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조삼존불입상(배리삼존석불입상)
삼국시대의 석조삼존불입상이다. 보물63호이며 7세기초기에 조성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주변에 그냥 넘어져 있던 것을 조선시대인 1923년에 일으켜 세우고 토담으로 담장을 둘렀다.
그동안 보호각 없이 노천에 방치되어 있다가 보호각 건립을 위하여 1987년과 1988년 2차례에 걸쳐 주변을 발굴하고 보호각을 세웠으나 그 뒤 보호각으로 인한 빛의 차단으로 잔잔하던 미소가 사라지고 담장 때문에 통풍이 잘안되어 풍화가 가속된다는 지적이 많아 담장을 철거하였다.
보호각이 설치되기 전의 배리삼존불
우협시보살의 모습
(지금은 복원되었지만 아랫쪽 완전히 잘라진 모습이 보인다)
보호각이 없을 때 본존의 미소.
보호각내에 서 있는 배리삼존불상
삼국시대 만들어진 불상들은 대부분 얼굴에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통인을 취하고 있다.
풍만하고 네모난 얼굴에 아기 같은 모습, 천진스로운 미소, 신체를 다 가린 두꺼운 옷, 시무외인·여원인의 수인, 4등신대의 비율은 삼국시대 불상들의 특징들이다
백제의 미소라 일컫는 서산마애불과 태안마애불, 김유신장군의 전설이 있는 단석산 신선사의 미륵불, 선도산 아미타삼존불 등이 삼국시대 불상의 양식을 잘 갖추고 있다
삼존불은 흔히 관음보살(觀音菩薩)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양협시로 한 아미타삼존(阿彌陀三尊)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보관에 화불이나 정병(淨甁)의 표시가 없어 단정하기는 어렵다
미소가 두 볼로 터지는 본존불
본존불
본존불은 신체에 비해 얼굴이 큰 사등신(四等身)의 동자형(童子形)으로 신체는 굴곡없이 구체적으로 처리하였다.
양쪽 볼이 부풀어진 풍만한 사각형의 얼굴에 눈매와 입가를 한껏 둥글게 표현하여 방긋 미소를 지었고, 점(點)처럼 돋을 새김을 한 백호(白毫:부처님 미간에 난 힌털), 머리는 나발(螺髮 : 소라처럼 감겨 올라간 머리카락)이고 육계(상투)는 특이하게 이단으로 만들어져 있다.
풍만한 얼굴은 방형에 가깝고 눈은 부은 듯이 부풀어 있으며, 처진 눈매와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하다. 상체는 우람하게 표현하였으나 하체는 빈약하여 불균형을 이루며 수인은, 오른손을 펴서 위로 올린 '시무외인(施無畏印)'과 왼손을 펴서 내린 '시여원인(施汝願印)'을 하고 있는데, 두 수인을 '통인(通印)'이라고도 한다.
법의는 통견으로 입고 전면에‘U’자형 옷주름을 굵은 요철형으로 표현하였으며 다소 두꺼운 옷자락은 양쪽 어깨를 감싸고 있는 통견(通肩)으로 오른쪽 어깨에 가사 자락이 한 겹 더 걸쳐져 있다(편삼偏衫). 상체는 원만한 곡선의 어깨와 양쪽 손목으로 감겨 내려간 옷자락으로 우람하고 당당하다.
하체는 짧고 다리 선이 뚜렷하지 않아 빈약하게 보여 상하체 균형이 맞지 않다. 큰 발은 뒷꿈치를 들고 서 있는 것처럼 세우고 있는데 큰 몸집을 받치기에 적당한 크기와 긴장감이 느껴진다.
발등은 평평하며 발가락은 선을 그어 직선으로 나타내어 사실적인 부피감은 없다.
대좌는 자연석을 사용하고 있는데 주변 파면들로 보아 원래는 연화대좌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협시보살(협시불)
협시보살(脇侍菩薩)은 부처를 좌우에서 보좌하는 보살을 말한다.
보살(菩薩)이란 범어(梵語:산스크리트)로 '보디사트바(bodchi-sattva)'라 하는 데 '보디'는 깨달음을 '사트바'란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또는 마음을 뜻한다.
소리나는 대로 옮겨 보면 보리살타인데 이것을 줄여 보살(菩薩)이라고 부른다. 깨달음과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는 여래의 뜻을 받들어 위로는 도를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구제(上求菩堤下化衆生)하는 역활을 담당하고 있다.
보살의 좌우를 구분할 때는 본존을 중심으로 한다. 바라보는 사람을 중심으로 할 때는 향좌(向左), 향우(向右)라고도 한다.
우협시불
우협시보살은 다섯의 화불(化佛)을 조각한 원형 두광에 삼면두식(三面頭飾) 보관을 쓰고, 머리 양쪽에는 나비매듭진 관끈이 어깨까지 드리워져 있다. 두광의 화불은 부처님의 진리의 빛이 비치는 곳마다 부처님이 계시다는, 온 우주가 부처님 세상이라는 뜻이다.
짧은 목걸이와 발목까지 화려하고 무거운 목걸이가 길게 드리워지고 있다. 앳된 미소, 통통한 얼굴과 손, 팔 등은 역시 아이 같은 모습으로 다른 두 상에 비하여 세부표현이 매우 입체적이다.
눈썹은 적당한 곡선을 이루고 있고 눈은, 본존불이나 좌협시보살과는 달리 반개(半開)로 뜨고 있는데, 눈매는 직선에 가까우며 아래위가 곡선으로 나타나 있다.
코는 깨어져 없고 입매는 살짝 오므려 다물고 있다. 도톰한 뺨을 한 얼굴에 눈썹과 눈매,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가득하다.
각이 진 어깨는 야무지개 얼굴을 받치고 있고, 가사는 오른쪽 어깨를 걸치며 내려와 왼쪽 허리를 비스듬히 돌아 양쪽 팔을 감고 발목까지 내려와 있다. 그리고 허리를 두른 끈의 매듭이 발등까지 드리워져 있다.
목에는 구슬이 장식 된 세줄 목걸이를 하고 있다
두 줄 팔지(완천腕釧)를 낀 왼손은 연꽃봉오리를 쥐고 있으며 오른손은 발등 위까지 드리워 진 굵은 영락(瓔珞:구슬 목걸이)을 자연스럽게 잡고 있다.
발은 사실적으로 나타내었는데, 발가락 끝에 팽팽한 힘이 들어가 있다. 발목까지 드리워진 굵은 영락을 받치기에 적당한 힘을 나타내었다.
인체 표현은 본존불과 좌협시보살과 달리 사실적인 몸매를 하고 있다. 좁아진 어깨와 허리선이 분명히 드러나고 하체는 길고 왼쪽 무릅을 굽혀 삼곡자세(三曲姿勢)를 취하고 있다.
앙련과 복련이 맞붙은 연화대좌는 불상과 함께 한 개의 돌로 만들어져 있다.
좌협시보살
좌협시보살은 전체적으로 단순하고 소박하여 좌협시의 복잡하고 화려한 보살상과 대조적이다.
무늬가 없는 원형 두광에 삼면두식(三面頭飾) 보관을 쓰고 머리 양쪽에는 관끈이 어깨까지 드리워져 있다. 눈은 본존불처럼 지그시 감은 듯 두툼하고 입술선은 직선으로 나타나있어 본존불과 같은 환한 미소는 볼 수가 없다. 볼은 과장됨이 없는 사실적인 양감으로 나타내었다.
어깨는 당당하면서도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자세는 바로 선 듯 하나 자세히 보면 왼쪽 무릎을 살짝 굽히고 있는 삼굴자세 (三屈姿勢)를 취하고 있다.
양쪽 어깨를 덮고 몸으로 흘러 내리는 U자형의 옷주름과 발의 모양은 본존불과 같은 양식이며, 상체에 비해 짧은 하체는 다리선이 분명하지 않아 빈약하게 보인다.
. 왼손은 허리춤으로 내려 정병(淨甁)을 다섯 손가락으로 감싸 들었고, 오른손은 위로 들어 엄지와 중지를 꼬부려 맞대고 있는 설법인(說法印)을 취하고 있다.
손가락을 맞대고 있는 것은 수(數)를 헤아리고 있는 모습이다. 인도에서는 수를 헤아릴 때 손가락을 접지 않고 손가락 끝을 맞대면서 헤아린다고 한다. 물건을 들어 약속하는 것을 계인(契印)이라 하고 손으로 약속하는 것은 수인(手印)이라 한다.
정병을 들어 구원을 약속하고 손가락을 하나하나 짚으면서 구체적인 구원의 길과 방법을 일러주시는 보살은 사랑의 화신이다.
코를 떼어 갈아먹으면 아들을 얻는다는 믿음 때문에 남산에 있는 불상의 코는 떨어지고 없는 불상이 대부분이다. 코는 남성을 상징하는데 사람의 코가 아니라 부처님의 코이니 더욱 영험이 있다고 믿었던 그릇된 기자신앙(祈子信仰)으로 불상은 자연스럽게 훼손이 되어버렸다. 코는 얼굴에 입체감을 주고 심정적으로는 자존심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일설에는 조선시대에 훼불(毁佛)을 할 목적으로 소문을 폈다는 설도 있다.
삼존불을 조성할때는 일반적으로 좌우협시보살의 모습을 거의 동일하게 조성하는것이 일반적인데 배리삼존불에서는 좌우보살은 높이가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모습이 많이 다르다.
좌협시보살의 양식은 본존과 흡사한 점이 많으나 우협시보살은, 두광의 화불·반개한 눈·장신구(목걸이, 영락, 완천)·사실적인 발·연화대 좌·옷의 무늬 새김이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원래 삼존불 형식이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참고:'신라사람들'의 배동입불상설명문>
삼불사와 선방사지
삼존불이 있는 보호각 뒷쪽의 선방사지에서 나온 초석들
배리삼존불의 보호각 건립을 위하여 1987년과 1988년 2차례에 걸쳐 발굴한 결과, 현재 입상이 위치한 佛壇아래에서 그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佛壇址의 흔적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북쪽으로 건물지와 북서쪽으로 30m 정도 거리를 두고 眼象이 새겨진 방형기단(남북 268㎝∙동서 114㎝∙높이 48㎝)이 노출되었는데, 이는 강당에 설치된 강단으로 추정된다.
이 방형유구 동쪽 끝부분에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며 또한 불상에서 동편으로 39m 정도 떨어진 곳에서도 방형기단이 노출되었다.
약 7×7m의 크기로 전술한 방형기단에 비해 훨씬 크고 탑상륜부로 추정되는 불상이 새겨진 석재 등이 출토되어 탑지로 추정하고 있다.
1926년에 이미 주변에서 옥개석 등이 확인되어 신라 제49대 憲康王5년(A.D.879)에 해당하는 신라 하대의 석탑지로 추정하고 있다.
金詩習의『梅月堂集』에는 禪房寺에 관한 詩가 전해지고 1926년 석조삼존불상 주변에서‘乾符六年禪房寺塔鍊治內記’라는 명문이 음각된 小石이 발견되어 이곳이 선방사로 추정된다
삼불사와 사층탑
삼불사 정원 둑에 놓여있는 초석
현존하고 있는 삼불사는 근간에 세워진 사찰이며 사층석탑이 한 기가 있다. 석탑부재는 배리삼존불상 옆에서 옮겨진 것으로 모두 3기의 각기 다른 부재로 조립하였는데 주지의 욕심인지 무지인지 옥개석을 한 개 더 올려 어디에도 없는 사층탑을 만들어 놓았다.
요사 쪽에는 상층기단갑석 1매가 있으며, 보호각 안쪽에는 초석 등의 석재가 있다
일제시대 이 곳에서 선방사탑지가 발견이 되었다
탑지는“길이 약9.0㎝, 너비 약 6.1㎝, 두께 약 3.5㎝ 크기의 장방형 돌”로 납석제품으로 추정된다.
탑지의 명문은 모두 60자로
“乾符六年己亥五月十五日禪房寺塔鍊治內記佛舍利二十三金一分惠重入銀十五分道如入節上和上忠心第二志萱大伯士釋林典道如唯乃志空
[건부 6년 기해(A.D.897) 5월 15일 선방사탑을 수리하고 이를 기록한다. 불사리 23과와 금 1분은 惠重이, 은 15분은 道如가 넣었다. 이때의 上和上은 忠心이고, 제이(和上)는 志萱이다. 大伯士는 釋林典과 道如이며 唯乃는 志空이다.]”로 판독되며, 탑지석과 함께 길이 3.1㎝, 너비 3.8㎝, 두께 1.2㎝의 銀鋌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찾아가는 길
경주IC를 빠져나와 세번째 신호등이 있는 오릉네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약 2km 쯤 가면 포석정을 지나 바로 선방곡 입구가 된다
삼불사 표지판을 보고 포장된 도로를 따라 약 100m 들어오면 현존 사찰인 三佛寺가 있다
이 곳이 선방골 제1사지이며 배리삼존불(선방골제1사지 삼존입불상)이 있는 곳이다.
※ 배리삼존불 바로 옆에 위치한 망월사에는 옥개받침에 연꽃이 새겨진 특이한 탑이 구각(九角) 연못 속에 세워져 있으므로 꼭 들러보기를 권한다
2층 옥개석과 3층 옥개석 층계받침 사방에 연화문이 새겨져 있는 특이한 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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