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속사지 동,서 3층석탑을 찾아서
지리산옥녀봉
산청 운리 마을에 있는
단속사지는 절은 간 곳이 없고
동서 3층석탑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통일신라 후기 경덕왕 7년(748) 대나마
이준과 경덕왕 22년에 충신이 창건 하였다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이 절에는 최치원이 쓴
광제암문 글이 있으며 솔거가 그린 유마상과
신행선사 대감국사 진정대사의 비가 있었다고
하며 절에 온 신도들이 단속사 입구 광제암문
이라 세겨놓은 바위돌 앞에서 미투리를 갈아
신고 절을 한 바퀴 돌아 나오면 미투리가
닳아 떨어져 있었다는 이야기와 조석으로
쌀을 씻던 물이 10리밖 냇물까지 흘러
수많은 민초들의 불심을 짐작케 하는
단속사가 지금은 두기의 석탑 뿐 이
지만 절의 규모를 짐작케 하는
단속사지 쌍탑입니다
단속사지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쌍탑으로
동탑과 서탑은 크기와 모양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양탑 모두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올리고 있으며
탑신부는 몸돌과 옥개석을 각각 따로 만들었는데
몸돌에는 알맞은 크기의 우주를 새겼을 뿐 다른 장식은 없으며
옥개석은 비교적 엷은 편으로 5단의 받침이 있고
지붕면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흘러내리다가 네 귀의 끝에서
반전하였고 상륜부는 노반,복발, 앙화까지 남아있습니다
이 탑은 각 부분의 비례와 균형이 알맞아서 안정감이 있고
단정하고 우아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쌍탑은 전반적인 모습으로 보아 석탑 문화의 황금기인
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1967년 해체 보수할 때 서탑 첫층의 탑신
위에 원형사리공이 확인됐는데 유물은 없었다고 합니다
동,서 쌍탑 가람배치는 단석사 건물을 중심으로 한 통일신라
시기의 정통 가람배치 형식이라고 합니다
하층 기단은 모두 4매의 석재로 구성되었고 지대석과 중석은
한데붙여 만들었으며 동,서 탑이 모두 각면에 우주와
탱주가 2개씩 모각되어 있습니다
단속사지 동,서 3층 석탑은 탑동마을 단속사터에 동,서
3층석탑이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서 있습니다
상륜부는 노반. 복발. 앙화까지 남아 있는데 노반에는
부연이 있고 복발은 두 가닥의 띠를 둘렀고 앙화는 2단의
받침 위에 팔화를 양각 하였습니다
갑석은 두터우며 윗면에는 호형과 각형의 괴임이 선명하고,
탑신부는 몸돌과 옥개석이 서로 다른 돌로
각층 5단의 받침이 있습니다
명종 13년 1558년 음력 5월 58세의 나이로 지리산 유람에 나선
남명 조식은 단속사에서 시 한 수를 읊었다고 합니다
松下千年寺 人隨獨鶴尋
솔 아래 천년 옛절이 창연한데 사람이 한 마리 학을 따라 찾아드니
僧飢조朝冷 殿古野雲深
중은 굶어서 부엌이 싸늘하고 금당은 낡아 구름에 파묻혔네
燈點峰頭月 春聲水底砧
등불은 봉우리의 달을 밝혀주고 방아는 물밑의 망칫돌이 대신했네
佛殿香火死 惟見己灰心
부처 앞 향로에는 불도 꺼져 오직 재처럼 식은 마음을 보네.
단속사지에는 수령이 630년 넘은 정당매라는 매화나무가 있는데
정당매는 고려말 대사헌을 지낸 강회백선생이 청년시절
단속사에서 공부할 때 심었다고 합니다
[강회백선생의 시]
우연히 옛 산을 돌아와 찾아보니 한 그루 매화 향기 절에 가득하네
나무도 옛 주인을 능히 알아보고 은근히 눈 속에서 나를 향해 반기네
정당매라는 이름은 강회백선생이 정당문학 벼슬을 하였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하며 뒤편에 정당매 비각이 있습니다.
정당매비각 안에는 통정강선생수식정당매비 라는 비명이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단속사가 한창 번성할 때에는 수백명의 스님들이 공부를 하고
대웅전을 비롯한 전각들과 불탑등이 수 백기가 있는
큰 절이었다고 합니다
절에 사람이 너무 많이 찾아와서 스님들의 공부에 방해가 되어
"도인은 속세와 인연을 끊는다"는 뜻으로 원래의 절 이름
이었던 금계사를 단속사라고 고쳤다고 하는데
그 이후 부터는 찾아오는 사람이 없고 마침내
절이 폐사 되었다고 합니다
남명 조식 선생이 이곳을 찾아온 사명대사 유정 선사에게
바치는 증산인유정의 시가 돌에 새겨져 있습니다
남명 조식 선생의 시비
"贈山人惟政"
花落槽淵石 春心古寺臺.
別時勸記取 春子政堂梅.
꽃은 조연의 돌에 떨어지고
옛 단속사 축대엔 봄이 깊었구나.
이별하던 때 잘 기억 해 두게나.
정당매 푸른 열매 맺었을 때를
이 당간지주는 단속사지 동.서삼층석탑(보물 제72,73호) 남쪽에 있는데
당간지주는 사지 주변에 흩어져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84년도에
부재들을 모아 복원한 것입니다
서쪽의 당간지주는 완전하게 복원이 되었으나 동쪽의 당간지주는 부재가
정당매각의 문설주로 사용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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