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악산 덕주사를 찾아서
월악산 덕주사의
창건연대는 진평왕때로
처음에 월형산 월악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고 하는데
신라가 멸망한 후 경순왕의 장녀인
덕주공주가 불교에 입문을 하고 망국의
한을 달래면서 바위에 마애불을 조성한 후
덕주사라고 개칭을 하였다는 사찰입니다
덕주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미륵리
석불입상과 월악산 중턱에 있는 마애불에는
덕주공주가 오빠인 마의태자와 함께 망국의
한을 달래며 덕주사를 짓고 아버지인
경순왕을 그리워 했다는 전설이
담겨져 있습니다
월악산 덕주사에 관한 문헌상의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찾을 수 있는데, ‘덕주사는 월악산 밑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속설에 전하기를 덕주부인이 절을 창건했으므로 덕주사로
이름 지었다.’는 기록에 따라 10세기 중엽을
절의 창건연대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뒤의 연혁은 전하는 바가 없어 잘 알 수 없다고 하나
덕주사의 역사를 살피는데 있어서 상덕주사와
하덕주사의 존재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동지지의 충주 산수조에 의하면 동으로 45리에 있어
청풍 경계를 이룬다고 하였으며
상덕주사와 하덕주사가 있다고 하여 지금의
마애불이 있는 절터를 상덕주사라 하고
마애불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있는 지금의 덕주사를
예전에는 하덕주사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맷돌의 받침돌인것 같습니다만 실제로
사용했던 흔적이 역역합니다
대불정주비는 1988년 2월초에 한수면 송계리에서 덕주골까지
도로확장공사중 월광사지 입구인 송계리 답 147번지
논둑에서 발견되었고 월악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로 옮겨졌다가
현재는 하덕주사 경내로 옮겨 비각을 세웠습니다.
비석은 질이 떨어지는 화강암 자연석으로 세로 161cm, 가로 163cm의
방형을 이루는 자연석으로 모두 둥글고. 두께는 상단부는
30~40cm로 불규칙하며, 하단부는 28cm입니다.
특히 하단부 바닥면은 정으로 다듬은 흔적이 뚜렷하여
비의 좌대 석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문은 첫줄에만 한자로 대불정주라 새기고, 다음 줄부터는
범자문(梵字文)으로 새기었는데 모두 11행입니다.
비문은 각 행의 자수도 고르지 않고 범자로 새긴 부분은 글자의 크기도
일정하지 않으며 4행까지는 8자, 5~6행은 7자, 7~11행은
12~13자로 글자의 크기도 일정하지 않은 습니다.
글자 수는 모두 105자로 추정하고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며,
월광사와 관련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월광사는 원랑선사탑비(보물 제360호)가 있었던 곳으로
통일신라 시대의 명찰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재까지 알려진 범자문비는 조선금석총람에
4개가 소개되고 있으며 모두 대불정다라니당이라는
동일 제호들로 모두 현재 휴전선 북방에 있습니다.
광주의 십신사지 범자비가 이름대로 동국여지승람에도 범자비라고 하였으나
비신 상단부에만 범자의 옴(Om)자를 도안화하고 있을 뿐 비문은 모두
한자로 되어 있어 범자비라고 할 수 없는바 현재까지 남한에는
이 송계리의 대불정주비가 유일한 범자문비라고 합니다
덕주사 산신각은 하늘과 땅의 서기를 서로 잇는다는 월악산
영봉의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신성한 곳으로
우주의 생명력이 모여 새로운 세계를 탄생시키는
곳으로 믿어온 곳이라고 합니다
산신숭배는 단군신화에서 부터 시작하여 민중의 종교로
토착화된 뿌리깊은 민간 신앙이라고 합니다
불교가 이땅에 전파되어 대승적 차원으로 산신신앙을
하나의 정신으로 불교에 수용하여 체계적인 산신
신앙이 되어서 모든 사찰에 봉안된 산신과 산신의례에
잘 나타나 있다고 합니다
덕주사 산신각은 단기 4326년 영봉의 맥을 따라 자연스런
신품으로 조화를 이룬 터에 성일화상이 가로 180cm
세로 210cm의 화강암에 산신도를 양각해 봉안하니
월악산 영봉의 산신이 이 곳의 외호신으로 안주해
참배자의 영원을 섭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현 대웅보전은 옛 하덕주사가 수재에 위험이 있어 1996년
성일화상이 새로 절터를 마련하고 전면 5칸, 측면 3칸의
외5포, 내9포의 건물 양식으로 창건을 했다고 합니다
전각 안에는 법신, 보신, 화신의 삼존불이 모셔져 있는데
중앙이 법신불로 부처님의 진신이며
이 법신불은 자성으로 청정법계의 진여인 실상의 법을
시현하신 자성불이라고 합니다
오른 편의 부처님은 보신불로 과거 원력 수행의 한량없는
과보로 나타난 만덕이 원만한 불신이며
화신불 또는 응화신이라고도 하는 왼편의 부처님은 중생을 위해
갖가지 모습으로 변화해 구제하는 불신이라고 합니다
최근 1998년 청하 성일스님이 주석하면서 건물 오른쪽에
새 부지를 마련하여 대웅보전을 새로 건립하였습니다
2007년부터 현 주지스님이신 원경스님이 부임하셔서
도량을 일신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덕주사 법당을 중수할 때 1206년(희종 2)에 조성된
고려시대의 금고가 출토 되었다고 합니다.
이 곳 덕주사는 상덕주사와 하덕주사는 창건 이래 꾸준히 법등을
이어오다가 1950년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습니다
이후 1963년에 지암 권정철 스님이 지금의 덕주사를 중창했고
이어서 1970년에는 박해찬 스님이 법당을 중수하였는데
이후 1985년 성주스님이 절을 다시 중건하여
오늘의 모습이 되었다고 합니다
약사여래입상은 제천시 한수면 역리 덕상골의 전 정금사터라고
전해오던 곳에 위치하였는데, 충주댐 건설로 1983년 4월
현 위치로 이전하여 봉안되었다고 합니다
약사여래입상은 부분적으로 닳았을 뿐 비교적 완형에 속하며 특히
오랫동안 땅에 묻혀 있었으므로 하반신 의문 등이 완연한데
하단부에 약간의 파손이 있는 약사여래 입상 입니다
옷주름 등은 상태가 양호하며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낮고
작은 머리묶음이 있으며, 얼굴은 길쭉하지만 풍만합니다
양쪽 눈은 가늘고 긴 듯 하나 닳아서 구분하기 어렵고
양쪽 귀는 길게 늘어져 어깨에 닿았으며
옷은 왼쪽 어깨에만 형식적으로 표시하고 가슴 부분이
널찍하게 드러났으며 왼쪽편에 주름이 몰려 있습니다
오른손은 가슴에 들고 손바닥을 밖으로 드러내어 엄지에
새끼 손가락을 구부려 대고 있으며,
왼손은 수평으로 배 아래 부분까지 들어 약그릇을 받들고
있으므로 약사여래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몸통에 비해 머리가 크며 대좌는 별도로 만들어
양 발만을 윗면에 조각하고 위로 몸통을 얹고 있습니다
남근석으로 불리는 돌은 월악산의 험한 봉우리가 마치
여인이 머리를 풀고 누워 있는 형상과 같아서
그것과 연관시켜 조성한 것이라 합니다
덕주사가 자리한 월악산은 소백산과 속리산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월악산의 정상을 영봉이라고 칭하는 곳은
백두산과 월악산 2곳뿐 이라고 합니다
옛 사람들은 태양을 양라 하고 달을 음이라 했는데 이것을
사람에 비유하면 양을 남자. 음을 여자라 했으니
월악산은 뒤편 수산리 쪽에서 바라보면 누워있는 여자의 얼굴
모습을 닮은 형태라 월악산이라 칭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월악산이 풍수학적으로 음기가 왕성한 산이기에 옛 선조들은
월악산의 음의 지기를 누르고 음양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이곳에 남근석을 세웠다.고 합니다
덕주사 마애불의 전설
덕주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미륵리 석불입상과 월악산 중턱에 있는 마애불에는 덕주공주가 오빠인 마의태자와 함께 망국의 한을 달래며 덕주사를 짓고 아버지인 경순왕을 그리워 했다는 전설이 담겨져 있습니다
아버지인 경순왕이 왕건에게 나라를 넘기자 경주를 떠난 마의태자 일행은 망국의 한을 안고 신라의 국권회복을 위해병사를 양병하고자 금강산으로 길을 가던 중 문경군 마성면에 이르게 된다.
일행은 그곳 계곡 깊은 곳에 야영을 하고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그 날밤 왕자는 관음보살을 만나는 신기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관음보살은 왕자에게 말하기를
"이곳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서천에 이르는 큰 터가 있으니
그 곳에 절을 짓고 석불을 세우고
그 곳에서 북두칠성이 마주보이는 자리에 영봉을 골라 마애불을 이루면
억조창생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으리니 포덕함을 잊지 말라"
잠에서 깨어난 마의 태자는 꿈이 신기하기에 누이동생인 덕주공주를 불러
꿈의 얘기를 전하고 그 내용을 물었더니
놀랍게도 같은 시각에 공주 역시 그와 같은 현몽을 받았다.
두 남매는 맑은 계곡물에 손과 입을 씻고 서천을 향해 합장배례한 뒤
다음날 서쪽을 향해 고개를 넘으니 고개마루턱 큰 바위에
한 권의 황금빛 포경문이 놓여 있었다.
그 곳에서 일행은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는 곳에
파란 별빛을 받고 있는 최고봉이 보이는 장소를 택해 석불입상을 세우고
별빛을 받고 있는 최고봉 아래에 마애불을 조각하였다.
그리고는 8년이라는 세월을 이 곳에서 보내게 되었다.
공주는 만족하였으나 마의태자는 그러하지 못하였다.
태자는 공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초지를 굽히지 않고 한계산성을 향해 떠났고
마지막 혈육인 오빠와 헤어진 공주는 절에 몸 담고
아버지인 경순왕을 그리워하며 태자의 건승을 빌었다 한다.
미륵리 석불입상은 마의 태자의 상이요
덕주사 마애불은 덕주 공주의 상으로
두 남매가 마주보기 위해 마애불은 남향이고,
석불은 북쪽을 향하고 있다고 하며
이들은 일년에 한 번씩 서기를 하여 서로 만난다
마애불은 덕주공주가 세운 절이라고 전해지는 월악산 덕주사에서 1.5Km쯤
걸어 올라가면 높이가 15m쯤 되는 커다란 바위에 암각 된 마애불이 있으니
이 마애불이 바로 덕주공주와 마의태자 오누이가 조성한 것으로
천년의 세월 동안 한결같이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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