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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묘를 찾아서

김유신장군 묘를 찾아서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10. 9. 21.

김유신장군 묘를 찾아서

 

 송화산 옥녀봉에 있는

 태대각간 김유신장군의 묘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묘의 모양은

 지름이 18m에 달하는 원형봉토분이고

 둘레에는 호석과 돌낭간을 둘렀고 호석 밖

에는 38개 돌기둥을 세워 낭간을 만들었으며

바닥에도 돌을 깔았습니다.   호석은 24장을

 둘렀는데 12지신상을 조각한것과 하지않은

 것을 교대로 배치하고 있으며 어느왕릉과

비교 해 보아도 손색이 없는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는 송화산의   

         김유신장군 묘역입니다            

       

 

  

 

 김유신 장군의 묘를 들어가는 삼문입니다 

 삼문은 중앙의 신문과 좌우의 협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사를 지낼 때는 세문을 다 열어놓지만 정문은

영혼이 들어오시는 문이라 하여 사람들은

드나들 수 없고 협문만 사용하는 것이

 법도로 되어 있습니다

  

 

 흥무문이라는 현판이 있습니다

흥덕왕으로 부터 흥무왕으로

추봉되었기 때문입니다  

 

 

  

경주시 충효동  송화산 줄기가 남쪽으로 뻗은 옥녀봉 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태대각간 김유신장군의 묘가 있는 곳입니다

 멀리 보이는 봉우리가 옥녀봉입니다

 

 

  

24장의 호석을 둘렀는데 호석은 12지신 상을 조각한 것과

없는 것을 교대로 배치하고있으며  어느 왕릉과 비교해

봐도 손색이 없는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묘의 모양은 지름이 18m 둘레 50m, 높이 5.3m의 큰 원형

봉토분이고 둘레에는 호석과 돌난간을 둘렀고 호석

밖에는 38개의 돌기둥을 세워 난간을 만들었으며

 바닥에는 돌을 깔아 놓았습니다

 

무덤 뒷편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묘의 양 옆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있는데 서편 비는 1710년에

경주 부윤이 세웠다고 하며'新羅太大角干 金庾信墓

(신라태대각간 김유신묘)'라 새겨져 있으며,

 혼유석 이라고 합니다만 상석 일 것 같습니다   

 

 

 

 

 

비문의 내용은 묘소에 아무런 석물이 없으니, 오랜 세월이 흘러

산천이 변하여 흔적이 없어져서 전하지 못할 까 두렵다. 

이에 작은 비석을 세워 표시해 둔다.

 

 

 

이조 숙종36년(1710)겨울   부윤(시장) 

의령 남지훈 지음 이라는 내용이며    

 

 

 

신라 태대각간 김유신묘(新羅 太大角干 金庾信墓)라는

 글씨가 선명합니다 김유신은 왕의 신분이 아니기

때문에 묘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서편에 있는 비의 이수 부분입니다 

두전이 없어서 아쉽기만 합니다

 

 

  

양쪽 모서리의 나선형이 서로 다르게

회전을 하고 있습니다

 

 

 

동편 비는 1934년에 세운 것으로 '開國公純忠壯烈興武王陵

(개국공순충장열흥무왕릉)'이라 새겨져 있으며

 

 

  

 비문의 내용은 공렬은 오직 이 나라에서 처음일 뿐 아니라

중국에도 비길만한 사람이 드물도다. 중국에도 관운장과

곽분양, 악무목 세분정도가 있을 뿐 이라네. 

 

 

 

1934년 갑술 가을에 후손 용희가 짓고

우곤이 글씨를 썼다고 합니다. 

 

 

 

 근래에 세운 것으로 김유신장군 묘를 흥무왕릉으로

 지칭하고 있으며 가운데 있는 혼유석은

1974년에 만든 것입니다

 

 

 

동편의 비석에는 왕릉이라는

글씨가 선명합니다

 

  

 비가 오거나 비석이 물에 젖기만 하면

릉이란 글씨보다 선명하게 묘라는

 글씨로 변하게 됩니다 

 

 

 

  서편에는 김유신이라고 했기 때문에 묘라고 하였으나

 동편은 개국공순충렬흥무왕(開國公純忠烈興武王)

이라고 하였으니 왕릉이라 쓴 것 같습니다만 ...? 

 

 

 

 

1973년에 봉분 북서쪽에서 납석으로 된 돼지상 한개가

 발견되어 경주박물관에서 1974년에

김유신장군 묘의 굴조사와

 

 

 

석조물 복원을 위한 실측작업을 하였는데 그 때

또 동편에서 토끼상의 파편이 발견 되었습니다  

 

 

 

2010년 5월 29일(토) 국립경주박물관에서 12지신상을

별도로 특별전시를 하고 있는데 한 점 뿐이었습니다

 

 

 

  

  묘역 서쪽에는 산신제를 지내던 제단도 묻혀 있었고

 혼유석이 있던 자리도 찾아내어 복원하였으며

없어진 난간도 복원 하였습니다

 


 

 

1996년 3월 4일 정월 대보름 낮에 송화산

 옥녀봉에서 산불이 나  둘레의 도래솔과

무덤을 모두 태운 일이 있었는데

 

 

  

 이 때 김해김씨 종친회에서 사죄 의식을 했는데

 묘 동편에 후손들이꿇어 엎드려 용서를

빌었던 일이 있습니다

 

 

 

띠를 나타내는 12짐승을 십이지라 하고

형상으로 나타낸 것을 십이지신상

이라고 합니다

 

 

 

시간과 방향에 따라 수호신 역할을 하는데 

쥐는 밤 11시부터 1시 까지 이며 방향은 정북을 맡고 있으며

 소는 1시부터 3시까지를 맡으며 북동쪽을 맡고 있습니다   

 

북- 자 (쥐), 동- 묘 (토끼), 남- 오 (말), 서- 유 (닭)

 

 

12지신 상은 능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갑옷을 입은 상들이

새겨져 있으나 이 묘의 12지신 상은 수두인신 상으로 

 얼굴은 짐승이고 몸은 사람 모습입니다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었으며 몸체는 정면을 보고

있으나, 고개는 오른쪽으로 돌리고 있으며 무장을

하지 않아 매우 온화해 보입니다.

 

 

 

 방위에 따라 쥐, 소, 범,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의 대로 조각이 되어 있는데 조각의

 깊이는 얕지만 세련된 조각 솜씨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묘실 내에 12지신 상을 만들어 넣은 것은

있어도 봉분 주위에 조각해 놓은 것은 신라만의

독특한 창의 물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중국에서 받아들인 문물을 우리 것으로

 소화하여 변형 발전시켜 나간 점은 통일신라

 문화의 특성이라 하겠습니다

 

 

 

 12지신 상이 조각된 능묘

경덕왕릉(내남).   원성왕릉(괘릉).   헌덕왕릉(동천).

흥덕왕릉(안강).  진덕왕릉(현곡)  김유신장군묘는

돋을세김으로 되었고  성덕왕릉(조양동)은

두리세김으로 세웠습니다 

 

 

 

 12지신상의 복장

28대진덕왕릉(무복) 33대성덕왕릉(무복) 35대경덕왕릉(무복) 

 38대원성왕릉(무복) 41대덕왕릉(평복) 42대흥덕왕릉(무복)

불국사역 방형분(무복)   김유신장군묘 (평복) 

 

 

 

 

쥐가 십이지의 첫자리가 된 사연을 말해 주는 설화

 

 옛날, 하늘의 대왕이 동물들에게 지위를 주고자 했답니다. 선발 기준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정월 초하루에 제일 먼저 천상의 문에 도달한

 짐승으로부터 그 지위를 주겠다고 했답니다    정월 초하루가 되어

 동물들이 앞 다투어 달려왔는데, 소가 제일 먼저 도착하였으나

 도착한 바로 그 순간에 소 머리위에 붙어 있던 쥐가 뛰어

내리면서 먼저 문을 통과하였다고합니다 소는 분했지만

두 번째가 될 수밖에 없었고 합니다.  

 


 

 김유신장군의 묘역으로 들어가기 전 끝자락에 있는 

삼국통일안치소 비각입니다

 

김유신장군은 김수로왕의 13세손으로 금관가야국 마지막 왕인

 김구해왕의 증손이며 15세에 화랑이 되고 18세에 국선이

되었으며 김춘추를 도와 태종 무열왕이 되게 하고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하였습니다.

 

 

 

  

이러한 공로로 문무왕으로부터는 태대각간이라는 신라 최고의

 관직을 받았고 후대에 와서는  흥덕왕으로부터 흥무대왕으로

 추봉되어서 무덤의 크기가 왕릉처럼 조성되었다고 합니다.

 

 


 

 

삼국통일안치소(三國統一安置所)라는

표지석입니다 

 

 

 

태대각간 흥무왕 이라는 김유신 장군의 묘역 앞에는

하마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하마비는 조선시대 때 종묘, 문묘, 왕이나 장군, 고관, 성현 등의

 출생지나 분묘 앞에 세워 놓은 표석으로 이 곳을 지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글을 적은 표지석으로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하도록 하였던  곳입니다    

 

 

 

 

숭무전을 알려주는 표지석입니다 화살표 방향입니다

 

선생은 태어나자 신이하여 등에 북두칠성의 무늬가 있었다고

합니다.  자라면서 부모님의 엄한 교육을 받아 함부로

놀지 않았다고 합니다.  곧 글과 칼을 가까이 하여

깊은 산골짜기에서 온갖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어느날 밤에 공의 증조부인 구형왕을 꿈에서 뵙고 깨달은

 바가 있어 곧 거느리고 있던 병졸을 출동시켜 부하

30여명을 거느리고 바로 소판공(아버지)

영중으로 들어가  아버지를 배알했습니다

 

 

 

 그 때는 바로 고구려 군사가 아버지성을 몇겹으로 포위하여 곧

함락될 직전이었다고 하며 선생이 말하기를, "싸움터에서

용감하지 않으면 효가 아니다." 하고 고구려 진중에

뛰어들어 적장의 목을 베고 항복을 받아 드디어

군사를 이끌고 개선하였다고 합니다  

 

신라의 왕은 크게 기뻐하며 시중이란 벼슬을 내리고 그 후

공업이 많아짐에 따라서 상장군겸 태대각간 대도독을 삼았으며.

이 때부터 싸움터에 나가면 대장이고 돌아오면 정승으로서

일하여 마침내는 삼국을 통합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홍살문은 서원이나 제실 영역으로 진입함을 알리는

 상징적인 출입문으로 문은 달려 있지 않습니다

 

좌우에 기둥하나 씩을 세워 기둥 위를 서로 연결하는

 부재를 걸치고 그 위에 홍살을 죽 박은 지붕이 없는

붉은 색을 칠한 나무문으로서 그 주변에는

 하마비나 하마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아마 위에 있는 하마비가 숭신전 금산제를

 위하여 세워진 것인가 봅니다

 

 

 

 그 전에 백제를 섬멸할 때 당의 소정방이  신라를 도우려

왔다가 돌아가니 당황제가 묻기를, "어찌 백제를

평정한 후 신라를 치지 않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라는 임금이 어질어 백성을 사랑하고

신하들은 충성을 다하여 임금을 섬기니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도모하기 어려웠습니다."

 

 

 

 다시 황제가 말하기를, " 신라의 정승 김유신의 이름은 멀리

이곳까지 알려져 있으니 과연 그 인물이 어떠하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는 곧 바다건너 동쪽의 관중이요,

소하입니다. 그리고 그의 재주와 덕행, 충성과 의리를

 부귀로써 움직일 수 없습니다." 하였다고 합니다

 

 

 

 

 삼국통일의 원훈이고 민족중흥의 전기를 조성하신 선조

 흥무왕의 위업을 기리기 위하여 숭신전을 창건하는데

 헌성한 분들의 이름을 기록해 둔 헌성방명기입니다 

 

 

 

전전대통령이셨던 김대중 김해김씨 중앙종친회 고문도

5,000만원을 헌금하셨다는 기록이 눈에 뜨입니다

 

 

  

참고로 헌금하신 분들의 비석명을 올려 봅니다

 

 공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 후는 언제나 의관을 갖추고 여가를

 선용하여 송화동 물맑은 곳에서 자연을 벗삼아 풍류를 즐기고

원림(정원)를 가꾸었다고 하며. 그리고 예현당. 낙빈루,

 퇴사정 등의 건물을 세워 무를 쉬고 문을 닦으니

그 생활은 마치 그  옛날삼대(하,은,주)의

아름다운 모습과 같았다고 합니다.

 

 

 숭무전 사무실을 알리는 표지판입니다

 

문무왕은  "만일 공의 훌륭한 위업이 아니었으면 나라가 매우

위태로와 지탱해 나가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하고 이에  

'태대서발한'이란  벼슬과 식읍 5백호를 내리고     

또 수레와 지팡이를 내려 궁전에 오를 때는    

천천히 걷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삼국유사」에 "김유신이 죽은 뒤 흥무대왕으로 봉하였으며,

 그 능은 서산(西山) 모지사(毛只寺)를 동향한

산봉에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문무왕이 그 의 부음을 듣고 채백(彩帛)

1천 필과 조(租) 2천 석을 보내고, 군악고취(軍樂鼓吹)

 100인을 보내 금산원에 예장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유사(有司)로 하여금 비를 세워 기공(紀功)을 기명하고,

민호(民戶)를 배정하여 묘를 수호하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문무왕의 처남이요 친구이자 군신지간이오 또 사위인 김유신

장군이죽은 뒤 그의 죽음을 애도한 문무왕이 호화로운

 능을  마련해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태대각간 김유신장군 묘는  사적 제2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묘 아래쪽에 묘를 지키는

금산재(金山齋)가 있습니다.

 

 

 

 금산재를 관리하는 관리사 입구입니다

 

 

 손칼국수라는 간이 표지판이 서 있습니다만

이 집의 칼 국수 맛은 산천경관이

좋은 탓인가 일품입니다

 

 

  

경주부 서쪽 금산의 해좌 언덕은 우리 선조이신

신라의 큰 정승 김 선생의 묘소라고 합니다.

 

 선생의 휘는 유신이고 가락 태조왕의 13세손이요.

가야국 마지막 왕인 김구해왕의 증손입니다 

 

 

 

 신주도 대총관 무력의 손자이고. 대양주도독 서현공의

아들입니다.  비(女변에 比)는 갈문왕의 子

숙흘종의 딸이라고 합니다.

 

 

 

도독공(아버지)이 만노군 태수 때 스무달 만에 도독공의

 임소에서 탄생하였으니  이 때가 신라 진평왕

을묘년(595)이었습니다.

 

 

 

금산재 관리실 앞에 있는 애완견의

 한가로움입니다

 

 

 

칼국수를 시켜 놓고 대청 마루에 앉아 있노라니 

입주상양(立柱上樣)이라는 글씨가 보입니다

 

 

  

1976년 6월이라는 것으로 봐서 신축을 한지가

오래되지 않은 건물인 것 같습니다 

 

 

 

금산재로 건너가는 샛문입니다

동서 방향으로 문이 일직선으로 통합니다  

 

 

 

송화산 정상까지는 약 1km정도이며

 276m봉우리라는 표지판입니다

 

 

    

가을 칠월 자택에서 세상을 떠나자  왕은 매우 슬퍼하며

비단 일천필과 벼 이천석을 부의로 보내고 아울러 장례도

 군악을 울리며 이곳에 장사지내게 하였으며. 그 후

흥덕왕은 공에게 '순충장열 흥무왕'이란 시호를

내렸다고 합니다.

 

가정 신유년(1561, 명종16)에 사당을 세우고 인조계해년(1623)에

편액(서악서원이란 현판)을 하사하였고  정종 임자년(1792)에

치제하고 또 융희 기유년(1909)에도 제사를 모셨다고 합니다.  

 

 

 고무신 비가 세워져 있는 곳이라면 경주에 있는

 주당이라면 아마 한 두번은 추억이

 담겨진 곳일 것입니다

 

 

 

 종, 아직은 아직은 건드리지 말라

도사린 설움 서움을 터뜨리지 말라

 

 

 

 선도산에 해 떨어질 무렵 고무신 박종우선생의

시비 앞에서 소주 한잔을 나누던 그 때

그  친구가 그리워 집니다 

 

 

 

석당 최남주선생의 추송비입니다  

고무신 비석 바로 옆에 있습니다 

 

원광법사의 화랑오계

군신이충, 사친이효, 교우이신, 임전무퇴, 살생유택    

 

  

장지 무덤의 변천사

목관묘→ 목곽묘→ 적석목곽묘→ 석실묘→ 화장묘

 

 

 

무덤은 통일신라시대의 돌방무덤으로 주검을

넣어두는 널방은 정방형이며 무덤 안으로

들어가는 널 길이 남쪽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무덤의 북쪽 면에 동.서로 길게 관을 놓았던

 주검 받침이 있으며 머리를 받쳤던 두침과

 다리를 받쳤던 발받침이 놓여 있습니다    

 

   

 

  

경주시의 상징

시의 기 : 신라의 금관(여섯 개의 점; 첨성대에서 바라 본 육부촌)

시의 꽃: 개나리   시의 나무 : 소나무    시의 새 : 까치

캐릭터 : 관이와 금이( 왕과 왕비, 금관의 글자를 따옴)

 

 

 

  

청동기시대(고인돌, 암각화, 민무늬토기, 청동연모)⇒철기시대

(와질토기, 농기구, 철제무기) ⇒ 삼한시대 - 진한 - 6촌 -

 

사로국 ⇒ 서라벌(기원전 57년 박혁거세) ⇒ 신라(지증왕(503)

 경주(고려와 합쳐 짐 935 경주라는 이름을 처음 사용)

 

 

 

  

3기 금척, 옥저(만파식적), 에밀레종

 

  3보 :황룡사 9층탑, 황룡사 장육존불, 진평왕 옥대 

 

 

 

  

삼기종은대종(황룡사종 49만근) 성덕대왕 신종(에밀레종),

효자 손순의 석종 입니다 그리고  삼귀 8괴의 3귀는

 옥저, 금척, 신종 이라고 합니다 

 

 

8괴는 계림황엽, 문천도사, 불국영지, 압지부평, 금장낙안,

서산낙조, 백률송순, 남산부석, (나원백탑, 금오만하)

 

 

 

 

        ☸ 경주 최부자 집 가훈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마라.

둘째, 만 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며

       만석이 넘으면 사회에 환원하라.

 셋째, 흉년기에는 남의 논밭을 매입하지 말라.

 넷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다섯째, 며느리들은 시집온 뒤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여섯째,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 최부자집 6연

 

        첫째는 자처초연(自處超然). 스스로 초연하게 지낸다.

          둘째는 대인애연(對人靄然). 남에게는 온화하게 대한다.

          셋째는 무사징연(無事澄然). 일이 없을 때에는 맑게 지낸다.

          넷째는 유사감연(有事敢然). 유사시에는 용감하게 대처한다.

          다섯째 득의담연(得意淡然). 뜻을 얻었을 때에는 담담하게 행동한다.

          여섯째 실의태연(失意泰然). 실의에 빠졌을 때에는 태연하게 행동한다.

 

 

 

                                     김유신 장군 묘 해설 자료

 

들어가는 말

이곳은 송화산 줄기가 남쪽으로 뻗은 옥녀봉 자락에 사적 제21호로 지정된 김유신장군의 묘가 있는 곳입니다

 

☸ 김유신 장군의 생애

김유신장군은 진평왕17년(595) 에 아버지가 태수로 있던 진천에서 태어나셨으며 78세(673)에 돌아가셨습니다

김수로왕의 12세손으로 금관가야국의 마지막왕인 김구해(구형)왕의 증손이며 23대 법흥왕(562)때 신라에 편입되면서 15세에 화랑이 되고 18세에는 국선이 되었으며

654년 진덕여왕이 자식이 없이 죽자,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하고 660년에는 상대등이 되어 백제를 병합시켰으며 668년에는 대총관이 되어 고구려를 병합시키고 당나라를 몰아내어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데 크게 기여 하였습니다

이러한 공로로 문무왕(30)으로 부터는 태대각간이란 신라 최고의 관직을 받았으며 후에 흥덕왕(42 삼국유사에는 경명왕으로 기록)이 흥무대왕으로 추봉하고 왕릉의 예우로 묘역을 다시 조성하였다고 합니다

 

☸ 김유신장군 묘의 외형

묘의 모양은  지름 30m 높이 5.3m의 원형봉토분으로 둘레에는 호석을 둘렀으며 38개의 돌기둥과 난간이 있고 바닥에는 돌을 깔았으며 호석은 24장으로 12지신 상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교대로 배치하여 어느 왕릉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모습입니다

 

12지신 상

띠를 나타내는 12짐승을 십이지라 하고 형상으로 나타낸 것을 십이지신상 이라고 합니다 시간과 방향에 따라 수호신 역할을 하는데  쥐는 밤 11시부터 1시까지이며 방향은 정북을 맡고 있습니다  ⦗북-자(쥐), 동-묘(토끼), 남- 오(말), 서-유(닭)⦘

12지신 상은 능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보통 갑옷을 입은 상들이 새겨져 있으나 이 묘의 12지신 상은 수두인신 상으로  얼굴은 짐승이고 몸은 사람 모습인데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었으며 몸체는 정면을 보고 있으나, 고개는 오른쪽으로 돌리고 있으며 무장을 하지 않아 매우 온화해 보입니다.

방위에 따라 쥐, 소, 범,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의 순서대로 조각이 되어 있는데 조각의 깊이는 얕지만 세련된 조각 솜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 12지신 상이 조각된 능 묘

경덕왕릉(내남). 원성왕릉(괘릉). 헌덕왕릉(동천). 흥덕왕릉(안강). 진덕왕릉(현곡) 김유신장군묘는 돋을세김으로 되었고 성덕왕릉(조양동)은 두리세김으로 세웠습니다

 

12지신 상의 복장

28대 진덕왕릉(무복) 33대 성덕왕릉(무복) 35대경덕왕릉 (무복) 38대 원성왕릉(무복) 41대 헌덕왕릉(평복) 42대 흥덕왕릉(무복)  불국사역 방형분(무복)  김유신장군묘(평복)

 

중국에서는 묘실 안에 12지신 상을 만들어 넣은 것은 있어도 봉분 주위에 조각해 놓은 것은 신라만의 독특한 창의물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중국에서 받아들인 문물을 우리 것으로 소화하여 변형 발전시켜 나간 점은 통일신라 문화의 특성이라 하겠습니다

 

비석 비문

묘의 양 옆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있는데 서편 비는 1710년에 경주 부윤이 세웠다고 하며'新羅太大角干 金庾信墓(신라태대각간 김유신묘)'라 새겨져 있으며, 비문의 내용은 묘소에 아무런 석물이 없으니, 오랜 세월이 흘러 산천이 변하여 흔적이 없어져서 전하지 못할 까 두렵다.  이에 작은 비석을 세워 표시해 둔다. 이조 숙종36년(1710)겨울   부윤(시장)  의령 남지훈 지음 이라는 내용이며

 

동편 비는 1934년에 세운 것으로 '開國公純忠壯烈興武王陵(개국공순충장열흥무왕릉)'이라 새겨져 있으며. 비문의 내용은 공렬은 오직 이 나라에서 처음일 뿐 아니라 중국에도 비길만한 사람이 드물도다.

 

중국에도 관운장과 곽분양, 악무목 세분정도가 있을 뿐 이라네.  1934년 갑술 가을에 후손 용희가 짓고 우곤이 글씨를 썼다고 하며.  근래에 세운 것으로 김유신장군 묘를 흥무왕릉으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으며 가운데 있는 혼유석은 1974년에 만든 것입니다

 

묘역 복원

1973년에 묘 북서쪽에서 납석으로 된 돼지상 한 개가 발견되어 경주박물관에서 1974년에 김유신장군 묘의 발굴조사와 석조물 복원을 위한 실측작업을 하였는데 그 때 또 동편에서 토끼상과 말상이 발견 되었습니다 묘 서쪽에는 산신제를 지내던 제단도 묻혀 있었고 혼유석이 있던 자리도 찾아내어 복원하였으며 없어진 난간도 복원 하였습니다

 

김유신 장군 묘가 아니라는 주장

12지신 상 호석이 새겨진 것은 왕릉 이라는 고정관념으로 이 무덤을 김유신장군의 무덤이 아닐 것 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묘역에 12지신 상을 조각하여 배치하기 시작한 것은 제33대 성덕왕(702∼737)능 부터 이며 김유신장군은 673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 묘는 김유신장군의 묘가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후대에 와서 42대 흥덕왕(826 ∼836)이 김유신 장군을 흥무대왕으로 추봉하였는데 그 능은 서산 모지사 동향한 산봉에 있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를 보면 김유신 장군 묘의 12지신 상은 흥무대왕으로 추봉된 뒤에 왕릉의 예우로 묘역을 다시 조성하면서 12지신 상을 조각해 놓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묘에 산불

1996년 3월 4일 정월 대보름 낮에 송화산 옥녀봉에서 산불이 나 이곳 둘레의 도래솔과 무덤을 모두 태운 일이 있었는데 이 때 김해김씨 종친회에서 사죄 의식을 했는데 묘 동편에 후손들이 꿇어 엎드려 용서를 빌었던 일이 있습니다

 

쥐가 십이지의 첫자리가 된 사연을 말해 주는 설화가 있습니다.

옛날, 하늘의 대왕이 동물들에게 지위를 주고자 했답니다. 선발 기준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정월 초하루에 제일 먼저 천상의 문에 도달한 짐승으로부터 그 지위를 주겠다고 했답니다 

정월 초하루가 되어 동물들이 앞 다투어 달려왔는데, 소가 제일 먼저 도착하였으나, 도착한 바로 그 순간에 소 머리위에 붙어 있던 쥐가 뛰어내리면서 먼저 문을 통과하였다고 합니다

소는 분했지만 두 번째가 될 수밖에 없었고 합니다.쥐가 십이지의 첫머리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미약한 힘을 일찍 파악하고, 약삭빠르게 머리를 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비문 상세 자료 

 

김유신 장군 묘 서쪽편의 비문

新羅太大角干金庾信墓  按東史  公 卒於文武王朝  命有司立碑紀功云  而今亡焉 上下千有餘載  象山宛然 東京婦孺  皆知爲公之墓  過而敬之 獨惜乎墓道  無麗牲石 竊恐年代寢久  陵谷變遷  泯沒而無傳  玆竪短碣以識之 至若公之嵬勳偉烈  昭載史冊  不容評云爾  崇禎紀元  周甲子  庚寅   冬  府尹  宜寧  南至薰 誌

신라의 역사를 살펴보면 공은 문무왕 13년(673)에 돌아가시니,  나라에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비석을 세우고 공적을 기록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이 후 천여년동안에도 묘지가 완연해서 동도(경주)의 아낙네들까지도 공의 묘소인줄 알고 지날 때에는 누구나 공경하는 뜻을 표한다. 그러나  아깝게도 묘소에는 아무런 석물이 없으니, 오랜 세월이 흘러 산천이 변하여 흔적도 없어져서 전하지 못할 까 두렵다. 

이에 작은 비석을 세워 표시해 둔다.  공의 훌륭한 업적과 위대한 공훈은 청사(靑史)에 자세하게 실려있으니, 여기서는 더 소개하지 않는다.        

           이조 숙종 36년 (1710) 겨울       부윤(시장)  의령 남지훈 지음 

  

김유신장군묘의 동편비문  

 

開國公純忠壯烈興武王陵 慶州府西金山枕亥之原  惟我  先祖大丞相金先生之藏也 先生諱 庾信 駕洛太祖王十三世孫  仇衡王曾孫  新州都  大總管諱武力孫 大梁州都督諱舒玄子  비葛文王肅訖宗之女  都督公 爲萬弩太守時   娠二十月而生先生于任所  眞平王乙卯也  先生  生而神異  背有七 星文  自幼日奉嚴訓  不妄交遊  遂懷書與劍  力學山陰   凡十餘年 一夜  仇衡王  有夢感  卽發麾下騎  從者三十人  直入蘇判營中  拜 謁大人 時麗兵圍重  城幾陷矣 先生曰 臨陣不勇  非孝也  乃突入麗  陣  斬將受降  遂振旅而還  王大喜  拜爲侍中  尋爲上將軍  兼太大 角干大都督    自是出將入相 統合三韓  先時唐將蘇定方  救新羅而來 及還  唐帝曰何不因平濟而伐新羅  對曰其君  仁而愛民  其臣  忠以 事君  雖小  不可圖也  唐帝曰新羅相金庾信  名聞中國  果何如  對 曰卽海東管蕭也  而其才德忠義  不可以富貴動之  武烈王  謂諸將 曰金庾信  仁智才略  我之諸葛孔明也  眞德王  試度量曰不意頗牧 在吾宮中也  先生 於中國本國  屢樹大勳  唐高宗  遣使來聘  冊奉 常正卿平壤開國公  食邑二千戶  文武王  曰若不倚賴公  國之存亡 未可知也  於是授太大舒發翰  食邑五百戶  仍賜輿杖  上殿不趨 公 退而有暇 卽幅巾杖구   逍遙于松花洞泉石之間  修治園林  建禮賢 堂  樂賓樓  退思亭  偃武修文  粹然有三代風焉 文武王十三年妖星 見地震後旬餘  寢疾 王  親臨慰問  泣曰寡人之有卿猶魚之有 水  若有不諱  其如人民何  其如社稷何  對曰臣遇不肖  豈能有益於 國家  但自古繼體之君  靡不有初  鮮克有終  累世功績   一朝휴廢 甚可痛也  伏願殿下  知成功之不易  念守成之亦難  遠小人親君子 화亂不作  基業無窮  卽臣死且無憾  王泣而受之  秋七月 夢于私第  聞訃震悼  贈賻綵帛一千匹  租二千石  及軍樂鼓吹  葬于此  興德  王  追諡純忠壯烈興武王  嘉靖辛酉  建祠  仁祖癸亥賜額  正宗壬子  致祭  隆熙己酉  致祭  西岳書院  是也  列聖朝崇奉  類此而諸賢贊 述  不可탄記  在昔文武王  命國子博士薛仁宣  撰碣紀功而亡焉  後  府尹南致薰  撰碣而 語甚樸  無以稽事業  士林若後孫  會于齋所  屬  一言于容禧  容禧何敢焉  不顧僭妄  乃伐石  謹按實記而敍之  係之  以銘曰  以功烈卽不惟東方之初出  中國亦鮮有倫比  以爵諡卽不惟東方之絶無  中國亦不過關武勇  郭汾陽岳武穆而己卽其他盛德大業  有史冊在  庸何尙一二贅焉也  於乎偉哉 西紀一九三四年  甲戌 秋 七月  日 

          孫  參奉   容禧     謹撰          裔孫  友坤    謹書   

 

경주부 서쪽 금산의 해좌 언덕은 우리 선조이신 신라의 큰 정승 김 선생의 묘소이다. 선생의 휘는 유신이고 가락 태조왕의 13세손이요.  구형왕의 증손이며  신주도 대총관 무력의 손자이고. 대양주도독 서현공의 아들이다. 

 비(女변에 比)는 갈문왕의 子 숙흘종의 딸이다. 도독공(아버지)이 만노군 태수 때 스무달 만에 도독공의 임소에서 탄생하였으니  이 때가 신라 진평왕 을묘년(595)이었다.

선생은 태어나자 신이하여 등에 북두칠성의 무늬가 있었다.  자라면서 부모님의 엄한 교육을 받아 함부로 놀지 않았다.  곧 글과 칼을 가까이 하여 깊은 산골짜기에서 온갖 노력을 기울여 10여년이 흘렀다. 

 어느 날 밤에 공의 증조부인 구형왕을 꿈에서 뵙고 깨달은 바가 있어 곧 거느리고 있던 병졸을 출동시켜 부하 30여명을 거느리고 바로 소판공(아버지)영중으로 들어가  아버지를 배알했다.

그 때는 바로 고구려 군사가 아버지성을 몇겹으로 포위하여 곧 함락될 직전이었다..선생이 말하기를, "싸움터에서 용감하지 않으면 효가 아니다." 하고 고구려 진중에 뛰어들어 적장의 목을 베고 항복을 받아 드디어 군사를 이끌고 개선하였다. 

신라의 왕은 크게 기뻐하며 시중이란 벼슬을 내리고 그 후 공업이 많아짐에 따라서 상장군겸 태대각간 대도독을 삼았다. 이 때부터 싸움터에 나가면 대장이고 돌아오면 정승으로서 일하여 마침내는 삼국(삼한)을 통합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전에 백제를 섬멸할 때 당의 소정방이  신라를 도우려 왔다가 돌아가니 당황제가 묻기를, "어찌 백제를 평정한 후 신라를 치지 않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라는 임금이 어질어 백성을 사랑하고 신하들은 충성을 다하여 임금을 섬기니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도모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였다.

다시 황제가 말하기를, " 신라의 정승 김유신의 이름은 멀리 이곳까지 알려져 있으니 과연 그 인물이 어떠하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는 곧 바다건너 동쪽의 관중이요, 소하입니다. 그리고 그의 재주와 덕행, 충성과 의리를 부귀로써 움직일 수 없습니다." 하였다고 한다. 

무열왕은 모든 장수에게 말하기를, "김유신이 어질고 슬기로우며 뛰어난 재주와 훌륭한 책략은 나의 제갈공명이다." 하였고  진덕왕도 도량을 시험하고 난 뒤에 말하기를, "뜻밖에 염파와 이목이 우리 궁중에 있다." 하였다.  

선생이 본국과 중국에 수많은 큰 공을 세웠으므로 당나라 고종은 예를 갖추어 사신을 보내어 선생을 '봉상정경 평양 개국공' 으로 책봉하고 식읍 2천호를 내렸다.

문무왕은 말하기를, "만일 공의 훌륭한 위업이 아니었으면 나라가 매우 위태로와 지탱해 나가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하고 이에 '태대서발한'이란  벼슬과 식읍 5백호를 내리고 또 수레와 지팡이를 내려 궁전에 오를 때는 천천히 걷도록 하였다.

공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 후는 언제나 의관을 갖추고 여가를 선용하여 송화동 물맑은 곳에서 자연을 벗삼아 풍류를 즐기고 원림(정원)를 가꾸었다. 그리고 예현당. 낙빈루, 퇴사정 등의 건물을 세워 무를 쉬고 문을 닦으니 그 생활은 마치 그  옛날 삼대(하,은,주)의 아름다운 모습과 같았다.

문무왕 13년에 요상한 별이 나타나고 지진이 일어난 후 20여일이 지나서 병상에 눕게 되니 문무왕은 친히 문병하고 울면서 말하기를, "과인은 경이 있음은 물고기가 물있는 것과 같은데 만일 쾌유치 못하면 백성은 어찌하리까! 나라는 어찌 되리까! "하니  대답하기를, "어리석은 신이 어찌 국가의 중책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다만 옛적부터 임금이 계통을 대대로 이어받아 내려오는 임금이 간혹 처음에는 잘하는 듯 하나 끝을 잘 맺지 못하는 일이 있어 공적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니 그것은 정말로 통탄할 일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성공하기가 쉽지않고 이룬 것을 지키기 어렵다.' 는 사실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시어 어리석은 소인을 멀리하시고 군자를 가까이 하시어 화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시며  기업(선대로 부터내려오는 사직)을 영원히 전하시면 신은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하였다. 왕은 울면서 받아들였다.

가을 칠월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왕은 매우 슬퍼하며 비단 일천필과 벼 이천석을 부의로 보내고 아울러 장례도 군악을 울리며 이곳에 장사지내게 하였다.

그 후 흥덕왕은 공에게 '순충장열 흥무왕'이란 시호를 내렸다. 가정 신유년(1561, 명종16)에 사당을 세우고 인조계해년(1623)에 편액(서악서원이란 현판)을 하사하였고 정종 임자년(1792)에 치제하고 또 융희 기유년(1909)에도 제사를 모셨다.

서악서원에는 열성조에서 숭봉함이 이와 같았으나 여러 선현들의 찬술에서는 공의 위업을 다 기록하지 못했다.옛날 문무왕은 국자박사 설인선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고 새겨 공의 공로를 기록했으나 없어졌다.

그 후 부윤 남지훈이 비문을 지어 새겼으나 너무 소박하여 사적을 자세히 알 수 없었다. 그 후 선비들과 후손들이 재실에 모여서 나에게 글을 부탁하니 어찌 내가 이 글을 지을 수 있으리오. 외람되고 망녕됨을 돌아보지않고 돌에 새기려는 무렵에 삼가 실기를 참고하여 글을 짓고 다음과 같이 명을 지었다.

공렬은 오직 이 나라에서 처음일 뿐아니라 중국에도 비길만한 사람이 드물도다.

 벼슬과 시호도 이 나라에서는 없는데   중국에서도 관운장과 곽분양, 악무목 세분정도가 있을 뿐 이라네. 나머지 큰 덕망과 위대한 성업은  역사책에 있으니 어찌 한두 마디 부질없는 말로써 기술하겠는가,  아,  위대하신 분이시어 !    

                               서기 1934년 갑술 가을 7월  일

           1934년에 후손 용희容禧가 짓고 후손 우곤友坤이 글씨를 썼다. 

 

 

☸ 김유신과 김춘추 

 

  (언니인 보희가 동생인 문희에게 꿈을 파다)

김유신의 아우는 김흠순이며, 맏누이는 보희이고, 누이동생은 문희입니다. 

 

이 무렵 신라 사회에는 신분 제도가 엄격하여 왕족 출신의 성골이나

귀족 출신의 진골이 아니면 높은 벼슬에 오를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든지 신라의 귀족들과 혼인을 맺어야 한다."  

진골인 김유신은 성골인 김춘추와 사귀었습니다.  

 

어느 해, 정월 보름날이었습니다. 

김유신은 김춘추를 초대하여 집 근처 넓은 뜰에서 축국놀이를 즐겼습니다.

 

축국놀이는 꿩 깃이 꽂힌 공을 발로 차는 놀이였습니다. 

김유신은 축국을 하다가 일부러 김춘추의 옷자락을 힘껏 밟았습니다.

 

옷은 짝 소리를 내며 터졌습니다. 

 김춘추는 놀이에 팔려 옷이 터진 줄도 몰랐습니다.

 

한참 놀고 난 김춘추는

돌아가려고 할 때 비로소 소매자락이 터진 것을 알았습니다. 

 

"너무 재미있게 놀아서 옷이 터진 줄도 몰랐네.

" 김춘추가 중얼거렸습니다.

김유신이 얼른 말했습니다.  

 

"상공, 옷이 터졌으니 그대로 돌아갈 수야 있소?" 

 "괜찮소. 대단치 않으니까 집에 가서 꿰매겠소."

 "아니올시다.

 

우리 집에 오셨다가 그렇게 되었으니, 소생의 집에서 꿰매는 게 좋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합시다." 

 김유신은 김춘추를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방 안에 있던 보희와 문희가

얼른 일어나서 김춘추에게 인사를 하였습니다. 

 

 "상공께서 옷이 조금 터졌으니, 보희 네가 꿰매드려라."  

김유신이 말하자,

보희는 "어찌 하찮은 일로 귀공자를 가까이 하겠습니까?" 

하고 다른 방으로 건너 갔습니다.

 

김유신이 이번에는 문희에게 청했습니다. 

 "네가 좀 꿰매 드리겠니?" 

"그러겠습니다." 문희는 얼른 승낙을 하였습니다. 

 

김춘추는 문희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문희는 제 반짇고리에서 비단 실과 바늘을 가지고 와서

얼굴을 다소곳이 숙인 채 터진 곳을 꿰매기 시작했습니다.  

 

'문희가 보희보다 마음시도 곱고 훨씬 낫구나~!' 

김춘추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옷을 다 꿰맨 문희가 김춘추에게 말했습니다. 

 "천한 소녀가 귀공자의 옷을 꿰매드리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김춘추는 문희가 얼굴만 예쁜 줄 알았는데, 목소리도 아름답다고 느꼈습니다.

 

마음씨 곱고, 얼굴 예쁘고, 목소리가 고운

문희를 한번 본 김춘추의 가슴은 마구 뛰었습니다. 

 

 김춘추는 30살이 넘어 이미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런 김춘추였지만,

문희에게 마음이 끌려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김춘추는 이튿날부터 축국을 한다는 핑계로

김유신의 집을 뻔질나게 드나들었습니다.

그리고 꼭 한 차례 문희를 만나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김춘추와 문희는 남의 눈을 피해 만났습니다. 

하루는 김유신이 문희에게 다그쳐 물었습니다. 

 

"너, 상공(김춘추)의 아기를 가졌지?" 

오라버니, 그러니 어쩌면 좋아요?'

 

"상공은 본부인이 있다.

그렇지만, 너를 첩으로 들여보낼 수는 없어."

 김유신은 문희를

김춘추의 정식 부인으로 들여보낼 궁리를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덕여왕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김유신의 집 앞에 있는 남산으로 거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김유신은 선덕여왕과 신하들이 남산에서 놀고 있을 때,

자기 집 마당에 나무를 잔뜩 쌓아 두고 불을 질렀습니다.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 올랐습니다. 

 "저게 무슨 연기인고?" 

선덕여왕이 신하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김유신이 누이동생을 태워 죽인다 하옵니다." 

신하의 말을 들은 선덕여왕은 기겁을 하였습니다.

 

 '아니, 무슨 까닭으로 ?"

 "남편 없이 아기를 배었기 때문이랍니다."

 

 "남자가 누구인 줄은 알 것이 아니오?"

 

 "어느 진골의 소행이라 하옵니다." 

이 말을 곁에서 들은 김춘추는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선덕여왕은 김춘추를 보자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춘추공의 안색이 좋지 않군. 왜 그러시오?" 

'황공하옵게도 그 진골이 바로 저입니다." 

 

 "책임을 져야겠군~!

어서 내려가 어명으로 혼인을 하도록 하고,

김유신의 누이동생을 구하시오." 

 

 이렇게 하여 김유신은

문희와 감춘추가 정식 결혼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 또한 김유신이 김춘추의 옷을 일부러 밟은 것처럼,

계획적으로 꾸민 일이었습니다. 

 

뒷날, 김춘추는

태종무열왕이 되었으며 문희는 왕비가 되었습니다. 

 

 문희가 왕비가 되던 날,

 보희는 비단 치마 하나를 태우며 울었습니다.

 

그 비단 치마는

동생인 문희에게 꿈과 바꿔 가진 것이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

둘이 모두 처녀였을 적에

 언니인 보희가 꿈을 꾼적이 있었습니다.

 

 보희는 문희에게 꿈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간밤에 괴상망측한 꿈을 꾸었어." 

"무슨 꿈인데?" 

 

"꿈에 서산에 올라가서 소변을 보았는데,

글쎄 서울이 온통 오줌으로 가득 차지 않겠니?"

 

 '언니, 그 꿈 나에게 팔아요~!"

 "내 꿈을 사겠다고? 무엇을 주겠니?" 

 

"비단 치마를 드리겠어요~!

 만들어 놓고 한 번도 입어보지 않았어요."

 

 "그래." 보희는 말로, "내 꿈을 너에게 판다." 

하고는 문희에게 그 값으로 비단 치마를 받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꿈은 왕비가 될 꿈이었습니다.

 

영특한 문희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언니에게 꿈을 산 것입니다.

 

그리고 언니가 꿰맸어야 할 김춘추의 옷을

 문희가 꿰매었고, 마침내 왕비가 된 것입니다.

 

 

 

경주 김씨 시조 김알지의 탄생설화


신라 4대 탈해왕 9년에 호공 이란 사람이 산책을 하는데 오색찬란한 빛이 시림에서 보여 가까이 가보니 황금빛 상자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밑에서는 흰 닭이 울고 있었답니다


호공이 이 사실을 탈해왕께 고하니 탈해왕이 직접 이 곳 시림에 오셔서 상자를 열어보았는데 상자 속에서 옥동자가 울음대신에「알 지」라는 소리를 내면서 나왔다고 합니다


탈해왕은 하늘이 주신 복으로 알고 옥동자를 궁성으로 안고 가는데 수많은 새와 짐승들이 앞뒤를 따르며 노래를 했다고 합니다

왕은 이 옥동자를 태자로 삼고 호공에게 양육을 맡겼다고 합니다

김알지라는 이름은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이라하고, 세상에 나오면서 처음한 말이「알지」라 하였다 해서 이름은 알지라고 하였답니다


알지의 자손들은 13대 미추왕 대에 와서 왕위에 올랐지만 그 뒤로 30여 분이나 임금이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알지는 경주 김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김알지가 태어날 때 닭이 울었다 하여 이 숲을 계림이라고 고치고 13대 미추왕이 되신 후 계림이란 국호까지 만들어서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박씨 시조 박혁거세 탄생설화

 

진한 땅의 여섯 마을 우두머리들이 알천에 모여 군왕을 정하여 만들고자 하여 높은 곳에 올라 멀리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 기슭의 나정 우물가에 번개와 같은 이상한 기운이 드리워진 흰 말이 엎드려 절하고 있었답니다.

찾아가서 그곳을 살폈더니 자줏빛 알이 있었고 말은 사람들을 보자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 알을 깨뜨리자 사내아이가 나와서 동천에 목욕을 시키니 온 몸에서 광채가 나며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고 하늘과 땅이 흔들리고 해와 달이 청명하였다고 합니다. 

혁거세라고 이름하고 성씨는 알에서 태어났으니 알이 박과 같으므로 그 성을 박씨로 하였다고 합니다.

같은 날에 알영 우물가에 계룡이 나타나 그 왼쪽 겨드랑이로 딸아이를 낳으니 그 용모가 수려하였으나 꼭 입술이 닭 부리와 같았는데 북천에서 목욕을 시키자 입 부리가 떨어졌다고 하는데 그녀가 태어난 우물 이름을 따서 알령 이라고 하였답니다

그들 나이 열셋이 되매 각기 왕과 왕후로 삼고 나라이름을 서라벌 혹은 사로라고 하였으며 혁거세왕은 예순한 해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 하늘에 올랐는데 칠일 뒤에 주검이 땅에 떨어져 흩어서 사람들이 합쳐서 묻고자 하였으나 큰 뱀이 나타나 사람들을 쫓으면서 방해하므로 5체를 다섯 능에 묻고 오릉 또는 사릉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합니다.

 

경주 이씨 이 알평공 탄생 설화

 

소금강산에 있는 표암이라는 바위는 박 바위 또는 밝은 바위라는 뜻으로 신라 6촌 가운데 급량부였던  알천 양산촌 의 시조 이 알평공이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라고 합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설화에 의하면 진한 땅에 6촌이 있었는데 그 하나가 알천 양산촌이며 촌장은 알평으로 하늘에서 표암봉으로 내려와 급량부 이씨 즉 경주 이씨의 조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곳을 급량부라고 하였으며 신라 화백회의의 연원이 되었던 곳으로 표암은 경주 이씨의 근원지인 동시에 신라 건국의 산실이라고 합니다   

 

석씨 시조 탄생설화

 

남해왕 때에 아진포에 노파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문득 바다에서 까치들이 떼를 지어 날며 우짖고 있음을 보았다. 이상히 여긴 노파가 가까이 가 보았더니 거기에 배 한 척이 있었고 배 안에 큰 궤짝이 있었다고 합니다.

궤짝을 열어보니, 그 속에 단정하게 생긴 한 사내아이와 그 밖에 여러 보물, 노비들이 들어 있었답니다

아이를 7일 동안 보살펴 주자, 스스로 입을 열어 말하기를 나는 본디 용성국(龍城國)사람으로 그 나라의 왕비에게서 알로 태어났으므로 버림을 받아 이곳에 닿았다고 하였답니다.

그 아이는 말을 마치자 지팡이를 들고 두 사람의 종과 더불어 토함산에 올라가 거기다 돌무덤을 파고 7일 동안 머물었는데. 그 뒤에 산을 내려와 성 안을 살펴 살 만한 곳을 물색하던 중 호공(瓠公)의 집에 다다랐다고 합니다.

 

그는 호공의 집 곁에 남몰래 숫돌과 숯을 묻고서, 이튿날 아침 관가에다 그 집은 자신의 조상이 대대로 살았던 집이었는데 자신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 호공이 들어와 차지한 것이라고 송사를 제기하였답니다.

그는 숫돌과 숯을 증거물로 제시하여 그 집을 차지하게 되고 그 소문이 나자 남해왕은 이 사람(탈해)이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맏공주와 배필이 되게 하였다고 합니다

 

김해 김씨 시조 설화

 

수로왕 설화(알에서 태어난 6명의 아이들 중 가락국의 왕이 된 김해김씨의 시조)


김해김씨는 우리나라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성씨입니다.  시조는 가락국의 시조왕 김수로왕입니다. 가락국은 고대 낙동강 하류에서 일어난 나라로. 가야 혹은 6가야라고도 하며 오늘날 김해 일대에 해당됩니다.

 김수로왕이 나라를 세운 후 500여 년 동안 계속되다가 후에 신라에 합병됩니다.

김해를 본관으로 삼게 된 것은 가락국의 터전이 김해였기 때문입니다. 한편 가락국의 창업주  김수로왕의 탄생에는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여러 부족의 아홉 촌장들이 42년 어느 날 구지봉에 올라가 나라를 다스릴 왕을 얻기 위해 의식을 올리게 됩니다.

 이 때 하늘에서 한 줄기 붉은 빛이 내려와 달려가 보니 금 그릇 안에 여섯 개의 알이 있었다고 합니다. 다음날 그 알속에서 여섯 동자가 나옵니다. 그 중 제일 먼저 나온 동자를 수로라 하고 금 그릇에서 태어났다 하여 성을 김(金)이라 했다고 합니다.

 그가 바로 가락국의 시조왕 김수로 이고 . 나머지 다섯 동자는 5가야의 수장으로 각각 삼았다고 합니다   뒤에 수로왕은 아유타국(지금의 인도)의 공주 허황옥을 왕비로 맞아 열 명의 왕자와 두 명의 공주를 두었습니다.

왕자 중 맏이인 거등 왕자가 왕위를 잇고 둘째 왕자는 어머니 성을 따라 허씨로 계승하게 됩니다.   

거등왕으로 이어지는 김수로왕의 후손들이 바로 김해김씨입니다. 김해김씨는 후손들이 번창하면서 수로왕의 13세조 김유신을 중시조로 하여 그 뒤에 148파로 갈라지게 됩니다

 

 

삼국유사에는? 

 

진한 땅에 옛날에는 여섯 마을이 있었다고 합니다 .


그 첫째의 것이 알천 양산촌이니, 남쪽의 지금 담엄사 일대에 위치했었으며. 이 마을의 우두머리는 알평, 그는 하늘에서 표암봉으로 내려왔다고 합니다.

이 알천 양산촌의 우두머리 알평이 급량부 이씨의 조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둘째의 것이 돌산 고허촌이니. 이 마을의 우두머리는 소벌도리, 그는 하늘에서 형산으로 내려왔다고 하며. 이 돌산 고허촌의 우두머리 소벌도리는 사량부 최씨의 조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셋째의 것은 무산 대수촌이니. 이 마을의 우두머리가 구례마인데, 그는 하늘에서 이산으로 내려왔다고 하며. 이 무산대수촌의 우두머리 구례마는 점량부 또는 모량부로 손씨의 조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넷째의 것은 취산 진지촌, 이 마을의 우두머리는 지백호인데. 그는 하늘에서 화산으로 내려왔다고 하며. 이취산 진지촌의 우두머리 지백호는 본피부 정씨의 조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최치원이 바로 본피부의 사림 이었다고 하며. 지금도 황룡사 남쪽에 있는 미탄사 남쪽에 옛터가 있어 그것이 문창후 최치원의 옛날 살던 집터라고들 말하고 있으니 거의 틀림이 없다고 합니다.

그 다섯째의 것은 금산 가리촌, 이마을의 우두머리는 지타인데. 그는 하늘에서 명활산으로 내려왔다고 하며. 이 금산 가리촌의 우두머리 지타는 한기부 또는 한기부 배씨의 조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여섯째의 것은 명활산 고야촌이니. 이 마을의 우두머리는 호진, 그는 하늘에서 금강산으로 내려왔다고 하며. 이 명활산 고야촌의 우두머리 호진은 습비부 설씨의 조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육촌에 관한 기록을 보면 육부의 조상이 모두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 같다고 하며. 유리왕 9년에  육촌을 육부로 개정하여 명칭을 고치고, 여섯 가지 성을 각각 내려 주었다고 합니다.

 

 

                     김유신의 부모 서현과 만명의 사랑이야기

 

지소는 23대 법흥왕과 보도왕비 사이에서 태어나 숙부인 입종에게 시집가 진흥을 낳았고, 다시 이화랑과의 사이에서 만호를 낳았다. 따라서 진흥왕과 만호는 아버지는 다르지만 어머니는 같은 이부동모 남매사이였다.

 

☆ 삼국사기에는 만호가 입종의 딸로 기록되어 있으나 화랑세기에는 이화랑과 지소 사이에서 출생했다고 되어 있다. 만호는 자라 진흥왕의 장자인 동륜(진지왕의 형)과 혼인하여 진평왕을 낳았으나 남편인 동륜이 보명궁에서 개에 물려 죽자 다시 숙흘종(입종갈문왕의 아들)과 혼인하여 만명을 낳았다.

 

따라서 진평왕과 만명 역시 이부동모 남매 사이였다. 그런데 바로 이 만명이 사고를 치고 만다. 당시 상황의 기록을 보면.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조에,  “처음 서현(김유신의 아버지)이 길에서 갈문왕 입종의 아들인 숙흘종의 딸 만명을 보고 마음에 들어 그녀에게 윙크를 하여 중매도 없이 야합하게 되었다.

 

서현이 만노군 태수가 되어 만명을 데리고 함께 가기를 청하자 숙흘종이 비로소 자기 딸이 서현과 야합한 것을 알게 되어 광속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그 광문에 벼락이 쳐서 지키던 자가 놀라 기절하였다. 이때를 틈타 만명이 구멍으로 빠져나와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도망갔다.

 

서현이 경진일 밤에 화성과 토성 두별이 자기에게로 내려오는 꿈을 꾸었고, 만명 역시 꿈에 동자가 금 갑옷을 입고 구름을 타고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는데, 얼마 후 태기가 있어 스무달 만에 유신을 낳았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화랑세기 15세 풍월주 유신공 조에는, “처음 만명과 서현이 야합하여 임신하였는데, 만호태후는 서현이 대원신통류이기 때문에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만명이) 만노로 도망하여 스무달 만에 유신을 낳았는데, 꿈의 상서로움이 많았다.

 

진평왕은 여동생이 괴로워하자 서현공을 만노에 봉했다. 유신이 자라자 태양과 같은 위용이 있었다. 만호태후가 외손자인 유신이 보고 싶어 돌아올 것을 허락하였다. 만호태후가 유신을 보고는 “참으로 귀여운 나의 손자다 하며 기뻐하였다. 이로서 가야파가 받아들여졌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만호태후는 만명이 가출하여 유신을 낳은 후에야 그들의 혼인을 인정했던 것이다.이를 보면 만명과 서현이 눈이 맞아 연애를 하고 있었는데, 그를 숙흘종과 만호태후가 알고 헤어지기를 종용하자 만명이 임신이 되었다고 거짓말을 했던 듯하다.

 

사람이 20개월 만에 태어날 수는 없는데 유신은 스무달 만에 태어났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가출하여 만노군으로 도망쳐 서현을 만나 그때에야 임신이 되어 유신을 낳았는데, 만명이 스스로 임신했다고 말한 때로부터 따져보면 20개월이었기 때문에 김유신이 스무달 만에 태어났다고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 후  만명이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이 신라 왕실에 전해지자 그 친정어머니인 만호태후도 이제는 어쩔 수 없다 하고 그 혼인을 인정하고, 돌아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화랑세기 기록을 잘 새겨보면 이때 신라왕실은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만호태후는 딸이 가능하면 같은 진골정통과 혼인하기를 바랬지만 만명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자기가 바라던 대로 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   신라의 만명과 서현은 아들인 유신을 잘 키워 후일 삼국을 통일하는 주역으로 만들었으니 만명은 그때 올바른 선택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유신 장군 관련 설화


김유신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 중 백석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똑똑하고 재주가 많아 김유신이 아끼는 사람이었다.

 

김유신이 나라가 힘이 없음을 한탄하자 백석이 

 "한숨만 쉰다고 어디 될 일이옵니까?" 

 

"그럼 너는 무슨 방법이 있느냐?" 

"있지요. 유신님의 지혜라면 능히 삼국을 통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백석의 입에서 삼국통일이란 말이 나오자

유신이 되물었다. 

 

사실 삼국통일은 김유신이 꿈꾸고 있는 생각이었는데 

그걸 백석이 먼저 꺼내는 것이었다. 

 

"유신님은 지금 삼국 통일을 꿈꾸고 계시지 않습니까?" 

 유신은 속으로 흠칫 놀랐다. 

 

'이놈이 보통이 아니구나!  남의 속마음을 다 들여다볼 줄 아니.' 

백석이 똑똑한 줄은 알고 있었으나, 남의 속까지 들여다보는 줄은 미처 몰랐다.

 

"적을 치려면 먼저 적을 알아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당연한 말이지"  "그렇지요. 

유신님께서 그럴 모르실 리 없지요." 

 

 "그래서?"

  "그렇다면 이제 유신님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적의 정세를 살펴야 한다는 말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정세가 어떤지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싸워 이길 수가 있을 것입니다." 

 유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백제가 우리와 가까우니 먼저 백제부터 살펴야겠구나." 

 

"아니옵니다. 고구려부터 살펴야 합니다." 

유신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고구려는 먼 나라요, 백제는 가까운 나라였다. 

당연히 가까운 나라부터 정세를 살피는 것이 옳은 일이었다.

 

백석은 고구려가 더 강하니 강한나라부터 살피자고 하였다.

 

 유신이 생각하기에 백석의 말이 좀 이상했지만

원래 아끼는 백석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백석은 오늘밤 당장 떠나자고 하였다. 

 

이 일은 남모르게 하는 것이 좋다며, 자신이 모시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날이 어두워지길 기다려 북으로 말을 달렸다. 

 

오직 삼국통일의 꿈을 안고

유신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칠 각오를 하였다.

 

두 사람은 말에서 내려 잠시 쉬었다.

그런데 눈앞에 두 여인이 나타났다. 

한밤중에 길을 잃었다며 길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한밤중이라 짐승이 나타날까 무서우니

아랫마을로 가던 길인데

입구까지만 데려다 달라고 간절히 부탁하였다.

 

백석과 유신은 갈 길도 바쁘지만

 연약한 여인들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서 네 사람은 어두운 길을 헤쳐 나갔다. 

 

한참을 가는데 또 한 여인이 나타났다. 

"저는 윗마을에 심부름을 다녀오다 길을 잃었습니다. 

좀 도와주세요." 

 

"허허 이상한 일이군요.

 이 밤에 길 잃은 낭자들이 많다니…" 

 

 일행이 다섯 명으로 늘어났다. 

백석이 앞장을 섰으며, 유신이 맨 뒤에 따랐다. 

 

그때,

한 여인이 유신의 귓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하였다. 

 

"잠시 저분을 멀리하고 저희를 따라오십시오." 

 

유신은 잠시 생각하였다. 

 

밤중에 세 여인을 만난 것부터 이상했으며,

뭔가 사연이 있는 듯 했다. 

 

앞서가던 백석에게 말했다.

 

"잠시 소변 좀 봐야겠네. 기다려 주게." 

 

유신은 백석이 보이지 않는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때, 세 여인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아까와는 옷이 달랐다. 

 

마치 선녀와 같았다. 

 

"우리는 신라를 지키는 산신들이다. 

그대는 잘 들어라!" 

세 여인은 똑같이 입을 열어 말했다.

 

유신은 깜짝 놀라며, 허리를 숙여 공손히 절을 했다. 

 

 "지금 그대는 죽음의 길로 가고 있다.

 

그대와 같이 가고 있는 저 사람은 고구려의 첩자이니 

어서 바삐 금성(경주)로 돌아가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이 있을 뿐이다."

 

세 여인은 말을 마치자 바람과 같이 사라졌다.

 

유신은 그때서야 의문이 풀렸다. 

 

가까운 백제를 두고 고구려를

살피자고 한 백석의 속셈을 알게 되었다. 

 

유신은 시치미를 떼고 숲에서 나왔다. 

 

두 사람은 다시 길을 떠났다. 

조금 가다 유신이 깜짝 놀라 백석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시 집엘 갔다 와야겠네." 

백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전부터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마련해 둔 문서가 하나 있었네.

 

 급히 떠나느라 그럴 깜빡 잊고 왔네." 

 

"그렇게 중요한 것이옵니까?" 

 

"그렇다네,

고구려에 가면 아주 요긴하게 써먹을 문서일세." 

 

"그러시다면 할 수 없지요. 얼른 갔다 옵시다." 

 

백석은 할 수 없이 유신을 따라 다시 금성으로 돌아왔다.

 

백석은 일이 틀려질까 조바심이 났다.

 

집으로 돌아온 유신은 사람들을 시켜 백석을 묶도록 하였다. 

 

"고얀 놈!

나를 꾀어내 고구려에 넘기려 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 

 

"나는 고구려 사람이오." 

 "뭣이?"  모두들 깜짝 놀랐다.

 

고구려에서는 앞으로

신라가 크게 강해지리라는 것을 알고

걱정하고 있기 때문에 장차 신라의 훌륭한

 장수가 될 사람을 찾아내 없애려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천관녀(天官女)라는

아름다운 여인의 꾐에 빠져 어머니께

꾸중을 들은 뒤로 그녀를 멀리 했는데,

 

어느 날 술에 취했을 때 말이

평소의 습관대로 그녀의 집으로 가자

아끼던 명마(名馬)를 죽였다는 이야기 등이 전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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