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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문화재답사

[스크랩] 김시습이 머물렀던 용장사지

by 송강 (松岡) 최 재 모 2011.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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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이 머물렀던 용장사지

 

 

 

 

 

용장계(계곡)

 

 

오릉사거리에서  서남산자락을 따라 언양쪽으로 약 13㎞가면 용장마을이 있고 마을 가운데로 흐르는 개천이 용장계곡이다.

용장계곡은 해발 468미터의 금오산과 494미터의 고위산 두 봉우리 사이로 흐르는 큰 계곡으로 남산에서 가장 크고 깊으며  기암괴석 등으로 제일 아름다운 계곡이다.

용장(茸長)계곡이란 이름은 지붕을 이을 때 쓰는 갈대와 비슷한 풀이 많이 자라고 있어 붙여졌다고 한다.  이곳에는 용장사라는 절이 조선시대까지도 있었던 곳이다.

 

용장마을에 차를 두고 계곡에 접어들면 왼쪽으로 법당골과 열반골, 절골(寺谷)이 차례로 있고, 열반골에는 관음사(觀音寺)라는 작은 암자가 있다.

김시습이 잠시 머물렀다는 은적골(隱寂谷)은 절골 위에 오른쪽 계곡이고, 탑상골(塔像谷)은 은적골 위에 반대쪽 계곡이다.

 

 

용장사지

 

 

 

 

 

 

용장사의 경역은 탑상곡 입구에서 가파른 능선을 따라 250m 정도 올라가면 넓고 편평한 곳에 기단갑석 1매와 석등지대석이 있어 이곳부터 사지의 범위로 포함할 수 있고, 이 동편 아래로는 옥개석 2매가 굴러 떨어져 있다.

석재가 있는 곳에서 오르다가 큰 바위 있는 곳으로 바로 올라가면 삼륜대좌석조여래좌상(三輪臺座石造如來坐像)과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이 있고, 왼쪽의 소로를 따라 30m 정도 들어가면 거대한 축대가 나타나는 곳이 바로 사지의 세 번째 축대로 가장 큰 규모의 건물지가 있던 곳이다.

강당지로 추정되는 이곳은 높이 3m∙길이 40m에 이르며, 이를 포함하여 총 9개소에 이르는 축대가 있고 사지 아래로 탑 부재들이 남아 있다

 

창건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경덕왕때 대혀(大賢)스님이 주석하였다는'三國遺事'의 현유가해화엄(賢瑜嫁海華嚴)으로 보아 감산사와 더불어 통일신라 초기에 창건된 법상종(法相宗)의 사찰로 추정된다고 한다.

대현스님은'성유식학논기(成唯識學論記)'를 저술하여 중국에까지 알려진 당대의 고승으로, 날마다 염불을 외우면서 높이 4m 가량의 돌미륵상의 둘레를 돌았더니, 석불도 스님을 따라 얼굴을 돌렸다고 하는데 이 불상이 현재 삼륜대좌불로 추정되고 있다.

 

용장사에는 신라 경덕왕 때의 고승 대현과 조선시대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에 얽힌 이야기가
전한다. 단종의 폐위 소식을 듣고 불가에 입문해 전국을 떠돌던 김시습은 경주의 금오산에서 오래 머물렀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금오신화』의 산실이 바로 이 용장사이며 그 이름 또한 금오산에서 취한 것이일뿐 아니라, 김시습의 호 매월당도 금오신화에 나오는 시에서 '매화의 달그림자가 창에 가득하다고 한데'에서 비롯하였다고 한다.

사지(寺址)에서는 신라, 고려, 조선에 걸친 각종 기와편과 토∙자기편 및 용장사(茸長寺)라는 글씨가 새겨진 명문와 등이 출토되었다.
이 사실들을 미루어 용장사가 언제 폐사되었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조선 초기까지는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륜대좌석 여래좌상(용장사지 석불좌상)

  

 

 

 

 

 

 

 

 

 

삼륜대좌불은 용장사지 건물지에서 동쪽으로 60m정도 오르면 사지를 바라보면서 서향으로 위치한다.

육면체의 자연석을 가공하여 하대석으로 삼고, 그 위에 3매의 원형 대좌석과 받침을 교대로 놓은 독특한 대좌를 만들었다.

대좌를 합친 높이는 4.56미터이며, 불상의 높이는 92센티미터이다

3층의 대좌 위에 앞면은 상현좌로, 뒷면은 3중 연화문이 장식되어 있다.
불상 얼굴은 없는데 현재 남아있는 불상의 목 뒤쪽에 원형의 정자국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인위적인 파손으로 생각된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얹고 왼손은 무릎 아래로 늘어 뜨리고 있어 항마촉지인을 좌우로 바꾸어 놓은 듯하다. 특히 불상의 법의(입고 있는 옷) 표현이 특징적인데 두 어깨를 감싸고 흘러내린 법의 안에는 사선의 내의와 가슴 앞에서 묶은 띠 매듭이 보인다.

또 왼쪽 어깨 앞에는 영총(纓總) 매듭이 무릎 아래까지 늘어뜨려져 있다. 뒷면 왼쪽 어깨 위에는 띠매듭을 연결한 방형의 고리가 있다. 이상과 같이 삼륜대좌불은 불상 법의 표현과 관련하여 귀중한 자료로 삼릉계 제2사지 석조여래좌상과 강한 유사성을 보인다.

이러한 형태의 법의를 편삼이라고 하는데  보물 제328호인 금동약사여래입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과 영주 영주리 석조여래입상, 분황사지 출토 석조여래좌상 등에서도 드물게 나타나고 있다.

 

 

 

원반을 쌓아놓은 듯한 삼단의 대좌 가운데 하대석은 직육면체(2,490×1,360×1,060㎜)의 자연석 윗면을 약간 가공하여 지름 1,173㎜가 되도록 만들었다. 그 위에 놓인 중대석 3개는 북모양을 하고 있으며, 각 중대석 위에는 둥글고 넓은 반석 세 개를 사이사이에 끼워 넣음으로써 통일신라시대 전 기간에 걸쳐 유례가 없는 독특한 불상대좌를 만들었다.

특히 맨 위의 반석은 앙련을 조각한 연화대좌로 상대석에 해당된다

 

 

 

일제시 복원을 한 뒤 남긴 명문

 

석불좌상의 서남쪽에 있는 바위 남면에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는데  명문은 가로 58㎝∙세로 142㎝ 크기의 방형 명문대를 깊이 2㎝로 낮게 판 후 세로로 4줄을 배열하였다.

여기에는‘삼층석탑은 1922년에 무너졌으며, 경주남산용장사석불좌상은 1923년 봄, 그 속에 든 보물을 훔치려던 일당들에 의해 도괴되었는데, 이듬해인 1924년 봄에 조선총독부에서 복원해 세웠다.라고 적혀 있다. 그 후 1932년에 2차 도괴가 있었으며, 같은 해 11월에 복원되었다.

 

당시 조사에 의하면 2층탑신 상부에 한 변이 152×131㎜인 방형사리공(方形舍利孔)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총독보의 1922년 조사 때에 이미 경주남산용장사석불좌상의 불두가 일실(逸失)된 점과 그 아래에 놓인 3층의 연화대좌 가운데 2층이 뒤집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경주남산용장사석불좌상의 경우 1923년 이전을 포함하여 일제강점기에는 전후 모두 3차례의 도괴 및 복원이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삼층석탑의 기단부가 붕괴될 위험에 처하여 2001년 해체복원하면서 기단면석 위치가 서로 바뀌었던 것을 바로 잡아 놓았다.

 

 

일제시대 복원 전의 삼륜대좌불상

 

.이 불상이 바로 삼국유사에 나오는 대현스님이 매일 돌았다는 미륵장륙상이 아닐까 추정된다.
대현은 신라 경덕왕 당시 용장사의 주지로서『성유식론학기』등의 저술로 당나라까지 이름을 떨친 고승이다.

경덕왕 12년 여름 가뭄이 심해 곡식이 다 말라죽게 되자 경덕왕은 스님을 불러 비를 청하게 하였다. 재를 올려야 하는데 공양드릴 물조차 없는 형편이었다. 궁성에 있는 우물의 물이 다 말라 심부름하는 이가 멀리 있는 우물을 찾아갔다는 얘기를 듣고 대현스님이 향을 피워들고 기도를 올리자 메마른 우물 속에서 갑자기 물길이 높이 솟아올랐다는 얘기가 전한다.

당시 용장사에는 돌로 만든 미륵보살장륙상이 있었는데 대현스님은 매일 염불을 하며 이 장륙상의 주위를 돌았다. 그러면 장륙상 역시 대현을 따라 얼굴을 돌렸다고 한다.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

 

 

 

 

 

 

 

경주남산용장사석불좌상의 북쪽은 기암과 괴석으로 솟아 높이가 10여 미터나 되는 남면한 바위 봉우리가 있으며, 이 바위에는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항마촉지인을 표시한 여래상이 비교적 섬세하게 돋을새김으로 조각되어 있다.
지상에서 높지 않은 암면에 조각된 여래상은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추었으며, 대좌의 연화문은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불상은 나발의 머리에 육계는 분명하지 않고 목에는 삼도가 있고 눈 가와 입술 양 끝에 미소가 감돈다

법의는 통견으로 매우 얇게 표현되어 있고 옷주름은 평행 밀집형의 옷주름이며 오른쪽 가슴 아래에서 안으로 접혀 들어간 옷주름은 미륵곡 제1사지 (전 보리사) 불상과 유사하다.

 

광배는 두광과 신광을 각각 두 줄의 음각선으로 표현하고 연화대좌의 앙련은 두 겹의 꽃잎을 연이어 소략하게 표현했다. 불상은 전체적인 비례로 보아 균형이 잡혀 있고 결가부좌한 넓은 무릎에서 안정감을 주는 자세이다.

여래좌상은 8세기 중엽의 사실주의 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

전체높이는 162㎝이며 불신의 높이 111㎝, 무릎너비 55㎝이다.

 

한편  불상의 두광 오른쪽에 ‘太平二年八月??阿(尉)?佛成奉爲時’라는 명문281)이 새겨져있는데 그 내용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분분한 의견이 있다.

太平(A.D.1021-1031)은 원나라 성종(成宗)의 연호로 고려 현종(顯宗)연간에 해당한다. 따라서 태평2년은 1022년으로 고려 현종 13년에 해당한다. 그래서 이 명문을 불상 조상기로 보는 견해와 석조여래조상과 별개로 구분해서 보는 견해가  각각 존재한다

 

 

 

용장사지 삼층석탑 

 

 

 

 

 

 

삼층석탑은 용장골 맨 꼭대기에 있으며 크기는 작지만 남산에서 가장 위엄을 갖춘 탑이다.
용장골에 들어서서 고개를 들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탑이다. 신라 탑은 보통 2중의 기단을 두는 형식인
데 이 탑은 이중기단을 따로 두지 않고 자연암반 위에 바로 상층기단을 세웠으니 바로 남산 전체를 기단부로 삼은 셈이다.

아래 멀리서 이 탑을 우러러 보면 마치 부처님 나라를 우러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하층기단부를 보면 자연석에 홈을 파고 장대석을 이용하여 2단의 기단받침을 만들었다. 상층기단의 면석은 한 면은 한 개의 돌로, 나머지 삼면은 2개의 판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면에 우주와 탱주가 한 개씩 조각되어 있다. 옥개받침 층급은 4단이고, 탱주는 1주이며 상륜부는 유실되었고 3층 지붕돌 위에 찰주공만 남아있다.
지붕은 급한 경사를 이루며 처마 끝에서 경쾌한 반전을 이루고 있다.

 

 

 

 

 

 

 

 

 

 

이 탑은 남산 전체를 기단부로 삼아 법신을 형상화한 듯한 느낌이다. 불교에서 수미산은 우주의 중심이 되는 산이다. 어쩌면 탑 아래 남산 전체가 수미산이 되어 이 탑 자체가 바로 부처님 세상을 상징하는 듯 보인다. 비록 5미터도 안 되는 작은 탑이지만 하늘로 연결되는 심오한 뜻을 담았으니 불교적 우주관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신라인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전체적으로 볼 때 하층기단을 자연암반으로 대신한 점과 세부 형식으로 보아 9세기 중엽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삼층석탑은 1924년 용장사지 삼륜대좌불과 같이 복원되었는데, 당시 2층탑신석 상부에 한 변 15.2×13.1㎝의 방형사리공이 있었으며, 2001년도에 다시 해체복원이 실시되면서 확인이 되었다

 

 

 

용장사지삼층석탑의 옛모습

 

삼층석탑이 위치한 능선에서 북쪽으로 약 20m 가량 떨어진 곳에 4매의 지대석과 그 위에 놓인 탑신석이 있어 이 곳에도 또 하나의 석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원래의 위치인 것으로 판단되나 지대석과 탑신석 모두 우주와 탱주 등의 조각이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다른 부재의 결실로 석탑양식의 파악에 어려움이 있다.

 

여기서 다시 50m 정도 아래로 내려가면 하층기단 갑석 1매가 확인되는데 크기로 보아 위의 탑재와는 별개인 것으로 판단된다.

 

 

 

 

설잠 김시습

 

 

기림사에 있는 매월당 김시습의 영정(부분)

 

 

김시습은 1455년에 있었던 세조에 의한 단종 폐위사건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공부를 하던 삼각산(三角山)중흥사(重興寺)를 떠나 승려가 되었다.

법명(法名)을 설잠(雪岑)으로 한 김시습은 관서지방(關西地方)과 관동지방(關東地方) 그리고 호남지방(湖南地方)을 유랑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영남지방을 돌다가 경주의 금오산 용장사에 정착하였다. 그의 나이 31세부터 37세에 이르는 7년의 기간이었다.
또한 설잠은 은적골의 은적암에 있다가 용장사로 옮겼다고도 하는데, 용장사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금오신화(?鰲神話)』를 집필하였다.

는 용장사에 있으면서도 영월에 귀양가 있는 단종을 못 잊어 뜨락에 핀 꽃을 보며 슬퍼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 꽃을 북향화(北向花)라 하였는데  꽃은 목련으로 추측된다

 

김시습은 성종 2년(1471)에 경주를 떠났으며, 1482년에 승복을 벗고 속세로 환속하였다가 다시 출가하였으며 59세를 일기로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1493년 세상을 떠났다.

 

후일 현종 11년(1670)에 경주부윤 민주면(閔周冕)이 경주 유림들과 의논하여 용장사에 매월당(梅月堂)을 세워 영정을 봉안하고 승도(僧徒)들을 모아 이를 수호하며 유림(儒林)과 함께 향사(享祀)를 받들었다.

 

 

 

 

용장계 연화대좌

 

 

 

 

 

연화대좌(蓮花臺座)는 계곡 정상의 높이 180㎝∙너비 430㎝ 규모의 자연바위 위에 복련으로 새겨진 것이다. 16엽의 복엽연화문이 조각되어 있고, 14㎝∼19㎝의 크기가 서로 다른 홈 3개가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데, 2개는 연화문 위에 마련되어 있어 후대에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연화대좌의 원형 지름 154㎝∙주좌턱 높이 4.5㎝이고 동쪽으로 10×8㎝ 정도의 구멍 9개가 123㎝의 길이로 늘어서 있다.

 

 

 

 

일제강점기의 자료에는 무릎너비 103㎝가 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여래좌상이 복부 이상 결실된 채 남아 있었으나 1960년대 순환도로 공사 때 없어졌다고 전한다.

 

 

 

 

용장계 지곡 제3사지 삼층석탑(삼층모전석탑)

 

 

 

 

 

용장골의 마지막 17절터로 불리는 지곡(池谷) 제3사지는 용장계(茸長溪) 상류 산정호수 동편의 평평한 대지상에 위치한다.

 

용장골에서 계곡 쪽으로 (고위산 입구ㅡ이정표에서내리막길) 고위산 쪽으로 오다보면 산속에 호수을 이루고 있다. 호수 쪽에서 조금가다보면 칠불암 이정표가보인다 이정표를 따라 가다보면 삼층석탑이나온다. 탑에 대한 안내표시판은 없다.

 

복원 전에는 이 곳에 민묘가 있었으며, 민묘 뒤로 3층 모전석탑(模塼石塔)이 제자리에서 무너져 있었다. 조선조 어느 양반가가 이 곳에 묘를 쓰면서 무너뜨린 것이리라

 

거의 모든 부재가 남아 있고 복원이 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國立慶州文化財硏究所)에서 주관하는 남산 보존•정비 사업 중 석탑복원계획에 따라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경주시와 문화재연구소에서 2002년 2월에 복원한 탑이다

 

 

 

 

 

이 석탑은 기단부가 4개의 벽돌형 석재로 이중기단으로 쌓아 올렸으며 탑의 옥개석은 층급받침이 4.3.2로 되어 있고, 3층 옥신은 특이하게도 따로 분리되지 않고 2,3층 옥개석과 각각 반씩 한 돌로 되어있다.

서로 크기가 다른 직육면체의 돌 8개로 단층 기단을 세운 후 그 위에 3층의 탑신과 옥개석을 올렸디

 

 

지붕돌(옥개석)의 위 아래에 층급받침을 새겼는데 1층은 5개, 2층은 4개, 3층은 3개이다.

위로 갈수록 층급받침이 커보이나 실제로는 층급받침의 크기가 같은데 이것은 층급받침의 길이에 따른 착시현상보인다.

 

3층 옥개석의 낙수면 상단에는 노반 받침이 있고, 상면에 윗변 10cm, 아랫변 5cm, 깊이 14cm의 찰주공(刹柱孔)이 있다.

옥개성의 네 모서리에는 위에서 아래로 반쯤 뚫린 풍탁공(風鐸孔)이 있으며, 크기는 지름 2cm, 깊이 6cm 정도이다.

  

탑의 전체적인 양식을 보아 9세기 이후의 모전석탑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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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륙상
높이가 1장(丈) 6척(尺)인 불상으로 부처의 등신상을 말한다. 부처님의 키가

16척이라는 데 근거를 두고 만든 것이다.
이것을 당척(唐尺:당나라의 자 규격, 1척은 30센티미터)으로 환산하면 4미터 80센티가 된다.
신라에는 황룡사에 금동으로 만든 장륙상이 있었다.

 

상현좌
결가부좌한 불상의 옷자락이 내려와 대좌를 덮고 있는 형식을 말한다.

인도의 간다라 불상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불상 표현이 중국화되는 과정에서 옷주름 표현이 강조되어 나타난 현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불상에 많이 나타나는데 특히 부여 군수리사지에서 출토된 납석제 석불좌상, 군위 삼존불 본존상 등에서 볼 수 있다.

 

항마촉지인


석가모니가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성도하는 순간 마귀가 방해하자 석가모니께서 오른손으로 땅 속의 지신을 가리켜 마귀를 물리쳤다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오른손 검지손가락을 곧게 펴서 땅을 가리키는 자세를 말한다.

항마촉지인은 석가모니의 깨달음을 의미하므로 오직 석가여래만이 맺을 수 있는 수인이다.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메모 : 좋은 자료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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