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어산 마애불상을 찾아서
방어산은
경남 진주시와
함안군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고려 우왕 5년(1379년)
왜구가 이 산에 올라 진을 치고 있는
것을 상원수 우인열이 박경수, 오언등과
왜구를 공격하여 산을 되찾았다고 하는데
왜구로 부터 나라를 방어 하였다는 뜻으로
이 산 이름을 방어산 이라고 합니다 방어산
중턱에는 마애사란 절이 있고, 절 뒤로 500m
쯤 산길을 올라가면 마애불이 있는데 고통받는
가정을 구제하고 병을 고쳐주며 자식을 낳게 해
준다하여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으며
언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명문이 새겨져 있어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으며 통일신라 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작품 입니다
방어산 마애불은 함안군의 서쪽인 군북면에서도 가장
서편에 우뚝 솟은 '방어산'에 있습니다.
이 산은 본래는 '개방산', '웅립산'으로 불렀는데,
고려 말 또는 임진왜란 때 정상부에 산성을 쌓고
부터는 방어산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방어산 마애사로 들어가는 일주문인데 이 문을 통과해서
들어가만 방어산 마애불상을 볼 수 있습니다
방어산 마애사에는 해마다 산사음악회를 개최한다고 하는데
올해는 5월 10일 석가탄신일에 맞추어서 배일호 신유 등
유명연예인들을 초청해서 산사음악회를
성대하게 개최한다고 합니다
섬기는 마음으로 자주 만납시다 라는 현수막의 합장한
두 손길이 다른 곳에서는 접할 수 없던 모습입니다
부처님 오신날 봉축등 접수중이라는 현수막을 보면서
벌써 부처님 오신 날이 임박했구나 라는 것을
느껴 보면서 종각과 어울어진 모습이
화려하고 아름다웠습니다
방어산 마애불은 해발 530m의 방어산 8부 능선에 있으므로
제법 가파른 산비탈을 쉬엄 쉬엄 올라가야 합니다.
방어산 절벽에 새겨진 마애약사삼존불입상은 통일신라
애장왕 2년(801)에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본존은 왼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어서 약사여래상
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존인 약사여래상은 얼굴이 타원형으로 길고 어깨는
거대한 몸에 비해 좁은 것 같습니다
힘없이 표현된 신체에서는 긴장감을 조금도 느낄 수 없는데
이는 불상 양식이 8세기의 긴장감과 활력이 넘치던
이상적 사실주의 양식에서 현실적인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양쪽의 협시보살은 모두 본존을 향하여 자연스럽게 서 있는데.
왼쪽은 일광보살로 남성적인 강렬한 인상이고,
본존불 오른 쪽에 서 있는 월광보살은 합장을 하고
서 있는 모습에서 미소를 짓는 듯한 얼굴에는
눈썹사이에 달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방어산 마애불 삼존상은 만든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자료가
남아 있어, 문화유산 연구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명문 자료는 월광보살의 팔꿈치 부분에 새긴 글인데 이 마애불을
조성한 사람의 이름과 시기, 발원 등을 적은 명문이 있는데,
마애불의 조성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체가 고스란히 남아 있진 않지만 이전의 연구자들이
판독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成人?刀秦 / 貞元十七 /年辛巳 / 三月十六日 / 鴻巖? / 成記願旨
/ ▨父▨不▨ / ▨▨日? / 二▨母?叉 / 一切衆生▨
정원 17년 신사 3월 16일 홍암에 부처를 조성하고 기록한다.
바라건대 … 아버지 … 어머니 … 또 일체중생을 ….
즉, 미도태라는 사람이 정원(貞元) 17년 신사년(辛巳年) 3월 16일,
곧 신라 애장왕 2년(801년)에 큰바위 부처님을 조성하고
이 사실을 기록하고, 부모님과 일체중생을 위해
발원한다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이 방어산마애불을 볼려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여러번 닦으면서
어렵게 올랐는데 벌써 오래전에 오신 것으로 생각되는 보살
한 분이 계속해서 예불을 올리고 있는 모습을 입구에서는
개 보살인가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기 위함인가 밀착 경호를
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통과하는데 겁이 났습니다
마애불을 끼고 오른쪽으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좌우
큰 석벽 안에 금동비로자나불이 있습니다.
마애사에서 세운 것이라고 하는 이 불상은 돌탑을
높이 쌓은 정상에 금동비로자나불이
근엄하게 올려져 있습니다
옆 석벽 틈에는 기도를 하시는 분들이나 수도를 하시는 분들이
한 명 정도 들어가실 만한 공간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석벽을 조심스럽게 올라가 보니 바위 틈새에 작은 문을
하나 만들어 놓았으며 위에는 슬라브
지붕같은 평평한 모습이었습니다
방어산 산성의 둘레는 500m 정도이며 지금은 남쪽 일부
성벽만 남아 있을 뿐 곳곳이 허물어져 있다고 합니다
법당의 벽화에서 한 스님이 어느 여인의 백색 치마폭 위에
그림을 그리려고 하는데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가
생각 나서 한번 올려 보았습니다
철창 속에 같혀 있는 화상의 모습이 이상해서 사진을
담고 보니 바로 옆에 세워져 있는 화상의 모습이
반사되어 비춰진 허상이었습니다
실상의 화상 모습을 담아서 비교해 보았습니다만
허상이 더 돋보이는 것 같습니다
바위 위에 올라있는 한 점의 수걱입니다만 화가 난 불상의
모습이런가? 이목구비가 특징적인 모습입니다
사랑이 넘치는 우리들의 어머님 모습 입니다만
칭얼거리기만 해도 배가 고픈가?
행여 어디가 아프지는 않은가?
체온을 느껴 가면서 아기의 얼굴 모습으로 진맥까지 하시던
어머님의 사랑이 느껴지는 자애스런 모습입니다
함안은 삼한 시절 변한의 안라국이 세워졌던 곳이고
가야시절에는 가야의 세력 중심에 서기도 했으며
가야 고분군은 아라가야의 역사를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으며
지금도 함안 군청 소재지는 가야읍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열쇠가 주렁 주렁 매달려 있는 모습을 중국과 백두산을 여행할 때
많이 보았고 신기하다고 생각이 되어 사진으로도 담아
보았습니다만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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