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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문화재답사

의성 대곡사를 찾아서

by 송강 (松岡) 최 재 모 2012. 4. 7.

 

의성 대곡사를 찾아서

 

대곡사는

경북 의성군

다인면 봉정리 비봉산

동쪽 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 말 원나라와 고려에서 불법을

크게 폈다고 알려진 인도 출신의 승려

지공선사와 공민왕의 왕사를 지낸 고승 나옹

선사가 주도하여 고려 공민왕 때 창건한 사찰로

대국사라고 불렀으나 임진애란과 정유왜란 때 전소

하여 조선 선조 38년에 대전선사가 중건을 하면서

대곡사라고 이름을 바꾸었다고 하는데 대곡사는 우리

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인도의 승려와 우리나라의

승려가 힘을 합쳐서 세운 절이라고 하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애송되고 있는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라는

시를 지은 나옹선사와 관련된 사찰이라서 정감이

더 가는 사찰이며 점판암 13개로 된 청석탑과

대웅전 천정에는 반야용선이 달려 있는데

악착보살은 없어졌지만 작은 종은

아직까지 4개가 남아 있습니다

=== 대곡사. 다층석탑 ===

 

 

대곡사에 들어서면 탑신이 없는 다층석탑 청석탑을 중심으로

전방에 누각형식의 범종각이 있고, 좌측에 요사체, 우측에

명부전이 마주보고 있으며, 뒤쪽에 대웅전이 있는

형의 가람배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대곡사에는 1605년에 세운 대웅전과, 1623년에 세운 향적전, 1650년에 세운

범종루, 1656년에 세운 명부전이 있으며 아홉 개의 암자 중에 1647년에

세운 적조암 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고 합니다.

 

 

창건 당시에는 대국사(大國寺)라 하였는데, 1687(숙종 13)

태전(太顚)이 중건하면서 이곳 태행봉에 올라가서 주위를

둘러보았더니 100리나 되는 긴 계곡이 보인다 해서

대곡사로 절 이름을 바꿨다고 합니다.

 

 

대곡사는 다층 청석탑도 12세기 이전의 양식을 지니고 있으므로

절의 창건은 통일신라 말 고려초 무렵으로 지공·혜근 두스님은

14세기에 대곡사를 중창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대곡사는 고려시대에는 비봉산 일대에 본원을 비롯한 아홉 개의

암자를 지어 불교를 융성하게 하였으며 또한 호국불교

정신으로 많은 불제자를 배출한 대찰이었다고 합니다   

 

대곡사 대웅전은 고려 공민왕 17(1396)에 처음 건립한 후 조선 선조

31(1598)정유제란 때 대부분 소실되어 선조 38년에 탄우대사와

숙종 13(1687)태전선사가 중창을 하였다고 합니다

 

 

  대곡사 대웅전은 앞면 3, 옆면 2칸 규모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1982년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160호로 지정 되었습니다

 

대곡사 대웅전은 자연석을 써서 막돌쌓기로 기단을 세운 뒤 동향으로

건물을 세웠으며 기둥 위에 평방을 돌리고 기둥 위와 그 중간에도

각각 공포를 배치한 다포계 양식의 전각입니다.

 

 

대곡사 대웅전의 내부는 대들보 밑까지 초각으로 연결하였으며

내부의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꾸몄고 구조 수법이 비교적 건실한

편으로 전체적으로 조선 중기 건축 양식을 띠고 있습니다 

 

 대곡사 대웅전에는 금동석가여래삼존상이 주불로 봉안

되어 있고, 그 좌우로 소조로 된 소형 13위의

여래좌상이 놓여 있습니다.

 

 

 이 소형 여래좌상은 본래 53불이었는데 1850년 무렵

정인조라는 주지가 53불전을 헐고 그 땅을 지방민

에게 매각하였다고 전합니다 

 

 이 때 53불이 방치되어 산 속으로 흩어졌는데, 일제강점기에 최인찬

주지가 주석하고 있을 때 한 여신도에 의해 발견되어 다시

모셔져 영험을 발휘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몇 위씩 찾았으나 결국 지금은 13위만 남았다고 하며 13

가운데 중앙에 모셔진 불상은 개금하였다고 하며 이 13위의 불상은

조성 양식으로 보아 조선 중기에 봉안된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이 사찰은 고려 공민왕 17(1368) 왕사인 지공선사와, 나옹 선사가

원나라에서 수도를 할 때 영남 예천 땅 자징산 남쪽 기슭에 절을

창건하여 불교를 포교하면 대성한다는 계시를 받고 귀국하여

 

 이런 사실을 국왕께 고하였는데 국왕은 이 두 국사의 도력이 높은

것을 알고 나라의 군병 들에게 명하여 두 선사로 하여금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게 하고 이름을 대국사라 불렀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이곳에 불교를 공부하는 승려들이 모여들어 수도를

하였으며, 산내에는 현재 남아있는 적조암을 비롯하여

아홉 개의 암자를 지었다고 합니다.

 

 

대웅전 천정에는 반야용선이 달려 있는데

악착보살은 없어졌지만 작은 종은

아직까지 4개가 남아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본원과 암자의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니, 원우대사는

1605(선조 38)에 소실된 사찰을 중창하여 선객들을

맞이하였다고 하며 이후 1687(숙종 13)

태전대사가 중건하였다고 합니다

 

 

이 다층석탑은 탑신이 점판암으로 만든 고려 초기의 청석 탑으로,

대곡사 다층석탑'이라고 하며 상륜부는 없어졌으나 화강암으로

된 기단부와 점판암으로 된 탑신부는 약간의 손상을

입은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이 다층석탑은 기단부 지대석은 사각의 돌로 되어 있고 그 위에

함께 기단부를 형성하는 하대석이나 중대석·연화대좌·

상대석이 차례로 놓여져 있습니다.

 

 

   탑신부는 현재 12층이 남아 있는데 각층은 탑신석은 없고

옥개석만 놓여 있는데 각층의 옥개석이 위로 갈수록

일정한 비율로 축소되어 있는데  

 

6층과 7층의 체감비율이 급격히 줄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사이에 있었던 한 층의 옥개석이 없어진듯 하여

 본래 13층을 이루었으리라 추정합니다

 

 

이 다층석탑은 보물 제27호 금산사의 육각다층 청석탑과 형태가 유사하며,

보물 제518호 해인사 원당암 다층석탑보다 조금 늦은 고려 초기에 만들어

졌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전체적으로 고려 초기 청석탑의 양식을

잘 보여 준다고 하며 현재 높이는 173입니다.

 

명부전은 저승의 유명계를 사찰 속으로 옮겨 놓은 전각으로

죽음과 저승을 느끼며 현세에 내가 할 바를

생각헤 보는 곳이라고 합니다

 

대곡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고시공부를 시작한 초기에

 잠시 다녀갔던 절이라고 하는데 죽기 얼마 전에

의성 어디를 가면 대곡사란 절이 있다고 하며,

그 때 생각이 난다고 한 곳 입니다 

 

 대곡사 명부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정과 위패가 있었다고

하는데 오늘따라 명부전 내부는 수리를 하는 중이라서

내부의 불적들이 모두 치워져 있었습니다

 

대곡사 명부전에 있던 노무현 전대통령의 영정과 위패가

있었던 사진인데 지금은 수리 중이라 볼 수 없습니다

 

대곡사 대웅전 뒷편에 있는 산신각입니다

 

산에는 신이 있고 이 신은 산 아래의 인간을 보살펴준다는

마음에서 산악숭배와 함께 산신을 모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대곡사 산신각에 있는 산신상과 산신탱화 입니다 

산신은 원래 불교와는 관계가 없는 우리 민족

고유의 토속신이라고 합니다

 

대곡사 산신각에 있는 산신상과 산신탱화

 산신각 안에는 호랑이와 노인의 모습으로 묘사를 한 산신상을

봉안하거나 탱화로 도상화한 그림을 모시기도 합니다  

 

대곡사 나한전의 외부 모습입니다

 

대곡사 나한전의 현판 입니다

 

나한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개달았다고 하여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 제자들입니다

 

나한전은 부처님의 제자인 나한들을 모신 전각으로 16나한,

500나한, 1,200나한등이 있다고 합니다

 

 대곡사는 고려 공민왕 17(1368)에 왕사인 지공선사와

나옹선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나 1960년 대곡사 탑밭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시대의 보살상을 볼 때 그 이전에

이미 창건되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고려 말의 이규보가 대곡사를 방문하고 지은 시문 제목에

대곡사라 되어 있어 13세기 초중반에 이미 절이 있었고,

이름이 대곡사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범종루는 맞배지붕에 앞면과 옆면 각 3칸의 규모인 2층 누각 건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에는 외부로

뻗쳐 나온 재료의 윗몸에 연꽃을 조각하여 조선 후기의

조각 수법을 보이고 있는 아름다운 건물입니다

 

 

범종루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 공포를 하나씩 놓은 반면 가운데 칸에는

공포를 배치하지 않은 점도 특이하며 이것은 아마도 대웅전의 조각

수법을 모방한 것으로 보여, 대웅전보다 시대가 약간 떨어지는

조선 후기의 건축물로 추정한다고 합니다

 

 

  범종루는 2층루각으로 종루를 받치고 있는 12개의 아름드리 기둥

아래초석은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그랭이 기법으로 조성된

루각이고 그 남쪽편에 새로 범종각을 건립하여

그 곳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범종루에는 본래 이 종각 안에 안치하였던 종은 예전에 예천 용문사로

가져갔다고 전하며, 지금은 근래에 새로 조성한 범종각에

범종과 목어·운판·법고가 걸려 있습니다

 

대곡사 범종각에 있는 범종 입니다

 

대곡사 범종각에 있는 법고 입니다

 

대곡사 범종각에 있는 목어 입니다

 

 

대곡사 범종각에 있는 운판입니다

 

 

대곡사 입구에 서 있는 석장승입니다

 

대곡사 일주문을 들어서면 우측에 특이하게 보이는 연화문이

양각된 석종형의 부도와 석장승, 하대석,

부재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대곡사가오래도록 유지될 수 있었던 연유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는데 1856년 정인조 화상이 사찰의 주지로 부임하여

53 불전, 16 나한전, 산신각, 요사채, 적조암 일부를 지방민에게

매각하였다고 하는데. 이로 인하여 화상은 부처님의 노여움을

입었기 때문인지 나병에 걸려 죽었다고 합니다.

 

 

그 후 최인찬 스님이 부임하여 27년간 봉직할 때에 정인조 화상이 팔고

53불전의 불상을 다인면 목재골 굴속에서 한 여신도가 발견하고

불자가 된 마음에 가슴이 아파 촛불을 켜고 3일간을 정성껏 불공을

드렸더니 결혼 20년 동안 잉태하지 못했던 몸에서 옥동자를

분만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연유에 의함인지 예부터 비봉산은 명산, 대곡사는 명찰임을

작자미상의 삭명가와 인근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에 보관하는

글에 지공대사가 수행하던 도량이므로, 입장을 금하여야 한다는

감결과 절 근처에 무덤을 만들지 말라는 기문 등의 글로 미루어,

주변에 사람들의 당시 생각과 인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

   대웅전과 범종각 사이에는 연꽃문이 양각되어 있는 석재,

부도 등을 모아 놓은 석조물 2점이 있습니다

 

명부전에 동국이상국집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예천현을 살펴보면

다인현의 남쪽 비봉산 에 대곡사가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소개된 이규보가 지은 17일에 대곡사에 들어가다 라는 시가

대곡사 범종루 누각 2층에 걸려있습니다.

 

石路高低平不平

돌 길이 높고 낮아 울퉁불통하니

閑騎果下彈鞭行

한가한 손이 과하마 타고 채찍을 늘어뜨리고 가네.

輕風靜掃煙光去

가벼운 바람은 고요히 연기 빛을 쓸어 가고,

落月時兼曉色明

넘어가는 달 때로는 새벽 빛을 겸하여 밝다.

 

短麓前頭看寺榜

짧은 산기슭 앞머리에서 절[]의 현판을 보고,

橫舟側畔問灘名

배를 옆 언덕에 가로 대고는 여울 이름을 묻는다.

孤村何處吹寒笛

외로운 마을 어디에서 쓸쓸히 피리를 부는가,

抱疾他鄕易惱情

타향에서 병들어 있는 사람의 심정은 괴로워지기 쉬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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