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김씨 400만의 시조 수로왕릉을 찾아서
수로왕릉은 서기 42년
구지봉에서 탄강하여 가락국을
세운 수로왕의 묘역으로 남릉이라
고도하며 원형봉토분으로 능비와 상석
문무인석. 마양호석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경내에는 숭선전과 숭안전, 안향각, 신도비각
등이 있습니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는 199년
수로왕이 158세로 돌아가자 대궐 동북쪽 평지에
빈궁을 짓고 장사를 지낸 뒤 주위 300보의 땅을
수로왕의 묘역으로 정했다고기록되어 있어
현재의 수로왕릉이 평지에 있는 것과 삼국
유사에 능역이평지로 설정되었던 점이
묘역의 현장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김해김씨 시조 수로왕릉
한나절이 되자 김수로왕릉을 관리하시는 분이
도포까지 의관을 정재하시고 묘역으로
들어가시는 틈을 타서
따라 들어가 보았는데 들어가시더니 읍을 한 자세로
묘역을 천천히 한번 둘러 보신 다음
예를 올리고 계시는 모습입니다
김수로왕은 AD 42년 다른 다섯명의 아이와 함께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하늘이 열린 다음
아직 나라의 이름도 없고 임금과 신하라는
호칭도 없었던 AD 44년에 가야라는
나라를 세웠다고 합니다
수로왕비 허황옥은 멀리
아유타국에서 왔는데
부부가 합심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고 합니다
가야는 신라와 백제, 일본인 까지 드나드는
교통의 요충지인 김해를 중심으로 한
가야의 문화가 펼쳐집니다
김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김해 김씨는 현재
전국적으로 400만이라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성씨라고 합니다
김수로왕릉 묘역 앞에 세워져 있는 신도비각입니다만
새들의 보금자리로 비각이 훼손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철망이 둘려져 있습니다
신도비각은 가락사와 숭선전사가 기록된 비각으로
1885년 고종 22년에 3칸으로 창건되어
1926년과 1954년 두 차례에 걸쳐
중수가 이루어 졌고
1988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되면서
보수되었다고 합니다
6개의 황금빛 알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선진문명을 가진 민족이 북방으로부터
이주해 왔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김수로왕은 금관가야의 초대 왕이자 400만
김해김씨의 시조인데 A.D.42년 3월,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하늘이 열린 다음 이 땅에는 아직 나라의
이름이 있지 않았고 임금과 신하의
호칭 또한 없었다.
다만 9간이 있었는데, 그들이 추장으로서
백성을 통솔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사는 북쪽 구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2~3백명의 무리가 그곳에 모여드는 것으로
탄생의 장면은 시작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그 유명한 <구지가>라는
노래가 나오게 됩니다
구지가는 가야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몇 가지
안 되는 역사적 기록입니다.
가락국기에 의하면
“하늘에서 내게 명하기를,
‘이곳에 내려가 나라를 새롭게 하고 임금이 되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내려왔다.
너희들은 모름지기 봉우리 위의 흙을 파면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서 먹을 테다’라고
노래 부르며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아 기뻐 뛰게 될 것이다.”
라는 글이 있습니다
얼마 뒤에 공중을 쳐다보았더니,
붉은 줄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땅에 드리워졌습니다.
그 줄의 끝에 붉은 보자기로 싼 금합이 나타났는데,
금합을 열어보니 해 같이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들어 있었는데
이 알에서‘처음 나타났다’ 해서 이름을
수로라 지었고 그가 만든 나라를
가야국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나머지 다섯 알에서 태어난 아이도 각각
다섯 가야의 왕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때가 A. D. 44년이었답니다.
능역은 주위 18,000여평이 왕릉공원으로
되어 있으며, 봉분은 원형 봉토분입니다
김수로왕릉의 규모는 직경 22미터∼21미터,
높이 5미터의 크기라고 합니다
왕릉 경내에는 신위를 모신 숭선전과 안향각
전사청과 제기고. 납능정문
숭재, 동재, 서재, 신도비각, 신도비,
문무인석과 마양호석,
가락루, 홍살문, 공적비, 숭화문 등의
부속건물 및 석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장사조에 의하면,
대궐의 동북쪽 평지에 빈궁
<능묘>을 지었으며,
높이 일장 주위 삼백장으로 그 곳에 장사를
지내고 수로왕묘라 하였다고 하였으며,
고려 문종대까지는 능묘의 보존상태가
양호하였지만, 조선 초기에는 능묘가
황폐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지봉유설 권19 능묘조에 의하면, 이 능은 임진왜란 때
왜적들에 의해 도굴을 당하였는데 순장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인조 25년(1647년)에 능비를 세우고 고종 2년(1884년)에는
숭선전이란 당호를 내려 침묘를 개축하였고
이때 안향각과 신도비각, 석수도
설치되었다고 합니다.
김수로 왕릉은 이후 1964년부터 현재까지 계속적으로
보수공사를 실시 정화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되었다고 합니다.
읍지 납능조의 기록에 의하면 지방민들이
동짓날에 제사를 지냈으며,
능을 지키는 능군과 제사를 모시기 위한
제전 있었다고 합니다
이 능의 내부구조는 지봉유설의 기사에 따른다면
규모가 큰 석실묘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탄생과 치적에 관하여는 〈삼국유사〉에 실린
가락국기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직 나라가 없던 때 가락지역에서는 주민들이
각 촌락별로 나뉘어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42년 3월 하늘의 명을 받아 가락국의 9간 이하
수백 명이 구지봉에 올라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춤을 추면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라고
노래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하늘에서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빛 그릇이
내려왔는데, 그 속에 둥근 황금색의 알이
6개 있었다고 합니다.
12일이 지난 뒤 이 알에서 태어난 사내아이들 가운데
키가 9척이며 제일 먼저 사람으로
변한 것이 수로였다고 합니다.
주민들이 가락국의 왕으로 받들었고 나머지 아이들도
각각 5가야의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수로는 즉위 후 관직을 정비하고 도읍을 정하여
국가의 기틀을 확립했습니다.
그리고 천신의 명으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삼았다고 합니다.
김수로왕은 157년을 재위하다가 죽었으며.
아들 거등왕이 뒤를 이었다고 합니다.
이 신화는 천강난생신화(天降卵生神話)로서
우리나라 고대국가 성립기에 흔히 보이는
건국시조 신화와 흐름을 같습니다.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뒤에도 수로왕은
가야의 시조로 계속 받들어졌다고 합니다
문무왕은 수로왕릉의 관리를 위해 위전을
설치하고 능묘의 제례를 후손이
계승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수로왕릉 앞의 문을 납릉정문 이라고 하는데
그 유명한 쌍어문이 이 곳에 있습니다
납릉정문의 윗쪽 목판에 새겨진 그림을 보면 두마리의
흰색 물고기가 탑처럼 생긴것을 대칭으로 보면 신령
스런 물고기라 신어상이라고 하며 두 마리의
물고기이므로 쌍어문이라고도 합니다
함께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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