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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문화재답사

표충사를 찾아서

by 송강 (松岡) 최 재 모 2011. 1. 16.

 

재약산 표충사를 찾아서(1)

 

 

재약산 표충사는

1300년전 신라원효성사가

창건하고 네분의 국사님들이

교화 제도하셨고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낸 사명대사님이 승병을  훈련시키시고

그 유품이 보관된 성지입니다 이곳 표충사는

가지산·운문산·제약산을 뒷 배경으로 하고

양수가 모여서 나가는 안쪽에 자리한 천하의

명당으로서 미래에 구세성자가 여섯 명이 더

나오기로 에언 된 곳입니다 신라 흥덕왕의

셋째 왕자가 문둥병을 고쳤다는 영정 약수

물은 한국 제일이고 조계종 초대 종정을

영임한 효봉스님이 공부하고  열반한

서래각 선원은 동방 제일 선원으로

유명합니다. 부처님 말씀에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표충사를 찾아서는 내용이 많아서 몇차로

나누어서 올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표충사는 사명대사의 8대 법손인 천유선사가 임진왜란 때

  국국을 위해 헌신한 사명, 서산, 기허대사를 기리기

 위하여 밀양군 무안면 표충사(表忠祠) 사당에 있던

 

 

 

 

 

 

 

세분 승려의 진영과 위폐를 옮겨와 이 곳에 모시면서

표충사(表忠寺)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표충사에는 여러번 가 본적이 있습니다만 사찰 안에 서원과

사당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문화유산들을 공부하기 전에는 대한민국의 절은

다 똑같이 부처님을 모셔 놓고 불공을 드리는

사찰이라고만 알고 있었던 철부지 였습니다

 

 

 

표충사는 여러차례 절의 이름을 바꾸었는데 신라 무열왕

원년에 원효대사가 지금의 극락암 자리에 작은 암를

 짓고 수도하던 중 어느날 재약산을 바라보니

 

 

 

대밭 속에서 오색의 상서로운 구름이 떠 오르는 것을 보고

 원효는 곧바로 하산하여 그 자리에 절을 세우고 이 절의

이름을 죽림사라 하였다고 하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절 뒤 대밭 속에 남아 있다고 합니다

 

 

표충서원

 

영조 20년(1744년) 왕명으로 조정에서 임진왜란 때 구국구민하신

 3대 성사를 모시고 매년 춘추로 제향을 올리게 하여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고종 8년(1871년)에는 대원군에 의해 전국서원철폐령이 내렸으나

표충서원은 훼철을 면했다고 하며 표충사가 불교와 유교가

통합된 한국사찰의 유연성을 보여 주고 있는

대표적인 예라고 합니다

 

 

표충사(表忠祠)

 

1839년(헌종 5)에 이건하면서 대광전 옆 지금의 팔상전이

 있는 곳에 위치해 표충서원이란 이름으로 있었으나

이후 1971년 팔상전과 자리를 바꾸었으며

 

 

 

최근에 가람을 정비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어 표충사라고

편액하였다고 하는데 현재의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로

 

여느 전각들과는 달리 전면의 한 칸 퇴를 물려 방을 들인 것으로

  내부에는 사명대사ㆍ서산대사ㆍ기허대사의 진영을 봉안하고,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정일(初丁日)에

제향(祭享)을 올리고 있다고 합니다

 

사명대사

 

유정. 호는 사명당, 속명은 임응규.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으며 

묘향산 보현사 휴정의 법을 이어받았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집, 휴정의 휘하로 들어갔으며 선조 37년

국왕의 친서를 휴대하고, 일본에 건너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를 맺고 조선인 포로 3,500명을

인솔하여 귀국했다고 합니다.

 

 

 

서산대서

 

휴정으로 속성은 최  법호는 청허, 서산 지리산에 입산,

숭인문하에서 승려가 되어 봉은사 주지가 되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3세의 노구로 승병 1,500명을 모집하여

 명나라 군대와 합세한양 수복에 공을 세웠습니다. 

 

유정(惟政)에게 승병을 맡기고 묘향산 원적암에서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기허대사

 

속명은 박영규, 법호는 기허당으로 계룡산 갑사에 출가하여

휴정대사의 고제로 선장으로 무예를 익혔다고 하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00명의 승병을 모아 의병장

조헌과 함께  청주를 수복하였으며 격전 끝에

 

조헌 등 700의사(義士)와 함께 순국하였는데 임진왜란 당시

최초의 승병을 일으켜 전국의 승병들이

궐기하는 도화선이 되었다고 합니다 

 

 

 

표충사의 사당(祠堂) 영역과 사원(寺院) 영역을

 구분하고 있는 사천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인

사천왕을 모신 전각입니다

 

외호신은 불국정토의 외곽을 맡아서 지키는 신으로

동,서,남,북의 사방을 지키게 됩니다

 

 

 

원래는 대광전 맞은편 우화루 앞쪽에 사천왕문이 있었으나

최근 사당영역을 새롭게 조성하고 절의 진입로를

옮기면서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습니다  

 

 

 

내부에는 근래에 조성한 목조사천왕상과 함께 현대의 불모

 석정스님이 조성한 사천왕탱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천왕상은 부릅뜬 눈과 치켜올린 검은 눈섭,

빨간 입으로 두려움을 주는 얼굴에

 

 

 

갑옷을 걸치고 손에는 무기를 들고 발로는

마귀를 밟고 있는 모습으로

 

 

 

발 밑에 깔린 마귀들은 고통스런 모습으로

일그러진 모습으로 신음하는 형상을

 취하고 있습니다  

 

 

 

사천왕은 음양오행으로는

목은 동쪽으로 청색, 화는 남쪽으로 붉은 색,

수는 북쪽으로 흑색, 금은 서쪽으로 흰색,

 

토는 오행의 중앙에 위치하며 황금색을 뜻하며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라고 합니다

 

 

절의 이름을 바꾸게 된 것은 흥덕왕 4년(829)에

셋째 왕자가 풍병으로 고생을 할 때

 

 

 

이곳의 신비스런 우물인 영정약수(靈井藥水)를

마시고 병이 씻은 듯이 나았으므로

 

 

 

절의 이름을 영정사(靈井寺)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도 합니다

 

 

  

일주문은 불교에서는 일심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고 하며 

사찰에 들어서기전에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일주문을 기준으로 중생이 사는 세상인 세간 속계와

생사 번뇌에서 해탈한 깨달음의 세계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재약산 표충사(載藥山 表忠寺)라는 현판을 걸어서

사찰 이름을 밝히는 것이 보편적인데

표충사 일주문에는 앞뒤 어디에도

현판이 보이지 않습니다

 

 

 

=== 다음에 2편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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