 김현성이 새겼다고 합니다.
좌수영대첩비의 끝부분에 만력사십삼년오월립(萬曆四十三年五月立)이란
명문이 있어 1615년(광해군 7)에 건립된 것으로 국내 비석 가운데
최대로 길이 3.6m, 폭 1.27m, 두께 27㎝에 달한다고 합니다
좌수영대첩비는 세밀하게 장식한 기단과 귀부가 1매의 돌로 구성되었으며
귀부에는 세장한 다리와 형식적인 머리, 등에는 육갑문이 표현되었으며
그 위에 장방형의 비좌를 마련하여 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얹었습니다
이수는 아래에 연화문이, 앞면은 중앙에 여의주를 중심으로 두 마리의
용이 구름에 둘러싸인 채 다투는 형상으로 뒷면은 구름무늬와
꽃무늬가 있고, 맨 위에는 꽃무늬의 보주가 있습니다.
비문 상단에는 "통제이공수군대첩비(統制李公水軍大捷碑)"라고
전액되었고, 비제(碑題)는
"유명조선국정헌대부행전라좌도수군절도사겸충청전라
경상삼도
수군통제사 증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
좌의정겸 령경연사덕풍부원군시충무이공수군대첩비명병서
(有明朝鮮國正憲大夫行全羅左道水軍節度使兼忠淸全羅慶尙三道
水軍統制使贈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
左議政兼領經筵事德豊府院君諡忠武李公水軍大捷碑銘幷序)"
해남의 해남 명량대첩비(보물 제503호)와 함께 일제의 박해로
1942년 서울로 운반되어 행방을 알 수 없다가, 광복 이후
해남지역 유지들의 수소문으로 경복궁 근정전 앞뜰 땅
속에서 찾아내어 지금의 자리에 다시 세워졌습니다.
비는 한 돌로 이루어진 바닥돌 위에 거북받침돌을 두고, 비몸을 세운 후
구름과 용, 연꽃 등이 조각된 머릿돌을 올린 모습으로 비문의 글은
당시 이름을 날렸던 이항복이 짓고, 글씨는 명필 김현성이 썼으며,
비몸 윗면의 통제이공수군대첩비(統制李公水軍大捷碑)라는
비 명칭은 김상용의 글씨입니다.
타루비는 전라남도 여수시 고소동에 있는 조선 중기 이순신 부하들이
세운 추모비로 이순신 장군이 죽은 지 6년 후인 1603년에
부하들이 장군의 덕을 추모하여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좌수영대첩비 오른쪽에 있는 타루비의 비좌 아래는 땅에 묻혀서 알 수
없으나 비좌는 장방형으로 앞면과 옆면에 네모꼴 안상을 마련하였고,
그 안에 풀 무늬와 여의주 무늬를 조각하였으며,
타루비의 윗면에는 중판의 연화문을 새겼으며 옥개 부분에도 앞면과
옆면에만 나선형의 구름무늬가 표현되었을 뿐 뒷면에는 아무런 장식
없이 처리되었고 그 위에는 반원형의 연봉형 보주가 있습니다
타루비에는 영하의 수졸들이 통제사 이공순신을 위하여 짧은 비를 세우니
이름 하여 타루라 말 하니라. 대개 중국 진나라의 양양(襄陽) 사람들은
양호를 생각하며 그 비를 바라보면서 반드시 눈물을 흘린다는 고사를
취한 것이니라. 만력 31년(1603) 가을에 세우다
(營下水卒 爲統制使李公舜臣 立短喝 名曰墮淚 蓋取襄陽人
思羊祜 而望其碑 則淚必墮者也 萬曆三十一年秋立)
라고 쓰여 있습니다.
타루비는 좌수영대첩비와 함께 보물 제571호로 일괄 지정되어 있었으나,
여수 주민들이 분리하여 보물로 지정할 것을 정부에 건의하여 1998년
11월 27일 타루비가 보물 제1288호로 지정되었다고 하며 비각 안에
보관되어 있어 비교적 양호한 상태입니다.
‘타루(墮淚)’란 눈물을 흘린다는 뜻으로, 중국의 양양 사람들이
양호(羊祜)를 생각하면서 비석을 바라보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고사 성어 에서 인용하였다고 합니다
비의 형태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었으며
받침돌에는 꽃무늬가 있고 머릿돌에는 구름무늬로 있으며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보주가 솟아 있습니다.
비문은 타루비 라는 비의 명칭을 앞면에 크게 새기고 그 아래로
명칭을 붙이게 된 연유와 비를 세운 시기 등을 적고 있으며
이순신 장군이 세상을 떠난 지 6년 후인 선조
36년(1603)에 이 비를 세워두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숙종 4년 장수현감 조종면은 민정시찰을 나섰다가 이 곳
산 비탈을 지나게 되었는데 말발굽소리에 놀란 꿩이 푸드득 날아
가는 바람에 현감이 타고 있던 말이 놀라 벼랑 밑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현감이 벼랑 밑으로 떨어져서 죽게 되자 이 광경을 보고
있던 통인이 자기의 잘 못으로 현감이 죽게 되었다고 통곡을
하며 손가락을 깨물어 벼랑 위에 꿩과 말의 그림을 그리고
타루(墮淚)라는 두 글자를 쓴 다음 스스로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고 하는데
그 후 장수 현감으로 부임해 온 최수형이 이 사연을 전해 듣고
주인을 따라 죽은 그 충성스런 의리를 널리 알리고자 비를
세워 타루비 라고 이름 짓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는 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비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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