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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릉계 제9사지 상선암절터와 주변
제6사지에서 등산로를 따라 약 380m 가파른 길을 오르면 상선암(上禪庵)이라는 조그만 암자가 있다.
이 곳이 삼릉계 제9사지이다.
제7사지와 제8사지는 남아있는 문화재가 없고 절터의 흔적만 남아 있으므로, 대개 6사지 석조여래좌상을 보고는 바로 제9사지 상선암으로 오른다
이곳에는 근대에 지어진 법당과 요사채가 있고, 과거에 있었던 건물지들 위에 현존 건물이 축조되어 흔적을 알 수 없으나, 길가에는 장대석 1매가 있고 주변에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기와편들이 수습된다.
임필대(任必大)가 기록한 유동도록(遊東都錄)에는 ‘상선암에 올라서 보면 앞쪽에는 하선암이 수석사이에 있다.’고 하였다.
현재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아래쪽 제6사지가 하선암(下禪庵)일 가능성이 높다. 바로 아래 위치하며, 그 외의 사지는 능선으로 가려져 잘 보이지가 않기 때문이다.
상선암에서 등산로를 계속 150여m 오르면 5.2m 높이의 마애여래좌상이 있고, 서편으로 돌아가면 선각여래좌상이 있다. 또한 바로 위쪽 정상부 서편으로는 금송정지(金松亭址)와 바둑바위가, 동편으로는 상사바위가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경주시내가 한 눈에 들어와 자연경관이 수려하다.
선각보살입상
이 보살상은 상선암 요사채 바로 옆에 있다. 현재 상체와 발 부분이 결실되었는데, 보살상이 넘어지면서 파손된 것으로 보이지만 원래 세워졌던 위치는 알 수 없다.
보살상은 다리 위로 흘러내린 옷주름과 길게 드리워져 있는 띠, 영락장식 일부를 확인할 수 있는데 구슬모양의 영락장식이 달려있어 매우 화려하다.
현재 남아있는 부분의 크기가 높이 290㎝∙최대 너비 100㎝로, 파손 이전의 크기는 약 5-6m에 이르는 대형입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보살상의 맞은편에는 지름 15㎝∙깊이 10㎝의 석등 간주석을 꽂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구멍이 있다.
마애여래좌상(삼릉곡 마애석가여래좌상)
상선암 뒤쪽으로 약 150m 가량 떨어진 암벽에 남쪽을 향하여 높이 7m∙너비 5m의 광배형으로 생긴 암벽에 지방유형문화재 제158호이며 남산에 있는 좌불 중에서는 제일 큰 불상인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자연 암반을 둥글게 다듬어 광배로 삼고 그 내부에 여래좌상을 새겼는데, 여래좌상은 커다란 연꽃 위에 결가부좌하고 설법을 하는 자세로 읹아 있다
불상의 머리는 배광면에서 66.6센티미터나 튀어 나와 입체상에 가까울 정도로 사실적이며 몸체는 바위 면을 이용하여 부피 없는 선각으로 새겨 놓았지만 불상의 몸체는 빈약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바위 자체가 갖고 있는 양감(量感)이 둥근 머리와 충분한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머리는 곱슬머리가 아닌 소발에 육계는 나지막하고 얼굴은 살이 많아 방형에 가깝우며 눈과 눈썹, 코, 입은 세밀하게 조각하여 예리한 인상을 준다.
통견의 법의는 가슴 아래 깊게‘U’자형을 이루며 내려오고, 그 안에는 군의(裙衣)를 묶은 띠 매듭이 표현되었고 옷주름은 선각으로 구불구불하게 표현하였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서 엄지, 중지, 약지를 맞대고 설법인(設法印)을 취하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하여 결가부좌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대좌는 중대석이 생략된 채 앙련과 복련이 맞붙어 있고, 두 겹으로 된 앙련의 연판 내부는 보상화문으로 장식하였다.
얼굴 표정은 매우 숙련된 솜씨이나, 평판적인 신체 표현, 힘이 빠진 옷주름 선 등으로 보아 9세기 불상양식을 반영하는 巨佛像群에 속한다.
몸체를 머리와 같은 수법으로 조각하지 아니하고 바위 모양을 이용하여 반자연 반인공으로 표현한 신라인의 예술적인 안목이 놀랍기만 하다.
불상의 크기는 높이 521㎝∙무릎 너비 350㎝이다
이 불상을 찍은 사진은 경주 남산을 소개할 때 단골로 등장을 한다
마애선각여래좌상
삼릉계의 정상부 마애여래좌상에서 서쪽으로 약 8m 떨어진 지점, 즉 마애여래좌상과 같은 바위의 뒷면에 또 하나의 마애선각여래좌상이 있다.
앞에 예배할 공간이 전혀 없어 이 불상은 개울 건너 산 언덕이나, 정상부에서 선방곡으로 내려가는 길, 즉 선각마애여래입상으로 가는 길로 조금만 내려가면 있는 분묘에서 겨우 보인다.
그것도 석양 무렵 햇빛이 바위틈에 스칠 때 보이는 정도라 신비에 싸인 불상이다.
통견(通肩)의 법의로 감싼 체구는 건장한 편이며, 둥근 얼굴에 눈은 가늘고 길게 표현하였다.
오른손은 올려 설법인을, 왼손은 들어 가슴 앞에 올리고 있으며 원형의 두광과 신광을 갖추고 있으나, 암면 전체에 균열과 마모가 심해 세부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얼굴과 어깨부분만 선각하고 허리 아랫부분이 없어 마치 바위 속에서 여래상이 나타나는 듯한데 아마 미완성의 작품으로 보인다
아니면 미완성이라기 보다는 고도의 계산에서 나온 신라 불상의 독특한 표현방식일지도.......
이마가 좁고 눈썹과 눈 사이도 좁은 점 등 세부 표현은 앞서 본 마애여래좌상과 비슷해 신라 말기인 9세기나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대체로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 경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불상 높이 150㎝∙무릎너비 105㎝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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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의 머리에 툭 튀어나온 것이 뭐죠?
부처님은 원래 신체상으로 우리 인간과는 다른 특징이 있는데 이것이 작게는 32가지, 크게는 80가지가
있다. 즉 절대적인 신성한 존재이기이 평범한 중생들과는 다른 특수한 모습을 지녀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 존엄성의 표시로 생겨난 것이다.
보통 부처님의 머리 위에는 혹이나 살 같은 것이 튀어나와 있다. 이것을 육계라 하는데 지혜의 상징이다. 인도의 성인들이 긴 머리카락을 위로 올려묶었던 형태에서 유래한 것이다.
▶ 나발과 소발
부처님의 머리는 보통 오른쪽으로 말린 꼬불꼬불한 소라모양의 나선형으로 표현된다. 이것을 나발이라고 한다
원래 초기의 간다라 불상은 굵은 웨이브형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으나 마투라 불상에서는 소라 모양의
곱슬머리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이에 비해 민머리로 별다른 장식이 없는 것을 소발이라 하며 석불에서는 소발 표현도 많이 발견된다.
▶ 백호
부처님의 양 눈썹 사이에 오른쪽으로 말리면서 난 희고 부드러운 털을 말한다.
대승불교에서는 광명을 비춘다고 하여 부처뿐 아니라 여러 보살들도 백호를 갖추도록 규정하였다.
보통 작은 원형을 도드라지게 새기거나 따로 보석을 끼워넣기도 하였다. 드물게는 채색을 한 경우도 있다.
삼릉계 금송정터
이곳은 상선암 마애여래좌상 위쪽 정상부로, 기암곡으로 내려가는 등산로 상에 암반이 있는 곳이다.
북, 서, 동쪽이 암반으로 연결되어 있고, 남쪽은 트여 급경사를 이룬다.
건물지는 2.7×2.7m 크기의 단칸 구조로 추정되고, 서쪽의 남서 기둥은 암반에 25×15㎝ 크기의 홈을 파서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지 주변에 통일신라시대 와편들이 다수 산재되어 있고, 이형석재가 1점 있다.
신라 경덕왕(景德王)때 옥보고(玉寶高)란 사람이 지리산에 들어가 거문고를 배운지 오십년만에 스스로 신조(新調)를 지어 타자 현학(玄鶴)이 날아와서 춤을 추었으므로 현학금(玄鶴琴)또는 현금이라 부르며, 금송정(琴松亭)은 보고(寶高)가 노닐며 즐기던 곳이라고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금송정지와 상사암의 위치
<금송정관련문헌자료>
▶ 신동국여지승람 경주부고적(新增東國輿地勝覽 慶州府古蹟)
琴松亭在金鰲山頂玉寶高遊樂之處寶高新羅沙粲恭永之子景德王時人也入智異山雲上院學琴五十年自題新調三十曲彈之有玄鶴來 舞遂名玄鶴琴又云玄琴世傳寶高得仙道.
<금송정재김오산정옥보고유악지처보고신라사찬공영지자경덕왕시인야입지이산운상원학금오십년자제신조삼십곡탄지유현학래 무수명현학금우운현금세전보고득선도>
금송정은 금오산 마루턱에 있다. 옥보고가 노닐고 즐기던 곳이다. (옥)보고는 신라 사찬 공영의 아들인데 경덕왕때 사람이다. (그는)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가 거문고를 50년동안 배웠다. 스스로 새로운 곡조 30곡을 만들어서 타니 검은 학(玄鶴)이 날아와서 춤을 추었으므로 드디어 현학금(玄鶴琴) 또는 현금(玄琴)이라 이름 부른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는 (옥)보고는 신선의 도를 얻었다고 한다.
▶ 금송정 동도유적 27수 중. 성여신. 부사집 권1 琴松亭 東都遺跡二十七首中. 成汝信. 浮査集 卷一)
金鰲山頂松亭在聞昔高仙抱瑟遊彈盡新調玄鶴舞如今往事水東流
금오산정송정재문석고선포슬유탄진신조현학무여금왕사수동류
(右琴松亭, 景德王時有玉寶高者入智異山學琴五十年自題新調彈之有玄鶴來舞遂名玄鶴琴又云玄琴琴松亭寶高遊樂之處)
(우금송정 경덕왕시유옥보고자입지이산학금오십년자제신조탄지유현학래무수명현학금우운현금금송정보고유악지처)
금송정 금오산 꼭대기에 금송정 있는데 그 옛날 고선(高仙)이 거문고 타고 놀았다네. 신(곡)조 두드리자 현학이 날아와 덩실 춤을 추었다고 하나 이제는 모두 지나간 일, 동으로 물만 흘러가는구려.
(금송정에는 경덕왕 때 옥보고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지리산에 들어가 거문고를 배운지 오십 년만에 스스로 신조을 지어 타자 현학이 날아와서 춤을 추었으므로 혛학금(玄鶴琴) 또는 현금(玄琴)이라 이름 부른다. 금송정은 보고(寶高)가 노닐며 즐기던 곳이다.)
상사바위(상사임)
삼릉골 정상의 마애석가여래불좌상을 보면서 남산의 능선을 타고 오르면, 포석계곡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게 되는데 이곳에 상사바위이라는 영험한 바위가 있다.
상사암은 높이 13m, 길이 25m쯤 되는 주름이 많은 큰 바위이다. 이 험상궂은 바위더미는 아득한 옛날부터 상사병에 걸린 사람들의 병을 낫게 하고 아들 낳기를 바라는 부녀자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는 바위이다
바위 동쪽면 중앙에 가로 1.44m, 높이 56cm, 깊이 30.3cm 되는 감실과 제단이 마련되어 있고 주위에 돌무지도 확인된다
감실은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켠 촛불에 의하여 검게 그을려 있다.
상사암의 감실 아래에는 높이 80cm에 너비 35cm의 작은 석불입상이 있다. 머리는 없어졌고 두 손은 가슴에 모아 붙이고 있다. 아마도 남산에서 가장 작은 불상일 것이다.
이 민간 신앙터에 불상이 서 있는 것은 오랫동안 토속신앙과 불교가 밀착되어왔음을 알게 해준다.
바위 서쪽면에는 사람들이 남근석과 여근석으로 여기고 치성을 드린 자리가 있다.
이 상사바위에는 할아버지와 피리소녀에 담긴 애틋한 얘기가 담겨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예전에 주변의 마을에 혼자된 할아버지와 피리라는 이름의 소녀가 있었다.
피리는 할아버지를 잘 모시고, 할아버지도 피리를 아꼈다. 그러던 어느 날 피리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늘 자신을 보살펴 주었던 피리가 없는 것이 상당히 허전했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피리를 생각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후 피리는 무서운 꿈을 꾸게 되는데, 뱀이 몸을 휘감고 혀를 내밀어 자신을 괴롭히는 꿈을 꾸게 된다. 마을 사람들이 할아버지의 혼이 상사뱀이 되어 피리소녀를 괴롭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던 중 꿈에 피리를 괴롭히던 뱀이 할아버지로 변해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가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그래도 잊지 못하여 피리아가씨를 괴롭히고 있는 거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사죄하고 국사골로 들어가 바위가 되어 자신을 바라보는 꿈을 꾸었다.
피리아가씨는 자신을 그리워하다가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할아버지를 측은히 여겨 할아버지가 변한 바위에서 뛰어 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다.
피리의 영혼도 바위가 되어 할아버지 옆에 서 있어 이 바위를 상사바위라고 부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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