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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문화재답사

흥법사지를 찾아서

by 송강 (松岡) 최 재 모 2011. 11. 18.

 

흥법사지를 찾아서

 

 

흥법사지는

진공대사 충담이

입적 하자 진공대사

부도탑이 있는 원주영봉산

흥법사에 태조가 비문을 지어

진공대사탑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흥법사가 신라

때부터 있었던 사찰인데 흥법사의

폐사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된것으로 추

정된다고 하며 현재 절터주변은 모두

경작지로 변했고 삼층석탑, 진공대사

,진공대사탑 비,전 흥법사염거화상

탑이 있었으나 현재는 삼층석탑과 진

공대사탑비의 귀부 및 이수만 남아

있는데 일제강점기때 염거화상탑은

서울 탑골공원으로 옮겨지고 진공

대사탑과 진공대사탑비의 비신은

일본으로 반출된 것을 되찾아

지금은 3점 모두 국립중앙

박물관에 소장 되어

있습니다

 

 

  

흥법사는 신라때 창건된 후 조선중기에 폐사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절터에는 훼손이 심한 삼층석탑과 정교한 솜씨가 돋보이는

진공대사탑비의 귀부와 이수가 남아있습니다

 

 

 

흥법사지는 진공대사 충담이 입적 하자 진공대사 부도탑이 있는 원주영봉산

흥법사에 태조가 비문을 지어 진공대사탑비를 세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흥법사가 신라 때부터 있었던 것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흥법사의 폐사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임진왜란 때

사찰이 모두 소실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재 절터주변은 모두 경작지로 변했고 삼층석탑, 진공대사 탑,

진공대사 탑 비,전 흥법사 염거화상 탑이 있었으나

 

 

 

현재는 삼층석탑과 진공대사탑비의 귀부 및 이수만 남아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염거화상 탑은 서울 탑골공원으로 옮겨지고

 

 

 (흥법사에 있었던 염거화상 사리탑)

 

진공대사 탑과 진공대사 탑비의 비신은 일본으로 반출된 것을 되찾아

지금은 3점 모두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되어 있습니다

 

 

 (진공대사의 사리를 모셔놓은 탑과 석관)

 

고려사에는 937(태조 20) 당시 왕사였던 진공대사 충담이 입적하자

940년 진공대사(869~940)의 부도탑이 있는 원주 영봉산 흥법사에

태조가 비문을 지어 진공대사탑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흥법사지를 떠난 문화재는 전형적인 승탑의 모습을 처음 선보인 국보 (제104)

염거화상탑과 보물 제365호 진공대사탑과 석관이 있는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데 석관은 선사의 장례법으로 치러진

사실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합니다

 

 

 

원주에는 남한강을 따라 100여개의 절터가 흩어져 있는데

대부분은 민가가 들어서거나 밭으로 변했는데

 

 

 

터를 남겨둔 몇 안 되는 곳 3대 절터가 흥법사지, 법천사지, 거돈사지로

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는 고찰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삼층석탑과 진공대사탑, 진공대사탑비가 있었는데 1930년 무렵에

진공대사탑과 탑비의 비신은 서울로 옮겨져 현재는 삼층석탑과

진공대사탑비 중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습니다

 

 

 

흥법사지에는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는 보물 제463호인

진공대사탑비와 보물 제464호인 삼층석탑이 있는데

진공대사탑비는 당대를 대표하는 조각입니다

 

 

  

흥법사지 삼층석탑은 2중 기단으로 그 위로 기와집 모습의

탑신을 3층으로 쌓아올린 석탑으로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안상이 3개씩 새겨져 있는데 꽃모양처럼

솟아올라 있어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겨놓았으며 1층 몸돌에는

네모난 문비가 있고 문비 안에는 문고리 장식이 남아있습니다

  

 

 

옥개석은 경사가 가파르고 아래받침은 얇게 4단으로 되어 있고

지붕돌의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양쪽 가에서 들려있어

고려 전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 석탑은 높이가 3.69m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쌓은 석탑으로

상륜부는 노반과 복발이 남아 있고 나머지는 유실되었는데

보물 제464호로 지정된 3층석탑입니다

  

 

   

진공대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스승으로 모셨고 열반 후에는 태조가

직접 비문을 짓고 당 태종 이세민의 글씨를 집자해서 비석을 새긴

흥법사 진공대사탑비는 서예의 백미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단단하고 커다란 바위에 조각을 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고 꿈틀거리듯 살아있는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흥법사 진공대사 탑비의 비신은 없고 귀부와 이수만 있는데 이 탑비는

신라말 고려초에 활약한 고승 진공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으로

   

 

 

귀부와 이수만이 절터에 남아 있는데 조각의 귀부와 깊게 새긴

이수의 운룡이 섬세하면서도 화려합니다

 

 

 

귀부의 머리는 짧은 목 위에 붙어 있고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데 입의 윗입술이 약간 튀어나와 있습니다

   

 

 

불거진 두 눈과 눈썹은 일자형을 이루고 머리 위에는 별도의 돌로

제작된 뿔을 꽂았던 것으로 짐작되는 홈이 있습니다

  

 

 

목 줄기에는 두 줄의 비늘무늬가 있고 뱃가죽은 물결무늬로

등가죽은 두터운 테를 두르고 그 안에 육각형의 껍질무늬를

세 겹의 선으로 구획하였는데 그 안에는 만()자와

연화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등 가운데에 마련된 비석받침은 주위에 구름무늬를 새기고

옆면에는 안상을 배치하였습니다

   

 

 

이수는 구름무늬와 몸을 서린 용무늬를 매우 화려하고

입체적으로 조각하여 생기가 넘치며

 

 

 

흥법사 진공대사 탑비의 이수 앞면 가운데에는 진공대사

(眞空大師) 라는 전액이 새겨져 있습니다

  

 

 

  흥법사 진공대사 탑비의 귀부에는 뒷발가락이 5개가 두터우면서도

날카롭게 힘이 들어가 있습니다  

 

 

 

진공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오자 새로 나라를 연 태조 왕건이

대사를 왕사로 임명하고 이곳 흥법사를 중건해주었다고 하는데

이때부터 흥법사는 흥법선원이 되고 선수행을 닦기 위해

찾아오는 스님들이 수백명에 이르렀다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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