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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문화재답사

충민사와 석천사를 찾아서

by 송강 (松岡) 최 재 모 2012. 4. 3.

 

 

충민사와 석천사를 찾아서

 

 

여수 석천사와

충민사는 유교와 불교가

화합하여 국난을 극복한 영웅

들을 기려 모시는 사당과 사찰인데

석천사는 불교 사찰이고, 충민사는 유교

사당으로 충민사는 임진왜란 때 승전고를

울린 충무공 이순신장군과 의민공 이억기장군

충현공 안홍국 장군 3 장군을 모신 사당입니다

석천사는 충민사 뒤에 있는 사찰로 이순신장군과

임진왜란 때 흥국사 승병장 기암대사 옥형과 화엄사

학승 원정대사 자운과 이곳 수병장 박대복의 공적을

기르기 위하여 만든 사찰로 유교가 불교를 탄압하던

조선시대에 충민사라는 사당과 석천사라는 사찰은

두 종교의 이념을 초월하여 화합으로 국난극복에

앞장섰던 전승 장군들을 같이 추모한 사례를

보여준 호국의 성지 였다고 합니다

= 충민사(사당)와 석천사(사찰) =

 

여수시 덕충동 마래산 아래에는 있는 충민사는 선조34(1601) 체찰사

이항복이 왕명을 받아 임진왜란이 끝난 뒤의 민심을 살펴본 후 통제사

이시언에게 명하여 건립한 것으로 국가 사적 제 381호입니다 

 

 

충민사를 세우자 우부승지 김상용이 선조께 간청하여 선조가 직접

이름을 짓고 그것을 새긴 현판을 받음으로써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최초의 사당이 되었습니다.

 

 

충민사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고종8(1871) 5월에 철폐되었는데

이충무공 서원인 여수 충민사, 아산 현충사 통영의 충렬사 등이 모두 사액

서원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사표가 될 1인을 1개 서원 이외는

향사하지 못한다는 원칙과 그 당시(고종8) 삼도수군통제영이 통영에

있다는 이유로 통영의 충렬사만을 남기고 철폐되었다고 합니다

 

 

  석천사는 충무공을 모시고 따라 다니던 옥형이라는 스님이 충무공을

잊지 못하여 충민사 곁에 암자를 짓고 제사를 지내던 절입니다

 

 

  충민사는 원래 본영에서 공을 모시고 있던 교리 박대복이 공을 사모하여

두어 칸 사당을 짓고 제향을 드리고 있었던 터전이었습니다.

 

 

공의 순국 3년 뒤에 우의정 이항복이 왕명으로 전후 민정시찰 겸 이 고장에

내려와서 여러 장수들과 사당 세울 것을 의논한 결과 후임 통제사

이시언의 주관 하에 이 사당이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그 뒤 그 터전에 단만을 쌓았다가 시민들이 합심해 중수하였으나,

1919년 일제의 탄압으로 다시 철폐되었는데 광복 후 1947

충민사를 다시 세워 유림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사당에는 충무공을 주신으로 의민공 이억기, 충현공 안홍국을 배향하고

있으며 충민사는 역사상 충무공과 관계된 사당으로서는 국내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통영의 충열사 보다는 62, 숙종 30(1704)

세워진 아산 현충사보다는 103년이 앞선다고 합니다

 

 

  조정에서는 경상좌우수영 수군이 임란초기에 패배하고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연전연승하자 선조26(1593) 8월에 충청 전라 경상의

삼도 수군 통제사 직함을 내렸다고 합니다.

 

 

선조 34(1601)까지 약 9년간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조선수군의

최고사령부였던 여수는 제4대 삼도수군통제사 이시언이 "여수는 해양 방어

상 서쪽에 치우친다"는 건의를 받아들여 통제영을 거제 우수영으로

옮겨감에 따라 본영(통제영) 시대에 종말을 고했다고 합니다

 

 

여수는 임란을 승리로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구국의 성지이며

거북선의 건조지이며. 충무공이 어머니를 모시고 지극한 효행을

베풀던 인륜의 고장으로 이라고 합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여러 사람들 가운데 가장 먼저 제사를 모시는

분으로 하고 의민공 이덕기, 충현공 안홍국이 좌우로 배향 되었으며

그 후 숙종 35년 충민공이봉상을 신묘로 모시고 석천제를 창설

하였으며 영조 8(1732)에 사우를 중수하였다고 합니다

 

 

 

고종 5(186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충민단만 남기고 모두

철거되었으나, 고종 10(1873) 지역 유림들의 진정으로 건물을

다시 세우고 판서 윤용술이 쓴 충민사 현판을 걸었다고 합니다

 

 

 

1919년에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된 후, 19472칸 집으로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지역 주민의 노력으로 다시 세워

1993국가 사적 제38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충민사에 배향된 충무공 이순신, 의민공 이억기, 충현공 안홍국을

기리기 위하여 여수 지역 유림과 주민들이 매년 음력 310일에

춘기 석채례를, 음력 910일에 추기 석채례를,

428일 충무공 탄신제를 거행하고 있습니다.

 

 

충민사의 건물은 사당 외삼문 내삼문 홍살문이 남북으로 일직선

상에 배치되어 있는데 사당 왼쪽에는 흥국사의 말사인 석천사가 

있고, 외삼문과 내삼문 경내 오른쪽에는 충민사 정화

사적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사당은 정면 3, 측면 2칸에 팔작 기와지붕 겹처마이고, 기단은 3단의

장대석으로 이루어졌으며. 민흘림의 원형 기둥 위에는 익공

두 개를 겹쳐놓았고 기둥머리에는 화반을 끼워 넣었습니다.

 

 

사당의 정면 어 칸의 창호는 사분합문이며, 양쪽의 창호는 삼분합으로

모두 띠살문으로 사당의 외삼문은 맞배지붕이고, 내삼문은

맞배지붕 가운데가 양쪽보다 높은 솟을대문입니다.

 

 

  외삼문에는 숭모문(崇慕門)’, 내삼문에는 충의문(忠義門)’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 있는데 여수 충민사는 현재 사적 제381호로서 여수시가 관리

하고 있으며 이충무공유적영구보존회가 매년 제를 올리고 있습니다.

 

 

1598년 정유재란 때 노량해전에서 결전을 벌이던 이순신 장군을 도왔던

흥국사 승병장 옥형(기암대사), 물자조달관 자운(원정대사), 좌병장

박대복은 최선을 다했으나 장렬한 전사를 하고 말았다고 하며 때를

같이하여 임진왜란은 종결 되었다고 합니다.

 

 

1599(선조 32) 우부승지 김상용의 추천으로 선조왕은 영의정 이항복을

시켜 이순신과 이억기. 안홍국의 사당을 짓게 하였으며 영의정 이항복은

전라 좌수사인 이시언을 시켜 진남관을 건조케 하면서 사당을 짓게

하여 이시언이 마래산 석천사 앞에 사당을 지었고 이항복은

대첩비문을 써서 충민사에 내 걸었다고 합니다

 

이 장군이 관음포에서 돌아가시고 시신이 아산으로 옮겨간 후 전우로서

같이했던 지방의 의병들은 몸과 마음을 의지할 곳을 찾지 못하였는데

 

이때 이 지방의 향교 교리인 박대복 선생 또한 의병으로 참전했다가

공이 돌아가신 후 본인이 혼자라도 제향을 드리고 싶어 평소 장군이

재세 시에 자주 오르내리시면서 石泉의 석간수를 마시던 인연이

있는 곳에 공의 사당을 모시고 제사지냈는데,

 

 

옥형 스님 역시 충무공을 잊지 못하고 사당 곁에 당우를 짓고

80평생을 사당에 제향 올리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석천사에서 생을 마감한 것 같다고 합니다.

 

충민사 하마비는 충민사 입구에 있으며 높이 1.4m, 너비 42cm,

두께 10cm 크기의 작은 비가 하나 서 있는데

하마비(下馬碑)'라 쓰여져 있습니다.

 

 

하마비는 주로 궁궐, 종묘, 문묘, 성현의 탄생지나 묘 앞에 세워 경의를

표하게 한 하마비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충민사가 그만큼 중요한 곳

이라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이 비는 원래 동산동 벅수에서 충민사

쪽으로 약 100m 쯤 떨어진 곳에 세워져 있었으나 우회 도로가

만들어지면서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지방 불교인들의 성숙한 민심은 석천사 앞에 충민사를 세웠지만 애국선열을

추앙한다는 취지에서 일심으로 찬사했던 것으로 원래 석천사는 고려 때 세워진

암자였다고 하는데 이 암자에는 이순신 장군과 이 지방 출신 장수

박대복과 옥형, 자운 두 대사의 공적을 기리고 있습니다.

 

 

여수의 일문삼충(一門三忠)이라고 부르는 박대복 3형제는 나라를 위해 몸을

던진 충신들로 박대복은 문경공 낙촌 박충원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참봉

박안수이며 박대복과 형 박홍주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좌병장으로

전공을 세우고 전사한 장수였고 동생 박신충은 살아남았으나 병자호란

때 국치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바다에 몸을 던져 순절했다고 합니다.

 

 

자운스님은 승과로 등용한 학승으로 지리산 화엄사에서 승군팔도 도총섭을

지냈다고 하며. 옥형스님은 서산대사의 수제자로 흥국사 승병장을 지냈고

두 스님은 승군수병을 이끌고 전투에 참전했고 전투가 없는 날은

전승병군을 시켜 시주로 군량미를 거두어 들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석천사는 불교 신자들이 모여서 장군과 스님의 영혼을 애도했고

충민사는 유림들이 모여서 장군들의 충절을 추모하였다고 합니다

 

 

종교는 달라도 백성들의 생각은 하나였다고 하니. 이처럼 충민사는 사당으로

석천사는 사찰로 임진왜란의 영웅들을 모셔 기리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 후 한결 같이 여수 충민사와 석천사는 나란히 존재하면서

종교를 초월한 이 지방 사람들의 충절을 다시 한 번 되돌아

보게 하는 성지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습니다.

 

 

충민사와 석천사는 17번 도로를 타고 여수에 와서 연등동 뒷산자락을

끼고 돌아 마래산에서 종고산으로 이어지는 턱을 넘으면 남해바다와

오동도가 한눈에 보이는데 왼쪽 산비탈로 오르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록을 갖고 있지 못하여 구체적이고 세세한 사실을

알 수 없으나 다행히도 창건 당시와 이후 300여 년간을 좌수영과 함께한

기록들이 단편적으로 있어서 대략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임란 당시 참전했던 300여명의 의승 수군들 중에 승군 대장역을 하셨던 옥형,

자운의 두 스님이 계셨는데 자운스님은 화엄사가 출가 본사로 서산대사와

부휴선사와도 교분이 두터웠으며, 당시 선. 교양 승과 가운데 교과의

최고인 화엄대선의 과거에 합격한 뛰어난 학승 이였다고 합니다

 

 

임란 발생과 함게 조카 상좌인 벽암각성(뒤에 승군팔도총섭으로 남한산성을

구축한 분)과 함께 해전에 참전했으며, 옥형스님의 기록은 거의 없어 알 수

없으나 자운스님과는 속가의 형제분이라는 불가의 전언이나 석천사에서

옥형과 자운스님의 영정을 모시고 3월 중순 정일에 제사지낸 연유 등을

보면 매우 가까운 분이였음에 틀림없는 것 같다고 합니다 

 

 

 

옥형스님의 꿈에 충무공이 나타나면 바다에 변고가 있어서 공이 돌아가셨어도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지극했으면 그렇겠느냐고 기록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종교에 가까울 정도로 공과 병사, 승려, 백성들이

한마음 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전라좌수영이 해체되고 (1896) 다시 한일합병이 되면서 일제치하로 들어가자

일본 제국주의는 이충무공과 조선수군, 그리고 의병의 활동근거를 없애기

위해 흥국사 승군도 그쯤에서 해체되고, 수륙재도 중단됐으며

 

 

충민사 제향도 드리지 못하게 해서 절에 오는 신도로 가장해서 새벽에 몰래

제사를 지냈으며, 석천사에 모셔졌던 옥형. 자운스님의 영정마저도 경찰

서장이 압수해 가져간 뒤 아직도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석천사 역시 충민사와 함께 쇠락하기 시작했으며 충민사 역시 1601년에 국가

현액 사당으로 충무공을 모시는 첫 번째 사당 이였기 때문에 총독부에서

사당을 없애기 위해 토지 매입을 시도했으나 유림들과 스님들이 공동

명의를 함으로써 겨우 유지할 수 있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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