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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문화재답사

간월사지를 찾아서

by 송강 (松岡) 최 재 모 2011. 1. 13.

간월사지를 찾아서

 

 

 

 

간월사는

신라 진덕여왕때

통도사를 창건하신 자장율사

스님께서 작천정 위에 간월사를

창건하시었다고 합니다 자장율사가

창건하여 법맥을 이어오다가 임진왜란

 없어졌다고 하는데 그 후 조선 인조

12년(1634)에 다시 지었다고 하나 그 후의

내력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조선중기까지만

하여도 법화경을 비롯한 다양한 대승 경전들을

각판할 정도로 재정적으로 부유한 절이기도 하였

으나 지금은 쇠락하여 겨우 명맥만 유지할 뿐 

남아있는 사지에 쌍탑과 금당터만 남아 있고 

 작은 법당에는 석불만 남아있고 금당지의  

건물터와 축대 등이 남아있습니다  

 

또한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70호)과 2기의

석탑이 남아 있는데, 이들은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현재 남아있는 불상과

 석탑은 고대 불교미술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있다고 합니다

 

 

 

 

간월사지는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 512-1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시도기념물 제5호(울주군)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간월사지는 등억관광단지의 모텔촌으로 둘러 쌓여 있어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제대로 관리되고 있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간월사지 삼층석탑은 동서 쌍탑으로 구성되어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인데 문화재

지정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보편적으로 일반 사찰들이 바라보는 남향이 아니라

 간월사는 금당터나 석탑의 현재 위치가

동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일금당에 쌍탑의 전형적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경주 감은사 쌍탑 이후에 세워진 사찰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풍파에 시달린 작은 석종형 부도 하나가 있는데

하단부는 제 것이 아닌 것으로 추정되며

팔각형 석재가 떠 바치고 있습니다  

 

 

 

창건연대는 출토물을 편년 조사한 결과 8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창건되어 계속된 증개축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되었다고 합니다

 

 

 

 

발굴에서는 청동여래입상, 청동보살입상, 와당류, 토기 자기편

 등이 나왔으며 간월사에는 보물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이 있습니다

 

 

 

 금당지를 향하여 좌측에 있는 탑으로 일반적 가람배치로는

서탑에 해당되는 짜임새 있은  남쪽 삼층석탑에

 이층 기단석이 조각되어있습니다.

 

 

 

 

 

주위 흩어져 있던 석재들을 모으고 없어진 석재들은 새롭게

만들어 보수를 하였으며 동탑의 모양과 같습니다

 

 

 

 

일층 몸돌에는 인왕상을 조각하였으며 가운데는 문비가있고

중앙 귀면 손잡이까지 양각되어 있습니다

 

 장항사지의 석탑 이후에 조성된 석탑으로

 조각수법이 비슷하다고 합니다 

 

 

 

 

인왕상은 입체감이 돋보이는 돋을새김과 섬세한

조각솜씨가 힘찬 모습을 표현하고 있으며 

 

 

상층기단에 우주와 탱주가 각각 두 개씩 조각되어

 있고 이층 몸돌과 삼층 몸돌엔 우주가

양각되어 있습니다

 

 

 

상륜부는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지만 조성 당시의 모습은

 규모가 크고 잘 만들어진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간월사지는 현재 금당지의 건물터와 축대, 주초석,

장대석 등이 남아 있습니다

 

 

동향한 금당지는 정면 3간, 측면 3간의 정방형에

 가까운 것이었으며, 석등, 석탑, 중문지,

동문지로 연결된 계단식 구조입니다

 

 

 금당지를 향하여 우측에 있는 탑으로 일반적 가람배치로는

동탑에 해당되는 북쪽에 있는 삼층석탑으로

 이층 기단석이 조각되어있습니다 

 

 

 

 마주보고 있는 남쪽 탑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동탑에

 해당되는  북쪽 석탑은 얕은 동산 작은 암반위에

올려져 있으며 지대석을 겸하고 있습니다

 

 

 

북쪽에 있는 석탑에도 일층 탑신에는 인왕상이 돋을새김

 되어 있으나 가운데 문비에 귀면 손잡이가

없는 것이 서탑과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탑의 위치는 금당지에서 34m 떨어져 있으며 모두 붕괴되고

일부 훼손되었으나 이때 북탑만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남탑은 나중에 북탑을 참고하여 복원했다고 합니다

 

 

 

갑진생 이남금 이라고 씌여진 상석이 있어서 주위를

살펴보니 언덕위에 작은 묘지가 있습니다

 

이상한 것은 글씨로 보아서는 근래의 묘지는 아닌 것 같은데

한글로 상석에 글씨를 썼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간월사는 간월사(肝月寺) 또는 관월사(觀月寺)로도 쓰는데

간월산(肝月山)의 이름을 딴 절이라고 합니다.

 

 

 

이 절의 청건년대에 관해서는 엮은 사람을 알 수 없는

관월사기가 있어 이것을 보면 신라 진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지은 절이라 하였으나 선덕여왕

5년에 지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간월사지 석조여래좌상은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

산 139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보물 제370로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간월사지에 있는 석조여래좌상은 약간의 파손은 있지만 비교적

 잘 보관되어 있는 편으로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로 상투 모양의

큼직한 머리묶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얼굴은 둥글고 풍만하며 단정한 입과 긴 눈, 짧은 귀 등의

 표현에서 온화하고 인간적인 느낌을 주고 있으며

어깨는 좁아지고, 몸은 양감이 없이

펑퍼짐한 모습입니다

 

 

 

석조불상의 머리와 몸통부분이 붙여져 있는 것 같습니다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옷은 얇고 U자형의 옷주름을

 표현하고 있으며 얼굴과 신체의 풍만함과

좁아진 어깨에서 9세기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목에는 삼도가 있고 법의는 주름잡힌 통견으로

투박하고 석재의 색감이 검고 거칠어 때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 모습입니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한 모습이나 1984년 논 흙속에서

 농부가 발견 할 당시에는 오른 손과 양 무릎이

깨어지고 없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누가 붙여 놓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좌대는 제것이라 보기엔 크기가 틀리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석재들을 모아 올려놓은 것으로 추정되며

안상모양의 팔각대좌 가운데 것만

제것으로 추정됩니다

 

 

 

머리는 나발이며 얼굴 모습은 둥글고 바람의 흔적이

있으나 가끔은 귀여운 상이나 근엄하기보다 친근한

이웃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른 석재들은 석등의 하대석이나 연화좌대들을 모아

 놓은것으로 생각되며 안상가운데 사자라고 생각되는

동물의 모양을 양각해 놓았지만 마모가 심해

알아 볼 수 없을 정도 입니다

 

 

 

 

 

간월사에서 날아간 학의 설화

 

아주 먼 옛날 이야기입니다만 양산 통도사에서 영축산을 넘어 언양 석남사로 가는 길에 간월사라는 큰 절이 있었습니다.

 

이 절 스님들은 객승이 찾아오는 것을 몹시 싫어하였는데 만약 객승이 찾아오면 실컷 푸대접을 해서 보냈다고 합니다.그러면서도 자신들은 넉넉하게 잘 살았다고 합니다.

 

어느날 행색이 초라한 객승이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이 절 스님들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간월사의 스님들은

"쳇, 자기가 무슨 도승이라고 주책을 떠나"라고 말하며 객승을 비웃으며 말했다.

"다른 소원은 없고 제발 스님처럼 시시껄렁한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소."

 

"그것이 소원이라면 일주문 앞에 있는 넓은 바위를 깨뜨리시오.

그러면 객승이 일체 찾아오지 않을 것이오.

 

"간월사의 스님들이 일주문 앞의 바위를 깨뜨리는 순간 두 마리의 학이 푸르른 허공 위로 날아올라서 한 마리는 통도사의 선자바위 속으로, 한 마리는 범어사의 두쥐재 속으로 날아가 버렸다고 합니다.

 

그 뒤부터 부유했던 간월사는 점점 퇴락하고 말았다는 설화 입니다.

 

 

 

 

 

                   간월사지 발굴조사에 대하여

 

간월사지에 대하여는 1984년 7월 3일에서 8월 3일까지 동아대학 박물관의 학술조사가 있었다. 이로써 절의 창건연대와 양탑의복월을 위한 탑재의 수합, 금당지(金堂址)의 조사 등이 있었는데 그 결과는 대개 다음과 같다.

 

1. 금당지

동향한 금당지는 정면 3간, 측면 3간의 거의 정방형에 가까운 것이었으며, 석등, 석탑, 중문지, 동문지로 연결된 계단식 구조였다.

 

2. 석탑

탑의 위치는 금당지에서 34m 떨어져 있으며 모두 붕괴되고 일부 훼손되었으나 이때 북탑만 복원하였다. 기단부(基壇部)는 하대저석(下臺底石), 하대중석, 하대갑석(甲石)으로 이루어졌고, 탑신부의 초층옥신석 4면 우주(隅柱) 사이에 인왕상(仁旺像) 2구(鷗)를 그리고 그 중간에는 3중의 문비(門扉)를 모각(模刻)하였으며 윗면 중앙에는 방형의 사리공(舍利孔)이 뚫어져 있었다.

 

초층의 옥개석(屋蓋石) 낙수면은 느린 만곡을 이루면서 끝이 약간 쳐들린 듯하며 옥석받침은 5층이고 쳐든 듯한 우동단(隅東端)에는 양쪽으로 풍령(風鈴)을 달았던 구멍이 있다.

 

2, 3층 옥신석은 좌우로 우주(隅柱)만 있을 뿐 초층옥신과 같은 문양은 없다.

 

2, 3층 옥개석은 초층 옥개석과 동일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나 점차 감량된 것이 다르다.

 

상륜부(相輪部)는 형태를 알 수 없어 복원치 않았다. 남탑도 같은 구조이나 뒤에 이것 역시 복원하였다.

 

금당지 우측에 위치한 삼층석탑

인왕상 조각이 경주 모화의 원원사지 인왕상과 유사함 높은 부조, 그래서 환조에 가까운 특징이 석탑이 100m간격으로 똑같은 모양으로 자리해 있어 간월사는 웅장한 대웅전과 부속건물을 갖춘 대사찰이었음에 틀림없다.

 

간월사는 신라 진덕여왕 때의 고승 자장(慈藏)이 지은 사찰로, 당시에는 대찰(大刹)의 면모를 갖추었으나, 차츰 퇴락하여 임진왜란 때 왜병들에 의해 파괴되어 폐사되었다고 한다.

 

그뒤 조선시대인 1634년(인조 12)에 명언(明彦)이 다시 지었으나 1836년(헌종 2) 큰 흉작이 들어 다시 폐사되었다.

 

1984년 발굴이 이루어지면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금당 터와 석탑 2기, 축대, 주춧돌, 장대석 등이 발견되어 통일신라시대의 유구(遺構)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청동여래입상, 청동보살입상, 기왓조각, 질그릇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석탑 2기는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로 미루어볼 때 후대에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산지형 양탑일당식(兩塔一堂式) 가람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3. 창건연대

출토물을 편년조사한 결과 8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창건되어 계속된 증개축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4. 출토품

발굴에서는 청동여래입상, 청동보살입상, 와당류, 토기 자기편 등이 나왔다. 간월사에는 보물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또 간월사에서는 불서의 간행에도 참여하여 3종을 발간하였다가 폐사 뒤에는 목판을 통도사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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