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수도암을 찾아서
직지사 말사인
청암사의 부속 암자로
불령산 정상 부근에 있으며
도선국사가 수도도량으로 이절을
창건하고 매우 기쁜 나머지 7일 동안
춤을 추었다고 하는 사찰로 조선 시대에
벽암각성이 중창했으며 동학농민운동 당시
암자의 일부가 소실된 것을 포응이 다시 이룩
했던 것을 6· 25전쟁 때 빨치산 소탕 작전으로
일부 건물을 제외하고 불타버렸던 것을 1960년
에는 대적광전· 약사전· 정각암· 요사채 등 4동의
건물에서 3, 4명의 승려가 수도하고 있었는데 조계
종 제11대 종정인 법전이 와서 크게 중수하여 20여
동이 넘는 큰 가람으로 변모했다고 하며 현존하는 건
물로는 대적광전· 약광전· 수도선원· 관음전· 나한전·
노전· 정각· 서전· 낙가전이 있으며 유물로는 도선이
조성했다는 약광전의 석불좌상(보물 296), 수도암의
절터가 마치 옥녀가 베를 짜는 모습의 명당터라하여
베틀의 기둥을 상징하는 뜻으로 두탑을 세웠다는
삼층석탑(보물 297) 2기,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307) 등과 함께 창건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기단과 초석이 있습니다
==== 김천 수도암 ====
수도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의 말사인 청암사의 부속 암자로
불령산 정상 부근에 있으며 859년(헌안왕 3) 도선국사가 수도 도량으로
이 절을 창건하고 기뻐서 7일 동안 춤을 추었다고 하는 절입니다
수도암은 조선 시대 1649년(인조 27)에 벽암각성이 중창했으며, 동학농민운동
당시 암자가 소실된 것을 1649년(광무 3) 포응이 다시 이룩했습니다.
수도암은 6·25때 빨치산 소탕 작전으로 일부 건물을 제외하고 불타버렸는데
1960년에는 대적광전·약사전·정각암·요사채 등 4동의 건물에서 3, 4명의
승려가 수도하고 있었는데, 조계종 제11대 종정인 법전이 와서 크게
중수하여 20여 동이 넘는 큰 가람으로 변모했다고 합니다
수도암은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적광전·약광전·수도선원·관음전·
나한전·노전·정각·서전·낙가전 등이 있습니다.
유물로는 약광전의 석불좌상(보물 296), 삼층석탑(보물 297) 2기, 석조비로자나불
좌상(보물 307) 등과 창건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기단과 초석이 있습니다
수도암에는 사물을 모셔 놓은 범종각은 따로 두지 않았고
수도암 이란 소박한 현판 밑에 달려 있는 금고 (?)
하나로 모두를 대신하는 가 봅니다
수도암 법당에서 대적광전과 양광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위에 있는
삼룡의 힘찬 모습인데 용틀임이 인상적입니다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경주시의 석굴암 불상보다 80cm 작으며 9세기에
거창군 가북면 북석리에서 제작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이 불상의 운반에 고심하고 있을 때 한 노승이 나타나 불상을 등에 업고
이 절까지 운반했는데, 절에 다 와서 칡덩굴에 걸려 넘어지자 산신령을 불러
크게 꾸짖고 칡덩굴을 모두 없애게 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도 이 절
근처에는 칡덩굴이 없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
청암사 수도암에 모셔진 높이 2.51m의 통일신라시대 석조불상으로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들어가 볼 수가 없어서 사진도 문화재청 사진자료를
인용햇습니다만 스님께서 잠시도 자리를 뜨시지 낳고 학업에 정진
중이시라 감히 들어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약광전 석불좌상은 도선이 조성한 것으로 전하며, 금오산 약사사, 직지사 삼성암에
있는 약사여래좌상과 함께 방광했다고 하여 삼 형제 불상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불령산 수도암 약광전에 모셔져 있는 높이 1.54m의
고려시대 석불좌상입니다
머리에 원통형의 관을 쓰고 있어서 보살상처럼 보이지만, 광배와 대좌가 있고
신체 각 부분의 표현으로 보아 여래상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데 얼굴은
마모가 심해 세부수법을 자세하게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머리 부분에 보관을 장식했던 흔적이 있는데 이는 약왕보살의 머리에
금속관을 설치했던 것으로서 흔치 않은 예입니다.
양 어깨에 걸쳐져 있는 옷의 주름은 도식적이고, 손모양은 두 손을 무릎 위에
나란히 모아 보주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도식적으로 처리된 옷주름과
형식적인 광배와 대좌의 표현등이 고려초기 작품으로 추정합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에는 연꽃무늬·덩쿨무늬·불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불상이 앉아있는 대좌는 4각형으로 윗부분에는 연꽃이 활짝
핀 모양을, 아랫부분에는 연꽃을 엎어 놓은 모양을 조각하였습니다.
이 석불좌상은 광배와 대좌를 갖추고 있는데, 단아한 얼굴에 머리에는
원통관을 쓰고 있으며 두 어깨는 좁아진 편이고 통견의 옷주름은
도식적이며 두 손은 법계정인을 취하면서 보주를 들고 있습니다
광배는 거신광으로 연화문, 당초문, 화염문 등을 새겼고, 대좌는 상대는 앙련을,
중대는 안상, 하대는 복련을 조각한 방형대좌를 보여주고 있는 특징으로
보아 고려 초기인 10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생각된다고 합니다.
삼층석탑은 이 절터가 마치 옥녀가 베를 짜는 모습의 명당 터라 하여
베틀의 기둥을 상징하는 뜻으로 두 탑을 세웠다고 합니다다.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쪽에 서 있는 쌍탑으로, 신라 헌안왕
3년(859)에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설이 전해오는데 앞 뜰이 좁아서
탑과 법당과의 거리가 가깝습니다.
동탑은 단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기둥을 얕게 새겼습니다
동탑의 탑신부에서는 1층 몸돌이 위가 좁고 밑이 넓은 독특한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각 면에는 4각형의 감실을 두고 있습니다
동탑은 감실 안에 여래좌상을 도드라지게 새겼으며 2·3층의
몸돌에는 각 모서리 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받침은 4단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서탑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으며 1층 몸돌에 비해
2층몸돌이 크게 줄었으나 3층 몸돌은 2층과 비슷합니다.
서탑은 1층 몸돌의 각 모서리에는 기둥만 새겨져 있고 그 사이에 여래좌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지붕돌은 동탑보다 얇고 넓으며 밑받침은 5단입니다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쪽에 서 있는 쌍탑은 통일신라 중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며
특이한 수법을 보여주고 있는데
동탑은 1층 몸돌의 위가 좁고 감실을 두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고
서탑은 지붕돌 밑의 간격과 지붕돌이 넓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쪽에 서 있는 쌍탑을 사이에 두고
불령산 수도암을
밝혀 주고 있는 석등이 서 있는데 자세히 보니화사석이 반쯤은 잘려져 나간 모양입니다
두 탑 사이에 석등 하나와 자연석에 가까운 돌기둥이 하나 서 있는데
돌기둥에는 창주도선국사(창主道詵國師)'라는 새김이 있습니다
수도암 대적광전 앞에서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를 보면 가야산이
보이는데 멀리 뒷 쪽으로 보이는 연꽃모양의 봉우리가
가야산이고 그 아래에 해인사가 있습니다.
지권인을 한 대적광전 비로자나불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따라 가다보면 가야산
꼭대기와 마주하는데 수도암에서는 그곳을 연화봉이라고 부르며
해인사 강원 학인들은 해마다 이른 봄 고려대장경 정대불사
(경전 목판을 머리에 이고 경내를 도는 법회)를 마치고
가야산에서 수도암이 있는 불령산까지 등산을 하는데
비구니 스님들의 수도처인 청암사에서 점심을 먹고 수도암을 참배한 뒤
다시 해인사로 돌아가는 하루 여정은 법회 준비에 지친 스님들을
위로하는 봄소풍을 실시한다고 합니다
수도암 나한전은 전국의 나한전 중에서도 으뜸 기도도량으로 통한다고 하는데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 중 한가지가 수도암 나한전의 신묘함을 더해 줍니다
먼 옛날 한 노파가 쌀을 지고 수도암을 향하고 있는데 수도암은 깊은 산중에
위치한 터라 오르는 길이 여간 힘든게 아닌데도 한 처사가 노파를 도와
쌀을 턱하니 어깨에 짊어지고 수도암에 올랐다고 합니다
법당을 향해 간단하게 합장을 마친 노파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옆을 돌아보자 처사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습니다.
노파는 이를 기이하게 여기다가 이윽고 나한전으로 향했는데,
나한전에 앉아있는 열여섯 나한 중 한분이
흐뭇하게 웃고 있는게 아닌가.
그가 바로 쌀을 절까지 옮겨다 준 처사임을 안 노파는 수도암 나한전의
신령스러움을 알게 되고 죽는 날까지 기도를 올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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