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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문화재답사

여수 진남관을 찾아서

by 송강 (松岡) 최 재 모 2012. 3. 31.

 

여수 진남관을 찾아서

 

 

여수 진남관은

조선시대 사백여년 동안

수군의 본거지와 구국의 성지로

이용되었고 전승의 사명을 한 역사적

현장으로 여수를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며

진남관 정면에 있는 망해루는 일제강점기때

철거된 것을 19914월에 재복원한 2층 누각이며

선조32년 통제사 겸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시언이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린 진해루터에 세운 75칸의 거대

한 객사인데 절도사 이도빈이 1664년 개축을 하였으나

1716년 불의의 화재로 소실되고 1718년 수사 이제면이

건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하며 이 객사는 조선

대왕들의 궐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정례

참배를 행하였으며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는 하례를

드리고 나라의 슬픔이 있을 때는 봉도식을 관민일

동이 수행하여 왔으며 1910년 고종4년 경술년에는

여수공립보통학교를 시초로 여수중학교와 야간

상업중학원 등 학교로 사용한 건물인데 현존

하는 지방관아 건물로서는 가장 큰 규모

라고 합니다. 여수 진남관

 

 

 

진남관은 조선시대 사백여년 동안 수군의 본거지와 구국의 성지로

이용되었고 전승의 사명을 다한 역사적 현장으로

여수를 상징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진남관은 1599년 선조 32년 기해년 12월에 통제사 겸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시언이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린 진해루터에

다시 세운 75칸의 거대한 객사 입니다

 

 

진남관은 그 후 절도사 이도빈이 1664년 갑진년에 개축하고

숙종 42(1716) 94대 이여옥 수사때 불의의 화재로

소실되고 숙종 44(1718) 95대 수사 이제면이

다시 건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객사는 조선대왕들의 궐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정례 참배를 행하였으며 또한 국가에 경사가 있을때는 하례를

드리고 나라의 슬픔이 있을 때는 봉도식을 관민

일동이 수행하여 왔다고 합니다

 

  진남관은 1910년 고종 4년 경술년에는 여수공립보통학교를 시초로

여수중학교와 야간상업중학원으로 사용하기도 한 건물입니다

 

 

  진남관은 그후 6.25 등으로 도괴 직전에 있는 진남관 보수가 무엇보다도

시급한 실정에 있어 1억 여원을 들여 보수하였다고 합니다  

 

진남관은 1953년에 준국보 480호로 1959년에는 보물 324호로

지정됨에 따라 본격적으로 보수에 착수하게 되었으며,

1973년 단청을 하고 1978년에 42천만원을 투입하여

진입도로를 개설하였다고 합니다

 

 

진남관은 건평 240평으로 정면 15, 측면 5칸으로 길이 75m, 높이 14m,

둘레 2.4m의 기둥 68개가 거대하고 웅장한 모양을 자랑하며

우리나라 최대의 단층 목조건물이라고 합니다

 

 

  진남관의 건물은 조선초기 객사양식으로서 보기드문 건물인데

공포는 기둥위에만 배치하고 사이 공간에는 화반을 바쳤는데

이러한 구성의 건축은 주심포 내지는 익공집 계통으로

주로 사용하는 방식이라고 합니다.

 

 

여수 진남관은 1598(선조 31) 전라좌수영 객사로 건립한 건물로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수군 중심기지로서의 역사성과

1718년 전라좌수사 이제면이 중창한 당시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으며, 건물규모가 정면 15, 측면 5, 건물면적 240평으로

현존하는 지방관아 건물로서는 최대 규모라고 합니다.

 

  진남관의 평면은 68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었는데 기둥은 민흘림 수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1963121일 보물 제324호로 지정되었다가

2001417일 국보 제304호로 승격 지정되었습니다

 

 

진남관 정면에 있는 망해루는 일제강점기 때에 철거된 것을

19914월에 재 복원한 2층 누각입니다   

 

진남관으로 들어가는 삼문인데 현판이 통제문이라고

씌여져 있어서 출입을 통제하는 문인줄 알았습니다

 

석인상은 수진남관(국보 제304) 뜰 안에 서 있는 것으로, 돌로 만든 사람의

모습으로 여수는 임진왜란 때 해전의 격전지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전라좌수영으로 있던 이순신 장군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데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드느라

한창일 때 왜구의 공격이 심하자 이를 막기 위해 7개의 석인(돌사람)

만들어 사람처럼 세워 놓았는데, 이로써 적의 눈을 속이어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되었다고 합니다

 

원래의 7기 중에서 지금은 이것 하나만 남아있으며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손은 팔짱을 꼈으며 그 위로 도포자락이 늘어져 있는 모습으로,

시선은 유유히 적을 바라 다 보는 듯합니다

 

 

건물이 있는 자리는 충무공 이순신이 전라좌수영의 본영으로 사용하던

곳인데 1599(선조 32)에 삼도 수군통제사 겸 전라 좌수사로 부임한

이시언이 전라좌수영 건물로 75칸의 거대한 객사를 지어

수군의 중심기지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진남관은 1598년 선조 31년에 전라좌수영 객사로 건립하여 진해루라

하였는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이순신과 조선 수군들이

연승을 이끌어낸 훈련터로 수군 중심기지로서의 역할을 한 곳으로

역사적인 의미와 문화적 가치가 큰 곳이라고 합니다.

 

 

   진남관은 현재 국보 304호 지정되어 있는데, 건물규모가 정면 15,

측면 5, 건물면적 240평으로 진남관에 들어서면 벽면은 없고

무려 689개의 기둥만이 지붕을 받치고 있을 뿐입니다.

 

 

이는 공간의 효율성을 살리고, 간결하면서도 건실한 부재를 사용하여

건물의 웅장함을 더해주고 있으며 18세기 초에 건립된 건물이지만

당시의 역사적 의의을 떠나서도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건물로 평가 되기도 하는 건물입니다

  

진남관 입구 오른쪽에는 임진왜란 당시의 유물과 이순신장군이

전라좌수영으로 재직하면서 사용하던 각종 유물들을

전시해 둔 유물전시관이 있습니다.

 

여수 진남관 임란 유물 전시관을 알리는 안내판이 언덕바지에

위치한 진남관에 걸맞게 잘 세워져 잇습니다  

 

여수 진남관 임란 유물 전시관 입구 입니다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휴관이라고 합니다

알면서도 혹시나 해서 한 번 들려 보았습니다

 

여수 진남관 임란 유물 전시관은 진남관 입구에 있으면서도

공간을 잘 활용하여 미관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적절한 위치에  아름답게 잘 꾸며져 있습니다 

 

여수 진남관 앞에는 중앙동 인민대회 장소라는 이색적인 간판이

세워져 있어서 주민들에게 물어 보았더니 여수시민들

인민대회를 열었다고 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인미대회는 반군과 좌익이 1948년 10월 20일 중앙동 광장에서

1,000여명의 시미들이참여하여 인민대회를 열었다고 하는데

인민대회에서 3.8선이 무너졌다, 제주 출병을 거부한다.

 

동포가 동포를 죽일 수 없다고 선전을 한 다음 인미대회를 결의하고

반군대표와 지방 좌익의 축사에 이어 결정서를 채택하고

시가행진을 시작하였다고 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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