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사를 찾아서
율곡사는
해인사의 말사로
신라 진덕여왕 때 원효가
창건하였고 경순왕 때 감악조사가
중창을 하였으며 대웅전은 2003년 해체
과정에서 어칸 종도리 하부에서 강희십팔년
기미월일상량기(康熙十八年己未月日上樑記)의
묵서명기록이 나와 조선 숙종4년에 대대적으로
중수되었으며 팔작지붕에 다포식으로 건물안쪽
천장은 우물정자 모양의 우물천장으로 만들어
천장 속을 가리고 있으며 불단 위쪽은 지붕
모형의 닫집을 만들어 놓았는데 율곡사는
조선 중기에 대웅전을 다시 지을 때는
못을 하나도 쓰지 않고 지어서
목침절 이라고도 합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로 651년(진덕여왕5)
원효가 창건하였고 930년(경순왕4) 감악이 중창하였다고 합니다
율곡사에는 보물 제374호 대웅전과 보물 제1316호인 율곡사괘불탱화.
경남도유형문화재 제373호인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이 있습니다
현존하는 당우는 대웅전, 칠성각, 관심당, 요사채가 있는데
대웅전은 보물 제374호로 지정된 정면 3칸, 측면 2칸인
다포집 계통의 것으로 조선 중기의 건축물입니다
율곡사는 원효대사가 창건할 때 절 뒤의 새신바위에 올라가서
이 절터를 정했다고 하며 조선 중기에 대웅전을 다시 지을 때
못 하나 쓰지 않고 지어서 목침절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율곡사 대웅전은 2003년 해체과정에서 어칸 종도리 하부에서
“강희십팔년기미월일상량기(康熙十八年己未月日上樑記)”의
묵서명 기록이 나와, 조선 숙종 4년(1679)에 대대적으로
중수되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율곡사 대웅전은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팔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다포 양식의 건물입니다
율곡사 대웅전의 건물 안쪽 천장은 우물 정자 모양의 우물
천장으로 만들어 천장 속을 가리고 있고 불단 위쪽
으로 지붕 모형의 닫집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율곡사 대웅전에는 마루를 깔고 뒷벽 중앙에 불단을 만들었는데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불단위에는 화려한 닫집이 있습니다
대웅전 기단 앞에 고려시대의 유물로 추정되는
석조팔각불대좌가 남아 있습니다
율곡사는 밤나무가 많은 골짜기에서 유래된 사찰 이름으로
정수산에 밤이 많아 율곡사라 불렸다고 합니다
율곡사 대웅전 법당을 다시 지을때 어떤 나이 많은 목공이 찾아와 절을 짓겠다고
자청하여 주지스님이 일을 맡겼더니 그는 석달이 되도록 목침만 만들고 있어
상좌를 시켜 목침을 하나 숨겼다고 하는데 목침을 다 만든 목공이 목침을 세어보고
아무 말도 없이 주지스님에게 와서 공사를 중단하고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주지스님이 "왜 그러느냐?"고 말렸더니 "그동안 성스러운 법당을
짓기 위해 목침을 만들었는데 목침이 한 개가 부족합니다
내가 정성이 모자라서야 어떻게 절을 짓겠습니까?" 라고 했습니다
주지스님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숨겨둔 목침을 가져와서 사죄하였더니
목수는 비로써 마음을 돌리고 목침을 조립하기 시작했는데 못하나
사용하지 않고 짜 올리는 기술이 신기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이리하여 율곡사라기 보다 목침 절이란 이름으로 불러진 이야기는 이때부터
전설을 간직하게 되었다고 하며 요즘도 이 지방 사람들은“목침절.
뭉치미절〞이라 불러져 온다고 합니다
대웅전 단청에도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는데, 대웅전을 지은 후 단청을 하려고
기도 발원하고 있던 주지스님에게 하루는 남루한 환자가 찾아왔습니다
제가 법당의 단청을 도와드리고 싶은데 허락을 해주시겠습니까?“
라고 해서 주지스님이 승낙을 했더니
"제가 일을 하는 데 이레가 걸리는 데, 그 이레 동안 법당 안에 누가
들어오거나 들여다보지도 말아야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레 동안 화공이 나오지도 식사도 하지 않아 궁금했던 동자스님이
살금살금 법당 문으로 가서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아름다운 새 한마리가 붓을 입에 물고 날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있어 동자승이 감탄하고 말았습니다
인기척을 느낀 새는 새신바위로 날아가 흔적을 감추어버렸고 지금도
율곡사의 벽화는 미완성이라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율곡사 오른쪽 산봉우리 밑에 수 십 길이나 되는 암벽의 이름이 새신바위인데
단청을 하던 화공인 새가 날아가 그 바위에 앉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율곡사괘불탱화는 보물 1316호로 보살형의 한 인물을 단독으로
그린 독존탱으로 1684년(숙종 10)에 화원 법림과
숙련·자명 등이 조성하였다고 합니다
머리에는 백·청·황색의 테두리를 한 둥근 두광을 갖추었고,
보관을 쓰고 있으며 보관에는 길상좌로 합장하고 있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5불이 둘러싸고 있는
화려한 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얼굴은 둥그스럼하며 치켜뜬 듯한 눈과 긴 코, 작은 입,
큰 귀와 이목구비가 단정하고 목에는 삼도가 있습니다
크기는 가로 475㎝, 세로 827㎝이며, 단정하고 세련된 필선과
우아하고 균형잡힌 신체비례, 호화스러우면서도 안정감 있고
조화로운 색채, 다양하고 섬세한 문양 등 세부표현이 매우
뛰어난 작품이다. 보존상태도 양호하여 17세기 불화연구에
자료적 가치가 높다고 합니다
산청 율곡사 목조 아미타 삼존불 좌상은 가운데 본존인 아미타
여래상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관음보살상이 배치되고
오른쪽에는 대세지보살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삼존불의 크기는 1m 이상의 사람의 키만 한 불상으로서, 자세는
등을 세우고 고개를 약간 숙인 모습의 반가부좌상으로
전체적으로 균형감 있는 모습입니다
아미타여래상은 머리는 육계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으며 나발의 표현이
촘촘한 편이고.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양손은 따로 만들어 끼웠고
제1지와 제3지를 맞대고 있는데 그 사이에 작은 구슬을 쥐고 있으며
오른팔은 구부려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한 채 어깨부위까지 들어 올린
상태이고, 왼손은 반가부좌한 오른발 위에 얹고 있습니다
관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상은 자세·손 모양·얼굴·옷차림 등이
본존인 아미타여래상과 공통적인 특징을 보이는데 두 보살상은
장신구를 착용하지 않았으나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습니다.
관음보살상은 오른쪽 어깨에 반쯤 걸친 소위 반단형식이며, 등 쪽에는
왼쪽 어깨에서 넘어온 대의자락이 보이는데, 이러한 표현은
아미타여래상과 대세지보살상의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예로부터 산청 지역에는 하지가 지나도록 비가 오지 않아 모를
심지 못하면 율곡사 등의 사찰에서 괘불을 걸어 놓고 천수바라춤과 나비춤을 추며
부처에게 공양을 올리는 괘불기우제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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