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청암사를 찾아서
불령산청암사는
한국불교 조계종 제8교구
직지사의 말사로 신라 헌안왕 때
도선국사가 창건하였으며 조선 숙종의
두 번째 부인인 인현왕후가 궁에서 쫓겨
났을 때 이곳에 기거한 일이 있어 인현왕후
복위 이후 조선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
으며 조선 말기까지 상궁들이 내려와 불공을
드리고 시주를 했으며 바위에는 최송설당이라
쓰인 글씨가 있는데 최송설당은 조선말의 상궁
으로 고종과 엄비사이에 태어난 영친왕 유모로
영친왕을 돌보았는데 그 공로로 하사받은 금품
으로써 대운 스님이 청암사를 두 차례에 걸쳐
보수할 때 대 시주를 한 최송설당은 김천출신
으로 김천중고등학교를 설립한 여류시인이며
청암사는 비구니 강원인 승가대학이 있으며
물이 맑아서 바위가 푸르게 보이기 때문에
청암사 라고 하였으며 대웅전 앞에는
다층석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 불령산 청암사 ===
청암사는 경상북도 김천시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불령산 북쪽 기슭인 증산면 평촌리에 있습니다
바위에는 최송설당 이라는 붉은 각자가 새겨져 있는데 최송설당은 조선말의
상궁으로 고종과 엄비 사이에서 태어난 영친왕의 유모였다고 합니다
일주문을 지나서 전나무 길을 걸어가다 보면 오른쪽에
'우비천' 이라고 쓰인 옹달샘이 있는데
우비천이란 말은 청암사가 소가 왼쪽으로 누워 있는 와우형상인데
이 샘이 바로 코 부분에 해당되어 우비천
혹은 코샘 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샘 옆에 붙여진 안내문에는 예로부터 이 샘에서 물이 나오면
청암사와 증산면 일대가 부자가 된다고 하며
또 이 물을 먹으면 부자가 된다는 전설 때문에 재물을 멀리하는
스님들은 이 샘 앞을 지날 때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기도 했다라고 쓰여있습니다
최송설당은 김천중고등학교를 설립하기도 했으며 여류시인
으로 1922년 ‘송설당집’3권을 펴냈습니다
불령산은 국가보호림으로 지정되었고 조선 말기까지 상궁들이
찾아와 불공을 드리고 시주를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보수를 끝낸 지 6년만인 1911년 9월 다시 원인 모를 화재가
일어나 극락전과 백련암을 제외한 청암사가 모두 불타자
대운스님은 1912년 봄에 청암사를 다시 세웠는데
그때의 모습이 지금 청암사라고 합니다
회당비각 옆의 비석 중에는 "상궁청신녀천씨정공심공덕비"라는 비는
조선시대 때 상궁이 청암사 불사를 일으킬 때의
대시주자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대운당비각은 청암사를 모두 보수하고
극락전을 새로 지으며
제2의 중흥기를 맞게 한 대운스님을 기리는
비석을 모셔둔 곳입니다
대운당비각의 귀부의 모습인데 거북의 모양이
비교적 오동통한 편입니다
회당 비각의 주인공은 조선시대 화엄학에 정통한
대강백 회암 정혜스님(1685~1741)으로
이 비의 비문은 영조 때 우의정을 지낸 귀록
조현명(1690~1752)이 지었다고 합니다
귀부의 조각은 뛰어난 편이 아니지만 해학적이고 왼쪽 큰 건물부터
천왕문, 대운당 비각, 회당비각이 있습니다
대운당비각 옆에는 비각은 없지만 화려한 장식을 한
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비석의 글씨가 예사롭지 않은 것 같습니다
청암사로 들어가는 관문인 천왕문이 회당비각과 대운당비각
옆에 대각으로 세워져 있습니다
청암사는 조계종 제8교구의 직지사 소속 말사로 직지사와 함께
김천을 대표하는 절이라고 합니다.
청암사는 신라 헌안왕 3년인 859년에 도선이 처음 설립한 것으로 오랫동안
연혁이 전해지지 않다가 조선 시대에 와서 역사속 등장하게 됩니다
청암사는 조선 숙종의 두 번째 부인인 인현왕후가 궁에서 쫓겨났을 때
이곳에 기거한 일이 있어 인현왕후 복위 이후 조선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고 합니다
청암사는 인조 25년과 정조 3년에 화재로 전소되었으나 재건되었다가
1897년에 폐사되었는데 1900년대 초에 극락전을 복원하면서
다시 문을 열었다고 합니다.
청암사는 1911년에 화재로 또다시 소실되어 이듬해 주지인 대운이 복구
했다고 하며 청암사라는 이름은 물이 맑아서 바위가 푸르게
보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청암사는 광무 1년(1897년) 대운스님이 8년에 걸쳐 청암사를 모두 보수하고
극락전을 새로 지으면서 제2의 중흥기를 맞았다고 합니다
불영산 청암사 일주문으로 물이 너무 맑아서 바위가
푸르게 보인다는 청암사 입니다
일주문의 불령산 청암사 편액은 근세의 명필 성당 김돈희(1871~1936)의
글씨이고 천왕문 오른쪽에는 회당, 대운당 2개의 비각과 청암사
사적비를 비롯한 여러 개의 비석들이 나란히 서있습니다
청암사는 계곡을 사이에 두고 두 구역으로 나누는데 계곡을 중심으로
북쪽의 낮은 곳에는 남향하여 양지바르게 자리 잡은 대웅전영역과
그 남쪽 언덕 위에는 동향한 극락전·보광전 영역입니다
대웅전 영역에는 지방 문화재로 지정된 대웅전(경북 문화재자료 제120호)과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다층석탑(경북 문화재자료 제121호)과
승가대학의 중심을 이루는 육화원이 있습니다
극락전영역에는 조선시대 사대부 가옥형태의 극락전과 인현왕후의 원당
이었던 보광전(경북 문화재 자료 제288호)이 있습니다
박한영 스님, 고붕 스님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 학승들의 강론처로
전통이 이어져 불교 강원으로 비구니들의 승가대학이 있습니다
비구니들의 승가대학은 청도 운문사, 공주 계룡산 동학사,
수원 봉녕사, 전남 화순 유마사 등 여러 곳이 있습니다
청암사는 계곡을 사이에 두고 두 구역으로 나누는데 계곡을 중심으로
대웅전 영역과 남쪽의 보광전 영역의 중심이 되는 곳에
범종각이 세워져 있습니다
청암사의 범종각 앞에는 비석 받침인듯한 귀부의 등 위에
무거운 짐을 잔뜩 실려 있는데 아마도 신도들의
갖은 업보를 대신 지고 갈려나 봅니다
순종을 낳은 명성황후와 엄비의 갈등 사이에서도 최상궁은
변함없이 영친왕을 돌보았는데
그 공로로 하사받은 금품을 시주하여 청암사를
다시 짓게 되었다고 합니다
숙종의 둘째 왕비인 인현왕후가 장희빈의 무고로 폐서인이
되었을 때 청암사 보광전에서 기도를 드렸고
그 인연으로 청암사는 왕실의 후원을 받았으며 조선 말기까지
상궁들이 청암사에서 신앙생활을 하였다고 합니다
청암사 범종각 안에 있는 사물 중의 법고를 받치고 있는
거북의 힘들어 하는 모습입니다
청암사 대웅전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20호로 지정되어 있고
대웅전 앞 다층석탑도 경북 문화재자료
제121호입니다
대웅전 앞에는 해태상인지 사자상인지 분명하지 않은 석상이
양쪽에서 대웅전을 지키고 있습니다
청암사의 대웅전은 청기와로 지붕을 덮었으며 주련이 사자상
뒷편 대웅전 기둥에 바로 적혀 있습니다.
4층으로 세워진 다층석탑의 상층 기단에는 활짝 핀 연꽃이
조각되어 있고 갑석의 탑신받침에는 복련의
작은 연꽃이 새겨져 있습니다
청암사 대운대사가 청암사 중건(1912년)시 성주땅 어느 논바닥에
있던 것을 옮겨 왔다고 전해지는 조선 후기의 탑입니다
4매의 지대석위에 2층 기단으로 되어있고 1층 옥신에는 4면에 좌불이
1구씩 양각되어 있으며 옥신 받침이 없어 다소 불안정하고
상륜부는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
오층탑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1개 층의 옥개석과 탑신을
수합하지 못하여 4층으로 만들어져서 다층석탑
이라고 하며 탑의 높이는 4.21m 입니다
대운스님이 청암사를 두 차례에 걸쳐 보수할 때 대 시주를 한
사람이 바로 최송설덩(1855~1939)인데
최송설당은 김천 출신으로 영친왕의 보모상궁 이었던 영친왕의
생모인 엄비와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많은 재산을 모았다고 합니다
대운스님은 최송설당을 통하여 궐내의 많은 궁녀들로 부터
많은 시주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짧은 기간에 큰 불사를 두 차례나
일으킬 수 있었다고 합니다
대웅전 영역에 있는 육화료 라는 건물은 새을(乙)자 형에 귀틀을 지닌
전각으로서 108평이나 되는 너른 방을 가진 승가대학의
중심을 이루는 건물입니다
육화란 깨달음을 구하고 깨끗한 행을 닦되, 서로 친절하고 경애하는
신(身), 구(口), 의(意), 戒(계), 견(見), 이(利) 등
여섯 가지 법으로서 화합하여
사자굴 안에서는 모두 사자가 되고, 전단나무 숲에서는 전단나무가
되어야 한다는 승가의 실천 내용이라고 합니다
육화란?
1. 신화공주(身和共住)- 남의 희생을 전제로 자기만 잘 살려고 하지 말아라
2. 구화무쟁(口和無諍)- 모든 다툼은 입에서 비롯되니 서로 말을 조심하라
3. 의화동사(意和同事)- 자기 주장만 내세우고 남의 주장을 무시하지 말라
4. 계화동수(戒和同修)- 만인은 평등하니 모든 계율을 잘 지켜라
5. 견화동해(見和同解)- 옳은 것을 그르다고 그른 것을 옳다고 왜곡하지 말라
6. 이화동균(利和同均)- 모든 이익은 공동체 구성원에게 골고루 나누어라
극락전 남쪽에 있는 보광전은 인현왕후가 조선
숙종15년(1689)에 장희빈의 무고로 폐위되자
원당으로 건립된 것으로 폐위된 인현왕후의
상궁들이 보시를 하여 지었다고 합니다.
이 사실은 후에 대들보에 적힌 26명의 상궁들 이름을
발견하게 됨으로 알려지게 되어
청암사에서는 지금도 이 26명의 상궁들에
대한 제를 올린다고 합니다
정면3칸, 측면2칸의 작은 건물로 보광전 안에는 42개의
손으로 중생들의 고통을 두루 만진다는
목조 42수관세음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 불상은 원래의
불상을 도둑맞은 뒤에 새로 모신 것이라고 합니다
보광전 앞에 있는 연화문 배례석은 청암사 주변의
쌍계사지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합니다
청암사는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였던 사찰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현재 사찰의 출입은 허용되지만
아직도 방문객은 경내를 제한적으로 둘러 볼 수 있으나 스님이
동행하며 일체의 사진 촬영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극락전은 대웅전에서 앞쪽으로 보이는 언덕 위에 보광전과 함께 있으며
사대부집 처럼 극락전으로 들어가는 솟을 대문이 있습니다
극락전이 있는 건물은 조선시대 숙종의 왕비였던 인현왕후가 무고를 당해
폐위된 뒤 복위를 기다리며 한 많은 세월을 보냈던 곳입니다
건물에도 궁궐 건축양식이 남아있는데 풍혈과 계좌난간등 사대부 가옥에서만
볼 수 있는 한옥구조로 인현왕후에 대한 배려로 지어진 건물을
후대에 극락전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종 9년(1905) 대운스님이 빨간 주머니를 얻는 꿈을 꾼 뒤 한양에 가니
어느 노보살이 대시주를 하며 자기가 죽은 뒤 3년간 염불해 주기를
원하였다고 하는데
이 돈으로 쇠락한 극락전을 중건하고 만일회를 결성하여 염불소리가
끊어지지 않게 하였다고 하는데 지금도 일반인들은 극락전 내부에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고 하며 독경소리만 들려왔습니다
인현왕후 민씨(1667년~1701년)는 조선의 왕 숙종의 계비로 성은 민, 휘호는 효경숙성장순원화의열정목인현왕후, 여양부원군 민유중과 은성부부인
송씨의 딸이며 민진후,민진원,민진영의 누이로 숙종의 정비 인경
왕후가 죽은 1년 뒤인 1681년 계비가 되었습니다
부덕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으나 희빈 장씨를 투기하여 영빈 김씨의 입궐을 주선
하기도 했고, 희빈 장씨를 불러다가 종아리를 치기도 했다고 하지만
인현왕후가 종아리를 친 것이 아니고, 희빈장씨(장옥정)스스로 나인을
혼낸 것을 제가 쳐서 벌을 받겠다고 제 종아리를 친것입니다
숙종의 초비 인경왕후가 죽은 후 1년 후에 숙종의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와 외가
친척인 송시열의 추천으로 중궁으로 간택 되는데 가례 초기부터 숙종의 애정을
받지 못하였으며 명성왕후 사후 숙종은 과거 명성왕후에 의해 출궁되었던
궁인 장씨(희빈 장씨)를 환궁시켜 후궁으로 삼고 총애하였습니다
인현왕후는 장희빈을 견제하고자 김수항의 종손녀인 영빈 김씨를 간택 후궁으로
추천하여 입궐시키기도 했지만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원자 정호 사태1688년 후궁 장씨(소위 장희빈)가 아들 균(후일의 경종)을 낳자 숙종은
이 왕자를 원자를 정하고자 했으나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들은
원자 정호를 뒤로 미룰 것을 주장했습니다
송시열 등은 송나라 철종의 고사를 예로 들기도 했다. 원자 정호 문제는 결국 기사
환국으로 이어져 1689년 서인들이 쫓겨나고 남인들이 집권하였으며 그녀 역시
폐서인되어 안국동 사가로 내쳐졌습니다
복위폐출된 지 6년이 지난 후인 1694년 4월 1일, 숙종이 남인들을 몰아내고 서인들을
기용하여 정권을 교체하였는데 이를 갑술환국이라고 하며 숙종은 폐인(민씨)를 신원
하는 자는 역률로 다스린다는 명을 내려 왕비를 교체할 마음이 없음을 선포했지만
4월 9일 숙종은 마음을 바꾸어 민씨를 서궁으로 이전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고
4월 12일 서궁으로 입거한 그녀에게 왕비 복위령이 내려졌습니다
동시에 왕비였던 장씨는 국모가 둘일 수 없다는 이유로 왕비의 아래 지위인
빈으로 강등되어 본래의 희빈의 작호를 돌려 받았습니다
이에 대해 서인이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는데 노론은 폐비 민씨의 복위를 주장
하였던 반면에 소론은 장씨의 왕후직을 그대로 둔 채 궐 밖 사가에 거주 중인 민씨가
궐 서궁에 입주하기만을 주장하였던 탓으로
숙종의 명이 번복되자 병조판서 서문중과 이조참판 박태상 등의 소론 거두들은 민씨가 먼저 왕비였고 더 오래 왕비의 자리에 있었지만 세자의 어미인 장씨가 더 귀하니 장씨가 강등되고 민씨가 복위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고 정원은 조정백관과 신중히 공론을 한 후에 결정지어질 때까지 명을 받들 수 없다는 거부의사를 표명했으며
뒤이어 우의정 윤지완, 공조판서 신익상, 한성부우윤 임상원, 병조참의 이유 등의
소론의 대표 인물들이 줄을 이어 사직상소를 올리는 등 강경한 거부 의사를 보여
갑술환국이 있기까지 합심하였던 노론과 소론이 강하게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17일, 영의정이자 소론 영수인 남구만이 '민씨의 복위는 이미 정해졌으니 이에 대해 거론하여 다투는 것은 아들이 어머니에 대해 논하고 신하가 임금에 대해 의논하는 것이니 천하의 도리에 맞지 않으며, 희빈의 강호는 죄가 있어서 폐출된 것이 아니라 민씨가 복위함에 있어 왕비가
둘이 있을 수 없으니 부득이한 것이다'고 선언하여 노론과 소론을 중재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민씨의 복위가 결정되었지만 노론과 소론의 사이엔 깊은 골이 생겼으며 노론은
장씨의 친정 오라비인 장희재에게 칼 끝을 돌려 남인과 함께 제거하려 하였지만 노론의
행위를 희빈 장씨와 왕세자(경종)을 제거하기 위한 단계임을 안 남구만과 소론의 강력한
제지로 남인 영수 민암 부자만을 죽일 수 있었을 뿐 장희재는 목숨을 유지하여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같은 해 6월 1일, 정식으로 왕비 책봉을 받았습니다.
경종실록에 따르면 민씨가 복위된 뒤 왕세자 윤(경종)이 민씨 아래로 입적되었다고 전하는데
이는 '서자로서 아비의 뒤를 잇는 자는 적모에게 입적한다'는 예를 따른 것으로 흔히 알려진 것처럼 숙종이 장씨에게서 아들을 빼앗아 민씨에게 줘버렸다는 것은 와전으로 경종은
기사환국 전 원자 명호를 받았을 때에도 당시 정궁이었던 민씨에게 입적되었습니다
원자에게 이미 진호하여 위로 적후에게 올렸으니 바로 중궁의 아들인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박한영(1870~1948)이 머물며 강론을 하는 등 불교 강원으로
맥이 이어졌으며 987년에 강주 지형스님이 승가대학을 설치하여
비구니의 수학 도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팔도문화재답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천 수도암을 찾아서 (0) | 2011.11.28 |
---|---|
노석리 마애불상군을 찾아서 (0) | 2011.11.27 |
봉산동 당간지주를 찾아서 (0) | 2011.11.21 |
거돈사지를 찾아서 (0) | 2011.11.19 |
흥법사지를 찾아서 (0) | 2011.11.1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